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小출판사 순례기 - 출판정신으로 무장한
고지마 기요타카 지음, 박지현 옮김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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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류쇼에는 마감이 없다. 모든 원고를 훑고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검토한 후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의 오만은 허용되지 않았고 독자도 겸하한 마음으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오가와는 저자와 독자 사이에서 교량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 (23)

그런 만큼 ‘잘 나갈 것이다‘ ‘널리 보급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출판하는 사람의 솔직한 심정이 아니겠는가. 그럴 때는 보통 가능한 ‘정가‘를 낮추고 ‘부수‘를 늘린다. 하지만 후지와라쇼텐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환상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지중해> 첫 권은 2000부를 발행했다. 그리고 발매 초기부터 1000부 단위로 몇 달동안 중쇄를 거듭해 2001년 초까지 1만 5000부를 팔았다. 소부수, 높은 정가. 왕성한 지적 호기심을 가진 독서인들이 원하는 책을 기획해 최대한 높은 정가를 매겨 2~3000부를 확실하게 파는 것. 이런 후지와라표텐의 마케팅 수법이 적중한 것이 <지중해>였다. ‘얼마나 벌 수 있는가‘ 보다는 ‘손해를 최소화하는‘ 지점에서 채산을 맞춘 덕이다. 이렇게 진행해 몇 권이 성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64)

국제적인 두 학자, 그것도 사회학과 자연과학 분야의 권위자다. 후지와라쇼텐은 두 사람의 대담을 기획해 날짜까지 정해 두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병으로 쓰러진 것이다. 그러나 이후 두 학자는 모두 사선을 넘어 기적적으로 기사회생했다. 대담은 형태를 바꾸어 두 사람의 왕복 서간집 <해후...>(2003)로 출간되었다. ... 다다 도미오는 왼손에 지팡이를 들고 조금씩 걸을 수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다. 쓰루미는 오른쪽 뇌를 다쳐 말은 할 수 있지만 왼쪽 하반신을 쓸 수 없다. 두 사람은 쓰러지고 난 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새로운 사상을 향해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이것이 당초 기획을 뛰어넘은 엄청난 책의 탄생 배경이다. 두 사람이 각자 전문 분야에 대해 설명하고 서로 배려하며 만들어낸 이 왕복 서간집은 간행되자마자 여러 매체의 서평에 실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화제작이 되었다. (69)

여러분은 어릴 때 무엇이 되고 싶었는가? 지금도 그 꿈을 기억하는가? 일본이 2차 대전에서 패한 1945년, 열 살이 된 다나카 가즈오...는 ‘어른이 되면 고서점을 해야지. 내가 주인이 되면 아이들이 책을 읽어도 총채로 떨며 내쫓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했다. (71)

산리즈카에 온 나카자토를 기다린 것은 ‘인간의 삶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데 자기가 편한 길을 선택하면 별 재미가 없다‘는 가카기의 한마디였다. 나카자토는 산질즈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도쿄에서 맺을 수 없는 농밀한 인간관계, 논이나 밭에서 하는 육체노동, 그 밖에도 인생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92)

먼저 일본의 한센병을 다룬 <소장 ‘한센병 예방법, 인권침해사죄 국가배상청구소송‘...>에 대해 살펴보자. 한센병은 감염률이나 발병률이 매우 낮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과거 전시 체제에 돌입하면서 ‘조국정화, 한센병 없는 일본‘이라는 모토 아래 모든 한센병 환자를 강제 수용소에 격리했다. 이 정책은 ‘한센병 없는 아시아‘라는 미명하에 한반도 등 식민지까지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수용 시설에서 치료를 받아도 사회에 복귀할 수 없었다. 생식 능력을 없애는 단종 및 우생 수술을 시술해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만든 후, 모두 똑같은 옷을 입히고 요양소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사용하게 해다. 또한 강제 노동으로 증상을 악화시키고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죽음을 감수해야 할 정도의 중징계를 내렸다. 한편, 환자들은 가족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두려워 가명을 사용하는 등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를 감내해야만 했다. (108)

전쟁이 없다는 것, 그것은 아주 사소한 일상이었다.
마치 밤이 되어 전등 스위치를 켜는 것,
잠옷을 입고 잠드는 것처럼...
전쟁에서는 졌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112)

