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 인종.명종실록,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9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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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에겐 별 이견 없음. 그녀가 아니었어도 이미 있었던, 그리고 악화되었을 구조적 문제를 그녀에게 덮어씌울 생각 없음. 능력 있고 열심히 사셨네. 오히려 묻고 싶은 건 한 나라의 왕이란 자들이 왜 이리 박복함? 인종보다 명종이 더 딱함. 30년을 숨 죽이고 살다가 이제 어깨 좀 펴나 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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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너머의 역사담론 6
미야지마 히로시 외 지음, 김현영 외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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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보이는 고수. 15~19C 동북아 파노라마를 무겁거나 추상적이지 않은 생생한 이야기로 조근조근 펼쳐 보이며 조선의 유니크함에 대해 균형 있게 평가. 19C 비극이 16C 전세계 은의 흐름에서 잉태되는 중에, 조선은 그 흐름에서 멀찍이 나와 있었어도 어쩔수없이 언제나 세계사 흐름 속에 있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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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홀리데이 (서울역-인천공항 공항철도 할인쿠폰 수록) 최고의 휴가를 위한 여행 파우치 홀리데이 시리즈 27
배나영.석현정 지음 / 꿈의지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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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유적은 언제 건설되었을까? 10세기 안팎으로 건설된 앙코르 유적들은 무려 1천 년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후삼국시대에서 조선 초기쯤에 앙코르 왕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석조 신전인 앙코르와트를 건설하고 찬란한 그들의 문명을 뽐낸 것.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앙코르 톰은 11~12세기에 인구가 무려 1백만 명에 이르렀고, 1백만 명이 살아가기 위한 주거 공간과 기반 시설을 갖춘 과학적으로 설계된 도시였다. 당시 크메르인들은 이미 3모작을 할 줄 알았고, 거대한 인구를 먹여 살렸다. 17세기 말 유럽의 중심지에서 한창 번화했던 파리의 인구가 55만 명이었음을 미루어보면, 크메르 문명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으면서도 거대한 문명이다. (33)

착한 여행의 시작은 삶에 대한 존중에서부터
톤레샵의 수상 가옥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으면서도 호수에 쓰레기를 버리고, 호수에서 용변을 보고, 그 물로 몸을 씻는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관광객에게 공개하는 대가로 살아간다. 가끔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민망한 장면과 마주칠 때는 슬쩍 카메라를 내려놓자. 어떤 경우라도 삶은 존중받아 마땅하니까. 어려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에게 예의를 지키며 수상마을을 방문하자. (203)

시엡립까지 왔는데 앙코르와트에 직접 가서 보면 되기, 굳이 박물관을 갈 필요가 있을까? 답은 예스. 유적을 꼼꼼히 돌아본 사람에게는 시대별로 정리된 유물을 살펴보며 몰랐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될 테고, 아직 유적을 돌아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크메르 문명에 대한 충분한 예습이 될 테니. 게다가 훼손될 우려가 있는 유물은 박물관에 옮겨두어 진품을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앙코르 국립 박물관은 너무 더워 야외를 돌아다니지 힘든 시간이나 비가 오는 날에 방문하면 좋다. (211)

톡톡, 서걱서걱, 여기저기 음식 만드는 소리가 분주하다. 초보 요리사들의 눈빛만큼은 유명 요리사 저리가라다. 크메르의 전통 음식을 만들고 나눠먹으며 크메르의 문화를 접하는 시간이다. 쿠킹 클래스는 시엠립 시내 곳곳에서 진행된다. 그중 펍 스트리트에 르 티그르 드 파피에 레스토랑에서 운영하는 쿠킹 클래스는 여행자들에게 인기. 메뉴를 고르고, 같이 장을 보고, 요리를 만들고 나누어 먹는다. 자신이 선택한 세 가지 메뉴에 맞춰 재료를 준비한다. 한 시간 동안 올드 마켓을 둘러보며 식재료와 향신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솔쏠하다. 수업은 영어로 2시간 남짓 진행된다. (227)

