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음식여행 잘먹고 잘사는 법 38
김동욱, 이혜선 지음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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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은 초라해도 속은 꽉 차있는 책. 조금 더 발전시켜서 예쁘게 다시 펴내면 많은 이들 찾을 듯. 베트남에서 자주 마주친 파인애플-토마토 들어간 새콤달콤국(필리핀에도 거의 유사한 요리 있음) 꼭 알고 싶었는데 이 책에 나옴, Canh Chua! 유투브 보니 조리법 잘 나옴. 남베트남의 컴포트푸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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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 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조선 문명의 힘 1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노영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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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강한! <유교화과정>에 대한 좋은 보완. 1. 양반 지위는 공식적 아니라 상식적 2. 양반의 짝패 노비의 존재 부각시킨 것 아주 좋음 3. 주자학은 18C 생산력 감소에 따른 부득이한 제도 변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널리 수용되었다는 점 4. 근대는 외려 '전통'이 수립-강화되는 시기였다는 멋진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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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쿡 - 누들로드 PD의 세계 최고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뢰 생존기
이욱정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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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건 코스요리와 비슷하다. 세상맛을 배우는 애피타이저...가 지나면 본격적으로 자기가 원하는 일을 찾아 목표를 성취해야 하는 메인요리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는 달콤한 디저트가 있다. 식당에서야 전체-메인-디저트가 순서대로 이어지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이의 인생은 달콤한 디저트부터 머저 즐기다가 메인요리라는 도전의 시간을 영원히 맛보지 못하고 끝나기도 한다. 반면에, 일에 미쳐 버둥거리다가 달콤향긋한 디저트를 아예 맛보지 못하는 일도 있을 것이고, 평생 자기 길을 못 찾고 변죽만 올리다가 끝나는 전채요리 인생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코스요리는 어찌 보면 공평하지도 않고 사람마다 순서도 제각각이다. (9)

"이 감독, 요리를 배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요리학교에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테크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요리를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당근을 똑같은 크기로 재빨리 채 썰 수 있는 요리사는 많지만, 당근으로 새로운 레시피를 생각해낼 수 있는 요리사는 드물지요." (27)

요리사가 되는 과정은 두려움과 싸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튀김요리라도 할라치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기름 솥 근처에 가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밀려온다. 그렇다고 치례 겁을 먹고 멀찌감치 서서 음식을 던져넣었다가는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기름에 혼비백산하게 된다. 무딘 칼이 위험하고 날 선 칼이 안전하다는 것, 뜨거운 것이 두려울수록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 주방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그 아이러니를 먼저 배워야 한다. (71)

작가라면 남들과 변별되는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하고, 디자이너라면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춰 새로운 스타일을 창조해야 하지만 요리의 세계는 다르다. 사람들은 레스토랑에서 지난번에 맛있게 먹은 음식이 이번에도 똑같은 맛을 내기를 기대한다. 요리에서는 피카소급의 몇몇 대가가 혁신을 일으키면 그걸로 충분할 뿐,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은 맛을 낼 수 있는 능력을 요구받는다.
요리는 표절이 관대하다 못해 심지어 조장하는 분야라 할 수 있다. 누군가 거장의 요리를 똑같은 모양, 똑같은 맛으로 복제해냈다면 그는 손가락질을 받는 게 아니라 칭찬을 듣는다. 알랭 뒤카스나 피에르 가니에르의 요리를, 그것도 풀코스 요리를 똑같이 만들 줄 아는 셰프는 양심 없는 삼류 요리사가 아니라 천재인 것이다. 작가가 남의 문장을 베끼면 표절이지만, 요리사가 남의 요리를 베끼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 재현이다. (91)

42세인 토니는 레바논 사람으로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요리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지만 이미 열 살 때 샌드위치를 만들어 축구장 앞에서 팔기 시작했다. 18세이 영국에 놀러왔다가 주저앉아 접시닦이부터 배웠다. 어린 나이였지만 술과 담배를 비롯하여 모든 유흥과 담을 쌓고 하루도 쉬지 않고 미친 듯이 주방일을 배웠다. 그는 22세 때 자신의 첫번째 식당...을 열었고 돈을 모았다. 그리고 십 년 전 비로소 오랜 꿈이었던 레바논 음식점을 열었다.
......
"이 모든 아이디어와 메뉴들이 어디서 나온 거죠?"
"어렵지 않았어요. 가난하던 시절, 내가 먹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먹을 수 없었던 음식들, 갖고 싶었던 물건들, 살고 싶었던 공간의 꿈을 모아놓았을 뿐이지요." (121)