‘깨끗한 느낌을 잃고 싶지 않다‘는 지면에 대한 고집은 광고를 싣지 않고 편집자와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기사로 된 잡지라는 편집 방침을 만들어냈다. 광고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가 지불하는 책값으로 잡지 제작비와 급여를 충당했다. 시대보다 ‘반 보 앞서가는 잡지 만들기‘를 표방한 삶의수첩사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반드시 자신의 삶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파고들어 납득할 만한 기사를 썼다. 그 결과 놀랍게도 어떻게 독자의 공감을 얻었는지 창간 이후 각 호가 몇 년간 중쇄를 거듭했다. (115)

신간 위탁은 하지 않지만 한 세트씩 판매하는 것이 최종 목표이므로 구입한 고객을 모두 파악해둔다. 구입한 사람의 이름을 대장에 기록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서점에서 판매한 것이라도 가능한 한 끝까지 추적한다. 새로운 자료를 발견했을 때 목록에 있는 이들에게 무료로 자료를 보낸다. 애프터서비스까지 책임지는 활동의 근본은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집을 낸다는 후지출판의 원칙에서 비롯된다 오노는 ‘20년이 지난 후에도 누가 샀는지 알고 있다는 점은 대단한 일‘이라고 말했다. (130)
......
이제 궁금증이 조금은 풀린 듯하다. 후지출판의 가장 큰 특징은 간행 분야를 확대하지 않고 판로가 되는 데이터를 충실히 축적한 점이다. 그리고 그 데이터를 다음 기회에 활용한다. 즉 깊어지는 방법이다. 새로운 기획을 판매하는 동시에 재고도 처리한다. 몇 번씩 판촉 활동을 할 수 있으므로 연구가들에게 정보가 전달되지 않을 염려는 없다. (131)

"저희 회사는 근본적인 지...에 대해, 그리고 책임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된 현대사회에서 ‘관계 회복‘을 위한 길을 찾고 싶습니다." (223)

"우리 회사는 근원에 대한 역행과 미래에 대한 투기... 없이는 절대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고 믿으며 시대를 개척하고 엮어내는 방법으로서 책 만들기에 주력하고 싶습니다." (226)

"고령자 또는 특별한 욕구를 가진 분들로, 일반적인 종이책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수단을 제공함으로써 독서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싶다. 그것이 도쿠쇼코보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는 나리마쓰는 50대, 60대, 70대부터 시각이나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책을 기획했다. (233)

슌주샤는 이렇게 얻은 이익으로 자사에서 책을 내고자 하는 저자에게 머물 곳을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가 나중에 새로운 자산을 낳는 초석이 되었다. (253)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던 중에 선생님은 무심코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아시아 민중들의 인간 이하의 삶 위에 성립된 것‘이라고 하셨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에서 자란 나는 숨이 멎는 듯했다. 무언가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 나의 얄팍한 지식, 인간관계 속에서도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자본주의와 식민지 관계에 대해 읽거나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이론일 뿐이었다. 이렇게 인간에 근거하여, 생활에 근거하여 따뜻한 시선으로 어떤 슬픔마저 감도는 어투로 말한 이가 있었던가. 이론이 아닌 인간의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그 한마디에 나는 깊이 감동했다. (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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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말의 미디어 혁명 - 서민이 책을 읽다 문자.사회.문화 총서 7
오키 야스시 지음, 고인덕 옮김 /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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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요약서. 화려한 당 차분한 송 세밀한 청 사이에서 존재감 없던 명이 이리 다시 보니 큰 일 했고 매력도 있네. 전국민이 드라마 보고 책&인터넷으로 실시간 여론 싸움 하는 현대 미디어 문화의 원형이 명대부터 나타났으니. 김성탄 비평, 직접 보니 인기 이유 알겠음. 자연스럽고 분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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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말의 미디어 혁명 - 서민이 책을 읽다 문자.사회.문화 총서 7
오키 야스시 지음, 고인덕 옮김 / 연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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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결국, 유교에 앞서 경전을 인쇄하고 포교활동을 하였던 불교에 대한 반감, 그리고 또 유교 측에 있었던 경전 인쇄에 대한 일종의 저항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불교가 포교를 중시한 것과 달리, 유교 경전은 소위 당시 지배계급의 특권적인 학습과 교육 내용이었다. 그래서 당시에는 널리 세상 사람들 일반에게 전달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그것을 지나치게 널리 전달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유교 경전에 대한 수요가 당대에는 아직 인쇄를 하지 않고서도 지탱할 수 있는 정도이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윽고 오대, 송에 이르러 그것이 인쇄되었다는 것은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였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19)