이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한국인 때문에 생겨났다. ... 예전에는 사진을 준비하지 않았을 때, 비자 신청서를 틀리게 작성했을 때 웃돈을 요구했는데, 최근에는 정상적인 서류를 제출해도 1달러를 부른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무시해도 아무 문제 없다. 지금은 작업이 세분화되어 웃돈을 준다고 더 빨리 처리되지도 않는다. "원 달러, 원달러!"라고 말해도 못 알아듣는 척 하던가, 웃으면서 ‘노‘라고 말하면 대부분 그냥 통과할 수 있다. 밤늦은 시간에 피곤한 몸으로 시엠립 공항에 도착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비자를 받고 숙소로 가고 싶겠지만, 한국인만 봉으로 아는 관행이 더 이상 소용없도록 웃돈을 얹어주는 일은 그만하도록 하자. (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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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와트, 지금 이 순간 - 어느 여행상품 기획자의 이야기, 증보판
김문환 지음 / 이담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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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지적 있음: 거리의 아이들이나 수상가옥 사람들을 불쌍한 시선으로 보지 않기. 그 사람들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 당당해. 자기 역사가 있고 삶이 있고 지금 상황이 그러한 것 뿐야. 그리고 진짜 불쌍한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음. 진짜 봉사할 마음 있으면 그 다른 곳으로 찾아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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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보는 역사, 조선과 명청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너머의 역사담론 6
미야지마 히로시 외 지음, 김현영 외 옮김 / 너머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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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가 이상한 부분:

 

  • p.127~8  "조선에서는(??) 3년에 한 번 실시되는 정규 과거 문과...에서 세 차례 시험을 보는 것에 비해, 두 차례 또는 한 차례만 실시되는 임시 문과가 조선에서는 자주 실시되었다."

 


 

중국 일본은 1000~1750년 사이에 세계인구에서 차지하는 인구비가 가장 높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표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조선도 같은 경향을 보여준다. (26)
......
남북조... 수당... 시대부터 시작한 강남... 개발은 송대에 커다란 진전을 이룬다. 그래서 중국 농업의 중심이 화북... 전작田作에서 강남 도작稻作으로 전환되어 이와 함께 경제 중심지도 강남 지역으로 옮겨간다. 이 강남 도작기술이 조선 일본 베트남 북부에 서서히 전파되어간다. 동아시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매우 높은 인구밀도는 이 강남 도작기술의 보급에 의해 처음으로 형성된 것이다.
도자기 제조기술, 면화 재배와 의복 재료로서의 목면 사용, 제지와 인쇄기술 등은 모두 송대에 사회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드디어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가 되었다. 20세기 고도 대중소비시대가 시작되기까지 동아시아의 생활문화는 그중 많은 것이 중국 송대의 생활혁명, 문화혁명에서 발단한 것이다. (27)

세계 기후사상 10~12세기는 온난화가 세계적인 규모로 진행된 시기라고 한다. 이 온난화 시기는 송대와 딱 겹치는데, 몽골 제국은 송대의 번영을 계승하면서 중국의 부를 아시아 전역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송대의 번영을 지탱한 온난한 기후는 원元의 지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냉화로 바뀌어 15세기의 소빙하기를 향해 갔다. (28)

다른 군웅들과 비교했을 때, 주원장 집단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특징은 주원장이 새로운 국가체제를 건설하는 때에도 이어졌다. 첫째는 가난한 회서 지역 출신으로 힘겨운 전쟁에서 이겨온 군대의 검약하고 강건한 기풍이다. 특히 부유한 지주나 상인에게 지원을 받고, 풍부한 재력과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장사성 세력과 대비해볼 때, 그 특질은 더욱 두드러진다. (42)
......
총체적으로 원 왕조의 자유방임적인 정책하에서 빈곤한 농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번영하던 도시나 선진 지역 중심의 사회경제에 대해, 주원장은 강력한 긴축정책을 취한 것이다. 그것은 농민보호 정책임과 동시에 농촌의 질서를 아래로부터 규제하는 강력한 풍속 통제책이기도 하였다. 송 원대에 사치한 풍속으로 유명하던 장강 하류 지역도 "국조...에 들어와서 그 습속은 일변하여 검소해졌다...." (45)

빈번한 조공관계로 인해 류큐에는 대량의 중국 생산품이 들어왔지만, 이것은 물론 류큐 내부에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잇는 전략적 거점으로서 류큐는 중국과 동남아시아, 일본, 조선을 이어주는 교역의 중심이 된다. ... 중국 상인의 해외 진출이 막혀 있던 이 시대에 중국 상품을 대량으로 들여올 수 있는 류큐의 상인은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91)

