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는 주변 지역인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오랜 시간에 걸쳐 보급되었다. 이 지역을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한국은 유교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았다. 일본은, 유학은 받아들였지만 유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유교를 학문으로나 통치자의 교양으로는 수용했지만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예로는 수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견해에는 이론도 있겠지만, 일본의 경우 관혼상제와 일상생활의 규범 또는 가족과 친족제도 등에서 비유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베트남의 유교 수용도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일상생활에서는 불교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15)
동족집단이 단순히 부계 계통으로 맺어진 생물학적 자연적 혈연집단이 아니라 특별한 사회적 역사적 형성물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동족집단의 형성을 추진한 세력은 누구였을까? 이 세력이야말로 양반층이다. 달리 말하면 양반층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갈 때, 그들이 자신의 혈통을 사회적으로 과시하려고 형성한 것이 동족집단이었던 것이다. 안동 권씨의 경우 권중시의 장남인 권수평...이란 인물이 추밀부사...라는 중앙정부의 높은 관직에 종사했는데, 이것은 권수평이 출신 모체인 이족 계층에서 양반으로 출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권수평의 세대에 안동 권씨로서 동족 결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46)
이상 소개한 안동 권씨의 권의, 권벌 형제 일족과 천전 김씨의 예에서 보듯이 사회 계층으로서 양반층은 15~17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결코 개개의 가계에서 우연히 일어난 현상은 아니며, 하나의 광범위한 사회운동이라고 해야 할 현상이었다.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을 보면 유곡 권씨나 천전 김씨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 출신 모체는 고려시대의 토착 이족 세력이며 이족 > 중앙 관료 > 세거지 정착이라는 과정을 밟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즉 재지양반 계층의 형성 과정은 이족 세력에서 재지양반층이 분화해온 과정이었고, 이 분화를 가능하게 한 분기점으로 한번은 중앙정부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65)
조선 전기 노비의 신분 판정과 그 소유권의 귀속은 두 가지 원칙에 따라 결정되었다. ‘종모법從母法’과 ‘일천즉천一賤卽賤’의 원칙이 그것이다. 종모법이란 노비 소유권의 귀속을 결정하기 위한 원칙인데, 소유주가 서로 다른 남자종과 여자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친인 여자종을 소유한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천즉천이란 노비의 신분을 결정하기 위한 원칙으로, 부 또는 모 어느 쪽인가가 천신분…이라면 그 아이도 천신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자종과 양인 신분의 여성 또는 여자종과 양인 신분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어떤 경우라도 노비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일천즉천의 원칙은 노비 신분인 사람을 늘리는 큰 원인이었는데, 남자종과 양인 신분의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종모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남자종의 소유자에게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76)
그뿐만 아니라 국가는 노비가 거주지에서 달아나는 경우 이를 엄하게 뒤쫓는 정책도 취하였다. 달아난 노비는 잡혀오면 다시 원소유자의 지배를 받았다. 더구나 달아난 것에는 시효가 없었다. 따라서 달아난 노비가 죽은 뒤에도 그 자손들이 발견되면 원소유자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81)
무릇 양반은 ‘사士’로서 학문에 힘써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생활 방식으로 삼는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천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양반다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일상의 여러 가지 잡일을 담당하는 노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조선 전기에 재지양반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은 노비가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노비 인구의 급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82)
재지양반층이 형성되어온 조선 전기는 한국 역사상 농업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농업 발전이 재지양반층 형성의 큰 원동력이 되었고, 아울러 재지양반층은 농업 기술의 발전과 농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조선 전기 농업 기술의 발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현상은 이 시기에 비로소 한국의 독자적인 농서…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중국의 농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농업 기술을 체계화한 농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 독자의 체계적인 농서로 처음 저술된 것이 <농사직설>이다. (97)
그러면 이와 같은 급속한 경지 면적의 증대는 16세기와 17세기 중 주로 언제 일어났을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국토를 크게 황폐화했다. 주된 전쟁터 중 하나였던 경상도 지방의 피해는 특히 심했지만, 이러한 피해는 17세기 한 세기에 걸쳐 복구되었다. 이런 경위를 생각한다면 안동의 경지 면적은 주로 16세기에 이미 증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경지 개발이 급속히 진전된 16세기야말로 재지양반층이 농촌 지역에 정착하여 일제히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116)
이런 현상은 오희문 일가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지만 양반들의 경제생활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것, 즉 증답경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듯하다. …… 증답경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양반들의 경제생활에서 화폐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에 거주한 유희춘도 증답경제의 역할이 컸다면,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층에게는 화폐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더욱 낮았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노비를 많이 소유했던 양반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대부분 노비를 사역해 생산하든가, 노비의 신공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1)
재지양반층이 농촌 거주자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분명히 억제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도시도 수도 서울과 옛 수도인 개성이나 평양을 제외하면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같은 원인에서라고 생각된다. 양반층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억말사상…, 즉 상업을 천시하는 사고방식도 재지양반층의 존재 방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사대부층에는 상인 출신이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상인 출신 양반이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133)
