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표류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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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게 청춘이라는게 존재했었는가, 또는 존재 하는가?"
맨처음 "청춘표류"라는 제목을 보고선,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었다.
삶이란 것을 항상 데면데면 살아오고 있는 나로서는 "청춘"이라는 단어는 먼 나라 이야기인것처럼만 느껴진다. 아마도 내심 나는 "청춘"이라는 단어에서 열정이라던지, 무모함, 도전따위를 연상하고 있었나 보다. 가끔씩은 애늙은이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내 인생에서 그런것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청춘"이란 단어를 나와 멀리 했었을 터이다. 여하튼, "청춘"이란 단어는 내게 있어서는 그런것들을 연상시키고 아마 다른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듯하다. 그리고 "청춘표류"안에서의 "청춘" 역시도.

일본의 "지의 거장"이라고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가 인터뷰 했다는, 책 속에 등장하는 11명의 일본 젊은이들의 면면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들은 대부분 어린시절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고, 정규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저능아란 얘기를 들을만큼 흥미와 재능을 보이지 못했으며, 11명 중 몇몇은 고등교육을 받지 못하기조차 했다. 그 덕분(?)인지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받는 정상적인 코스를 밟지 않고 그들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 개척한다. 게다가 정규적인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저능아 취급마저 받던 그들이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되자
대단한 열정가로 돌변하게 된다. (사족 : 이런데서 바로 적성이란 말이 나오는것 아니겠는가?)

학창시절 운동과 여자에 푹 빠져 지냈던 후루카와 시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바로 공장에 취업을 했지만, 우연챦게 나이프 제작 과정을 접하게 되고, 현재 전 세계에 몇 안되는 커스텀 나이프 제작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심지어는 세계 최고의 나이프 수집가로 유명한 "미국 모던 나이프의 대부"라고 불리는 보 랜돌도 후루카와 시로의 작품을 열점 이상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속된 말로 "날라리"라 불려지던 부류에 속하던 후루카와 시로가 이런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고 과연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후루카와는 나이프 제작자가 그냥 된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혀를 내두를 만큼 나이프 제작방법을 알아내기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고, 공장에서의 기계 작동법을 익힌것 또한 그에게 플러스 요인이 되었으며, 또  나이프 제작에 있어서는 본고장인 미국으로 그야말로 열정 하나만 가지고 공부를 하러 떠나기도 한다. 물론 낯선 고장에서의 언어문제와 각종 여러가지의 문제점에 부딪혔을 것이고, 후루카와는 나이프제작자가 되겠다는 열정하나만으로 그 모든것을 이겨냈을 것이다.