이러한 명의 보호 아래 말라카는 교역 거점으로서 급성장하였다. 그 이전에는 중국의 선박이 인도 연안에 가는 경우나 이슬람 상인의 배가 중국 동남아시아에 가는 경우 모두 각각 직접 목적지까지 항해했지만, 말라카의 융성으로 말라카의 동쪽과 서쪽의 배가 말라카에서 만나 상품을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이 활발해진 것이다. (92)
......
그러나 포르투갈이 1511년에 말라카를 점령한 뒤부터는 류큐의 배가 말라카에 들어오는 것은 중지되고 말았다. 포르투갈에 의한 점령, 1641년 네덜란드 점령을 거쳐서, 19세기 전반 싱가포르가 건설되기 전까지 말라카의 번영은 지속되었다. 또한 류큐도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 사건을 거쳐 여전히 일본과 중국 양쪽에 속한 국가로서 계속 동아시아 교역의 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류큐와 말라카가 가장 번영한 것은 역시 명의 해금... 정책에 따른 특권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15세기부터 16세기 초반이라고 할 수 있다. (93)

앞에 서술한 과거시험의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과거시험으로 평가되는 것은 법률의 자잘한 지식이나 징세상의 계산 등 실무적인 능력이 아니었다. 그러한 실무는 서리나 막우...(지방관이 사설 비서)의 일이었고, 중국 관료에게 요구된 것은 대국적 시야를 갖고 다양한 상황에 대응해서 좀 더 적절한 통치를 행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었다. 예를 들면 지방관의 재판에 대해서도 앞에 서술했지만, 여기에서 지방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정확히 법률을 적용해 판결을 내리는 능력이 아니라, 악인을 변화시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화해시키는 높은 인격적 도덕성이었다. 관료에 대한 오늘날의 사고방식과 당시 사고방식 간의 커다란 차이가 여기에 있다. (111)

일단 과거시험을 보면 그는 일반 서민보다 뛰어난 덕을 가진 인간이라는 보증서를 받은 것이 된다. 그 우월성은 그가 살아 있는 한 그의 것이었고, 그가 실제로 관료가 되지 않아도, 또 관료를 그만두고 은퇴한 후에도 그를 떠나는 것이 아니었다. 명 청 시대의 중국에서는 관직에 있었거나 또는 과거 자격 보유자를 가리켜서 ‘신사...‘, ‘향신...‘이라는 말로 자주 불렀다. 그들은 지방 사회의 유력자로서 간혹 지방관과 병립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지기도 했는데, 현임 관료가 아닌데도 그러한 세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것 자체가 그들의 흘륭함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임 관료도 퇴임 후의 신사도 모두 요역 면제 등의 특권을 부여받고 또 교제 의례에 있어서도 일반 서민과 달리 한 단계 높은 신분으로 간주되었다. (112)

이처럼 조선시대 과거는 중국과 비교해서 소수의 혈연집단에 의한 과점 상태, 인구 비율로 볼 때 많은 문과 합격자 수 등,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실로 이 두 가지 특징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실시 일정이 애초에 결정되어 있는 식년문화와는 달리, 임시로 실시되는 문과는 일정 공표에서 시험 실시까지가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게다가 임시 문과에서는 지방마다 실시되는 초시...없이 처음부터 서울에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아 지방 수험생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불리했던 것이다. 채점 역시 짧은 기간에 이루어져서 보통 시험 당일에 결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도 엄격함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특히 세력 있는 가문들에게는 임시 문과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같은 과거제도를 채용하면서도 조선과 중국은 그 양상이 크게 달랐던 것이다. (133)

사림파 등장의 배경에는 이상과 같은 정치 운영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사림파 등장의 역사적 의미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즉 왕권과 재상권의 대립을 축으로 한 양극 구조에 사림이라는 또 하나의 정치세력을 더함으로써 보다 안정된 정치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신권이 재상권과 삼사 낭관권으로 분리됨으로써 왕권의 상대적 강화를 이룰 수 있게 했다. (139)

