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목전쟁 - 영국은 왜 중국 홍차를 훔쳤나
세라 로즈 지음, 이재황 옮김 / 산처럼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농작물들이 동양 무역의 대차대조표를 풍성하게 하자 세계 질서에서 그것들이 매우 중요해졌고, 이에 따라 농작물을 연구하던 사람들(과거 단순한 원예사로 보통 생각됐던 사람들이다)은 식물학자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 무렵 식물학자들은 더 이상 모자 쓰고 징 박은 장화 신고 알뿌리와 꽃과 초목을 보살피는 허드레꾼이 아니라, 어깨에 힘주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었다. ... 식물군을 옮겨 심는 새로운 기술 또한 보다 정교해져서, 전문적인 식물 채집자들이 더욱 이국적인 표본들을 수집해 보낼 수 있게 됐다.
... 인도에서 성공적으로 차를 생산하려면 영국은 가장 좋은 차나무와 건강한 표본과 수천 톨의 씨앗, 뛰어난 중국차 생산자들의 수백 년 묵은 지식을 입수해야 했다. 이 임무는 식물 채집자와 원예사, 도둑과 스파이를 겸해야 했다. (13)

그렇기는 하지만 포천은 야망이 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재능은 있지만 시원찮은 자리도 없었던 19세기 스코틀랜드나 잉글랜드의 장남이 아닌 자식들로서는 외지로 나가서 기회를 찾아보는 것이 엄격한 빅토리아 시대 사회 위계에서 신분 산승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국의 미개발 자원을 개발하면 품위 있는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무궁무진한 기회가 있었다. (16)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는 이국적인 자연물, 먼 나라에서 선교사 관리 상인들이 수십 년 동안 수집해 온 곤충 화석 초목들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공업화가 진척되고 지주들이 농지에 울타리를 쳐서... 시골 농민들이 농토를 떠나 도시로 이주하게 되자 영국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연을 갈망하게 됐고, 영국의 가정에 초목을 공급하는 새로운 시장이 떠올랐다. 화분에 담긴 각양각색의 양치식물에 온 국민이 마음을 빼앗겼고, 곧 어디서나 그런 것들을 볼 수 있게 됐다. 장식용 도자기와 벽지와 옷감에도 그러졌고, 부자의 온실과 가난뱅이의 창턱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양치식물은 기르고 번식시키기 쉬운데다 매우 강인해 옮겨심기에도 좋았는데, 자연스럽고 일부러 가꾸지 않은 듯한 모습을 지녀 전 국민의 자연 취향을 드러내는 데 제격이었다. (18)

초목 교환은 대영제국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대영제국은 당시 서인도제도 같은 오래된 식민지와 인도아대륙의 새로이 병합한 식민지, 그리고 대양들 사이에 산재하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포천과 같은 식물학자들은 해외 영토에서 새로 발견된 초목들을 어떻게 서양의 시장을 위해 개발할 것이며, 선택과 교배를 통해 어떻게 환금작물을 개선할 것인지, 값싼 식민지 노동력을 이용해 최대의 수익을 올리려면 특정 작물을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재배해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해 초목을 어떻게 가공할지에 대한 방안을 만들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초목 채집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고 날카로운 눈을 지닌 사람들로서, 발견의 매력에 빠져 고향과 가족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공업화 시대 초창기에 식물학 연구는 오늘날의 산업 연구 실험실과 맞먹는 것이었다. 식물학 제국주의는 식민지 당국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한 방법이었고, 초목 채집자들은 제국의 연구 개발 인력이 됐다. (51)