무라사키 타로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에 순전히 아버지의 권유로 "원숭이 기예"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오래전에는 번성하기도 했었던 원숭이 기예는 무라사키 타로가 원숭이 기예를 배우려고 했던 당시만 해도, 이제는 맥이 끊긴 전통일 뿐이었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과 원숭이 선생님, 어느게 더 나을까? 원숭이 선생님은 없쟎아. 없으니까 제1인자!"
물론 이런 마음만으로 원숭이 선생이 되려고 하기에는 원숭이를 조련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원숭이 기예의 전통이 끊긴 상황에서 그 첫발을 내딛는것조차도 무척이나 힘겨운 과정이었다고 한다. 다행이도 젊은시절 원숭이 기예을 가르쳤던 시게오카의 부인 후지코에게 부탁해 원숭이를 가르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일본에서 원숭이 기예을 가르치는 사람은 단 두명이라고 한다. 어쨌든 무라사키 타로의 말처럼, 제 1인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외에도 많지 않은 나이에 평범하지 않은 이력을 가진 9인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대학진학에 실패한 이후 칠기장인이 되어 산골에 오크밸리라는 가구마을을 형성하고 살아가는 이나모토 유타카, 정육계에서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모리야스 츠네요시, 엄청난 끈기로 동물들의 생태계를 밝혀내는데 큰 공헌을 한 동물사진 전문작가 미야자키 마나부, 자전거 선수가 되려다 사고로 프레임 빌더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나가사와 요시아키, 전 일본에서 유일무이한 매 사냥꾼(수할치) 마츠바라 히데토시, 일본최초의 소믈리에라 할 수 있는 다사키 신야, 프랑스에서 알아주는 요리사 사이스 마사오, 유럽에서는 알아주는 염직가 도미타 준, 최초로 레코딩 엔지니어도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다는걸 보여준 요시노 긴지. 비록 방황하고 표류하는 청춘을 보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낸 후에는 어떤 권위나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락함과 순조로운 삶을 포기하면서까지도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가 된 젊은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청춘은 분명 표류할 필요가 있다고, 표류하지 않는 청춘은 청춘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얘기하고 있는듯 하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 " 젊으니까 괜챦다.", "그런일은 젊을때, 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항상 들어왔었던 많은 얘기들이 청춘이 표류하기를 권유하고 있는것 같기도 하다.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세상모든 도덕률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는 마음과, 전혀 표류하길 원하지 않는 내 마음의 자세에 대한 걱정. 다시 말해, 왜 성공하기 위해 인간적인 모멸감마저 견뎌야 할 정도로 애써야 하는가? 그런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은 있는자들의 음모가 아닌가? 하는 마음과 지금이라도 열정을 갖고 죽도록 애써야 하는거 아닌가? 하는 불안감. 어쨋든 생각할 거리가 느낄거리가 많았던 책인것 만은 분명하다.

사족 :
 "이거이거 청춘표류가 아니라 {기인열전}이라고 제목 바꿔야 하는거 아냐?"
동생이랑 잠깐 이런 대화를 하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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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5-05-3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님, 오랫만에 뵈어요..^^(제가 오랫만인가요..?;;;) 이 책, 궁금해지는군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사족 윗단락 내용에 공감합니다.

2005-06-01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둑 두는 여자
샨 사 지음, 이상해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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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을 읽은후 리뷰를 쓴다는것은 내겐 무척 어려운 일처럼 여겨진다. 소설은 여타의 사회 과학 서적들과는 달리 뚜렷한 주제나 지식을 전달해 주지도 않을 뿐더러, 또한 에세이나 수필, 기행문등과는 또 다르게 뚜렷한 감정이나 감상 포인트를 전해 주지도 않는다. 소설은 그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같은 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어조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자가 그 소설속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짐작해 내야 할 수 밖에 없고, 읽는 사람 각자가 살아온 동안 겪은 경험이나 그들이 형성해 온 가치관에 따라 소설속의 이야기를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그래서 소설은 작가가 쓴것과는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한 소설을 읽은 후 느끼는 각자의 감정은 어쩌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야기들을 전해 줄 수도 있다. 아니, 말로 표현은 해 보고 싶지만, 어떻게 해도 정확하게 또는 근사치에라도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 안타깝게 하는 그런 어조로 말이다. 마치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누군가의 이름이나 사실들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아 머릿속이 간지럽던 그런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샨 사"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느꼈던 것은 그런거였다. 이 소설의 소재는 사랑, 운명, 바둑, 중국, 전쟁등의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모든 소재가 얼기설기 짜여져서 이야기하는 그 깊은 속내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그리하여 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숨이 막혔고,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으며, 운명이라는 것을 저주하게 될 것 만 같은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렇게 내게 전이된 우울증은 한동안 날 사로잡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 소설속에서의 바둑은 한낱 소재였을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바둑이라는것에 대한 완벽하게 무지한 어리석은 나의 견해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속에서의 바둑은 아주 중요한 소재이며, 주인공은 바둑을 둠으로서, 바둑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또 다른 주인공과 소통하게 되지만, 기실은 바둑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들이 만나게 된게, 그렇게 운명의 끈이 엮이게 된게, 바둑이 하나의 창이 되어줄 수 있었다는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사실 소설을 읽고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언지를 알고 싶어하는것은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르겠다. 내 자신이 이야기를 써 본 적은 전혀 없지만, 작가는 무언가 이야기 하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병이 나듯이 작가도 마찬가지인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구석에 신이 내려 아니면, 이야기라는것이 마음 한구석에 덩어리져 생겨나서 작가는 그 이야기를 뱉어내지 않고서는 시름시름 앓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가 토해낸 이야기들을 귀기울여 듣고, 마음속에 무늬를 만들어 가는것이 우리들의 역할인지도. 여하튼 비극적 결말에도 불구하고 이소설이 아름다웠노라고 얘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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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반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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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 1995년에 이 책은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서 간행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번역된 그 책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니, 그 당시엔 그다지 인기가 없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이 번역되고 제목도 바뀌어 나온 이 책을 읽은 이들은 하나같이 모두 '독창적이다, 참신하다, 아주 재밌다.'라고 평하고 있다.

