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편리한 삶만이 아니라 사치를 누리는 삶도 인간 권리에 포함된다는 관점에서 이야기를 해나가야 한다. 문제는 무엇이 시대에 맞는 사치인가 하는 점이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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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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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흥미진진한데 오타가 상당히 많고 번역이 좀 거칠어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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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하자면, 상나라가 개국하고 100년 동안 왕실은 많은 인신공양제사를 시작해 옌스와 정저우의 상성에 있는 궁전 구역에 제사 흔적이 밀집해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 제사에 희생된 사람의 수가 민간 제사의 그것을 훨씬 초과한 것은 바로 상 왕조의 국가 종교가 인신공양제사를 정해진 형식으로 삼았음을 나타낸다. - P205

상나라 사람들의 인신공양제사라는 종교 행위는 그들의 복잡한 유래와도 관련이 있다. 하나라를 멸한 초기에는 여러 문화에서 온 집단이 융합하여 신흥 왕조의 ‘상‘이 되었고, 이런 이유로 그들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종교 문화를 구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희생으로 바치는 제사는 가장 뚜렷하고 간편한 방식이었다. 그것을 빌려 제사를 집행하는 ‘우리‘(상)와 제사에 바쳐지는 ‘그들‘(상이 아닌 이들)을 구분하고, 이를 통해 상족은 유일무이한 우월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은 ‘야만‘의 이족을 신들과 선조에게 바치는 방식으로 하늘의 축복과 보우를 기원하고, 그것을 통해 대지에 군림하면서 여러 부족을 통치할 칼자루를 획득했던 셈이다. - P206

얼리터우-하 왕조의 인신공양제사 유적도 그다지 많지 않으며, 게다가 왕실의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민간에 비해 적었다. 이런 정황은 상나라 초기까지 지속되었는데, 다시 100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그런 제사 행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결국 신석기시대 말기에서 상나라까지 인신공양제사는 비교적 보편적인 문화 형태였다. 특히 창장강 중류 지구가 여기에 해당되었다. - P227

판룽청의 상나라 사람들은 중원의 전통적인 인신공양제사와 인간을 매장하여 건물의 기초를 다지는 종교의식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중원보다는 평화로운 그 지역 토착민의 종교이념을 받아들였던 셈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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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제이콥스‘라는 라벨이 진정한 그런지 패션의 명예를 실추시킨 격이었다. 하위문화가 고급문화로 변신하는 순간 하위문화에 숨어 있던 저항의 가시도 사라진다. - P107

만일 갤러리 라파예트를 비롯한 패션업계에서 그린 워싱 대신 ‘그린 액션‘을 실천한다면 이는 곧 이들의 사업모델이 끝장남을 뜻한다. 패션이란 끝없이 새로운, 그리하여 결국에는 과도한 소비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 P111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탄소 배출량에서 패션업계의 비중은 연간 120억 톤 이상으로, 국제 항공교통과 상선 운행을 통틀어 발생한 수치보다도 더 많다. 기업 컨설팅 회사 맥킨지(그린피스가 아님!)의 계산에 따르면 의류 1킬로그램어치를 생산하는 데 평균 23킬로그램의 이산화탄소가 배출된다. 한 번 신고 버리려고 양말을 살 때마다 북극 얼음 한 조각을 지불하는 셈이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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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부자들은 사치를 포기하는 것을 사치의 정점으로 여긴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에서 트레킹을 하고, 캠핑 사파리에 도전하고, 탁 트인 하늘 밑에서 잠을 자고, 캐노피 앤 스타스 같은 힙한 여행사이트에서 예약 가능한 원초적 생활을 흉내 내는 경험을 하는 데 엄청난 돈을 지불한다. 반면 지갑이 얇은 계층에서 오히려 값비싼 호텔을 잡아 휴가를 보내는 일이 흔해졌다. 요즘 호화 호텔 앞에 여행사 버스가 서 있다면, 과거 이 호텔에 묵었던 고객들은 글래머러스 캠핑, 즉 ‘글램핑‘에 나선다. - P90

가장 뛰어난 혜안을 보여준 것은 빈프리트 크레치머라는 한 남성의 글이었다. 그 글에는 그림 형제의 친구였던 본 출신 시인 카를 짐로크Karl Simrock의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이 들어 있었다.

로마와 아테네, 라플란드에서
우리는 구석구석 살펴보기 바쁘다네
허나 정작 우리 조국에서는
눈 뜬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돌아다니는구나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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