그럼 뭘까? 내 생각에 프랑스인들은 요리를 단순히 먹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지한 사유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요리를 음악이나 미술작품과 같이 음미하고 비평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고, 요리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일찍이 표준화하고 체계화했다. (128)

프랑스인들이 요리를 사유의 대상으로 보고 요리의 체계와 용어를 고안한 것이 프랑스 요리의 지위를 드높이는 데 크게 작용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힘은 르 코르동 블뢰 같은 직업 요리학교에서 비롯되었다.
요리학교는 프랑스 요리의 지식과 규범을 집대성하여 프랑스 안팎으로 전수했고, 대중은 그것에 문화적 권위를 부여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최근에야 알마...같은 국제적 명성의 요리학교가 세워졌지만 르코르동 블뢰는 이미 개교 100년이 넘었다. 오늘날 뉴욕, 바르셀로나, 도쿄, 밀라노의 유명 요리학교들이 프랑스 요리학교의 틀을 그대로 베껴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나라에서 요리가 주걱으로 맞아가며 배워야 하는 도제적 ‘기술‘일 때, 프랑스 요리를 ‘학문‘으로 전환시켰다. (131)

또하나, 요리학교의 목적인 ‘기능‘과 ‘테크닉‘에 국한되어 있다면 많은 돈을 들여 굳이 유학갈 필요가 없다. 요리유학을 떠나기 전 켄 홈이 충고했듯이 내가 르 코르동 블뢰에서 배운 것은 요리를 ‘만드는 방법‘이 아니라 요리를 ‘생각하는 방법‘이었다. 전혀 다른 국적과 다양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 교실에 모여, 한 입 거리밖에 되지 않는 음식을 앞에 놓고, 토론하고 맛보고 비평하고 논쟁하는 과정, 내가 요리학교에서 배운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시간이었다.,
컨베이어 벨트의 한 부분만을 담당하는 실제 레스토랑과 달리, 다양한 레시피의 요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체험하게 하는 수업방식은 요리를 ‘총체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기본을 반복하며 전체를 바라보는 훈련이 끝나야 비로소 자신만의 생각으로 창조적인 요리를 완성할 수 있다. (133)

나는 켄 홈을 보면서 요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요리사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경험을 하며 문화적 소양을 쌓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켄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셰프는 많을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다른 셰프들이 갖지 못한 능력, 즉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1000명의 요리사 가운데 999명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칼질을 한다면, 한 명은 그 요리를 생각하고 분석해서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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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 - 우리가 몰랐던 양반의 실체를 찾아서 조선 문명의 힘 1
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노영구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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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발생한 유교는 주변 지역인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 오랜 시간에 걸쳐 보급되었다. 이 지역을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이라고도 하는데, 그중에서도 한국은 유교의 영향을 가장 깊이 받았다. 일본은, 유학은 받아들였지만 유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유교를 학문으로나 통치자의 교양으로는 수용했지만 일상생활을 규정하는 예로는 수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견해에는 이론도 있겠지만, 일본의 경우 관혼상제와 일상생활의 규범 또는 가족과 친족제도 등에서 비유교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베트남의 유교 수용도 일본과 비슷한 점이 많아서 일상생활에서는 불교의 영향이 지배적이다. (15)

동족집단이 단순히 부계 계통으로 맺어진 생물학적 자연적 혈연집단이 아니라 특별한 사회적 역사적 형성물이라고 한다면 이와 같은 동족집단의 형성을 추진한 세력은 누구였을까? 이 세력이야말로 양반층이다. 달리 말하면 양반층이 사회적으로 형성되어갈 때, 그들이 자신의 혈통을 사회적으로 과시하려고 형성한 것이 동족집단이었던 것이다. 안동 권씨의 경우 권중시의 장남인 권수평...이란 인물이 추밀부사...라는 중앙정부의 높은 관직에 종사했는데, 이것은 권수평이 출신 모체인 이족 계층에서 양반으로 출세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권수평의 세대에 안동 권씨로서 동족 결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46)

이상 소개한 안동 권씨의 권의, 권벌 형제 일족과 천전 김씨의 예에서 보듯이 사회 계층으로서 양반층은 15~17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결코 개개의 가계에서 우연히 일어난 현상은 아니며, 하나의 광범위한 사회운동이라고 해야 할 현상이었다.
재지양반층의 형성 과정을 보면 유곡 권씨나 천전 김씨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 출신 모체는 고려시대의 토착 이족 세력이며 이족 > 중앙 관료 > 세거지 정착이라는 과정을 밟아간 것을 알 수 있다. 즉 재지양반 계층의 형성 과정은 이족 세력에서 재지양반층이 분화해온 과정이었고, 이 분화를 가능하게 한 분기점으로 한번은 중앙정부의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65)

