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는 자신은 물론 국민당과 국민에게도 전쟁이 몇 주 혹은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걸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비토록 했다.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들은 여전히 중국 북부와 상하이에서의 사변‘이 활활 타오르다가 결단만 내리면 꺼뜨릴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를 전쟁터로 만든 목적은 두 개의 전역이 하나의 전쟁에 속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상하이를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중략)
그러나 상하이에서 싸우는 것은 국내와 국제 어느 쪽이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이제는 전쟁이 국가 전체의 싸움이 되었다. 그 전까지 만주의 문제는 중국의 주권과는 별개로 여겨졌고 구호만 요란할 뿐 행동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베이핑 주변의 중국 북부조차 상하이가 있는 창장 삼각지의 인구 밀집지대에서 본다면 와닿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 또한 중국이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여러 권력의 이합집산임을 강조할 요량으로 분쟁을 ‘북지나 사변‘이라고 불렀다. 이제 장제스는 중국 북부가 공격받는다면 남쪽이 앙갚음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중국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했다. 장제스는 전쟁을 상하이로 불러들여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제스가 가장 바라는 일은 전쟁에서 외국의 협력을 얻는 것이었다. 그는 일기에 자신의 희망을 적었다. "모든 나라가 일본에 분노하고 미국과 영국이 나서도록 압박할 것이다. "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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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부터 1935년까지 일본은 만주를 차지했다는 데 만족했다. 국민당의 중국은 국경에서 만주국을 마주보면서 적어도 한동안은 공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1935년부터 중국 북부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다. 일본이 중국 전체를 자신들의 영토로 여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장제스는 일본이 중국을 완전히 집어삼킬 때까지 멈추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만약 지금 맞서지 않는다면, 그런 순간이 곧 닥치리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확실히 곧 도래할 것이었다.(중략)
그러나 일본에 도전하는 것은 국가적 자살이나 다를 바 없는 매우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장제스는 국제사회의 도움을 거의 기대할 수 없었다.
1937년은 세계적으로 어두운 해였다. 유럽에서는 전체주의 정권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한층 강해졌다. - P90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달리, 일본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처럼 개인적인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한 사람이 외교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인과 군대, 일반 국민들이
‘전쟁 열풍‘에 중독되어 있었다. - P92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에게 허용한 모든 양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군대를 가져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이 합법화되면서 서북부에 근거지를 둔 공산군은 ‘제8로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P102

마오쩌둥은 전쟁을 앞두고 국민당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대신, 공산당이야말로 ‘진정한‘ 애국 정당이며 장제스에 대해서는 유화적이면서 나약하고 판단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 P105

7월 말부터 8월 초 사이 후스는 장제스에게 만주국의 승인을 건의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숨 돌릴 시간을 좀더 확보할 수 있으며, 일본이 전쟁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물리적 충돌과 거리가 먼 사업적 이익에 눈을 돌리도록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장제스가 중앙군을 건설할 시간을 좀더 확보해서 쉽게 패배하지 않을 군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후스는 지금의 일보 후퇴가 50년의 평화를 보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107

마오쩌둥은 국공합작 직후인 1937년 8월 22일 산시성 뤄촨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주요 지휘관들에게 "우리에게 항일은 당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호기다. 역량의 70퍼센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 데 써야 한다. 20퍼센트는 국민당과의 합작에, 10퍼센트는 항일에 써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이것은 마오쩌둥이 그동안 강조했던 항일의 의지를 의심케 했고 항일을 빙자하여 본격적인 세력 확장에 나서겠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를 보여주었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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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톈우의 수기 묘보설림 12
솽쉐타오 지음, 박희선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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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평생 기억할 수 있는 말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 그냥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일 뿐이야."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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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은 전간기에 있었던 가장 악명 높은 외교사건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조성된 불안정한 평화를 산산조각낸 군국주의 정부가 저지른 도발 행위 중에서 첫 번째 사건이기도 했다. 또한 1931년의 9·18사변은 장제스의 국민당이 통치하는 중국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었다. - P62

