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는 반대로 더 의식적으로, 더 성숙하게 우리의 삶을 단단히 부여잡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 ... 마치, 알프스를 오르는 산악인의 또는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병기고 안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리라. 살 의지를 상실한 도망자로서가 아니라, 굳은 의지를 품고 친구와 조력자들에게 나아가듯이 말이다. 만약에 정말 이럴 수만 있다면, 지금 읽는 것의 한 10분의 1가량만 읽는다고 해도, 우리 모두는 열 배는 더 행복하고 풍족해지리라. (12)
해마다 수천수만의 어린이들이 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글자를 써보고 한 자 한 자 글을 깨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의 아이들은 읽기능력을 그저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반면, 어떤 아이들은 한 해 두 해를 넘기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록 학교에서 배운 그 마법의 열쇠를 사용하며 새록새록 매료되고 탄복한다. 오늘날 읽기는 누구나 다 배우지만, 얼마나 강력한 보물을 손에 넣었는지를 진정으로 깨닫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난생처음 글을 배워 혼자 힘으로 짧은 시나 격언을 읽어내고 또 동화와 이야기책을 읽게 된 아이는 스스로 얼마나 대견해 하는가. 그런데 소명을 받지 못한 대개의 사람들은 이렇게 배운 읽기능력을 그저 신문기사를 읽는 데나 활용할 뿐이다. 하지만 소수만은 철자와 단어의 그 특별한 경이에 여전히 매료당한 채... 살아간다. 바로 이들이 진정한 독자가 된다. (21)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인류를 존중한다면서 자기가 부리는 하인은 괴롭히는 것, 조국이나 교회나 당은 신성하게 받들면서 그날그날 자기 할 일은 엉터리로 대충 해치우는 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된다. 이를 막는 교육적 방책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신념이나 세계관이나 애국심 같은 이른바 거창하고 신성한 모든 것을 일단 제쳐두고, 대신 사소한 일, 당장에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다. (41)
어휘를 달리 고른다든지 문장의 구조나 길이가 달라질 수는 있다. 또 팔레트에 색깔들을 다르게 정렬해 사용할 수도 있고, 단단한 연필을 쓰거나 부드러운 연필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언제나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 오래된 것, 거듭 얘기되고 거듭 시도되던 것, 영원한 그것이다. 관심을 모으는 각종 새로운 면모들, 언어와 예술의 흥미로운 변혁들, 예술가들이 보여주는 온갖 매혹적인 유희들 속에서, 이들이 이토록 애쓰며 말하고자 하는 것, 말할 가치가 있으되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 그것은 영원토록 하나이리라. (70)
예술가의 허영심 때문에 정곡을 꿰뚫는 진정한 비평보다 멍청한 아첨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든 존재가 사랑을 구하듯 작가도 사랑을 구하며, 이해받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비평가를 반기게 마련이다. 이는 그에게서 뭔가 자기 예술에 보탬이 될 만한 걸 배울까 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해서 배워지는 일도 아니다. 다만 자신의 행위가 이해받지 못한 채... 무감각의 비현실 속을 부유하는 대신, 자신과 자기의 작업을 자기 나라와 문화의 전반적인 평가 속에서, 또 재능과 성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공부요 수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74)
당연히 언젠가는 그칠 날이 올 것이다. '병적이다'라는 단어가 지금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말이다. 질병과 건강의 영역에서도 상대성이 있음을, 오늘의 병이 내일의 건강이 될 수도 있음을, 건강한 상태라는 게 항상 확고부동한 건강의 징표일 수는 없음을 인식할 때가 올 것이다. 고귀한 정신과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을 타고난, 일체의 평가를 넘어서는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에게는 선과 악 그리고 미와 추에 관한 현실의 관습들에 둘러싸여 산다는 것이 어쩌면 갑갑한, 아니 끔찍한 억압일 수 있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리고 인문학을 발전시키겠다면 인문학 본래의 방법과 체계를 가지고 추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것이다. (90)
그러나 이러한 분노와 끈질긴 노여움이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한다. 내면을 분출시키거나 정화해주지도, 내적 불안과 불안을 진정시키지도 못한다. 반면에 예술가들, 세간에서 쏟아내는 비난 못지않게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이들은 자신의 분노와 슬픔과 경멸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궁리하고 찾아내고 또 익히기에 여념이 없다. 욕을 퍼붓는 것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욕설을 입밖에 내는 쪽이 손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에는 이상으로 삼을 대상이 자신뿐이기에,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며 자기 안의 본성이 심어놓은 대로 행동하고 말하는 그것 하나밖에는 다른 어떤 뜻도 소원도 없는 예술가이기에 그들은 세간에 대한 자신의 적의를 최대한 개성적으로, 아름답게, 설득력 있게 가다듬어 내놓는다. 자신의 분노를 고스란히 독설로 내뱉는 대신 체에 거르고 고르고 매만지고 다듬는다. 그리하여 불쾌함과 혐오감을 유쾌하고 미적인 것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 반어법과 희화화를 찾아내는 것이다. (101)