16세기 주자학이 이기 논쟁이라는 철학적 전개를 보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주자학의 새로운 국면을 여는 것이었다. 왜 철학이었을까? 사림파의 등장과 정계 진출이 그 이유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사림파의 과제는 국왕과 신하의 관계를 어떻게 안정시키는가에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국왕에 대해서는 성인...교육을 실천함과 동시에 신하된 자로서의 인간 수양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16세기 지식인들의 극히 실천적인 질문이었다. 후세에 비판 대상이 된 16세기 주자학의 도학적 성격도 극히 시대적인 산물이었던 것이다. (171)

이러한 변화를 목격한 동시대 사람들에게 명 왕조 말기는 혼란과 불안이 가득 찬 말세였다. 그러나 한편 현대 역사학에서는 명말 청초를 일반적으로 중국사에서 유례없는 발전기로 간주한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걸쳐 ‘근대‘로의 발전을 예감케 하는 다양한 사실과 현상들이 중국에서 봇물 터지듯 분출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뒤에 따로 서술할 도시경제와 장거리 상업의 발전, ‘자본주의 맹아‘라고 불리는 부농 경영이나 공장제 수공업의 전개 등 경제면의 새로운 동향과 더불어 출판업의 융성에 따른 정보량의 급격한 확대, 전제정치...에 대한 비판 고조, 진부한 도덕적 설교보다 자신의 마음과 내면을 중시하려는 태도 등의 사상사 문화사의 새 조류도 포함하고 있다. (185)

그런데 1550년대에 최고조에 달해 1570년 전후에 완화된 북로남왜의 위기의 리듬이 일치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은의 흐름을 매개로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될수록 은의 북방 집중은 강화되고 국내의 은 부족은 심각해진다. 국내 은 부족이 심각해질수록 위험을 무릅쓰고 밀무역에 나서는 모험가들의 이익도 증대한다. 이리하여 부방 변경에서도 동남 연안에서도 폭력적인 항쟁과 상업적 이익을 표리로 한 활발한 시장이 확장되어 한인이나 다른 민족을 불문하고 이익에 끌린 사람들이 거기에 흘러들어간다. 북방의 ‘목농왕국‘도 남방의 ‘왜구적 상황...‘도 이렇게 되어 명 제국의 남북에 형성된, 화이...를 나눌 수 없는 변경인...의 세계였다. (199)

기압의 차이가 바람을 만드는 것처럼 도시의 호경기와 농촌의 불경기라는 극심한 차이는 농촌에서 도시로 나가는 사람들의 흐름을 만들어갔다. 그러면 도시의 일자리란 어떤 것들이었을까? 농촌은 농업, 도시는 공업이란 우리들의 상식과는 달리 당시 ‘공업‘의 대부분은 ‘농민‘들의 부업으로 이루어졌다. 고급 견직물이나 면포의 마지막 공정... 등 약간의 업종을 제외하고는 성벽도시 안에 특별한 공업은 없었다. 공업보다 오히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명말에 도시 잡업이라고 할 만한 잡다한 서비스업이 급속하게 커졌다는 점이다. (207)

명대 중앙정치의 스타일은 이때부터 하나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앙정치가 궁정 내의 정책 논의나 권력 다툼이 그치지 않고 중앙-지방을 가로지르는 인맥을 통해서 전국망을 가지게 된 점이다. 이러한 전국망의 형성은 관계... 내부의 인맥에 그치지 않았다. 경제 문화의 중심지임과 동시에 정보의 중심지인 도시의 번영을 기반으로 출판업이 번성하고 중앙의 소식도 신속히 지방으로 전해졌다. 관료 신사나 학생들뿐만 아니라 행상인이나 가마꾼 같은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술집에서 천하국가를 논하게 되며, 고향 출신 관료들의 언행이 예리한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그러면 관료들은 전국적인 평가에 신경을 쓰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어진다. 권력자를 대담하게 탄핵하는 등 인기를 얻기 위한 퍼포먼스도 성행해서 이것이 또한 정쟁을 격화시켜갔다. (221)

승선술...에 몰두하는 황제를 유유낙낙하게 따르던 가정제 때의 조정 신하들과 비교하면 서계 이후의 관계...에서는 재주 있고 기골 있는 관료들이 배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유능한 관료들이 있었는데도 그 후의 정국이 혼미에 빠져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정치부패를 개혁하려는 그들의 적극적인 정책이 그때까지 잠재해 있던 중앙-지방 간의 긴장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226)

