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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국 정부는 수백만 명의 전직 군인을 이 지역 북부로 이주시켜 군대 점령지에서 농부로 일하도록 했다. 신장생산건설단의 일원이었던 이 정착민들은 경제적 대책과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어우러져 국경지대로 오게 됐다. - P14

위구르족이 이 지역 남부에서 누렸던 상대적 자율성은 중국이 수출주도 시장경제로 전환한 1990년대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됨에 따라, 석유와 천연가스 그리고 종내는 면화와 토마토가 신장 경제의 기둥이 되었다.(중략)지난 30년간 신장은 상하이와 선전 등 대도시의 수요에 조응하는 전형적인 주변부 식민지의 역할을 해왔다. 다른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은 대체로 신경제의 가장 수익성 좋은 방향에서부터 배제됐다. 정착민 경제가 생활비 상승을 촉발하게 되면서, 도시와 자원 부문의 팽창은 위구르족 가구에 점차 더 많은 압력을 가했다. 일부는 산업 규모의 목화 농장에서 소작농이 되었고, 대다수는 건설업이나 다른 부문에서 저임금 이주노동으로 밀려났다. - P15

위구르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에서의 엄격한 정착민 우대조치는 커다란 반감을 야기했다. 광범위한 채용 차별과 토지 몰수, 종교적 관례에 대한 정부 통제의 증가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걸쳐 일련의 시위와 폭력적인 탄압을 유발했다. 이는2009년 한족 노동자들에 의한 위구르족 노동자 린치에 대응한 위구르족 학생 시위가 무장 경찰의 실탄 사격을 촉발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이에 맞서 위구르인들이 우루무치 거리에서 폭동을 일으켰는데, 130명 이상의 한족 민간인이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그 후 몇 달간 지방정부는 지역 전역에서 군사적인 "고강도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위구르인 수천 명이 사라졌고, 경찰의 야만성과 국가 통제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 P16

중국 당국은 "테러와의 인민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유럽과 북미의 국내 대테러 작전과 달리, "인민전쟁"은 위구르족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에서 한족 정착민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초법적인 집단 억류 프로그램으로 치달았다. 소수의 범죄자를 표적으로 삼기보다는 신장 내 1,500만 명의 전체 무슬림 인구를 대상으로 한 이 캠페인은 이슬람 관습과 많은 위구르 카자흐의 문화적 전통을 범죄화하는 데 기여했다. 초기에는 종교 지도자들만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2017년에 이르러 테러와의 전쟁은 위구르인이 이슬람교도가 되는 것 그리고 얼마간은 위구르인 혹은 카자흐인이 되는 것 자체를 방지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 P19

중국 당국은 2017년부터 150만명에 달하는 위구르족, 카자흐족, 후이족 사람들을 중간 수준에서 최고 수준의 보안을 갖춘 "재교육 수용소에 배치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종교 소수집단을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 수용소이다. 300여 개의 수용소와 그 밖에 새롭게 건설되거나 확장된 초법적 구금 시설들로 이루어진 이 군도의 존재는 정부의 입찰 계약과 위성 사진, 연구자 방문, 과거 수용됐던 사람들과 전직 수용소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입증되어 왔다. - P22

감시 시스템 스스로 예비 범죄라는 유죄추정[의 원리]을 만들어냈다. 시스템이 이러한 주장을 지어냄에 따라, 많은 무슬림이 국가 프로그램에 대한 충성의 가면을 써서 그들의 도덕적 이의를 숨기게 되었다. 가면이 없던 사람들은 수용소의 불빛과 카메라 아래에서 인간성을 말살당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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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에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을 제기했을 때 의도했던 것은 일본의 역사를 동아시아와의 공통성이라는 시각에서 보려고 한 것이었다. 일본의 역사학계는 오랫동안 일본의 역사를 서구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하려고 애써왔다. 그것은 역사인식에 있어서의 ‘탈아‘적인 경향이라고 할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을 비판하는 데 있어 소농사회론이 아주 주효했다. 그 핵심은 1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집약적인 벼농사 농법을 기반으로 소농들이 생산을 주도하는 사회가 등장한다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주목한 것이었다. - P91

지금까지의 근대사 연구는 19세기를 분기점으로 삼아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한국, 중국의 종속화라는 큰 틀로서 파악하려 하는 연구가 그 대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19세기 패러다임을 극복해서 21세기의 현실에 맞는 패러다임을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 P94

