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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실질적 꿈은 이미 모두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참으로 놀랍고도 기이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일테면 김밥집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면서, 정작은 틈틈이 연속극 보는 재미로 사는 김밥집 주인 아주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그녀는 자기 욕심의 6할 정도 되는 수입밖에 못 올리고 있을지라도, 결국은 6할의 돈 버는 꿈을 실현하는 동시에, 4할의 연속극 시청 소원을 모두 고스란히 성취하고 있는 셈이다. 그녀의 꿈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김밥집 아주머니와 흡사하다. 대부분이 여러 가지 형태의 의식과 무의식의 꿈으로 소망이 분산 되어 있고, 분산되어 있는 비율에 맞게 각각의 꿈들이 그 나름대로 성취되고 있는 식이다. 커피 마시고 싶은 꿈+데이트 하고 싶은 꿈+취업하고 싶은 꿈+친구 만나고 싶은 꿈..... 그렇다면 세상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실질적 꿈은 이미 모두 실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참으로 놀랍고도 아름다운, 꿈이 이루어져야 할 세상이 아니라 꿈이 이루어지고 있는, 기이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47쪽 

 

 

 

 

 

  

 언제나처럼 2호선 전철안은 붐비고, 사람들과의 어색한 눈맞춤을 피하기 위해 나 역시 언제나처럼 책을 펼쳐 든다. 아, 갑자기 맞닥뜨린 저 문장들. 그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 

  그러니까, 난 어린시절, 아주 열정적인 사람이 될 줄로만 알았다.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처럼, 밤이나 낮이나 줄창 공부만 해대던 사람, 또는 동료들과 스튜디오에서 밤도 낮도 없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들.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관심 없는 사람들. 아마도 그래서였을까? 내가 선택한 직업은 그런 일이었다. 밤낮없이 일하고 주말도 반납해야 할 경우가 너무나 잦은 직업. 혹시나 현장근무에라도 투입되면, 아예 쉬는 날을 상상할 수 조차 없던 일.  

 죽을만큼 싫은 날들이었는데, 난 정말 이 일이 싫다고 입밖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했다. 난 열정적인 사람이었으니까. 난 이 부류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일은 재미 있지만, 좀 힘드네.'란 말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진심이 담겨지지 않은 일들은 언젠가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 회사를 그만 둔 후, 일년간의 비정규직 생활 후에, 지금 나는 야근은 거의 하지 않고, 주5일근무를 꼬박꼬박 지키는 회사에서 근무한지 한달이 조금 넘었다. 놀랍게도 시간은 넘쳐 흐르고, 이제는 예전의 생활들이 아득하기만 하다. 다시 돌아가게 된다면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도 없고, 아마 다시 돌아갈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전철 안에서 위의 문장들을 읽으면서,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이런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안 몇몇 지인들은그때 일 했던 곳과 비슷한 곳들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라고 권했지만,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 일에 몸 바치는 열정적인 삶 따위, 나는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적당히 일해서,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돈을 벌고, 잠도 실컷 잘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도 넉넉한 그런 삶을 원했었던게 분명하다.  

 그렇게 꿈 꿨었기에 현재 나는 지금 여기 있는 것이다.

  

 아~,그런데, 문제는....가끔 나는 열정 없이 살아가는 나의 삶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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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10-14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습관님의 이 페이퍼를 읽고나니, 전철 안에서 출근하는 길에 괜찮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 자체도 만족할만한 삶이 아닌가 싶어져요. 사람들의 어색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라지만 사실은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 것, 거기에도 열정은 담겨 있지 않을까요? 그것도 좋아서 하는 것인데 말이죠. 열정이 없다면,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차라리 눈을 감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출근하는 지하철안에서 책을 읽고 그 책속의 어떤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되는 것들이 제게도 역시 간혹 일어나는 일이라 반갑습니다. :)

습관 2009-10-14 22:39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의 짐이 좀 덜어 지는 듯 해요.

그래도 여전히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기분에 시달리는 것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거라고 기대할 수 밖에요.

다락방님도 저랑 비슷한 행동을 하실때가 있다니, 기쁘네요.. ^^

참, 연극은 재미있으셨나요?? 기분은 좀 나아지셨구요??
 

 

 2009년 9월17일 ~18일 

 여자 셋이 모였다. 급조된 모임. 금요일 오후 잠깐 한가한 시간에 메신저에서의 수다가 계기를 마련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와중에 우리 회사의 펜션을 빌려서 놀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가 차 문제로 여자끼리만 가긴 힘들겠다는 아쉬움 섞인 푸념을 하다가 내일 영화를 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러다 S가 들어오면서 모임은 밤으로 정해졌다. 영화를 보고 술을 한 잔 하고, 노래방을 가지는 계획이 암암리에 짜졌다. 

  

 12시쯤 이태원 살인사건을 봤다. 불편한 CGV 영화관의 의자. 초반부터 피가 튄다. 결국은 누가 범인인지 알 수가 없다. 내심 마지막에 한번쯤 누군가 마지막 힌트를 주고 끝나기를 바랬다. 등장인물들은 모르더라도 나는 알고 싶었다. 누가 범인이었는지를. 하지만 검사와 변호사 둘 다 혹여나 자신들이 잘 못 짚은건 아닌지 의심의 고갯짓을 하면서 끝이 날 뿐이다. 용의자 둘이 햇살 환한 거리를 친근하게 얘기하며 걷는 모습에서 영화를 보던 사람들은 아마도 '둘이 공모한 짓일거야'란 상상을 하지 않았을까? 

  

 맥주를 마셨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의 관심사는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다. 서로가 잘 아는 주제들이니까. 신랑에 대한 불만. 시댁에 대한 불만. 아기 키우기의 어려움. 결혼한 기혼 여성들이 더구나 결혼함으로써 알게 된 우리들이 나눌 얘기가 더 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이 술이 약한 나는 맥주 두 세잔에 하품만 나온다. 눈에 눈물이 고이고, 춥다. 날씨는 이제 한낮을 빼곤 가을이다. 이야기들은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에서 열띠게 진행되다가도 이야기가 끝나면 잊혀진다. 우린 아마도 그저 배설구가 필요했는지도. 그런데, 나는 그 자리에서도 다른 세상을 부유한다. 그들과 달리 별달리 불만이 없는 나. 기복없는 인생에 안도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방을 간다. 일년이상이 지난것 같다. 가본지. 음주가무를 즐기지 않는, 타인의 눈에는 심심해 보이는 나는 아는 노래나 있을지 고민이다. 그나마 이들과는 4년 이상을 알고 지냈지만, 노래방은 처음이라서 매번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도 되겠다 싶다. 몇 손가락안에 꼽히는 노래들.  

 아침빛을 보고 돌아선다. 우리들의 기행에 신랑들은 놀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들도 예전엔 그렇게들 피씨방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빛에 집에 들어서곤 했다. 

 사실 그녀들과의 만남에 행복하고 즐거웠다. 이런 기분은 아니다. 뭐랄까 우리 각자에겐 모두 벗어나고 싶어하는 본능이 있는 것 같다. 난 사실 그렇게 강하진 않은 본능이지만, 결혼후 일을 그만두고 얘들까지 키우고 있는 그녀들은 아마 더 강할것이다. 나에게는..? 변화없는 삶은 가끔 지루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 지루함이 길어지면, 우리는 지긋지긋하다고 느낀다. 아니면 그대로도 좋다고 느낀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나는..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그 모임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설명하기 힘든 어떤 즐거움을 준 게 사실이다. 그게 무언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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