조선 전기 노비의 신분 판정과 그 소유권의 귀속은 두 가지 원칙에 따라 결정되었다. ‘종모법從母法’과 ‘일천즉천一賤卽賤’의 원칙이 그것이다. 종모법이란 노비 소유권의 귀속을 결정하기 위한 원칙인데, 소유주가 서로 다른 남자종과 여자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친인 여자종을 소유한 사람의 소유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천즉천이란 노비의 신분을 결정하기 위한 원칙으로, 부 또는 모 어느 쪽인가가 천신분…이라면 그 아이도 천신분이 되었다. 그러므로 남자종과 양인 신분의 여성 또는 여자종과 양인 신분인 남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어떤 경우라도 노비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일천즉천의 원칙은 노비 신분인 사람을 늘리는 큰 원인이었는데, 남자종과 양인 신분의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에게는 종모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남자종의 소유자에게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76)

그뿐만 아니라 국가는 노비가 거주지에서 달아나는 경우 이를 엄하게 뒤쫓는 정책도 취하였다. 달아난 노비는 잡혀오면 다시 원소유자의 지배를 받았다. 더구나 달아난 것에는 시효가 없었다. 따라서 달아난 노비가 죽은 뒤에도 그 자손들이 발견되면 원소유자의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81)

무릇 양반은 ‘사士’로서 학문에 힘써 과거에 합격하여 관료가 되는 것을 이상적인 생활 방식으로 삼는 존재이기 때문에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것은 천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양반다운 생활을 유지하려면 일상의 여러 가지 잡일을 담당하는 노비가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였는데, 조선 전기에 재지양반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된 것은 노비가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재지양반층의 형성과 노비 인구의 급증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82)

재지양반층이 형성되어온 조선 전기는 한국 역사상 농업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농업 발전이 재지양반층 형성의 큰 원동력이 되었고, 아울러 재지양반층은 농업 기술의 발전과 농지 개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조선 전기 농업 기술의 발전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현상은 이 시기에 비로소 한국의 독자적인 농서…가 출현했다는 점이다. ……
그래서 조선시대에 들어서자 중국의 농서를 참고하면서 한국의 농업 기술을 체계화한 농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한국 독자의 체계적인 농서로 처음 저술된 것이 <농사직설>이다. (97)

그러면 이와 같은 급속한 경지 면적의 증대는 16세기와 17세기 중 주로 언제 일어났을까?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국토를 크게 황폐화했다. 주된 전쟁터 중 하나였던 경상도 지방의 피해는 특히 심했지만, 이러한 피해는 17세기 한 세기에 걸쳐 복구되었다. 이런 경위를 생각한다면 안동의 경지 면적은 주로 16세기에 이미 증가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경지 개발이 급속히 진전된 16세기야말로 재지양반층이 농촌 지역에 정착하여 일제히 형성된 시기이기도 했다. (116)

이런 현상은 오희문 일가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지만 양반들의 경제생활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것, 즉 증답경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큰 역할을 하였음은 상당히 보편적인 현상이었던 듯하다.
……
증답경제의 역할이 컸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양반들의 경제생활에서 화폐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에 거주한 유희춘도 증답경제의 역할이 컸다면, 농촌에 거주하는 재지양반층에게는 화폐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더욱 낮았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노비를 많이 소유했던 양반들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대부분 노비를 사역해 생산하든가, 노비의 신공으로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31)

재지양반층이 농촌 거주자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화폐경제의 발전이라는 면에서 본다면 분명히 억제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도시도 수도 서울과 옛 수도인 개성이나 평양을 제외하면 거의 형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같은 원인에서라고 생각된다. 양반층에 나타나는 극단적인 억말사상…, 즉 상업을 천시하는 사고방식도 재지양반층의 존재 방식과 관련되어 있었다. 중국의 사대부층에는 상인 출신이 많았지만, 조선에서는 상인 출신 양반이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133)