이들 문헌의 작가는 대체로 가명으로 실상을 알기 어려우나 모두 자신을 ‘초망...‘, ‘포의...‘, ‘도인...‘ 등 관직이 없이 관계...의 명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칭하였다. 이렇듯 평민 지식인들 사이에 천하 국가에 대한 울분과 정치적 관심이 고조되는 것이 위충현 이후 사회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명말이란 시대는 하급 지식인이나 민중의 ‘여론‘, ‘공론‘이 위정자에게도 크게 의식된 시대였던 것이다. 민중의 ‘여론‘에 거스른다는 평판은 관료 신사들에게도 큰 오점이 되었다. (230)

17세기 일본에서 중국 정보의 계통적인 수집이 꾀해진 것은 16세기에 획기적으로 진행된 동아시아의 일체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일체화는 동아시아 내부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세계 시스템과 동아시아의 만남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239)
......
유럽 세계 시스템과 동아시아의 첫 만남은 이렇게 해서 유럽의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해금이라든가 쇄국이라고 말해지는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상황이 단적으로 그것을 말하고 있다. 은의 유입을 가장 완강하게 거부한 조선에서 동아시아의 당시 양상이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6세기의 만남을 살펴본다면, 19세기의 ‘두 번째 만남‘은 2세기에 걸친 세계 분업의 조직자로서 유럽의 축적된 면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었다. 19세기 동아시아의 ‘중체서용...(중국)‘, ‘동도서기...(조선)‘, ‘화혼양재...(일본)‘ 슬로건은 2세기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공통의 구호였다. (242)

겨울철 북경에서 스케이트를 타면서 화살을 쏘는 기술을 보이는 필기군들. 황 백 홍 남 및 각각에 테두리...가 붙은 기로 소속을 나타내고 있다. (265)

17세기 이후 당쟁이 격렬해진 조건으로는, (1) 사림파의 정권 장악 이후 공론이 중시됨에 따라 정치 참여층이 확대된 것, (2) 과거 합격자 수가 점차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의 수는 고정적이고, 그 때문에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한 것, 아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양반들은 당파를 조직해서 정권 다툼을 전개한 것이다.
16세기까지의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중앙 정계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것이고, 직접적인 관련자 수도 제한된 것이었다. 그에 비해 당쟁에는 현역 관료만이 아니라 모든 양반이 휩쓸려들었기 때문에 그 영향도 광범하였다. 원래 양반이 없거나 소수인 북부 지역을 제외하고 지방의 양반들도 어딘가의 당파에 속했고, 그것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져 갔다. (310)

그러나 17세기에 들어오면 이러한 현상은 점차 드물어진다. 17세기 이후 과거의 시험횟수 자체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서 문과 합격자 수도 증가해갔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은전은 소수의 가문에 독접되는 경향이 강해졌고, 이름 없는 가문 출신자는 비록 문과에 합격해도 낮은 관직으로 일생을 마치는 것이 일반화된다.
과거를 통한 관료 충원 방법이 이렇게 경직화되면 중앙의 유력 가문과 연결되는 것이 무엇보다 커다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전국에 산재하는 양반층의 계열화와 당파의 고정화 배경에는 이러한 관료 체제상의 변화가 숨어 있다.
남인 세력이 강했던 경상도 및 정여립의 난 이후 중앙 정계로의 진출이 막혔던 전라도, 이 두 도의 양반들은 17세기 이후 중앙 정계 진출이 매우 어려워졌다. 그런 만큼 이들 지방의 양반들은 어떻게라도 정계 진출의 가능성을 꿈꾸면서 보다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320)

대동법은 광해군이 즉위한 해(1608)에 경기도에서 우선 실시되었는데, 그 실시 범위는 좀처럼 확대되지 않았다. 이전의 공납제는 일종의 인두세였지만, 대동법은 그것을 지세화...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양반을 중심으로 토지를 많이 소유한 자가 대동법의 실시를 환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623년에 충청 전라 강원 3도에서 실시되었다가, 1625년 충청 전라 양도에서는 실시가 취소되고 말았다. 대동법 실시가 본격화하는 것은 17세기 후반부터로, ... 1677년에는 경상도에서도 실시되기에 이른다. (323)

