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아름답고 따스한 이유는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의 힘 때문이다. 소극적인 죽음은 늑대보다 무섭고 쥐 떼보다 무섭다. 하지만 결국 그런 죽음을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긴 것은 죽음의 적극적인 수용이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가 자신들보다 더 무력한 옥수수 한 그루를 살리기 위해 취한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또 다른 생명을 위한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이 일관되어 있다. 셴 할아버지와 눈먼 개는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겨낸 것이라 할 수있다. - P183
소설은 아무리 재미있다고 해도 하룻저녁에 다 읽어서는 안 되는 열독물이다. 작품에 담긴 서사와 수사, 리듬, 다양한 배경지식을 함께 호흡하고 흡수하며 천천히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 P183
나는 위대한 문학은 반드시 한 사람의 생명의 역참에 놓인 책상이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 P7
그 순간 그는 온몸을 떨면서 마을을 통틀어, 산맥 전체를 통틀어 일흔두 살 노인 하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마음은 한없이 공허해졌다. 죽음 같은 적막과 황량함이 깊은 가을처럼 그의 온몸 위로 내려앉았다. - P21
어망을 거둘 때 나는 청백색 물방울 튀는 소리가 났다. 셴 할아버지는 이 소리가 물소리도 아니고 나무 소리도 아니고 수풀 속의 벌레 소리도 아니라는것을 잘 알았다. 이는 광활하고 허무한 밤이 극도의 정적 속에서 응집해내는 적막의 소리였다. - P34
눈먼 개가 할아버지가 가는 방향으로 멍한 눈길을 던졌다. 낙담에 젖어 칠흑 같은 눈빛 속에 진한 눈물 냄새가 처연하게 고여 있었다. - P95
이거 딱 2010년대 초반에 중국에서 그랬는데... 타오바오에서 옷 파는 샵 들어가보면 죄다 상품명에‘한국식‘이라고 붙여놨던 시절...ㅎ
요즘 일본의 SNS에서한국풍)는 최고로 인기 있는 해시태그이다. 실제로는 한국이나 한국 문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가장 ‘핫‘하다는 장소, 요리, 패션 등에 관한 정보에 어김없이 이 해시태그가 붙는다. - P340
국경을 넘나드는 한일 언론의 ‘캐치볼‘이 몇 차례 반복되더니 급기야는 일본 신문들이 "국내의 혐한 분위기를 우려한다"라는 사설을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사이엔가 혐한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이다.한일 양국의 언론은 우려의 뉘앙스로 언급함으로써 혐오의 정서가 잦아들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극우 세력에 이 상황은 오히려 세를 불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혐한을 거론할수록 사회적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혐한은 극우 세력의 단골 구호가 되었고, 이제는 그 세력이 구심이 되어 혐오 발언이나 반인권적 행동을 해나가고 있다. - P273
일본 제국주의 정부는 ‘천황‘이야말로 신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은 나라의 주인이며, 그를 위해 적과 싸우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선전해 왔다. 항복을 선언하는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일본 대중들은 그 역시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한다. 불과 70여 년 전에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운 기이한 이야기지만, 인간의 맹목적인 믿음은 이성보다 광기에 가까운 법이다.항복이 선언된 이날을 ‘패전일‘이 아니라 ‘종전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침략 전쟁의 본질을 은폐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특히 과거사에 대한 관점이 현저하게 우경화되는 상황에서 ‘종전일‘이라는 모호한 표현이 전쟁을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우려스럽다. - P303
일제가 전쟁을 자행하던 당시 일본 사회는 전근대적인 군주제에 머물러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첫발도 내딛지 못한 미성숙한 상태에서, 과학기술과 군수산업만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즉, 일제의 침략 전쟁은 어떤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은 무법적 만행이었다. 시민이 참여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체제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전쟁의 책임 소재를 명확하게 규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정권이 가해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일본의 민중도 폭주하는 권력으로 인한 피해자라는 정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 P304
일제의 무법성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의 시민이 명명백백한 전쟁의 주체라고 단언하기에 애매하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방관해도 좋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과거의 일이지만, 그 전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패전이든 ‘종전‘이든 혹은 ‘해방‘이 되든, 과거 침략 전쟁의 과오를 직시하고 대내외적으로 성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전쟁이 끝난 지 75년이 되도록 일본 시민사회가 풀지 못한 숙제가아니겠는가. - P306
동일한 사양의 통신 기술이 한국과 일본에서 전혀 이질적인 미디어로 진화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의 삐삐는 목소리나 음악 등 소리를 전달하는 시끌벅적한 구술 미디어로 탈바꿈한 반면, 일본의 포케베루는 문자를 매개하는 과묵한 문자 미디어의 길을 택했다. - P226
코로나19 사태 이후 외식이 어려워지면서 일본에서는 원격 회의 시스템 등을 활용한 비대면 술자리가 꽤 인기이다. 일본인 동료들과 ‘줌 회식‘을 즐기다 보면, 각자 좋아하는 술잔을 기울이며 차분하게 이야기를 푸는 개인주의적인 음주 문화가 비대면 술자리와 은근히 궁합이 맞는다고 느낀다. 반면, 함께하는 분위기를 좋아하는한국의 주당들은 ‘랜선 술자리‘에 매력을 느끼기 쉽지 않을 듯하다. 한국에는 술잔을 쨍 부딪치고 서로 부대끼는 ‘찐한‘ 술자리를 못 가질 바에는 차라리 ‘혼술‘을 택하겠다는 술꾼도 많지 않을까? - P231
뒤르켐에 따르면 이타적 자살은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 합리화된다. 개인의 인격보다 집단의 필요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 집단의 명예에 비하면 개인의 삶은 무가치하다는 생각이 근저에있다. 집단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경시하는 결론에 쉽게 다다르는 것이다.일본의 할복 풍습은 사무라이 개인의 목숨보다 무사 집단의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가치 판단에 의해 정당화되었다. 선조가 주신몸에 멋대로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유교적 신체관도 개인의 개성보다 가족이나 선조와의 연대를 강조하는 혈연적 집단주의와 관련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타적 자살은 ‘대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개인이 목숨을 버리는 행위이다.이타적 자살은 개인의 인격과 삶의 다양성을 경시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이다. 한 개인의 생명을 가볍게 보는 생각은 다른 개인의 생명 역시 대의를 위해서라면 희생될 수 있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 P247
학문의 상아탑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는 경직성도 문제이긴 하지만, 일본 대학의 완고하고 보수적인 태도가 연구 활동의 객관성과 명분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에 기여하는 것도 사실이다. - P261
이동하는 문화의 속성과 관련해서 "주변으로 갈수록 오리지널 문화가 남아 있다"라는 주장도 있다. 식문화로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오리지널 레시피의 정통 프랑스 음식이 오랫동안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변화했을 파리의 레스토랑보다. 19세기에 ‘이식된 채로 보전된 호치민의 프렌치 레스토랑이 ‘진짜‘에 더 가까운 맛을 재현할 수도 있다니 흥미로운 일설이다. - P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