숲에 사는 즐거움 - 한 생물학자가 그려 낸 숲 속 생명의 세계 자연과 인간 6
베른트 하인리히 지음, 김원중.안소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나는 아직도 그들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결코 끝나지 않는 환희를 주리라는 것을 믿고 있으며, 이 다양한 종류의 곤충을 찾으면서 얻은 강렬한 기쁨을 기억하고 있다. ...... ...... 지난해에 나는 곤충의 열 조절을 연구하려고 연구비를 신청했다. 누군지는 모르나 이 연구 과제를 심사한 어떤 위원이 내 과제를 비판하려고 "하인리히는 놀려고만 한다."라고 말했다. 그가 한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옳은 말이다. 정규 교육을 통해 내가 자연을 관찰하는 방법이 더 복잡했을 뿐, 내가 자연을 관찰하는 연구를 계속하는 것은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54)

새 사냥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자연 환경이 파괴되면 어차피 새들이 살 수 없는데도 환경 파괴를 금지하는 법은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평생 이 언덕에서 새 사냥을 하고 살아도 새의 개체 수에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설령 영향을 준다고 해도 새의 개체 수는 1년 정도 지나면 회복될 것이다. 그러나 서식지를 파괴하면 미래의 세대까지 죽이는 셈이다. 벌목공 한 사람이 전동 기계톱 하나로 1년 안에 이곳의 큰 나무를 모두 벨 수 있다. 그러면 대부분의 새가 사라질 것이다. 새들은 나무가 다시 자라는 100년 후에야 돌아올 것이다. 숲이 있는 언덕이 옥수수 밭과 개척지로 둘러싸여서 고립되면 새들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95)

세계를 생물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러모로 경제와 관련되지만, 경제학자가 보는 시각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생태학자는 훨씬 더 큰 공동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이해하는데, 이 공동체는 그 스펙트럼의 서로 다른 지점마다 비용과 이득을 수반하는 경제 거래나 에너지 흐름을 갖는 다양한 생물들을 포함하는 세계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분리하는 경향이 있다. 수익과 다른 에너지 흐름이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적은 비용으로 수익을 빨리 올리기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그 자체의 뒤먹임(feedback)을 수반하기 마련이고 진정한 비용은 숨겨져 있으며 바로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다. 상호 작용을 하는 부분의 연결망이 더 크고 복잡할수록 되먹임 지연 현상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지연되었던 되먹임 고리들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162)

미네소타 주 북부 아이타스카 호의 현장 연구소에서 생태학을 가르치면서 몇몇 특별한 계획을 세우고 직접 참여도 했다. 이 계획은 대체로 배고픈 거머리들을 지나 오래된 해리의 굴에 가서 새로운 식물 군체 형성을 보거나, 스쿨크래프트섬 근처에서 자정에 구애하는 밍크개구리의 수를 세는 등 힘들고도 즐거운 일이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아직 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사물이 이래야 한다고 설명하는 학설에 길들어 있었다. 그들은 예기치 않은, 때로는 되풀이되지 않는 결과들과 끈덕진 흡혈 곤충 떼 같은 책 밖의 현실 세계에 놀라게 될 것이다. 현실 세계, 그 현장에서 우리 모두는 깊은 신비를 느낀다. (241)

그러나 내 요지는 스스로를 보호하는 식물의 전략이 최소한 한 단계 앞서간 군주나비에 대해서는 분명히 실패했다는 것이다. 누군가 마법의 지팡이를 휘둘러 당장 내일부터 모든 유액 잡초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독 만들기를 중단하게 된다면, 밝은 색 군주나비 애벌레는 모두 포식 동물들의 밥이 되고 유액 잡초에는 곧 군주나비 애벌레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액잡초는 그때까지는 알려져 있지 않던 다른 초식동물들에게 먹히고 말 것이다. 완벽한 적응이란 없다. 진화는 동적인 게임이다. 물론 독을 생산하지 않는 유액잡초 돌연변이가 이미(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움직임이 아주 느려서 짧게 명멸하는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는 대게 인식될 수 없기는 해도, 진화라는 경기의 참가자들은 늘 움직이고 있다. (248)