15~16세기 동안 형성되어온 양반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지방의 통치체제는 17세기 후반이 되면 여러 가지로 변질되지 시작한다. 그중에서도 과거제의 변질과 이에 따른 중앙 정계의 새로운 진출이 매우 어려워진 것은 지방에 사는 양반층에게는 중대한 사태였다. 이러한 사태를 맞아 양반들의 생존 전략으로서 취해진 것이 부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조직의 형성 및 강화였다. (337)

이렇게 해서 17세기에 들어오면 부계 혈연집단의 조직화가 진행되는데, 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났을까? 대부분 유교 혹은 주자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의문이다. 주자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시기와 부계 혈연집단의 조직화 시기는 그 차이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17세기에 들어와서 양반 특히 지방에 사는 양반들의 활력이 점차 상실되어가는 가운데, 그들의 생존전략으로서 부계 혈연집단의 강화가 꾀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남녀 균등 상속으로부터 남자 균등, 나아가 장자 우선 상속으로의 변화는 유교의 가르침과도 다르다. 이러한 변화를 주자학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39)

청 왕조는 이러한 해외이주를 중국인의 해외진출로 보지 않고 반... 정부 활동의 온상으로 여겨 항상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1740년 자바에서 네덜란드 사람들이 중국인 1만여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청 왕조는 결국 항의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방치했다. 이것은 네덜란드와 적대해서 무역을 저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유도 있지만, 해외 중국인은 보호할 필요가 없는 ‘천조...의 기민...‘이며 박해받는 것도 자업자득이라는 청 왕조의 매정한 태도의 소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속에서 동남아시아 화교들은 스스로 상호부조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상품경제의 중추를 장악해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무역망에서 커다란 역할을 다했다는 것은 주지하는 대로이다. (356)

중국적인 집권정치체제를 도입해서 만주 귀족들의 힘을 억제하고, 팔기의 힘을 빌려서 한인 관료들을 통제하는--한족 문화로 완전히 동화하지 않고, 북방 민족의 사회구조에도 매몰되지 않는 그러한 다면성이 청 왕조 특유의 독재적 황제권력을 가능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강희제 및 그를 이은 옹정제 시대는 황제와 칸이란 두 얼굴을 통합해서 중국사상 보기 드문 황제의 정치적 리더십을 실현했던 것이다. (369)

이렇게 천주교 수용에는 남인 양반층과 중인층이 큰 역할을 했는데, 이것은 조선에서 천주교 수용이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라는 성격을 지녔던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실학의 대두와 비슷한 움직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향층이나 향리층의 양반에 대한 도전이 양반 지배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한 데 비해 실학이나 천주교의 대두는 양반 지배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천주교에서는 특히 그러했다고 할 수 있다. (410)

이상에서 서술한 대로 18세기 이후 조선사회에서는 다양한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향층이나 향리층의 대두, 노비제 해체, 천주교의 전래와 침투, 농촌으로 파급된 상품경제 등이다. 이런 와중에 16세기에 확립된 양반 지배체제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대원군의 정책이 이러한 변화를 더욱 촉진시켜 새로운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운 권력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마도 유교 입국...을 기치로 내건 조선의 근본에까지 이르는 개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조나 정약용의 꿈을 깨뜨리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벽은 너무나 강고했다. 대원군은 결국 전국 유생들의 대원군 비판 상소... 운동 속에서 10년간의 섭정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435)

둘째, 사람의 마음속 부드러움에 대한 기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보옥이나 소녀들 사이에 토라진다든가 응석부린다든가 하는 관계에서는 생활을 등에 짊어진 책임 있는 어른의 경세제민적인 기개는 추호도 느낄 수 없다. 응석부리는 도련님과 아가씨의 일희일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론...‘이나 ‘도리...‘라는 투구에 덮여 있지 않은 섬세한 ‘아녀자의 정‘에는 무언가 생경한 것, 진솔한 것이 있어서 우리를 감동시킨다. 유약하다면 유약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되는 기질의 약함이 아니라, 부친에게 징계를 받아도 태도를 고치지 않았던 가보옥처럼, 옹고집 같은 미의식에 의해서 지탱되었다고 해도 좋다. 청대 중기 사람들은 특히 그러한 부드러운 마음의 굴곡에 한층 편안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허술한 대언장어...나 위압적인 명분론에 대한 혐오감이라고 할까. 역으로 말하면 섬세하고 적확한 것, 리얼하고 미묘한 것에 대한 호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444)