노비의 지위는 이처럼 비참했지만, 이런 면만 강조하는 것은 금물이다. 노비는 다른 면에서 몹시 꿋꿋하게 살아갔고, 지위를 높여갈 가능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이 양면을 보지 않으면 조선시대 노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노비들의 강인함, 성장 가능성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그들 다수가 가족을 형성하였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경영한 데서 찾을 수 있다. …… 이 기술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자종 한복이 오희문의 종자 일부를 자기 밭의 파종용으로 사용한 점이다. 게다가 한복은 오희문의 토지를 경작하는 한편 자신도 농경을 했다. 노비들은 인격적으로는 자유가 없었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것을 매매하거나 자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법으로 인정되었다. 노비 신분이면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사람의 예도 많이 알려져 있다. (139)
<쇄미록>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에 대한 오희문의 불만과 분노를 기록한 것이 무수히 보인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의 낮은 효율, 시장에서 사고팔 때 생기는 상품의 감소, 가격의 허위 보고 등 오희문에게는 머리 아픈 일이 연속되었다. 이런 게으름과 ‘부정‘은 노비 같은 부자유 노동자에게는 필연적인데, 앞에서 소개한 한복과 덕노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도 자기 자신의 경영에는 게으르지 않았다. 따라서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였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양반층에게 노비는 어떤 의미로는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였는데, 그런 관계의 근저에는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노비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140)
주자학적 수양을 몸에 익힌 재지양반층이 결집한 장으로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서원...이다. 서원은 유교의 선학...들을 제사 지내는 것과 함께 양반 자제를 위한 사적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재지양반층 결집의 장이기도 하였다. 한국 서원의 효시는 1542년에 건립된 백운동서원...이며, 16세기 후반 이후 각지에 서원이 많이 설립되어, 18세기 초엽에는 전국에 593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161)
물론 그중에는 18~19세기에도 재산 규모를 확대하는 일족도 있었으나 재지양반 계층 전체로는 17세기 후반 이후 경제력 성장이 정지해버린다. 그리고 많은 재지양반 가계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다음에 서술할 상속제도의 변화와도 관련되었는데, 분재기 자체가 작성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분재기는 거의 대부분 18세기까지의 것이며 19세기의 것은 극히 드물다. 재지양반층의 경제력 저하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큰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76) ...... 상속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 주자학을 국교로 수용하고도 2세기 이상 지난 후의 일임을 생각하면 주자학의 보급을 상속제도 변화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 재지양반 계층의 경제력 저하로 상속제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주자학이 그 변화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187)
족보 편찬 방식에 나타난 이상과 같은 변화는 부계 혈연집단으로 동족집단의 결합이 강화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초기 족보는 <성화보>의 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폐쇄된 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결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혼인관계를 통해 다른 유력 혈연집단과 결합되어 있는 열린 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후계의 족보는 동족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이는 동족 결합 강화의 산물이었다. (195)
호적대장상 신분 구성의 변동에서 양반호, 양반 인구의 증가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노비 신분의 동향이다. 호적에 등록된 노비 신분인 사람이 독립된 호로는 격감하지만 인구수로 보면 19세기 중엽에도 전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노비호와 노비 인구의 서로 반대되는 동향은 독립한 노비호가 대부분 소멸한 반면, 많은 노비가 다른 호의 호적에 흡수되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이전에는 독립한 가家를 구성했던 노비가 19세기가 되면 다른 호에 종속된 노동력으로, 말하자면 ‘가내적家內的‘ 존재로 변한 것이다. (218) ...... 그러므로 양반층으로서는 자기 대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노비의 존재가 불가결했고, 따라서 양반과 노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19세기의 호적에 대량 등장하는 유학들 대부분이 노비를 소유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념도 양반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19)
이상 최재석 교수가 밝혀낸 가족 유형의 시기별, 신분별 변동에서 얻은 결론은 18~19세기로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상민, 천민층에서도 결혼이 일반화되었고 더불어 부모, 자식, 손자 3세대가 동거하는 호가 차츰 증가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민호, 천민호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분별 가종 유형 차이도 차츰 해소되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민호나 노비를 중심으로 하는 천민호에서 가족 구성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소농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던 그들이 소농으로서 차츰 경영의 안정성을 높여감에 따라 가家의 연속성도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가의 연속성, 영속성이 일반 농민 사이에서도 현실의 일이 됨으로써, 그들 사이에서도 처음으로 조상 관념이나 공통의 조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족 의식이 형성되게 된다. 18세기 이후 진행된 양반적 가치관이나 생활이념의 사회 전체 침투는 이상에서 서술한 바처럼 소농층의 성장과 그들 사이의 가家 관념, 조상 관념의 일반화, 가족 구성에서 양반과의 동질성 획득과 같은 일련의 사태와 궤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225)
서론에서 소개한 바와 같은 유교적 생활습관이란 이상에서 서술해 온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었다. 즉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재지양반 계층의 광범위한 형성을 1단계로 하고 18~19세기의 양반적 가치관, 생활이념의 하층 침투와 양반 지향 사회의 성립을 2단계로 하여 사회 구석구석까지 유교적 생활관습이 정착하게 되었다. (228) ...... 전통이 오랜 시대부터 존속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면 전통과 근대를 대립해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통이란 근대가 시작되기 전 2세기 정도 사이에 생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며, 근대가 시작된 19세기는 전통이 전 사회적 규모로 정착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전통적인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인 근대에 들어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면도 보인다. (229)
18세기 이후 재지양반층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차츰 저하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으나, 한편으로 그들의 지배력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야말로 18세기 이후 시작되는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 즉 양반적 가치관, 생활 이념의 하층 침투였다. 양반층의 지방 지배에 도전하려고 새로이 성장해온 계층도 그 목적은 양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양반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는데 근대라는 시대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오히려 사회의 유동화가 격렬해지는 근대에 들어와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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