나는 두 팔 벌려 그들을 맞이하고 수긍하였으며, 내가 하는 일이 심히 의심스러울지언정 결코 그만두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새록새록 깨달았다. 다시금 깨닫노니, 나는 행복한 이들의 모든 행복, 스포츠맨들의 그 모든 신기록과 건강, 돈 많은 이들의 모든 재물, 권투선수들의 모든 명성을 다 준다 해도, 만일 그걸 얻는 대신 나 자신의 생각과 고뇌를 조금이라도 내놓아야 한다면 내겐 일말의 의미도 없으리라. 또한 비록 그 모든 역사적 사상적 논증이 나의 '낭만적' 추구의 가치를 조금도 인정해주지 않고, 모든 이성과 도덕과 지혜가 반대할지라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할 것이며 나의 주인공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품고 나는 마치 거인처럼 당당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116)
독자가 세계문학과 생동적인 관계를 맺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어떤 정해진 도식이나 교육과정보다는 자신에게 특별히 와 닿는 작품들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길은 사랑으로 걸어야지, 의무로 걷는 길이 아니다. ...... 세계문학의 고귀한 전당은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다. 그 풍성함에 기가 질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열댓 권의 책만 끼고 살아도 진정한 '독자'들이 있다. 또 온갖 것을 다 집어삼키고 모든 것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 줄 알지만 그 모두가 허사인 경우도 있다. 교양Building이란 무엇인가 '양성하는'bilden 것, 즉 인격과 인성의 도야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없다면, 그래서 알맹이가 빠진 채 공허하게 이루어진 교양이라면, 거기에서 지식은 생길지 몰라도 사랑과 생명은 나오지 못한다. 애정이 결여된 독서, 경외심 없는 지식, 가슴이 텅 빈 교양이란 정신에게 저지르는 가장 고약한 범죄 중 하나다. (121)
그렇다. 이 마지막 단계의 독자란 실로 더 이상 독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괴테가 없어도 아쉬울 게 없다. 세익스피어가 꼭 필요하지도 않다. 한마디로 말해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읽지 않는다. 온 세계가 자기 내면에 들어와 있는데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계속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아무것도 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없다. 반면 이 단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 또한 불충분하고 미숙한 독서자다. 그는 세상 모든 문학과 철학이 자기 내면에도 들어 있음을, 그 어떤 위대한 시인 못지않게 우리 각자에게 창조의 원친이 하나씩 내재되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다.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단 하루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이런 단계를 경혐해본다면... 당신은 훨썬 더 훌륭한 독자, 좀 더 훌륭한 청자가 될 것이며, 글로 쓰인 모든 것들을 좀 더 훌륭하게 해석하게 될 것이다. 길가의 돌멩이 하나가 괴테나 톨스토이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 단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머물러 보라. (191)
존경받는 고상한 인격체로서의 시인, 독자를 확고한 길로 이끌어 영혼의 귀족으로 승격시켜주는 그런 역할의 시인이란 만화에서나 가능할 뿐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에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성한 것이 이토록 불확실해지고 선이 이처럼 모호해지고 이상이 이렇게나 믿을 수 없게 되어버린 마당에, 예전에 정신적 귀족 운운하던 것이 어떻게 여전히 유효하겠습니까? 옛 시인들이 포고해던 저 정신적 귀족을 믿었던 건 당신들 아닌가요? 그러면서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은 그 아름답고 고귀한 믿음을 붙들고 열심히 장사를 벌이지 않았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을 빈곤하게 민들고 고통으로 돌아버리게 만든 그 전쟁에서 부를 창출해낸 당신들 아닙니까? (206)
오, 친구여, 분석의 전반부가 가르쳐주는 건, 우리 스스로가 하나의 온전한 개인이라는 인식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와 입법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완전히 상반된 권리와 힘과 충동들을 인정함으로써 말이지요. 말하자면 이 절반은 우리를 모반자로 만듭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우리 스스로가 인류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되고, 그리하여 인류를 거스르지 않고 그 궤도를 기꺼이 함게 밟아나갈 때에 비로소 개인의 최고 만족 또한 찾을 수 있음을 통찰하게 됩니다.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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