오늘날 티베트가 역사적으로도 중국의 일부였다고 간주되는 것은 이러한 경위에 의한 것이다. 청 왕조 황제, 특히 옹정제나 건륭제가 티베트 불교를 각별히 보호한 것에서도 보이듯이 청 왕조와 티베트는 단순한 지배 피지배의 관계가 아니었다. 티베트 쪽에서 보면, 청 왕조 황제는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서 자신들을 지켜주는 불교의 옹호자이고,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청 왕조의 티베트 지배는 티배트 불교의 가르침을 청 왕조까지 확대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청 왕조는 티베트 불교의 호화롭고 장엄한 사원을 북경이나 열하에도 건설했으며, 티베트 불교를 단순히 소수민족의 종교로 허용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조정이 모두 열심히 지원했던 것이다. 한족에 대한 영향력이 크지않았다고 해도 티베트 불교는 적어도 창 왕조를 지탱하는 세력의 하나인 몽골을 통합하는 중요한 열쇠였다. (454)

이 세상의 집도 향리...도 가짜이고, 진짜인 어머니 곁으로, 진짜인 가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의 공동성의 원점을 이루고, 사람들의 고독과 불안을 근원에서 감싸 안아주는 것은 ‘모母‘의 이미지이다. 원대...이래 백련교의 난에서 여성 교수...가 자주 나타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군주에 충성할 것을 설하는 유교의 정통적인 가르침 또한 천하의 부모인 황제와 아이로서의 인민이라는 혈연의식 아래 사람들과의 공동성에 대한 바람을 감싸 안으려는 것이었지만, ‘무생노모‘의 가르침은 그러한 유교 사상의 부정으로서 불안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자극을 이룬 것이다. (476)

이들 단체는 개인 자유의 확대에 의해 무너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반대로 사회 혼란기나 변경의 신개척지 등 제각각인 개인이 격렬하게 경쟁하는 국면에서야말로 중국 사람들의 단체 형성 의욕과 능력은 충분히 발휘된다. 이들 단체는 이해타산적으로 형성된 측면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희생을 아끼지 않는 강한 끈으로 개인을 묶는다. 중국에서 이러한 ‘단체 형성 방식‘을 지탱하는 공동의 감각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483)
......
격렬한 항쟁과 불안으로 가득 찬 사회에서 사람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직접적 입체적인 인간관계를 원한다. 엄격한 이해상황 속에서 타산적이 되면서, 게다가 개인이 무화되는 것 같은 다양한 사회집단--혈연 동기의 감각이 그러한 역동적인 집단 형성을 지탱하고 있었다. 타산적이면서 윤리적이고, 이기적이면서 친화적---인, 이 장의 처음에서 서술한 중국 사회의 어찌 보면 이중적인 성격은 바로 이 혈연 동기 감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492)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겼을까? 하나의 힌트가 되는 것은 중국에서는 혈연조직 이외의 단체를 형성할 때에도 혈연관계를 의제화...하는 경우가 보인다는 것이다. ... 이는 조선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현상으로, 중국에서 이러한 의제화가 가능한 것은 ‘기‘라는 것과 관계있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추측이다. 즉 한족이 공유하는 기라는 감각은, 필요한 때에 필요한 범위에서 중간단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비밀이 아닐까 생각한다. ...... 비한족이 한족화하는 경우에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 기의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조선민족은 기의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조선민족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499)

이렇게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보면 조선 중간단체의 특징은 통일적인 아이덴티티의 결여일 것이다. 중국에서의 기..., 일본에서의 천황제에 필적하는 존재를 갖지 않은 조선에서는 다양한 중간단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비한족..., 반일...이라는 민족주의적 언설...이 오늘날에도 강조되는 것은 통일적인 아이덴티티의 창출을 위한 노력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통일적인 아이덴티티의 부재가 가지는 적극적인 면이다. 오늘날 해외에 정주하는 한국인 조선인의 수는 본국 내 거주 인구와의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의 이민국이라고 말하는 중국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그 왕성한 정착력은 그들 아이덴티티의 유연성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어온 재일 한국인 조선인의 일본 사회와의 ‘공생‘ 노력은 그들의 유연한 아이덴티티 확립의 노력임[?? ‘통일된 아이덴티티 확립을 위한 유연한 노력‘을 말하나?]과 동시에 일본인의 협소한 아이덴티티에 대한 계속적인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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