공업혁명과 같이 험난했던 시기에 영국에서 온 국민이 정원 가꾸기에 집착했던 것은 아마도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과학기술이 일상생활에 빠른 대응을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요소들을 가져다주게 되자 온 나라에 걸쳐 인내와 시간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약간의 옷감이나 담요 또는 침구 몇 가지를 만들려면 한때는 불을 밝히고 밤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했지만, 이제는 리버풀과 맨체스터의 공장에서 매일 엄청나게 많은 직물이 쏟아져 나왔다. 국토 횡단 여행은 한 때는 몇 번씩 마차를 갈아타는 지구력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짧게 기차를 한 번 타는 일이 됐다. 촛불은 가스 불빛에 밀려났고, 풍력은 증기에 밀려났다. ...날씨를 둘러싼 우여곡절은 옛날 일이 됐고, 자연적인 과정이 시야에서 사라지면서 그것들은 맹목적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공업화한 빅토리아 시대의 새로운 중산계급은 이렇게 자연과 멀어지게 된 것을 후회하고 그 손실을 슬퍼하며, 곧 자연을 모사한 것에 대해 웃돈을 지불하고자 했다. (55)

중국 정부가 해외 이주를 금지하고는 있지만, 청 제국 말기에 중국인 노동자들을 해외로 보내는 사업이 생겨나 확대되고 번창했다. 세계 저임금 노동력 교환 시장에서 19세기 후반 들어 아프리카인 노예무역이 침체하면서 그 대신 중국인 노동자 무역이 늘어났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영국 식민지에서는 노동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영국은 폐지의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고, 이는 영국 무역회사의 대차대조표에 그대로 드러났다. 간단히 말해서 생산 차질을 매우려면 일손이 필요했던 것이다. 19세기 중엽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돼 수많은 중국인을 꾀어들였다. 그들은 중국을 휩쓴 기아와 홍수로 더이상 자기 땅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미국의 골드러시가 시작되고 처음 몇 년 동안에 2만 5천 명가량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게 된다. 1870년 무렵까지 200만 명의 중국인이 세계 각처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아프리카인 노예와 중국인 노동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중국인들이 계약에 따라 일한다는 사실이었다. (243)

책임을 맡은 영국인들이 휘하 인도인 세포이들에 대해 무신경함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이 윤활제를 선택한 것이야말로 엄청난 성공이었다. 돼지고기는 북부 인도의 이술람교도들에게 하람... 즉 금기...였다. 반면에 상위 카스트의 힌두교들은 아무도 죽은 소를 만지려하지 않고, 더구나 그것을 입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P53 탄약포의 동물 지방은 여러 종교를 믿는 인도인들을 모두 불결하고 타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그런 것을 사용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
병사들이 새 무기의 탄약포를 만지게 되면서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엔필드 소총은 인도 군대를 불결하게 만들어 그들의 카스트 지위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이로써 그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려는 회사의 거대한 계획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영국이 수백 년 동안 인도를 지배해 온 마당에 이는 성난 인도 군대에게 너무도 그럴 듯한 음모론이었다. (277)

차는 설탕 커피 담배 아편과 마찬가지로 처음으로 대량 생산되고 대량 유통된 국제적 상품이었다. 차가 직접 공업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겠지만, 영국에서 차의 인기가 높아가고 인도산 차의 출현으로 점점 더 쉽게 차를 마실 수 있게 되면서 영국의 공업화도 더욱 가속화됐다. (283)
......
차는 마찬가지로 영국의 자본과 금융 체계에 혁명을 일으켰고, 동아시아 무역망의 급속한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영국 식민지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대영제국이 확장해 버마 실론 동아프리카 등 차가 자랄 수 있는 지역이 포함되면서 이전에는 황폐한 밀림에 가깝다고 생각됐던 곳에서 경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차는 또한 카리브해와 남태평양 같은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노력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 지역은 영국의 설탕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동양 무역 덕분에 영국와 파운드화는 200년 가까이 세계를 호령했다. 그것이 없었다면 인구가 희박한 섬 농업국으로서는 이루기 어려운 위업이었다. (2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고 단단한 한반도 미시사연구. 드라이한 서술이지만 신분상승 위한 노비들 꾸준한 노력에 마음 짠해짐. 이 책 보니 본관과 족보란 정말로 믿을 게 못되는 사물. 진실이 있다면, 그저 버젓한 가문 출신으로 가슴 펴고 살고 싶다는 그 맘이 진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과 같이 읽으면 굿.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 - 어느 노비 가계 2백년의 기록
권내현 지음 / 역사비평사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비가 평민으로 해방되었어도 자신의 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할 때는 ‘부지‘나 그 비슷한 용어로 호적에 기재되었다. 때로는 호적을 만들었던 이들이 다소 장난스럽게 이름이 들어갈 자리에 이런 용어를 채워넣기도 했다. 1759년 김재중이란 인물의 부인인 고조이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나머지 조상 가운데 조부는 ‘안지...‘, 증조부는 ‘하지...‘, 외조부는 ‘전부지...‘였다. ‘안지‘나 ‘하지‘는 어찌 알겠느냐는 의미다. 모른다는 표현을 ‘안지‘나 ‘하지‘로 바꾸어 쓴 것이다. 외조부는 전주 전씨였으나 역시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지‘라고 했다. (25)

