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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 생활 중에 아버지 유지가 가끔 병문안 온 것 외에는 문안객도 없었다.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요양소 내에서 이렇다 할 친구도 없었고 장래의 전망도 없었다. 도쿄도청에 근무하던 와세다실업 시절의 친구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지만 그 외에는 편지를 받은 기억도 없다. 천애고독으로 미래도 없어 자살하고 싶어진 적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겐지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떤 처지가 되어도 인간은 오로지 희망을 찾아낸다. 시베리아에 있던 때도 그랬다. 게다가 그런 짓을 하면 아버지에게 죄송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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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나 고위급 군인은 전쟁에 져도 강화조약 뒤에 위로금이 나왔다. 그러나 서민은 일할 때 모은 돈도 이미 전후 인플레이션으로 없어졌다. 바보같은 전쟁을 시작해서 많은 사람을 죽이고 아버지나 할아버지·할머니를 이런 어려운 생활에 몰아넣은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 P175

시베리아 억류자는 ‘시베리아 귀향자‘였기 때문에 경찰의 감시를 받았고, 지역사회에서도 차별을 받았으며, 직업을 얻는 데도 손해를 봤다는 경험을 말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겐지는 그 때문에 일본 대기업에 일자리를 얻는 길을 사실상 차단당했다. - P180

"생활에 여유가 없어 책 같은 것을 사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나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를 여기까지 몰아넣은 전쟁의 진실은 어떻게 해서라도 알고 싶었다. 전쟁 중에는 거짓 발표로 무엇 하나 진실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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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을 맞춰 야외 노동을 나가면 치타의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 앞을 지나간다. 주방 하수구에 빵가루가 섞인 상태로 구정물이 얼어 있었다. 그 빵가루를 노리고 대열을 이탈했다가 감시병에게 혼나는 동료 포로들을 보고 겐지는 비참함을 느꼈다. - P122

"내가 살아남은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혼성부대에 들어가 수용소에서 계급 차별이 없었던 것. 또 하나는 수용소의 체제 개선이 빨랐던 것이다. 내가 있던 수용소는 지역 군사령부가 있던 치타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개선 속도가 빨랐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떨어져 지방에 있던 수용소는 사망자가 더 많았을 것이다."
겐지는 자기가 살아남은 것은 이런 객관적인 조건이 우연히 갖춰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판단력이나 ‘마음 씀씀이‘가 좋았다든가, 정신력이 있었다든가, 신이 지켜주었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 시기 죽은 사람에게 특징이나 경향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 약했다든가, 군대에 들어가기 전에 무엇을 했다든가, 그런 것으로 생사가 나뉘지는 않았을 거다. 장교는 노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 쪽에 사망자가 많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누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 P127

시베리아 억류만이 아니라 전쟁 체험 기록은 학도병, 예비사관, 장교 등 학력이나 지위의 혜택을 본 사람이 쓴 것이 많다. 그것들은 귀중한 기록이지만 특정한 시각의 기록이기도 하다. 생활에 여유가 없고 문해 능력 등이 떨어지는 서민은 손수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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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장에 도착했을 때 현지 고참병들이 대나무 통을 끈으로 늘어뜨려 목에 걸고 있는 우리를 희한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중 한 사람은 이제 ‘일본에는 이 정도로 물자가 없나‘ 하고 말했다. 실제 그 말대로였을 것이다. 군복만 입었지 맨주먹인 집단이었다." - P67

겐지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런 폭력도 폭력이지만 일본군의 형식주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전범령으로 불린 ‘보병수칙‘이나 ‘작전교법‘ 그리고 ‘군인훈시‘ 등을 암기해야 했다. 한 자 한 구를 원문 그대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고참병이 군인이 지켜야 할 것이 다섯 가지, 군인시에 쓰여 있다. 말해 봐‘라고 하면 ‘예. 충절, 예의, 무용, 신의 검소 다섯 가지입니다‘라는 식으로 답하면 안 되고 원문대로 ‘하나, 군인은 충절을 다 하는 것을 본분으로 해야 한다. 하나 군인은 예의를 바르게 해야 한다.‘라고 답해야 한다. 전투방법을 적은 보병수칙‘도 ‘사위를 경계하고‘를 ‘주위를 경계하고‘로 말하면 안 된다. 모두 형식주의였고 위에서 시키는 대로 형식을 갖추는 것뿐이었다."
"장비도 서류에서 위에 보고되어 있는 ‘숫자‘는 따지지만 서류상 형식만 갖춰 있다면 나머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내무반에서 장비가 부족하게 되면 책임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다른 중대에서 훔쳐와 ‘숫자‘를 맞추기 때문에 하여튼 도둑질이 많았다." - P71

"4월이 되고 나서 다른 중대에 일본에서 초년병들이 와서 호되게 훈련을 받았다. 우리들도 그렇지만 포로가 되기 위해 보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 P73