이렇게 잘린 잎은 나의 기대나 이론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빨간 깃발로 표시라도 된 듯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놀라웠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사실상 내 마음속에서 받아들일지 말지를 두고 서로 경쟁하는 다양한 이론들이 합쳐진 결과였다. 털벌레가 실수를 했을까? 어떻게 이런 실수를 저질러도 괜찮도록 진화했을까? 털벌레가 궁극에는 진화적 의미에서 없애려고 하는 것이 잎 안이나 위에 있었을까? ... 여러 가지 이론들이 머릿속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녔는데 나는 그것들이 한 가지나 몇 가지만 남을 때까지, 혹은 아무 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하나하나 지워 나가야 했다. 내가 이론을 전혀 몰랐다면 먹다 남은 잎이 땅에 떨어져 있어도 주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258)

다음 해 여름 우리는 더 큰 모래 상자를 이용하여 상자 하나에 애벌레 한 마리씩만 넣고 18일 동안이 아니라 여름 내내 지난번 실험을 반복했다. ... 작년과 마찬가지로 처음 3주간은 두 집단의 애벌레들이 눈에 띄게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 달 후 두 집안 사이에 행동 차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에 개미 한 마리씩을 받아먹은 애벌레는 그대로 있었지만, 먹이를 먹지 못한 애벌레는 평균 열흘에 한 번씩 다른 구멍을 지으러 살던 구멍을 떠났다. ... 함정의 성과가 좋지 않으면 큰 구멍을 만드는 데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짧게 시도해 보고 이동하기를 계속했다. 전쟁 직후 우리 가족도 한하이데에서 똑같은 일을 했었다. / 우리는 아무리 잘 모은 결과라도 가정의 근원적인 맥락이 잘못되었다면 오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시간 단위를 잘못 잡았다. 우리가 연구하는 모든 동물은 서로 다른 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고 연구하고자 하는 모든 현상도 마찬가지다. 타당한 결론을 얻기 위해서는 시간 단위를 잘 맞춰야 한다. 개미귀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내심이 있었다. (288)

하지만 봐야 할 모든 것이 그렇게 한결같이 선명하지는 않다. 언뜻 봐서는 볼 수 없는 것을 야외에서 보고 싶다. 말벌이 만드는 종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어떤 감촉인지 알고 싶다. '얇은', '강한', '빠른', '큰', '적은', '많은' 같은 단어는 묘사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말들은 관찰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얼마나 얇은가? 얼마나 강한가? 얼마나 많은가? ......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다시 동트기 전의 냉기를 무릎쓰고 벌통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말벌의 숫자를 세어 그 숫자를 공책에 적고, 옆에 있는 온도계 눈금의 다른 숫자들을 베껴 놓고, 시계 숫자판의 또 다른 숫자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말벌이 온도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 '보고' 싶었다. 누군가 '몇몇' 말벌이 '서늘한 아침'에 벌통을 떠났다가 들어오고 '다수'가 '따뜻한 오후'에 같은 행동을 하는 모습을 봤다고 말한다면 그건 헛소리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나는 숫자가 필요했다. 내가 결국 보게 될 광경, 그림은 전적으로 숫자에 달려 있었다. (312)

눈 냄새는 좋지만 표현할 길이 없다. 아니면 그것은 눈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오랫동안 익숙했던 낙엽 냄새와 나무 열매 향기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것 뿐인가? (323)

사냥은 젊은이를 숲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법일 때가 많은데, 그 안에서 그는 조용하게 유심히 관찰하고 생각하며 고민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식으로 수백만 년 동안 자연에 대해 배웠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인간'이 되기도 전인 태곳적부터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사냥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보다는 제대로 통제만 된다면 사냥은 생물학적 다양성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냥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자연 보호라는 주제를 피부로 느끼게 해 준다. 세상에는 좋은 사냥꾼과 나쁜 사냥꾼이 있다. 그러나 내가 관찰한 바로는 건강한 사슴떼를 유지하는 일에 대해 사냥꾼보다 더 신경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냥꾼들은 숲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는지 알고 있을 때가 많고 건강한 뇌조, 사슴, 오리, 곰의 개체군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사냥꾼에게 필요한 것은 서식지이고 그 서식지가 있으면 그것에 따라오는 다른 동물 수천 종도 확보하게 된다. (325)