하지만 차별에 대한 서얼들의 집단적인 도전과 저항으로 양반 관료들은 서얼들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했다. 어떤 사회든 저항 없이 자유가 확대될 수는 없는 법이다. 이와 더불어 영조나 정조처럼 서얼 허통에 관심을 보인 군주의 노력으로, 강고한 신분 제도는 서서히 허물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지역 내에서 혹은 한 가문 내에서 서얼에 대한 차별이라는 오랜 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50)

네 노비의 아버지인 막동은 가계를 계승하는 이에게 주는 숭중... 명목의 노비였다. 그의 첫째 아이는 김광려 형제 가운데 장남, 둘째는 장녀, 셋째는 차남, 넷째는 장녀가 각각 상속받았다. 특히 넷째는 막동의 부인 배 속에 있어 아직 출산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광려 남매는 철저하게 균분상속을 실현하고 상속받은 노비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쉽게 하기 위해 이처럼 어린아이들이 포함된 노비 가족을 해체시켰던 것이다.
물론 아직 막동의 아이들이 어리고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있어 이들 가족이 바로 흩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가족들이 상당 기간 같이 지내면서 각자의 주인에게 신공만 바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주인들의 필요에 따라 이들은 얼마든지 이별을 맞을 수 있었다. 노비들이 친족 간에 모여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는 딸을 상속에서 점차 배제시키고 아들들이 같은 마을에 모여 살게 되면서, 그들의 노비들도 일상에서 친 인척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났다. (57)

반면 수봉의 이종형...이었던 사노 실동은 양반 전시국의 사비와 결혼을 했다. 수봉과 마찬가지로 남의 집 비와 결혼을 한 것이다. 이때는 앞서 말했듯이 자녀들이 그들 어머니의 주인 소유가 되어 심정량에게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을 재산 일부를 심정량에게 바쳐 손해를 보상해주어야 했다.
......
"아침 일찍 뜰에서 가지, 상이, 상실, 석지 등 4명의 노가 남의 집 비를 처로 얻어 자식을 낳고 기른 죄로 벌을 주었다. 노 석지는 5명의 아들을 낳았다고 하여 그의 재산을 바치도록 했다." (58)

1678년은 물론이고 1717년에도 도산면에 거주했던 김해 김씨 가운데 양반이나 중인은 단 1호도 없었다. 1717년에는 9명의 주호가 노비였고, 37명의 평민 가운데 원래 노비였던 이들도 여러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이 지역에서 인구수가 가장 많은 김해 김씨 구성원들이 모두 하천민 출신이었다는 점, 이로 인해 노비들이 이 성관을 선호했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노비 수봉 역시 흔하면서도 신분적 장벽이 높지 않았던 김해 김씨를 자신의 성관으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김해 김씨 전체가 다 하천민 출신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수봉이 살았던 시기 도산면의 김해 김씨는 양반 성씨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이 지역의 양반 성관이었던 남원 양씨도 다른 곳에서는 얼마든지 노비가 선호하는 성관이 될 수 있었단 것이다. 수봉은 그의 거주 지역에서 가장 흔했던 김해 김씨라는 성관을 얻어 평민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외형적 조건을 구비했다. (94)