노비의 지위는 이처럼 비참했지만, 이런 면만 강조하는 것은 금물이다. 노비는 다른 면에서 몹시 꿋꿋하게 살아갔고, 지위를 높여갈 가능성을 간직한 존재였다. 이 양면을 보지 않으면 조선시대 노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노비들의 강인함, 성장 가능성의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그들 다수가 가족을 형성하였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경영한 데서 찾을 수 있다.
……
이 기술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자종 한복이 오희문의 종자 일부를 자기 밭의 파종용으로 사용한 점이다. 게다가 한복은 오희문의 토지를 경작하는 한편 자신도 농경을 했다. 노비들은 인격적으로는 자유가 없었지만 자기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것을 매매하거나 자손에게 상속하는 것이 법으로 인정되었다. 노비 신분이면서 광대한 토지를 소유했던 사람의 예도 많이 알려져 있다. (139)

<쇄미록>에는 노비들의 게으름과 ‘부정...‘에 대한 오희문의 불만과 분노를 기록한 것이 무수히 보인다. 노비를 이용한 농사일의 낮은 효율, 시장에서 사고팔 때 생기는 상품의 감소, 가격의 허위 보고 등 오희문에게는 머리 아픈 일이 연속되었다. 이런 게으름과 ‘부정‘은 노비 같은 부자유 노동자에게는 필연적인데, 앞에서 소개한 한복과 덕노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도 자기 자신의 경영에는 게으르지 않았다.
따라서 양반과 노비의 관계를 일방적인 지배와 복종의 관계였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양반층에게 노비는 어떤 의미로는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였는데, 그런 관계의 근저에는 자신들의 지위를 높이려는 노비들의 집요한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140)

주자학적 수양을 몸에 익힌 재지양반층이 결집한 장으로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서원...이다. 서원은 유교의 선학...들을 제사 지내는 것과 함께 양반 자제를 위한 사적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재지양반층 결집의 장이기도 하였다. 한국 서원의 효시는 1542년에 건립된 백운동서원...이며, 16세기 후반 이후 각지에 서원이 많이 설립되어, 18세기 초엽에는 전국에 593개를 헤아리게 되었다. (161)

물론 그중에는 18~19세기에도 재산 규모를 확대하는 일족도 있었으나 재지양반 계층 전체로는 17세기 후반 이후 경제력 성장이 정지해버린다. 그리고 많은 재지양반 가계에서는 18세기 후반 이후, 다음에 서술할 상속제도의 변화와도 관련되었는데, 분재기 자체가 작성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분재기는 거의 대부분 18세기까지의 것이며 19세기의 것은 극히 드물다. 재지양반층의 경제력 저하가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낸 큰 원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176)
......
상속제도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 주자학을 국교로 수용하고도 2세기 이상 지난 후의 일임을 생각하면 주자학의 보급을 상속제도 변화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 재지양반 계층의 경제력 저하로 상속제도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을 때, 주자학이 그 변화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187)

족보 편찬 방식에 나타난 이상과 같은 변화는 부계 혈연집단으로 동족집단의 결합이 강화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초기 족보는 <성화보>의 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폐쇄된 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결속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혼인관계를 통해 다른 유력 혈연집단과 결합되어 있는 열린 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위세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후계의 족보는 동족집단으로서 안동 권씨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으로 이는 동족 결합 강화의 산물이었다. (195)

호적대장상 신분 구성의 변동에서 양반호, 양반 인구의 증가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노비 신분의 동향이다. 호적에 등록된 노비 신분인 사람이 독립된 호로는 격감하지만 인구수로 보면 19세기 중엽에도 전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노비호와 노비 인구의 서로 반대되는 동향은 독립한 노비호가 대부분 소멸한 반면, 많은 노비가 다른 호의 호적에 흡수되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이전에는 독립한 가家를 구성했던 노비가 19세기가 되면 다른 호에 종속된 노동력으로, 말하자면 ‘가내적家內的‘ 존재로 변한 것이다. (218)
......
그러므로 양반층으로서는 자기 대산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노비의 존재가 불가결했고, 따라서 양반과 노비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19세기의 호적에 대량 등장하는 유학들 대부분이 노비를 소유했다는 것은 그들의 생활이념도 양반층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219)