동아시아 각국에서 작성된 토지대장에는 강한 공통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통성을 만들어낸 요인으로서, 특권적인 토지 지배의 부재, 바꾸어 말해 토지에 대한 지배가 국가에 집중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었다. 다만 일본 근세의 경우 중국이나 한국과는 달리, 토지 지배가 국가에 집중되었다고 할수 없는 면이 있다. 극히 일부의 상층 무사인 쇼군, 다이묘, 하타모토, 고케닌 및 그 신하의 일부 등은 독자적으로 영역 지배를 했고, 중세보다는 한층 토지 지배가 단순화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국가에 완전히 집중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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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근대 이행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 전체를 시야에 놓고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덧붙여서 말한다면 일본인으로서 한국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이 동아시아와의 공통성을 중심으로 일본의 전통사회를 파악함으로써 일본사 연구에서의 탈아적 경향을 극복하기 위한 가설이기도 하다. - P43

소농사회라는 것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거나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빌리거나 간에 기본적으로 자신과 그 가족의 노동력만으로 독립적인 농업 경영을 행하는, 그러한 소농의 존재가 지배적인 농업사회를 지칭하는 말이다. 자신과 그 가족 이외의 노동력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이러한 소농사회는 얼핏 보면 시대와 지역에 관계없이 극히 보편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지만, 17~18세기의 동아시아에서처럼 소농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사회는 오히려 예외적이다. - P49

동아시아에서 소농사회가 성립함과 더불어 형성된 사회구조의 여러 특징은 종래 ‘전통‘이라는 말로 일괄적으로 통칭되어왔다. 그리하여 전통과 근대,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에 좀 더 높은 가치관을발견할 수 있는지의 구별은 있더라도, 이 둘을 대립시키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사회과학과 인문과학의 전제가 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첫 번째로, 전통이란 것은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본다면 지극히 새로운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결코 아주 오래된 옛날부터 존재해온 것이 아니라14~17세기에 걸쳐 일제히 형성된 것이며 세계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근대로 이행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전통은 근대에 의해 해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이며 전통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근대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때로는 강화되기도 했다. 원래 전통이라는 것이 의식된다는 것 자체가 그것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의미 있는 것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의 오랜 기간에 걸친 사회변동을 거시적으로 볼 때, 그 최대의 분수령은 전근대와 근대의 사이가 아닌 소농사회 성립의 전후에, 달리 말해서 전통의 형성 이전과 그 이후 사이에 두어야 한다. 그리하여 1990년대 중엽이라는 현재의 시점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소농사회 성립기에 필적하는 제2의 대전환기의 출발점에 해당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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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한국이 북한처럼 "다양한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 독재국가라면 모를까, 한국은 빛나는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자랑하는 사회이자, 다양한 견해가 충돌하여 격렬한 마찰과 대립을 펼치는 역동적인 사회이다. 한국 사회가 갖는 역동성은 일본 사회보다 훨씬 큰 역동감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동적인 민주주의 한국 사회에서 아직 일본에 관한 담론에서만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특별한 관계, 그러니까 일본에 관해서만 사고가 정지되는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 P131

지금 일본 사회는 "남은 어차피 남이다"라는 생각이 극한에 달하여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봤자 시간 낭비라는 인식만 가득하고 말았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달성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다. 일본 사회는 명백히 생명력을 잃고 있다. - P132

자기 진영을 존속시키기 위해 ‘사악한 타자‘가 반드시 필요한 세력이 한국과 일본에서 상호의존하고있는 것이다. - P135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한국이라는 대상을 너무 이데올로기나 이념을 통해 인식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와 이념을 통해 이해되는 대상은 언뜻 보기에 매력적이지만 어디까지나 피상적으로 이해될 뿐이며 이윽고 독자나 관객은 그러한 ‘겉모습‘에 질려 떠나고 말 것이다. - P142

한국인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일본에 나쁜 인상을 갖는 이유‘의 1위로 "한국을 침략한 역사를 올바르게 반성하지 않으니까"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결과가 나옵니다(예를 들면 일본의 언론NPO와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소가 공동으로 시행하는 매년 ‘한일공동 여론조사‘), 한국 사회에 계속 살고 있으면 당연히 이러한 인식을 갖습니다. 하지만 일본인 쪽에서 말하자면 "일본이야말로 세계에서 식민지 지배나 전시 여성 인권 유린 문제에 정부가 처음으로 공식 사죄한 국가다"라는 사실의 ‘무게‘를 한국 쪽이 전혀 이해해주지 않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낍니다. "일본인은 독일과 달리 역사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다"는 스테레오 타입의 말을 들을 때마다 대체로 일본인은 강한 위화감을 느낍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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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차치하고.. ˝정말 그대로였다˝는 번역을 한 거냐 만 거냐. 원문이 아마 소노토오리..일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정도로도 번역을 안 하다니...

대통령이 된 후에는 ‘불통‘이라는 악명을 얻고 청와대에서도 거의 혼자 식사를 하는 ‘혼밥‘였던 점이 인기 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그녀야말로 옛날 방식 ‘일밥‘을 거부하고 여성이 ‘혼밥‘을 즐기는 시대의 선두에 선 "멋있는 여성"이라고 한다. 지금의 한국인에게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말이지만 5년 후에는 많은 한국인이 "정말 그대로였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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