난징의 장제스 정권은 큰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국민정부는 심각할 정도로 인권을 침해했다. 반정부 인사들은 수시로 체포되거나 살해되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에게 잔인했다. 또한 국민당 조직은 부패가 심했다. 지방 관료들은 농민에게 비공식적인 특별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착취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최고의 기회를 제공했던 국민정부의 가장 큰 실패는 농촌 지역의 극심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국민당 권력은 도시의 공장이나 광대한 농촌에서 경제적 기득권을 가진 부유한 엘리트들과의 관계에 의존했다. - P62

왕징웨이는 권력 구조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북벌 동안 자신의 권력을 강탈한 장제스를 결코 잊을 수 없었던 그는 장제스 집권 초기 3년 동안 국내외 반 장제스 세력들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를 무너뜨리려 했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왕징웨이는 강력한 북방 군벌 펑위샹, 옌시산과 연합했다. 1년 뒤에는 왕징웨이와 장제스의 또 다른 경쟁자 한민 사이에서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 쑨원의 계승자는 자신의 유산을 남에게 내주기를 거부했다. - P67

이론적으로 왕징웨이는 국민정부의 주요 행정 부서를 책임졌지만, 군사적 권한은 전혀 없었다. 장제스는 정적인 왕징웨이에게 아무런 자율권도 주지 않으면서 정부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왕징웨이 집단의 ‘개조‘는 적어도 국민정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장제스는 이제 명실상부한 지도자가 되었다. 왕징웨이는 매장되지는 않았지만 굴복했다. - P70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기로 결정했음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그들 대부분은 만주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장시성에 있었다. 장제스와 달리 중국공산당에게는 일본의 위협에 맞서라는 어떠한 요구도 없었다. - P71

비록 중국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군사적 대비를 해야 했다. 이러한 전후관계를 고려하면, 장제스가 중국공산당을 비롯해 지방 군벌들과의 지속적인 싸움을 택한 것은 이유가 있는 결정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이유로건 통일에 반대하는 것은 외세의 위협에 직면한 국민정부의 역량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많은 사람이 일본의 위협에 직면한 장제스가 (일본과 싸우는 대신) 중국공산당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비난했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그가 싸움을 멈춘다면 상대편 또한 그렇게 하리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겨우 10년 전 마오쩌둥은 자신이 국공합작에 가담하고 있으면서도 국민당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중국공산당의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밝힌 바 있었다. - P71

1932년 신중한 화해 뒤에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국방 강화 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친일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여전히 열렬한 민족주의자로서 활기차고 독립된 중국을 보고 싶었지만, 항전을 시작하기에는 중국의 군사력이 너무 약하다는 장제스의 신념을 공유했다. 또한 중국이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중략)
왕징웨이는 대부분의 중국 민족주의자처럼 모든 외세 제국주의를 적대행위로 간주했다. 그는 중국 영토에 식민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 영국이나 미국과의 동맹이 일본과 손을 잡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고 여겼다. 최소한 일본은 중국과 문화적인 휴대감은 있었다. 왕징웨이는 일본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지지해야 하는(어쨌든 정부 방침이었다) 분명한 위치에 있었고 대중이 보기에 그는 비한 바 없는 친일파였다. 이로 인해 미움 받는 대상이 되었다. - P74

오늘날 중국에서 장쉐량은 대원수(장제스가 일본의 ‘진짜‘ 위협은 못 본 척하면서 같은 중국인인 중국공산당과 싸우기를 고집했던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애국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장쉐량이 장제스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납치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는 장쉐량의 동기는 더 단순했다. 장제스가 자신을 군사령관에서 쫓아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를 살려준 가장 큰 이유 또한 간단했다. 중국 지도자들 또한 장제스가 죽거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오쩌둥 같은 중국공산당 최고 지도부 간부들은 장제스가 체포된 후 처형되기를 강하게 원했다. 그러나 산시 군벌 옌시산처럼 과거 장제스와 싸웠던 군벌들을 비롯해 다른 지도자들은 좀더 신중했다. 만약 장제스가 죽는다면, 중국을 통치하는 데 그의 권위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 P80