어머니는 수액 얼음 덩어리를 부엌에 두어 녹였는데 얼음이 녹자 나방 한 마리가 창문으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방이 얼음 덩어리 속에서 얼었다가 다시 날아갈 수 있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나방 여러 마리를 물에 담가 영하 4도로 맞춘 냉장고에 넣어 얼려서 확인했다. 다음 날 나방에 들어 있는 얼음 덩어리를 탁자 위에 두었다. 얼음이 녹자 나방들이 드러났다. 그중 한 마리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방은 몸을 바로 세우고 조금씩 기어가며 날개를 떨기 시작했다. 나방이 5분 정도 날개를 떨다가 날기 위해 이륙하려는 순간 나방을 잡아 가슴 온도를 측정했다. 이 나방은 섭씨 32도까지 체온이 올라갔다. (336)

나는 찌는 듯한 남아메리카의 정글이나 동아프리카의 평원과 같은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신기한 동물들을 꿈꾸고는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꿈을 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현관 계단에서 점점 더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한다. 자연의 많은 부분을 아주 정교하기 때문에 크고 거창한 것에 익숙해지면 자연을 제대로 즐기기가 어렵다. 내가 어렸을 적에 장난감 기차...를 가지고 놀았더라면 별볼 일 없는 딱정벌레를 관찰하는 것을 집어치웠을 것이다. 나는 새가 둥지로 무엇을 물어오는가를 알기 위해 몇 시간이나 새를 관찰하는 데 익숙해졌고 그 미묘한 차이를 알고서 기쁨을 누렸다. 수백만 년 동안 다양해진 새나 먼지벌레 혹은 개미의 정교함, 이런 것들이 모여 전체를 만든다. 처음 대하는 미묘한 사실에 조율되지 않으면 마치 사람들이 덜커덩거리고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기차만 보듯이 다른 모든 것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3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이 사라진 세상 - 인간과 종교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들
로널드 드워킨 지음, 김성훈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수학을 일단 이해하고 나면 그 기본 가정 그리고 수학이 증명해놓은 깜짝 놀랄 정도로 복잡한 진리를 도무지 믿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 기본 가정과 수학적 증명에 사용된 방법론을 수학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입증할 방법은 없다. 너무나 자명한 것이기에 다른 독립적인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논리와 수학의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35) ...... 유신론자들은 자신의 가치 사실주의가 근거 사실주의라고 가정한다. 유신론자들은 신이 자신들에게 가치에 대한 깨달음을 주었고 그것을 입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책임감 있는 삶과 경이로운 우주를 신이 깨닫게 해주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유신론자들의 사실주의는 결국 근거가 없는 게 분명하다. 그들의 믿음을 방어할 수 있으려면 그런 가치가 신의 역사를 비롯한 모든 역사로부터 철저하게 독립적이어야 한다. (41)

아인슈타인은 스피노자가 자신의 전임자라고 자주 칭했다. 심지어 스피노자의 신이 곧 자신의 신이라는 말까지 했다. 아인슈타인은 인격적인 신을 믿지 않았지만 자연을 '숭배'했다. 그는 자연을 경의감 어린 태도로 바라보았으며, 자신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앞에서는 겸손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자연에 대해서 종교적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 반면 스피노자는 우주를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연이 아름답다거나 추하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그는 자연이 심미적으로는 불활성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리적, 도덕적으로도 불활성 상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연의 근본 법칙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삶을 가장 올바르게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자연이야말로 정의의 진정한 기반이며, 그가 지지했던 자유주의적, 개인적, 정치적 도덕성의 기반이라고 믿었다. (60)

다시 말해, 물리학자들은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존재의 총체성 안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책임감 있는 물리학자라면 우주가 그저 우연으로라도 아름답다는 확신을 느낄 만큼, 우주에 대해 충분히 알아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 하지만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셀로 글레이서 같은 사람은 자신의 책 <최종 이론은 없다>에서 자신의 의구심을 밝혔다. 그는 우주가 결국에는 통일되기보다는 오히려 지저분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우주가 아름답다는 관점을 공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어 있는 우주가 아니라 인간의 삶만이 본질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 삶과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에는 아름다움이 있지만, 의식이 없는 은하계나 원자에는 아름다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은 경이로운 존재이지만, 통일 이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주 그 자체에는 경이로움이 없다고 주장한다. (85)