앞에서 인용한... 청대 초기의 고증학자인 고염무의 경우에도 그 장서의 적지 않은 부분이 총서이었음이 틀림없다. 많은 자료, 많은 판본을 이용하여 문헌연구를 행하는 고증학이라는 학문이 원래 많은 서적을 참고할 수없을 때에는 성립될 수 없는 학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청대의 고증학은 명말의 미디어 혁명, 특히 총서의 간행에 의하여 자극을 받았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32)

장정의 변화 외에, 명말 서적 형태의 변화 가운데 하나가 소위 명조체라는 자체... 완성이다. 다케무라 신이치...의 <명조체의 역사...>에 의하면, 명조체가 탄생한 것은 정덕...으로부터 가정...에 걸친 시기라고 한다. 기하학적인,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몰개성적인 명조체가 판목을 새기는 작업의 신속화,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분업화의 필요성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이다. (52)

그 밖에 도상이 필요한 경우는 명소나 유적일 것이다. 세계 도처에는 재미있는 곳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 누구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미리 관광 명소를 선전하여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
화본이 많이 만들어진 명말, 이와 같은 명소와 유적을 테마로 한 화본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책이 나온 배경에는 당시 실제로 명소 유적을 돌아다니는 관광 여행객이 증가하여, 가이드북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다는 사정도 존재한다. (74)

당대, 송대에 비하여 명대에는 시인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가령 당대의 이백이나 두보에 필적할만한 명대의 시인을 열거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시인들 개인의 성과를 생각한다면, 명대의 시인은 분명히 당대, 혹은 송대에 비하여 뒤떨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단에는 그때까지는 시를 짓지 않았을 것 같은 서민들이 시를 짓게 된 것도 분명하며, 이점에 있어서는 진보하였다고 할 수 있다. 모범을 충실히 본뜨면 좋을[은] 시를 쓸 수 있다는 고문사파의 주장은 일종의 문학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같은 매뉴얼이 요구된 배경에는 당시 나타난 수많은 일요시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당연히 자신이 시문을 지을 때 모범이 되어줄 당시... 선집...을 필요로 하였다. (81)

그러면 도대체 왜 명말에 이와 같은 대작 백화소설들이 산더미처럼 나왔을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나, 무엇보다도 수요가 있어서, 모두들 사서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러한 소설들을 사서 읽은 것은 누구이었을까?
...
"옛날에는 유..., 석..., 도...의 삼교...가 있었는데, 명 이래 또 하나가 늘었다. 즉 소설이다. 소설책은 아직껏 한 번도 자신을 가르침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사농공상... 모두가 이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글자를 모르는 아동과 부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귀로 들어서 마치 읽은 것과 같다. 이 가르침은 유, 석, 도보다 더욱 널리 퍼져있다." (97)

명말에 간행되었든 백화소설 작품에서, 비평과 삽화의 문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명말에 간행된 대부분 백화소설 작품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본문에 대한 비평이 가해져 있다. 비평은 독자에 대한 안내의 의미를 지니는데, 비평 자체가 독서의 대상이 되어서 그것을 즐기려고 책을 구입하는 독자가 있었다. 명말 간행된 소설을 보면, 당인..., 이탁오..., 진계유..., 탕현조..., 풍몽룡..., 김성탄... 등 유명인의 비평이 달려있는 것을 자랑거리로 내건 작품이 적지 않다. (101)

그리하여 그날 무도두...가 뒤돌아서 그 사람을 보더니 덤벼들 듯한 기세로 인사하였습니다. [김성탄 비평. 기묘하다!] 그 사람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무송과 피를 나눈 형 무대랑...이었습니다. 무송은 인사를 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년 남짓 형님을 뵙지 못했습니다만, 어인 일로 이런 곳에 계십니까?" [김성탄 비평. 이 말에 대해서는 바로 뒤의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말속에서, (무대가) 대답하지 않는 듯 대답하고 있다.] 무대가 말합니다. "동생, 동생이 없어지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왜 편지 한 장 보내주지 않았어? 나는 동생을 원망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네." [김성탄 비평. 이 여섯 글자...는 <서상기...>의 전체 내용을 총괄하고 있다. 무대의 입에서 이렇게 묘한 말이 나올 줄이야. 그를 생각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면, 어떻게 원망할 시간이 있었을까? [뭔 소리??] (이것은) 무대를 위한 하나의 전구...가 되어 준다.] (110)

