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기행 학고재 산문선 5
시바 료타로 / 학고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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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쓰시마라고 하는 이 큰 섬에서 쌀이 생산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이, 고대 이래의 한일관계에 중대한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또한 그 사실은 부산이라고 하는 한국 제일의 무역항을 만드는 데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19)

도쿠가와 시대의 왜관 건물은 도쿠가와 4대 장군 이에쓰나…에 의해 엔포… 6년…에 준공되었다. 물론 무로마치 시대와는 달리 대… 조선 외교를 막부로부터 청부 맡았던 쓰시마 번이 서울과 에도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서 세운 것으로 당당한 성곽이었다. … 일본식으로 해자…를 두르고 석축을 쌓았으며, 넓이는 450칸에 250칸, 그 부근에 쓰시마인들을 살게 하여 번사와 상인들이 무려 6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요컨대 근세 일본의 유일한 제외 공관이었다. 다만 조선 정부에서는 엄밀한 거주 제한을 시행하였고, 왜인들은 왜관 부근의 일정한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왜관은 조선측에서 보면 ‘왜인들에게 베푸는 일’쯤 될 것이고, 쓰시마 번의 처지에서 보면, 마치 류큐…가 중국과의 사이에서 양속… 상태였던 것같이 외교상 양속 성격을 가졌고, 에도와 서울을 상대하는 데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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