이상 최재석 교수가 밝혀낸 가족 유형의 시기별, 신분별 변동에서 얻은 결론은 18~19세기로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상민, 천민층에서도 결혼이 일반화되었고 더불어 부모, 자식, 손자 3세대가 동거하는 호가 차츰 증가해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상민호, 천민호에서 이와 같은 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신분별 가종 유형 차이도 차츰 해소되어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상민호나 노비를 중심으로 하는 천민호에서 가족 구성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소농으로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으로 몹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던 그들이 소농으로서 차츰 경영의 안정성을 높여감에 따라 가家의 연속성도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고 가의 연속성, 영속성이 일반 농민 사이에서도 현실의 일이 됨으로써, 그들 사이에서도 처음으로 조상 관념이나 공통의 조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동족 의식이 형성되게 된다.
18세기 이후 진행된 양반적 가치관이나 생활이념의 사회 전체 침투는 이상에서 서술한 바처럼 소농층의 성장과 그들 사이의 가家 관념, 조상 관념의 일반화, 가족 구성에서 양반과의 동질성 획득과 같은 일련의 사태와 궤를 같이하여 일어났다. (225)

서론에서 소개한 바와 같은 유교적 생활습관이란 이상에서 서술해 온 과정을 거쳐서 성립되었다. 즉 16세기를 중심으로 한 재지양반 계층의 광범위한 형성을 1단계로 하고 18~19세기의 양반적 가치관, 생활이념의 하층 침투와 양반 지향 사회의 성립을 2단계로 하여 사회 구석구석까지 유교적 생활관습이 정착하게 되었다. (228)
......
전통이 오랜 시대부터 존속해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면 전통과 근대를 대립해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전통이란 근대가 시작되기 전 2세기 정도 사이에 생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이며, 근대가 시작된 19세기는 전통이 전 사회적 규모로 정착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전통적인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인 근대에 들어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면도 보인다. (229)

18세기 이후 재지양반층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력이 차츰 저하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으나, 한편으로 그들의 지배력은 근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야말로 18세기 이후 시작되는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화, 즉 양반적 가치관, 생활 이념의 하층 침투였다. 양반층의 지방 지배에 도전하려고 새로이 성장해온 계층도 그 목적은 양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양반으로 성장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동향은 19세기에 들어와 본격화되었는데 근대라는 시대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오히려 사회의 유동화가 격렬해지는 근대에 들어와 사회 전체의 양반 지향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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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찜 만든 것 기록을 여기에.

 

 

닭찜 1 (12/5, 辛酉)

  • 오늘은 월차. 간만에 집밥 한끼 잘 해먹자며 닭찜, 칠절판, 그리고 연근전+굴전 제작을 계획함.
  • 서둘러 식사 준비에 들어갔으나 여엉부영하다가 벌써 저녁 7시가 넘어 버림. 재빨리 칠절판 제작 포기.
  • 평소처럼 닭(9호)을 반마리만 쓰려고 하였으나 한번에 다 만들어 내일도 먹자는 의견에 따라 한 마리를 다 냄비에 넣음.
  • 이에 따라 양념량도 늘려야 하는 것은 당연. 닭 반마리 정도 쓰는 데 간장3T로 제조한 갖은양념을 넣음. 오늘은 한 마리를 다 썼으니 간장 6T,가 아니고 4T로 양념을 넣어 제조함.
  • 조리 시점이 2/3을 넘긴 상황에서 갑자기 변덕이 남. 자주 그렇듯이 이 음식도 싱겁다는 말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간장을 반숟갈 정도 더 첨가함.
  • 식탁에서 먹어보니 간장 맛이 아주 거슬림. 나중에 넣은 간장을 안 넣어도 간은 충분했음. 게다가 간장을 추가할 것이라면 그에 따라 다른 양념도 알맞은 비율로 섞어 함께 추가했어야 하는데, 간장만 넣었으니 간장 맛만 남. 
  • 다음에는 이러지 말자!   
  • 사진의 오른쪽 상부의 검은 음식은 한우 부채살. 비싸지만 역시 맛있음. 
  • <채소의 신> 읽은 뒤 채소를 더 적극적으로 내 식탁에 끌여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오늘 저녁 식탁에서는 시간관계상 그 결심을 실천할 수 없었음(칠절판 무산). 저 오이지 무친 것이나 김장속(굴을 다 골라 먹어서 다시 사와 추가하였음. 내 사랑 굴) 중 하나를 빼고, 무언가 파릇한 색을 가진 숙채 요리를 더했으면 낫지 않았을까 싶음. 현재 녹색이 실종된 상태. 시각美에 더 신경 쓸 것.
  • 지금 보니 닭찜과 부채살을 한 상에 놓은 것도 잘한 일 아닌 것 같아. 둘이 다 있으니 중심(테마)가 없어짐.
  • 마음 내키는 대로 상 차리지 말고 뭔가 생각을 더 해서 메뉴를 짜고 움직입시다,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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