2. '사랑'이란 감정은, 특히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감정은 너무 보편적이어서, 더 이상 얘기라고 만들만한게 없을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자극적이면서도 결코 있을법하지 않은(정말 소설같은) 소재들로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끊임없이 반복되어(점점 업그레이드 하면서) 이야기 된다. 더구나 사람들은 이야기의 뻔한 플롯을 대부분은 다 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부사항만 다른체 끊임 없이 반복되는 이야기들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어찌보면, 참 이해하기 힘든 행태이기도 하다.

3.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랑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사업차 탔던 비행기에서 클로이라는 여성을 만났고, 첫눈에 사랑에 빠졌으며, 몇번의 데이트 다음에 연인 사이가 되고, 연인들이 흔히 하는 사랑의 행위들을 하고, 사랑의 대화를 나누고, 자기들만의 비밀 암호를 나누어 갖고,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서로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너무나도 사소한-만약 그녀가 다른사람이었다면 결코 고려되어지지도 않을만큼-일들로 싸우기도 하고, 눈물범벅이 되어 서로 화해하기도 하고, 화해 후 더욱더 서로를 사랑하기도 하고, 그리고 시간이 흐름으로 해서 생긴 연인의 무관심을 어렴풋이 깨닫기도 하고....그리고, 연인의 배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렇다. 이것은 너무나도 평범한 러브 스토리였던 것이다.

4. 오아시스 콤플레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이상적인 남자나 여자라는 환각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오아시스 콤플렉스가 완전한 망상인 것만은 아니다. 사막에 있는 사람은 실제로 지평선에서 무엇인가를 본다. 다만 야자나무는 시들었고, 우물은 말랐고, 오아시스는 메뚜기로 뒤덮여 있다. -p.142

5. 책 안의 화자는 항상 사유하고 추론한다. 내가 왜 클로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클로이의 어떤점이 나의 마음을 끄는지. 내가 다름사람이 하고 있을 일에 대해선 별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클로이가 그 일을 하고 있을경우 심하게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클로이의 사랑이 변한거라 느껴진다면 왜 그렇게 된건지.

6.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p.194

7. 이 사랑이야기는 평범했지만, 특별했다. 책 속의 나는 사랑의 모든 점을 구석구석 관찰하면서, 사랑의 실체를 모두 벗겨 보려고 했다. 그 시도는 어느정도 먹혀들어 책 속의 나는 클로이의 어떤점이 나를 사로잡았는지,클로이와의 사랑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 거의 속속들이 그 본질까지도 밝혀낸듯 하다. 더구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신비스럽게 서로에게 빠져드는 감정이 아닌 인간 자신의 자기연민에 대한 보답일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런 결론까지 은유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8. 이 책에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담론들을 알게되고, 그 동안 불명료하던 사랑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이라는 실체 없는 감정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기대심리에 대한 일깨움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어느 누구도 이 책을 읽고 나서, 사랑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리적 본능과 마찬가지로 목적론적 결과로 표현되거나 인과관계로 표현되는 인간의 감정중 하나라고 단정 짓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지게 된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것처럼 운명적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이라서 만약 그자리에 그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더라도 충분히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모든 걸로는 표현할 수 없는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나는 내심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결코 말로 표현되어 질 수도 없을 것이고, 하물며 분석되어지지도, 원인과 결과를 나눌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오만여가지 것들의 영향으로 아마 평생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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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lll 2008-03-13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사랑하는지를 도대체가 알수없었는데..이 책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쳐봐야겠네요..ㅎㅎ
 