등광은 수봉의 후손들이 정착한 주요 지역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곳이었다. 마을에서 마주치는 사람은 대부분 그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었다. 평민들 중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선대가 노비로 연결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늘 허리를 굽히고 살아야 하는 대상인 양만들을 일상적으로 마주칠 일은 적었다. ......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수봉의 여러 후손들 가운데 호적에 가장 오랫동안 꾸준히 등장하고 사회적 성장도 활발했던 일파가 바로 등광에 자리 잡은 이들이었다. 물론 양반들의 시선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일은 그들의 몫이었다. 당시에는 미곡이나 상품성이 있는 작물의 재배와 거래가 이전 시기보다 활발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평민들도 재산을 늘려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호적에 꾸준히 등장하며서 직역을 상승시켜 나간 이들은 바로 이러한 부류에 해당했다. (104)

이때 박종이 처의 외조부는 김수봉이 아닌 정수봉으로 기재되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김해 김씨에서 진주 정씨로 바뀌었으므로 외조부도 정수봉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수봉이라는 동일 인물이 한 가계에서는 김수봉으로, 또 다른 가계에서는 정수봉으로 기재되었다. 수봉이 김해 김씨가 되면서 새로운 가계가 탄생했지만, 그가 다시 정수봉이 되면서 또 다른 가계가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1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빔밥의 조리시간은 무려 50분!

때문에 짝꿍으로 나오는 메뉴는 무생채나 도라지생채로 정해져 있단다.

 

조리사에서 50분 짜리 메뉴는 딱 두 가지: 비빔밥과 어.선.!

과연 내가 어선을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심히 우려스럽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오늘은 비빔밥으로 풍성한 한끼를 맛봅시다.

 

어디에서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리나 궁금했는데,

직접 해보니 일단 밥을 지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음.

밥을 올려 놓고 밥 끓는 동안 남은 재료 싹 다듬어서 밥 내리면 바로 다음 불을 쓸 수 있도록 해야함.

 

냄비밥을 하면 난 꼭 밑바닥에 눌더라.

오늘도 역시.

어디서 자꾸 걸리는 것인지 연구가 필요해.

 

밥 하는데 한 12분 시간 쓰는 것 빼고는 별달리 어려운 것은 없었다.

도라지는 소금물에 담그고, 고기는 포와 채를 얇게 썰고.

 

아, 약고추장 만들기에도 시간이 소요된다. 고기 다지는 시간과 팬에서 소스 볶는 시간.

설탕과 물 넣으라기에 매실청을 넣었다.

 

마지막 정성의 정점은 다시마 튀겨서 부숴서 뿌리기. 

다시마 튀각을 비빔밥에 뿌려 먹을 생각은 한 번도 못 했네.

 

이어서 도라지생채도 만들었다. 

도라지 껍질을 까고 편 썰어 0.3cm로 자르는 지루한 작업을 견뎌내는가를 보는 메뉴.  

하기 싫은데 간신히 도라지 두 개를 까서 얼추 음식 모양을 만들어냄. 딱 한입거리.

두고 먹는 밑반찬 양으로 만들려면 죄송하지만 피도라지는 바이바이, 깐도라지 웰컴.

 

달걀국이나 부드러운 된장국, 아니면 어묵국물이 옆에서 받쳐주면 딱 좋겠으나

배가 고픈 관계로 국은 생략하고 바로 비빔밥 섭취.

 

으음, 약고추장이 의외로 맛있다! 다시마도 아삭거리고.

이런 비빔밥도 괜찮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 효종.현종실록, 개정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효종과 현종은 그나마 정상적이고 균형 잡힌 두뇌&인성 가졌음. 특히 효종의 컴플렉스와 무관한 현종은 지리한 병세에도 불구 적극&효율적 행정 펼치려 노력했고, 최종 결재자로서 아랫 사람 보호하려 무릎 꿇을 줄도 알고. 콘텐츠 사실상 제로이면서도 두 임금이 일생을 소비하게 만든 산당의 마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