장제스 납치 사건은 중국의 모든 시선을 집중시켰다. 장쉐량이 국공간의 담판이 사실상 합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결코 장제스를 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쉐량은 장제스와 마오쩌둥,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 사이에서 진행된 비밀 협상과 때때로 모순적이었던 전략 노선의 희생양이었다. 결국 저우언라이가 장제스의 석방 협상을 타결시켰다. 장제스는 각 당파의 항일통일전선을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대중에게는 마치 장제스가 항일 동맹을 강요당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합의 조건들은 장제스 납치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 이뤄진 비밀 합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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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위기에 대한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반응은 당시 수많은 동년배 젊은 남녀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1911년의 혁명 지지자였던 그들은 조국의밝은 희망이 군벌이라는 바다 속으로 사라져가는 현실을 고통스럽게 지켜봤다. - P46

1926년 6월 5일, 장제스는 국민당 군대인 국민혁명군을 공식적으로 장익했다. 역설적이게도 1912년 위안스카이의 강력한 군사력이 쑨원의 권력과 명성을 무력하게 만들었듯 이제는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쑨원의 실질적인 후계자(왕징웨이)로부터 승리했다. - P52

북벌의 큰 성공은 동맹의 좌파와 우파 사이의 긴장감을 증대시켰다.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장제스의 군사적 우위가 명백해지는 것과 비례하여 통일전선 내 공산주의자들의 존재에 대한 그의 혐오감도 점점 커졌다. 소련이 북벌 자금을 제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가 그들과의 동맹을 끝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가 왔을 때 권력의 균형을 깨뜨릴 계획을 준비했다. - P53

중국은 공식적으로 국민당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지역은 일부에 불과했다. 저장I, 장쑤 안후이를 비롯한 창장강 삼각주에 있던 성들은 장제스의 강력한 통제 아래 있었다. 그러나 난징에서 비교적 먼 지역은 국민정부의 통제력이 미약하게 미쳤다. 북벌이 군벌 시대를 끝내리라는 기대와 달리 많은 경우 국민당과 지방 군벌 사이에 불편한 합의가 있었다. 국민당은 자신의 힘으로 군벌들을 굴복시킬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 P54

중국에서 미국 선교사들의 존재는 유익한 문화적 교류를 가져왔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사고의 중심에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의 정치사상에서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인이 미국인처럼 되고 싶어한다는 널리 퍼져 있던 신념이었다. 정치 · 교육 · 종교 제도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인들을 가르치는 것은 미국인들의 숙제였다. (중략) 중국은 초보적인 단계의 미국이고, 기독교 국가로 이행 중이며, 잠재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낙관적인 시각이 형성되었다. 마침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전쟁 동안 미국과 중국 사이의 본질적인 충돌을 야기했다. 물론 국민당 스스로도 종종 중국을 서구식 자유주의 국가로 개조 중이라는 태도를 연출하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또한 미국인 방문객들에게는 세계 자유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자랑스럽게 서 있을 수 있는 신중국을 건설하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 P57

일본 지배층은 반제국주의적 구호를 외치는 장제스의 국민정부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했다. 그들은 국민당이 대중적 정당성을 가졌으며 중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이념적 과제를 가진 운동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장제스를 뇌물을 좋아하고 유약한 또 하나의 중국 군벌로 취급했다. 어떤 면에서 일본은 자신을 중국의 침략자가 아니라 친구 또는 조언자로 생각하는 제국주의자라는 점에서 미국과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청조가 멸망해가던 시절 중국 혁명가들의 진정한 천국이었고, 1913년 위안스카이가 중국의 신의회를 파괴한 뒤에는 쑨원의 도피처가 되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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