또한 명말의 소설 삽화는 대부분 이야기 중의 명장면을 그리는 것에 비하여, 청대 소설 삽화는 장면보다는 등장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만큼 간단하며 품을 덜 들인 것이 도어 있다. 이것도 청대 출판문화 쇠퇴를 나타내주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4)

<녹모란>은 연극을 통한 인신공격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상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각본이 출판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격에는 때를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로 희곡이 만들어지고, 바로 인쇄되어 유통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 경우에는 실제로 공격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만큼의 스피드로 각본이 출판되고 있다.
......
책을 중심으로 하는 각종 인쇄물이 생겨나서, 정보가 보다 넓게 보다 빠르게 전달됨과 동시에 인쇄물이 세론 형성 등을 위하여 사용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혹은 지금부터 일어나려고 하는 일에 관한 정보가 인쇄물이라는 매체에 의하여 시간을 두지 않고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명말 당시의 정보전달은 오늘날의 그것과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사회가 그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는 ‘명말의 미디어 혁명‘이다.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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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칭 - 숨은 시장을 발굴하는 강력한 힘
앨빈 E. 로스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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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증권거래소… 같은 큰 시장부터 동네 농산물 직매장 같은 작은 규모의 시장에 이르기까지 시장은 이렇게 일정한 규칙에 따라 움직인다. 시장이 좀 더 원활하게 움직이도록 이들 규칙을 계속 조정해 나가는 작업이 바로 ‘시장 설계’다. ‘설계’를 뜻하는 영어 단어 ‘design’은 동사이면서 동시에 명사다. 아무리 느리게 진화하는 시장이라도 나름대로 하나의 설계를 갖고 있다. 비록 의식적으로 설계한 사람이 없더라도 말이다. (24)

매칭 프로세스를 연구하다 보면, 참가자들이 ‘시스템과 작전 싸움’을 벌이는 방법을 알아낼 때가 종종 있다. 설계가 잘 된 매칭 프로세스는 참가자들이 전략적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사실을 고려한다. 그래서 시스템과 작전 싸움을 벌일 필요성을 줄여 참가자들이 자신의 진정한 요구와 욕구를 확인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도 시장 설계자들이 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참가자들이 시스템과 작전 싸움을 벌이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해도, 시장 설계자들은 시장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유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안전하고 단순한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이야말로 좋은 시장이다. (30)

시장 설계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 최근 몇 해 동안 행동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이 무조건 이득만 취하려 들거나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들의 주장은 기존의 경제적 가설을 뒤집었다. 시장 설계자들이 이들의 성과를 간과한다면, 좋은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지정 신장 기증자들만 봐도 그렇다. 기존의 전통적 경제 모델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자기 위주로만 행동한다면, 이타적인 기증자는 애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동시적 체인에 있는 기증자들은 또 어떤가? 사람들이 자신과 자기 가족과 친구에게만 관심을 갖는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신장을 기증받은 후에는 약속을 어기고 기증 계획을 철회하는 일이 잦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92)

이 모든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창업자들은 다음 사항들을 고려해야 한다.
* 어떻게 하면 구매자와 판매자를 많이 끌여들여 시장을 두텁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 그 결과 나타날 수 있는 혼잡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즉 어떻게 하면 시장이 두터워졌을 때도 시장의 속도를 빠르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 어떻게 하면 시장을 안전하고 믿을 만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176)

이런 시각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표를 열심히 추구하는 자유롭고 경쟁적인 시장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곧 안정적인 결과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차단 쌍이 있다면, 즉 시스템 밖에서 서로 매칭되기를 바라는 회사와 근로자가 하나라도 있다면, 어떻게 그들을 막는단 말인가. 그들을 막을 방법이 없다면, 그 시장은 불안한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앞에서 그런 쌍이 만나는 것을 막는 요소가 많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시장이 너무 얇고 너무 혼잡하고 너무 위험하여 관리하기 어려운 경우가 그렇다.
…… 이런 불안한 알고리즘을 택한 영국 정보 센터는 결국 실패했고, 이해 당사자인 지원자와 병원(차단 쌍)이 시스템을 피할 방법을 알아낸 뒤 정보 센터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같은 영국의 정보 센터라도 안정된 결과를 낳은 곳은 매칭에 성공했고, 그들의 프로그램은 계속 활용되었다. (234)

