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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으로 읽는 중국 근대 경제사 1800-1950
필립 리처드슨 지음, 강진아.구범진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메모
- p.45 지도의 설명에 오류가 있음. 아마도 2번이 동남연안, 3번이 윈구이가 맞을 것임.
또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의 뜻을 청두...의 한 가정에 표하고 싶다. 이 가정을 통해서 나는 복잡하고 애매하며 모순으로 가득한 중국과 중국의 역사를 내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어느 무엇보다도, 그냥 그 자리에 있어준 것만으로 중국에게 감사하고 싶다. (12)
서구적인 시각에서는 거의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비교의 맥락에서 그 해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왜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중국에서는 왜 일어나지 못했는가, 그 이후에라도 중국은 왜 공업화하는 서양을 따라잡지 못했는가? 이 서양 중심적인 접근법에 깔린 가정 가운데 하나는, 중국에는 서양에서 산업혁명을 낳았다고 여겨지는 요소가 없었다는 식으로 중국의 경험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경험과 다르다는 것이 곧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국이 서양과 단지 피상적으로 달랐다거나 경험의 정도에서 달랐던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측면에서 달랐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저변에 깔린 철학이 달랐다. 서양 사회가 명확한 법률적 규범을 운영하고 그 규범을 통해 지배된 것과 대조적으로, 중국은 도덕적 규범에 의존하였다. (23)
그런 결과를 향한 변화의 과정은 전통적 요소와 새로 등장하기 시작한 근대적 요소 사이의 상호 작용을 특징으로 하는 연속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 상호 작용에서 전통적 요소가 반드시 변화를 가로막은 것은 아니다. 근대적 요소가 지배적이 되기 위해선 전통적 요소를 반드시 버릴 필요도 없었다. 오히려 전통적 요소가 변화 과정의 정확하 양태를 결정하고 촉진하였다. 중국에서 이러한 변화는 세 종류의 요소로 구성되었다. 즉 서양을 그대로 받아들인 요소, 서양의 기술이나 관습 또는 사상을 중국에 적용시킨 요소, 그리고 내부적 문제에 대한 완전히 중국적인 대응으로 나타났지만 형태만은 ‘근대적‘인 요소가 그것이다. (25)
세계 인구의 4분의 2이 세계 경지의 7퍼센트도 안 되는 땅에서 생활하고 일하고 먹고 살았던 경제 경험은, 그 자체로 충분히 연구 대상이 될 가치가 있다. 그 경험의 분석은 이 연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보다 광범위한 많은 이슈와 관련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20세기의 중요한 정치적 분수령의 하나였던 1949년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세력으로부터 중국의 ‘해방‘을 이해하는 데에도 분명하고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공산당의 집권을 가능하게 한 농민혁명은 극도의 빈곤에 내몰리고 있던 봉건적이고 정체적인 경제의 산물인가? 아니면 이 혁명은 저변의 강력한 역동성을 보여주었으며 이미 성장과 발전의 역량을 과시하 상업화한 농촌 경제의 산물인가? 그 이후에 진행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근대적인 경제 성장과 산업화를 개시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1950년대에 채택한 집단주의적 접근은 성공적인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타도하고 파괴한 것인가? (27)
중국 경제사에 대한 다양한 분석적 연구를 연구사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모든 시각이 경제 변화 과정의 복잡하고 다양한 경험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시각도 다른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모든 대답을 제공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실로 그 복잡함을 다 포괄하려 한다면 모든 시각이 필요할지도 모르다. 일반화외에는 대안이 없을지라도 중국의 경험에 대한 거의 모든 일반화는 오도의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46)
1950년대 이전 중국 경제의 추세에 대해 확정적으로 정량화하는 것은 아직은 가능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불가능할지 모른다. 총량 규모에서는 성장이 이루어졌고, 전통적 형태의 생산에서 근대적 형태의 생산으로, 농업에서 공업으로 구조적인 변화가 진행 중이었으며, 1인당 평균소득과 생산에서 하락은 없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1인당 평균소득이 실질적으로 지속적인 증가를 보였다는 주장, 1인당 농업 생산이 분명히 늘어났다는 주장, 그리고 투자 비율이 현저하게 상승하였다는 주장—간단히 말해서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그 전체적인 논지에서는 논란이 되었거나 논쟁할 말한 가능성으로 머물고 있다. 그 상세한 내용은 아직 입증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86)
중국 경제에 대한 대와무역과 외국인 투자의 순효과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복잡한 일련의 상호 작용의 산물이었던 것만은 틀림 없다. 무역과 투자는 중국 국내 경제를 자극하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했으며, 중국 경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지위를 훼손하기도 하고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외국의 영향과 중국의 경제적 근대화 간의 관계를 전적으로 ‘충격-반응’의 견지에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처음부터 강조해 둘 필요가 있다. 원래부터 무기력하고 정체되어 있던 중국이 그런 중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역동적인 서양을 만나 그 충격에 단순하게 반응—내지는 반응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대외무역과 외국인 투자는 중국에 원래 있던 진화하는 상업 시스템을 통해 흘러들었으며 그 일부가 되었다. (89)
마찬가지로 무역과 투자가 일방저으로 중국에게 해로웠다는 부정적인 관점도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중국은 심각한 자원의 순유출을 경험했고, 교역 조건의 장기적 악화로 고통 받았다. 막 싹트기 시작한 중국의 근대적 산업이 외국의 경쟁자들에게 억압 받았고, 중국의 수공업 부문이 수입에 의해 파괴되었다. 중국은 농민들이 환금작물 때문에 곡물의 자급을 희생하면서 변덕스러운 국제 시장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는 데 무기력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모두 흔들리게 되었다. 비록 무역과 투자가 중국의 고도 균형의 함정을 제거하는 역사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개항장뿐 아니라 내지 농촌에서도 생산 증가에 긍정적이고 의미심장한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이 점차 신뢰를 얻고 있다. 이런 분석은 대외무역과 외국인 투자의 규모와 구조 및 그 영향이 직간접적으로 내지로 퍼져 들어가는 매커니즘에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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