과학은 여전히 보호막을 필요로 하며, 신학과 마차가지로 개념의 영역에서 그런 보호막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세속적 과학은 신학의 과학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해졌다.) 적어도 한동안 우주론 학자들은 빅뱅이 시간과 공간의 기원이기 때문에 그전에 무엇이 어디서 왜 일어났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런 질문은 북극에서 그보다 더 북쪽은 어디냐고 묻는 것처럼 어리석다는 뜻이다. ... 그러나 이것은 보호막이 효과가 있으려면 그 보호막이 자기가 보호하는 이론으로부터 유도되어야지, 나중에 이론에 덧대어지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요구사항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시간과 법칙 그 자체는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에 빅뱅이라는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119)

정치적 자유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요소가 존재한다. 공정한 국가에서는 '윤리적 독립성'이라 부를 수 있는 아주 일반적 권리, 그리고 특정 자유에 대한 특별한 권리를 모두 인정해야 한다. ...... 이제 한 가지 제안을 하려 한다. 종교의 자유를 정의하면서 우리가 처하게 된 문제점은, 종교의 자유를 특별한 권리로 유지하면서 동시에 종교를 신으로부터 분리하려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 대신 이제는 높은 보호 기준 때문에 엄격한 제한과 세심한 정의가 필요해진 특별한 권리라는 지위를 종교의 자유에서 내려놓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대신하여 그러한 권리의 전통적 주제에 윤리적 독립성에 대한 좀더 일반적인 권리만 적용할 것을 고려해야 한다. (160)

스위스 시민들은 2009년에 전 세계를 충격으로 내몬 국민투표를 통해 스위스 어디에도 미나레트를 건설하지 못하게 금지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 만약 종교의 자유를 종교적 주제에 국한된 특별한 권리로 생각한다면, 미나레트가 그 어떠한 종교적 의무나 요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것이 사실이라면)은 이 상황과 적절한 관련이 있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의 자유를 윤리적 독립성에 대한 좀 더 일반적인 권리의 핵심 사례로 생각한다면, 이런 사실은 완전히 관련이 없는 셈이 된다. 이 논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국민투표가 이슬람 종교와 문화에 대한 무차별적 비난을 표출하고 있다고 의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이 투표는 윤리적 독립성의 평등주의적 이상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173)

죽음 이후의 삶이 사실상 의미하는 것은 단지 우리가 절망적으로 두려워하는 그 무엇, 즉 존재가 모든 것으로부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아닌 무언가를 의미할 뿐이다. (180)

하지만 정말 필수적인 부분은 도덕과 윤리의 전문지식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객관적인 윤리적, 도덕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판단이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올바른 삶을 살겠다는 욕구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이 존재한다는 신념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1장에서 삶에 대한 종교적 태도라고 설명한 핵심이다. 이것은 실재가 오로지 물질과 마음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주의자들에게는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들에게 그러한 가치관은 물질과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나 허구에 불과하다. (186)

"이 말이 어리석은 이야기처럼 들리는가? 그저 감상적인 푸념에 불과한가? 당신이 음악을 연주하거나, 야구를 하며 커브 공을 던지거나, 의자를 직접 만들거나, 소네트를 작곡하거나, 사랑을 나누는 등, 무언가 소소한 일을 잘해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 이런 것들은 삶에서 이룬 성취다. 그렇다면 왜 삶도 그 자체로 완벽한 성취가 될 수 없단 말인가? 그 삶에 드러난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예술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자기만의 가치로 말이다." ...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불멸이다. 적어도 우리가 실질적으로 바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것은 그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신념이다. (19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이 사라진 세상 - 인간과 종교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들
로널드 드워킨 지음, 김성훈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짧은 책이지만 질문이 근본적이고 그 답을 찾아가는 문장과 문장 간 짜임이 조밀하다. 비인격적 신이라는 애매한 말을 버리고 종교적 무신론이라는 개념으로 새 프레임을 제시한다. 도킨스의 갇일루젼을 충분히 좋아하지만 완전히 동의할 수는 결코 없었던 바로 그 이유, 그 지점을 탁월하게 짚어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굉장히 스마트한 책! 전문화 세분화 심지어 파편화되어 있는 공식학문체계의 한 cell에 속하는 자가 자기 cell에 대한 치밀한 탐험을 통해 전체 세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이런 책은 언제나 환영이다.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는 어떻게 조직되어 있고 무엇을 (불)가능케 하는지 잘 배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경예술견문록 - 중국 현대미술을 탐하다
김도연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고 작가들의 서신과 잡지, 문헌자료들이 놓인 작은 전시장 벽에는 1989년 8월 6일 작가 구더신이 했던 한마디가 씌어 있었다. "중국 예술가들은 돈이 없는 것, 큰 작업실이 없는 것 외에는 다 갖고 있어요. 게다가 전부 제일 좋은 것이에요." (86)