이런 맥락에서 내게 던져진 질문 한 가지는 다음과 같았다.
"그동안 필요한 의료진을 다 채우지 못했던 시골 병원에 ‘매치’를 조정해 레지던트를 더 많이 보낼 방법을 찾을 수 있는가?"
……
어떤 병원이 안정적인 결과에서 빈자리를 다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 병원은 어떤 안정적 결과에서도 그 정도의 의사들 밖에 확보할 수 없다. (249)

관심과 바람직성, 이 두 종료의 정보가 모두 안전하게 전달될 때, 시장은 원활하게 제 기능을 발휘한다. (293)

차점 가격 경매에서는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적어 내는 것이 안전하지만, 파는 사람 입장에서도 이것이 손해라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최고가 봉인 입찰 경매에서는 입찰자가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적어 내는 것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경매에 이길 경우 입찰가를 전부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이득을 얻으려면 진정한 가치에 따라 매긴 금액보다 더 적은 금액을 적어 내야 한다. 결국 최고 가격 경매에서 파는 사람은 최고 입찰가를 받지만, 그 가격은 최고 가격 입찰자의 진정한 가치에 못 미치는 금액이다. 이에 비해, 차점 가격 경매에서 파는 사람은 차점 입찰가만 받지만, 그때 나오는 입찰자들은 그 물품의 진정한 가치보다 더 높은 금액을 적어낸다. 즉, 경매 방식이 바뀌면, 입찰가도 바뀐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상쇄 효과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301)

한 가지 우려는 ‘대상화…’다. 대상화는 어떤 사물(신장)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사고파는 행위가 그것들을 그것이 속해서는 안 되는 비인격적 ‘대상’으로 전락시킬 것이라는 두려움이다. 즉, 그런 행위는 그 사물이 가지는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잃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 다른 두려움은 ‘강제성…’이다. 상당한 액수의 금전적 지급은 사실상 거부하기 힘든 제의로 일종의 강제적인 회유일 뿐이어서, 보호받아 마땅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에 노출시키게 된다. (334)

그렇다고는 해도 시장을 금지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장을 통제하는 한 가지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법을 제정해도 시장을 막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무턱대고 시장을 불법화하면, 합법적인 시장만 사라진다. 우리가 금지시키려는 시장, 즉 혐오 시장은 사람들이 아무리 반대해도 기어코 참가하려는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그런 시장이다. 서로 거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다. 시장을 오랜 역사를 지난 채 침투력이 강한 인간의 활동 무대로 만든 바로 그런 세력은 합법적인 시장을 막는 곳에서 암시장의 모습으로 고개를 튼다. (347)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자들의 태도는 식물을 가꾸고 식물의 성장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내기 위해 식물의 구조와 그 기능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알아야 하는 정원사의 태도와 같다." (367)

이처럼 장터를 통한 시장 설계는 농업보다 역사 깊은 태고의 인간 활동이다. 그러나 그 역사가 1만 년도 더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도 시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경제학자들은 언어를 생각하는 방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보듯 시장을 연구했다. 그래서인지 시장은 아직 우리의 손아귀 안에 있는 것 같지 않다. (372)
……
하지만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설계를 다시 하면 된다. 아예 새로운 시장을 설계할 수도 있다. 시장 설계는 시장을 인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여 연구하고 조심스레 감시할 수 있는 기회다.
시장은 자연 현상이 아닌 인간의 발명품이다. 시장 설계는 인간이 만든 가장 유구하고 본질적인 발명품을 유지하고 개선할 기회를 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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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칭 - 숨은 시장을 발굴하는 강력한 힘
앨빈 E. 로스 지음, 이경남 옮김 / 알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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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유예 알고리즘은 줄리엣이 로미오 찍고 로미오도 줄리엣 찍었는데 둘이 매칭 안 되는 참사 백프로 예방하니 둘이 시장 밖에서 결탁하는 ‘시장 실패‘를 없애는 시스템,이라는 전반부는 조끔 지루함. 후반부의 하이예크식 사회 엔지니어설은 흥미로움. Not 방임/통제, but 적극&지속적 시장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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