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그르니에 서한집 1932~1960
알베르 카뮈.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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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저를 멈칫하게 했던 것, 또 많은 사람들을 멈칫하게 했던 것은 공산주의에 결여된 종교적 감각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족할 수 있는 어떤 모럴을 수립하겠다는 포부입니다. 거기에서는 에두아르 에리어식 휴머니즘, 즉 '세속적이고 필수적인 것'의 냄새가 너무 강하게 풍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를 하나의 준비로, 보다 더 정신적인 활동들에 토대를 마련해줄 어떤 준비 혹은 어떤 고행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요컨대 사이비 이상주의에서, 가식적인 낙관론에서 벗어나 인간이 그의 영성의 감각을 되찾을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하겠다는 어떤 의지로 말입니다. (35-6)

그렇습니다. <퐁텐>지는 전후에 나온 탁월한 잡지입니다. 어쨌거나 그 잡지에서 사람들은 용기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귀한 글들이지요. 그 용기 있는 글들 속에서 선생님이 개인에 관하여 말씀하신 글을 읽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것이 개인에서 시작하고 개인으로 귀착한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개인들이 증언하기를 포기한다면, 또 만에 하나 투쟁하기를 (투쟁의 방법이야 수없이 많지요) 포기한다면, 그 개인이란 것은 사라져버리고 말 가치입니다. (87)

당신의 원고를 잘 받았지만 시험 때라 도무지 짬이 나지 않소. 얼른 훑어보았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아주 만족스럽다는 느낌이오. 만약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향으로 끝까지 계속 밀고 나갔다고 했을 때 바로 나 자신이 했을 법한 말들을 당신이 하고 있소. (89)

벨쿠르에 있는 당신의 집을 찾아갔던 때가 생각나오. 아마도 십 년은 지난 일 같군요. 당신의 눈에는 내가 '사회'를 대표한다고 보였겠지만 당신은 내게 결코 '이방인'이 아니었어요. (119)
......
네, 선생님께서 벨쿠르로 찾아오셨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모든 일 하나하나가 다 기억납니다. 아마,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선생님은 '사회'를 대표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선생님이 제게 오셨으니 그날부터 저는 제가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한심한 것은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121)

저[카뮈]는 부조리의 사상이 (심지어 미학적인 면에서도) 어떤 막다른 길에 봉착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막다른 길에서 살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진실이 그 진실을 발견하게 된 사람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137)
......
[그르니에의 답장] "과연 인간은 막다른 길에 처해서도 살 수가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당신이 제기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살 수 없지요.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암시해요--당신의 사상에 그 특유의 악센트와 고귀함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 암시입니다--다른 사람들이야 대로로, 이미 나 있는 길들로 돌아다니든 말든, "그 막다른 길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용기가 있다면 혹시 또 모를 일"이라고 말입니다. 부조리는 진실입니다. 비록 그 진실이란 것이 인간이 참아낼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진실을 삶보다 높은 곳에 두고 생각하는 인간에게 그 진실을 참아낼 수 없다는 사실은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142)

어떤 이상을 위하여 사는 것은 부조리한 것이 아닙니다. 그 까닭은 바로 세계가 부조리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세계를 위하여, 그 세계 때문에 사는 것이 부조리하기 때문입니다. (144)

거의 하루 종일 어머니 곁에 붙어 있는 바람에 답장이 늦었어요. 즉시 당신의 희곡을 다 읽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최고 수준이고 첫 번 버전으로 읽은 <칼리굴라>보다 훨씬 낫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톤을 찾은 겁니다. <오해>는 <이방인>과 마찬가지 의미에서 정말 알베르 카뮈의 것입니다. 주제는 아주 거대한 것이고 당신은 그 주제를 그것에 걸맞게, 그리고 동시에 절제하여 다루었어요. 그 절제가 바로 당신의 힘입니다.
가장 성공적인 인물은 마르타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당신을 닮았고 당신을 거의 완전하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163)

인류, 문명, 조국이라는 것도 덧없는 조합들일 뿐, 깊이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조금도 성스러울 것이 없으며 그것들은 '나'의 이기주의와 부도덕보다 더한 이기주의와 부도덕에 의하여 작동됩니다. (195)

정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충고와 실제로 자신이 보여주는 태도 사이의 괴리가 명백한데, 그게 당신에게는 분명 황당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나는 지나치게 남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곤 했어요.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었어요. 거기에는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고 자신은 뒤로 숨고 싶은 마음, 나의 고독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 확실하고 능동적인 믿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다시 말해서 나의 내면에서 통일성을 이룰 수 없다는 무력감, 요컨대 온갖 것이 다 섞여 있었습니다. (208)

나는 <페스트>와 <페스트에 대한 문헌>을 다시 읽고 있어요. 알라신께서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신에게 그 책에 대하여 긴 편지를 써 보내겠습니다. 어쨌든 다른 장점들보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장점들 때문에 내가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책입니다. (209)

저로 말씀드리자면...... 사실 선생님께서 이미 딱 부러지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제가 혹시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미치광이가 되려는 게 아닐까 싶어 두렵습니다. 선생님도 기억하시지요? 미치광이란 바로 매일같이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246)

당신이 건네준 공책[주1]은 내가 가득하게 써서 채운 다음 어디로 보내줘야 할까요? (278)
[주1] 1951년 8월 4일 샹봉 쉬르 리뇽에서 알베르 카뮈는 장 그르니에에게 이 공책을 주었다. 종이의 광택이 마음에 든다고 하며 공책을 받은 장 그르니에는 "당신에 관한 글을 써서 이 아름다운 공책을 가득 채우지요"하고 말했다. 그러자 카뮈는 말도 안 된다는 듯 "그럼 그 공책은 백지로 남겠네요"하고 대답했다. (410)

그렇지만 선생님에 대하여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담을 쌓고 지냈던 것을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제가 선생님께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것에 너무 애태우지 말고, 그리고 모든 위험을 각오하고, 선생님께 마음을 열어 보이는 것이 바로 진정한 관대함이었을 텐데 저는 그걸 몰랐던 겁니다. ...... 귀중한 친구이신 그러니에 선생님, 이제 와서 새삼스레 제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릴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자신을 키워주고 이끌어주신 분들에게는 감사의 말을 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저 계속 그 모습 그대로 계셔달라고 부탁할 뿐이지요. 부디 저에 대한 선생님의 우정을 간직해 주십시오. 그것은 제 삶과 제 노력을 위하여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제자로서는 불안스러운 저를, 그리고 친구로서는 낙관적인 저를 믿어주십시오. (285)

"저는 당신이 하고 있는 것에 널리 퍼져 있는 그 고상한 능란함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특히 저를 감동시키는 것은 모든 종류의 가식과 불필요한 것에 대하여 거리를 유지하는 태도가 당신의 문체에 드러나 있다는 점입니다." (318)

"사람은 누구나 스물한 살이 되면 신전에 들어가서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친구라고 엄숙히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해마다 풍원(공화력의 제6월)에 그 사실을 다시 선언해야 한다." 앞당겨 그 사실을 선언하는 것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336)

며칠 전에 어떤 경관이 제 자동차를 세우더니 제게 무슨 글을 쓰느냐고 묻더군요(제 직업이 운전면허증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소설을 씁니다"하고 간단히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강조하듯 다시 묻는 거에요. "애정소설입니까, 아니면 탐정소설입니까"라고요. 마치 그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반이죠, 뭐." (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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