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된 뿌리 하나가 땅속 깊이 박히면 몸통의 튼튼한 가지도 하늘 높이 뻗기 시작한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에서 그들은 서로 만난다. - P455

한 가지 사물의 문은 사람에게 한 번씩만 열리는 모양이다. 그 문으로 들어가본 사람은 그 사물의 진상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 된다. 그 뒤로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그 사물을 알 수 있다. 진짜 모습은 전해질 길이 없다. 전언자를 통해서 보는 것은 그저 전언일 뿐이다. 그것은 이미 다른 사물이다. - P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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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오래되면 그 길을 걸어가 떠나버린 사람도 너무나 많아진다. 그러나 발자국은 가버리지 않는다. 발자국은 사람 몸에서 떨어진 나뭇잎이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떠나 시간 속에서 홀로 나부낀다. 나부낄수록 멀어지고 또 잠잠해진다. - P405

황사량에서는 서른이 넘으면 눈을 감고도 살아갈 수 있다. 불안하다면 칠팔 년쯤 지나 눈을 떠보면 된다. - P407

이 마을은 참으로 운이 좋다. 운 좋게도 똑똑한 사람들이 다 떠나버렸다. 똑똑한 사람이 촌장을 맡았다면 마을은 일찌감치 탈바꿈했으리라. 그는 보기 흉하게 쓰러져가는 담장과 집을 모조리 헐고, 낫처럼 생긴 황사량 마을을 직사각형이나 정사각형으로 정비했으리라. 신품종 가축을 들여오고 인공 교배하여 집집마다 소를 다른 품종 소로, 닭을 다른 품종 닭으로 바꿔놓았으리라. 어느 집에도 검은 소나 이마가 하얀 황소가 없을 것이다. 수수닭도, 등은 붉고 배는 하얀 닭도, 잘생긴 잡털 닭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마을은 진짜 끝장인 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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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뎬네 집은 예전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벽의 절반이 땅속으로 들어갔다. 집이 수십 년간 한 자리에 서 있으면 땅을 몇 자 가라앉히는구나 싶었다. 사람이 평생 한 곳을 걸으면 땅에 구덩이가 패듯 말이다.
많은 집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한 해 한 해 땅속으로 꺼져든다. 문과 지붕이 하루하루 낮아져 처음에는 사람이 고개를 쳐들고 드나들지만 나중에는 허리를 굽혀야 한다. 많은 사람이 늙어서 허리가 굽고다리가 훨 때까지 산다. 사람이 곧게 뻗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머리 위 지붕이 짓눌러서 그렇다. 하늘마저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사람이 무슨 방법이 있겠나. 억울해도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 P366

나는 황사량에서 자란 나무였다. 내 가지가 어디로 뻗어가도, 울타리와 담을 넘어 다른 곳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도 내 뿌리는 여전히 황사량에 있었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도 없고, 나를 바꿀 방법도 없었다.
그들은 내 가지를 다듬고 가장귀를 자를 수 있지만, 내 뿌리에는 손댈 수 없었다. 그들의 칼과 도끼는 황사량까지 뻗치지 못했다.
누군가와 내가 서로 아무리 오래 알고 아무리 친분이 깊다 해도 그가 내 고향에 가보지 않은(그곳을 알지 못하는) 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역시 낯선 사이였다. - P396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젠가 그 마을의 왁자한 소리 속에 다시금 내 소리 한두 마디를 더할 수 있을까. 음메 소리 뒤에, 문 두드리는 소리 앞에, 아니면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소리 사이에......
갑자기 그 속에서 내 소리를 듣고픈 갈망이 치솟았다. 더없이 작디작은 소리라 해도. 있다내 소리는 이미 그곳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 P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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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우리가 진정 찾으려던 것,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은 지금 이 시각의 모든 삶이었다. 그것은 사라졌고 이제 잊혀가고 있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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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릴 때 나는 대지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일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알려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미래라는 곳을 향해 정신없이 달린다. 맨 앞에서 달리는 것은 번화한 대도시, 바짝 뒤쫓는 것은크고 작은 도시, 그 뒤로는 마을이 성깃성깃 따라간다. 황사량은 너무 작아서 성큼성큼 걷지도 못하고 꽁무니에 처져 있다. 모두를 위해 후방을 엄호하는 중책이 자연스레 이 작은 마을로 넘어왔지만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른다. - P226

이리저리 날아다닌 끝에 잠자리가 다다른 곳은 저녁 햇빛이 내려앉은 흙담이다.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닌 끝에 사람이 늘그막에 이른 곳은 황혼에 잠긴 부서진 담장 아래다. - P230

어쨌든지 간에 내가 진정 알고픈 일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우리 곁에서 자라고 늙어 죽은 검둥개의 눈에 우리 가족의 삶은 어떤 정경이었을까, 우리의 이런 삶이 재미있어 보였을까. - P245

수확량이 많든 적든 가을 들판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마치 세월이 흐른 뒤의 자신을, 시든 몸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가을바람 속에 서 있는 자신을 보는 것만 같다. 수많은 가을 수확을 거치고 나면 사람은 자신의 마지막 작물이 된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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