"군대는 ‘관공서‘인 거다. 위에서 부대를 편성하라고, 여기에 주둔해 있으라고 여러 가지 명령을 하면 서류상으로는 그대로 하지만 명령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원래 초년병 교육 때부터 명령한 것을 그대로 하지 않으면 맞았지만,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도록 배우지 않았고 기대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태로 적이 공격해오면 어떻게 될까 같은 것은 나로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런 느낌은 당시 병사의 회상록에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이판섬이나 레이테섬 등 남방전선의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지역조차도 적이 눈앞에 닥쳐올 때까지 아무런 방어 준비도 하지 않고 주둔부대가 ‘빈둥빈둥‘하던 사례는 많다. 겐지가 놓여 있던 상황도 예외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 P74

무단장에는 약 6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어서 역은 피란하려는 일본인 가족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군용열차에 ‘지방인‘(민간인에 대한 당시 군의 호칭)을 태우고 피난시킨다는 생각은 일본군에게는 없었다.
"적어도 우리들이 타고 있던 화물열차에는 피란민은 타지 않았다. 대부분의 피란민은 역에 남겨진 것 같다. 당시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도 상상력도 없었다."
당시 만주에는 약 150만 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관동군은 처음부터 소련의 침공이 있으면 국경 근처에서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후퇴하면서 한반도 바로 앞에서 방어하는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인을 사전에 피란시키는 것은 일본인을 퇴각 시킬 때 후퇴 전술을 눈치 챌 수 있다는 이유로 채택하지 않았다. 이미 전투 이전부터 일본인 보호는 사실상 포기했다고 할 수 있다. - P79

"어이, 여기 사람들이 왔다‘라고 하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에 돌았다. 그 사람들에게 들었더니 현지 소집된 거주 일본인은 패전 직후에 제대해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제대증명서를 내줄 테니 군에 적을 두었던 사람은 출두하라는 통지가 와서 현지 경찰서 앞에 나갔더니 무장한 소련군이 베이링까지 호송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소련군에게서 이송할 인원의 규모를 지정받은 일본의 군대조직이 사람 수 확보를 위해 재소집한 것 같았다. 그들은 베이링에서 지급된 일본군 군복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부인에게 장 좀 봐달라는 부탁을 받아 나선 김에 출두해 베이링 집결지에 끌려와 그대로 시베리아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다.(중략)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 중에는 이상하다고 생각해 통지를 무시한 사람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은 적었다. 정직한 사람일수록 윗사람을 믿어 걸려들어 버렸다." - P84

열차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짊어지고 옮긴 그룹도 있었다.
"시체를 포로에게 옮기도록 한 것은 사람 숫자를 확인하기 위한 것일 거다. 소련군의 수송지휘관은 화물열차에 실은 포로를 확실하게 수용소에 이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시체를 포함해 확실히 옮긴 뒤 수용소 소장에게 사람 숫자를 확인받고 수령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소련군도, 일본군도 군대는 그런 곳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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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김가게가 문을 닫은 직후 도키오카는 오카야마에 징병검사를 위해 귀향했는데 거기서 결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징병관은 결핵이라서 징병검사 불합격이 된 그를 "(결핵에 걸린 것은) 당신이 충성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그는 그대로 오카야마의 본가에 머물러 있다가 1944년 여름에 죽었다. - P45

이 교사의 이야기 중에 특히 겐지의 인상에 남았던 것은 ‘신문은 하단부터 읽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언론이 통제되어 신문 지면에는 일본이나 독일의 승리라는 인상을 주는 제목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시오 선생의 충고대로‘ 읽고 있으면 다른 면이 보였다.
"국제면이 특히 그랬지만, 신문에서 큰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 1편의 상단에는 독일 승리 기사가 실려 있다. 그러나 아래쪽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독일의 불리한 상황을 전하는 기사가 작게 나와 있었다. 기자도 그런 형태로 관심을 보도하려고 했던 것일 테다. 시오 선생은 ‘신문에 읽혀서는 안 된다. 신문의 이면을 봐라‘라고 말했다. 이 습관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 P48

후지통신기는 그렇지 않았지만 당시는 급여뿐 아니라 직원과 공원은 문조차 따로 쓰는 기업도 적지 않았다. 패전 후에는 이런 ‘직공 차별‘의 철폐가 노동운동의 큰 주제가 된다. - P52

"젊은 현역병을 배용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인생경험이 있는 나이 든 군대가 소집되자 화려한 벌을 해도 본인도 가족도 기뻐하지 않는다. 울면 ‘비국민‘으로 비난받기 때문에 그러지는 않지만 기뻐할 이유가 없다. 주변에서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송별 같은 건 하지 않게 되었다." - P54

"당시는 관료나 고급군인이 아닌 서민에게는 연금제도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동안에 가능한 한 저축해 노후에 대비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그랬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그런 인생설계는 전부 파탄이 났다. 아버지가 만약 그것을 예측할 수 있었더라면 홋카이도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 자체가 파탄 나는 것 같은 엄청난 시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은 지금까지 인생의 연장선에서 세상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 P57

"나는 전쟁을 지지했다는 생각도 없었고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휩쓸려간 것이었다. 큰 전과를 올렸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는 점점 형세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뭔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이상 깊이 생각하는 것도 몸에 배어 있지 않았고 그를 위한 정보도 없었다. 우리 일반인들은 모두 그런 식이었던 것 같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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