중앙미술학원을 비롯해 전국에서 매년 10만 명이 넘는 미래의 예술가와 예술 전문가들이 배출되고 있어요. 그리고 중국은 발전하면서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앞으로 예술의 지위도 더 높아질 거에요. 한국과 일본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으리라고 보지만 중국도 이제까지 서양미술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이제 졸업한, 앞으로 졸업할 새로운 작가들은 진짜 아시아성을 찾고 그에서 비롯된 진짜 새로운 예술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141)

"집도 없는 야생의 들개처럼 살고 싶다. 보기에도 좋지 않고, 마르고, 병들고, 갖은 일을 겪겠지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싸우고 싶을 때 싸우고, 친하고 싶은 이와 친한, 그런 들개처럼 살고 싶다." (178)

1952년생, 이 예술가에게서는 단 1%의 '아저씨' 모습도 섞여 있지 않다. 그래서 전시를 위한 미팅도, 인터뷰도 항상 황루이를 만나면 모두 마치 데이트하는 느낌이다. 그의 외관도 나이를 짐작할 수 없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중국에서, 이 시대에 그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218)

맞아요. 1978년 10월 시인 베이다오, 망커, 그리고 저 세 사람이 문학잡지 <찐티엔>을 창간했어요. 저는 미술편집을 맡아 모든 그림과 디자인, 미술평론을 담당했죠. 저는 시인 친구들과 친하게 지냈어요. 지금 생각하면 좋은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저와 베이다오 집은 아주 가까워서 종종 모여서 이야기를 하거나 함께 책을 나눠 읽곤 했죠. 당시의 문인들은 다른 어떤 예술영역보다 앞서 있었어요. 미술은 현실, 3차원의 것을 2차원의 평면에 나타내거나 2차원을 3차원의 입체로 나타냅니다. 어떤 형식에든 결과물은 2차원, 3차원이라는 것에 묶여 있었어요. 하지만 시는 달라요. 완전히 상상의 것이죠. 시라는 것은 어떤 시간, 시대, 상황이 있을 때 꽃을 피워요. 그 때의 베이다오, 망커의 시를 보면 정말 그래요. 불가사의할 정도죠. 하지만 우리, 그림 그리는 이들은 그렇지 못했어요. (226)

제도와 사회는 사람을 길들여요. 이 길들여진 습관은 바꾸기 어렵죠. 설사 변화한다 해도 그 변화는 흔적을 남기고요. 러시아에 갔을 때 지하철에서 본 사람들의 표정이 중국과 너무나 닮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중국은 체제를 유지하면서 변화하고, 러시아는 완전히 그 체제가 깨졌지만 두 나라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나뭇가지가 강한 바람에 휘어지듯 큰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겠죠. 이런 큰 외적인 변화에 의해 꺾인, 휘어진 과정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표정이 있어요. 좌절, 그것이 마치 상처의 흔적처럼 그들에게 남아 있는 거에요. (251)

대학 때도 수채화를 그리긴 했지만 베이징에 와서 더 많이 그렸어요. 수채화는 유화보다 훨씬 그리기가 쉽잖아요. 작은 종이 한 장, 의자 하나, 책상 하나, 물감 조금과 물 한 잔이면 그릴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는 작품 안에 사람 손길이 나타나는 것이 싫어요. 한 획 한 획 그린 느낌이 작품 안에 출현하는 것이 싫어요. 제 그림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그 사물이 종이 안에서 자라난 듯 매끈하고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거든요. (333)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부모님을 가졌다. 남방의 도시는 북방에 비해 편안하고 느릿하다. 따뜻하고 좋은 기후를 가진 땅에 사는 사람들은 큰 욕심보다는 생활 속의 작은 만족과 편안한 리듬에 몸을 밑길 줄 안다. 그의 작품에는 바로 이런 자연스러움이 있다.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과 여유로움이 아니었자면 이 공격적인 베이징 예술세계에서 그처럼 조용하고 소소한 작품을 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더 큰 작품, 더 강한 작품, 더 깜짝 놀랄 만한 파워풀한 작품을 만들어야 눈에 띌 것 같은 이곳에서 그는 늘 그렇듯 웃는 얼굴로 변함없이 자신의 작품을 하고 있다. (3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