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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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굳이 두부분으로 나누자면, 보르헤스를 읽기전과 보르헤스를 읽은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뻥이 심하다고 금세 돌멩이 세례를 받을게 분명하다. 내 경우엔 이게 돌멩이 세례를 받을지도 모를만큼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조금 오래전의 다수의 사람들에겐(특히나 문학을 하는) 이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건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보르헤스라는 이름은 문학이라는 매체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에겐 아주 익숙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위대함을 지니고 있게 된 듯하다. 내가 보르헤스의 이름을 알게 된 건 물론 대중매체의 영향이지만, "바벨의 도서관"이란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를 통해서이다. 난 원래 도서관이라면 무척 환장을 하는데,(그냥 괜시리 말이다. 그렇다고 자주 가는 것도 아니면서.) 도서관에 관한 소설을 썼다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은 바벨의 도서관과 관련한 책을 구하지 못했고, 바벨의 도서관이 단편소설이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고선 더 이상 그 소설을 찾아보기를 단념했다.(이상하게도 나는 단편소설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재밌어 하지 않는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터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보르헤스의 이름을 익히게 된게 내가 보르헤스를 알게된 첫 걸음이었다. 그리고 그 뒤 이름이 익숙해진 탓인지 보르헤스의 흔적들은 책들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 전에는 그 이름을 무심히 보아 넘긴 탓에 아마도 그 이름이 어디선가 등장해도 깨닫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보르헤스를 알게 된 시점 뒤부터 보르헤스의 흔적들이 그렇게 많이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되어서 어찌어찌하여 얼마전 보르헤스의 문학전기가 발간된걸 알고선 보르헤스의 문학전기를 구해다 읽었다. 어찌보면 조금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르헤스의 작품은 한개도 읽어보지 않은 주제에 보르헤스의 문학을 총 망라해놓은 회고전 비슷한 문학전기를 먼저 읽다니 말이다. 그리하여서 나는 보르헤스 전집의 첫번째 권인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집어들게 된 것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는 말 그대로 불한당들의 세계사이다. 이 곳에는 사기꾼의 이야기도 등장하고, 중국에서 활개를 폈다는 여자해적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고, 마피아도 등장하고 카우보이도 등장하고 배반자들도 등장한다. 이 책 안 단편소설들의 주인공들은 모조리 불한당들이며, 또한 그 불한당들은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의 인물들이 아니라, 세계 곳곳의 인물들이다. "불한당들의 세계사"란 제목이 이토록 적당할 수가 없군, 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 이야기들은 보르헤스 소설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원래 있던 이야기들의 각색 번역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표절이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이 이야기들의 출처를 모조리 밝혀 놓았고, 모르긴 몰라도 보르헤스가 존재하는 시대의 언어들로 적절히 각색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보르헤스가 가지고 있던 신념 자체가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 수는 없다.' 는 것과 '같은 이야기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와 관념으로 계속해서 다시 씌어지는 양피지 사본과 같다.'는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아주 오래전에 창조되어지긴 했지만, 시의적절하지 못하여 무덤속에 파묻힐 이야기들이 건져내어져 다시 새롭게 재탄생을 하게 된 것이리라 생각한다. 아마 "불한당들의 세계사"에 담긴 보르헤스가 가진 컨셉은 이 두가지가 가장 주요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나중에 계속해서 이야기 되어질 판타직한 환상적인 소설세계는 보여지지 않으니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보르헤스를 읽고 충격을 받았다는 글을 많이 읽었지만 난 큰 충격은 받지 못했다.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보르헤스의 영향은 이미 광범위하게 펼쳐져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상태이므로 난 보르헤스의 책을 읽기 훨씬 전부터 보르헤스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지금 내가 보르헤스의 글을 읽는다고 감흥을 느낄리는 없을 터이다. 이미 면역력이 길러져도 한참은 길러졌을 테니 말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두 명의 대가가 인류에게 장차 1000년을 먹고살 양식을 남기고 갔다.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새천년의 이미지는 바로 월드 와이드 웹이다. 조이스는 그것을 언어로 구축하고, 보르헤스는 아이디어로 디자인하였다. 갈수록 세계는 이 속으로 빨려들고, 사물은 시각 이미지로 남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네권이나 남아있는 보르헤스 전집을 읽을것이고,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 없는 "모래의 책"을 힘이 닿는한 구하여 읽을 예정이다. 난 보르헤스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을만큼 현명하진 못하지만, 단지 "불한당들의 세계사"를 읽는것만으로도 내가 알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뿌리깊은것이었는지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보르헤스를 읽는 작업은 내내 나에게 그렇게 어렴풋한 깨달음을 줄거라고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에코가 말한것처럼 그렇게 내게 커다랗게 다가오진 않을지 몰라도, 내 머릿속은 보르헤스로 인하여 다시 한번 굳어버린 고정관념의 틀을 깰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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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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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소설을 쓴 박민규라는 작가가 분명, 내가 싫어하는 부류중 한 종류의 사람일거라고 확신한다. 그 부류는 아주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또는 그렇게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을 키워 최고가 될 생각은 애시당초 하질 않고, 냉소적이며 반항적인 시선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비주류에 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충분히 주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주류에 자신을 귀속시키는 것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행한다. 충분히 프로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추어로서 사는게 그런 사람들의 목적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시기심이다. 뛰어난 능력도 없고, 열심히 노력할 수 있는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뛰어난 자신의 능력을 그런식으로 손상시키는 그들이 배부르고 등 따시니 헛소리나 해 대는 사람들로 보인 탓이다.

처음 "삼미 슈퍼스타즈..."를 읽기 시작했을땐 항상 꼴찌만을 해야했었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재밌어서, 너무 우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삼미 슈퍼스타즈"를 알 것 같은 사람들만 보면 모조리 붙잡고 "삼미 슈퍼스타즈"를 혹시 아는지 물어봐대기 일쑤였다. 내게 "삼미 슈퍼스타즈"는 항상 꼴지만 해서(두번 신기하게도 팀2위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더욱더 동정이 가고 애정이 갔던 팀이었다. 마치 한때 신봉숭아학당에서 옥동자가 제일 재밌다며 좋아하는 마음처럼 말이다. 더불어 리틀 슈퍼스타즈도.

헌데, "삼미 슈퍼스타즈..."는 꼴찌만 도맡아 하는 팀의 비운이라고 이름붙일만한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자신들의 철학으로 내세우고 "야구를 통한 자기수양"을 강조한 꽤나 자아통찰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팀이었다는게 "삼미 슈퍼스타즈이 마지막 팬클럽"이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해 인식하는 방식이었다. 별 어처구니 없는 해석이 다 있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고,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만년 꼴찌를 하던 팀이 알고보니 심오한 정신세계를 가진 하나의 단체였다고 주장한다면 누군들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데, 읽고 난 뒷맛이 입안에서 영 사라지지가 않는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이미지가 항상 머릿속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잠들기 직전에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도,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꾸 자꾸 "삼미 슈퍼스타즈"를 생각한다.
'프로'가 되기를 강요당한 사회에서 스스로 '아마추어'가 되기를 갈망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나 역시, 인생이라는게, 삶이라는게 굳이 '프로'가 될 필요는 없다는데, 아마추어로서도 충분하다는데 내심 공감하고 있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비록 '프로'가 되지 못해서 발버둥치며 괴로워하고 있는 지금이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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