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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이 많은 요리점 힘찬문고 19
미야자와 겐지 지음, 민영 옮김, 이가경 그림 / 우리교육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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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기묘한 분위기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집 <주문이 많은 요리점>에는 모두 여덟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환상 속으로 빨려들어가기도 하고 전생의 인연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가늠해 보게도 된다. 그리고 인간과 함께 다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야생의 동물들을 나란히 등장시켜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모두가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한다.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불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고,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력이 느껴진다. 이것은 작가의 순수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이라 깊이가 있다. 이야기마다 군데군데 펼쳐지는 자연에 대한 묘사는 아름답고 생생하며, 작가의 자연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보인다. 눈이 많이 오는 고원지대가 그의 고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향의 험난한 자연 현상을 사랑으로 이해하며 새로운 이미지로 그려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꽤 낯설고 감각적인 분위기와 문체로, 신선하고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전생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생을 금하는 것을 덕목으로 하는 <기러기 동자>에서 작가는, '수리야'를 시켜 '무엇이든 목숨은 슬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문이 많은 요리점>에서는 동물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가는 인간(사냥꾼)에게 동물의 입장에서 정면으로 섬뜩한 경고를 하고 있다. 영국사냥꾼으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서방 강대국들의 무차별 식민지 개척에 대한 반감이 엿보인다.

전쟁에 대한 반감과 회의도 볼 수 있다. 수많은 목숨들이 사라지고 생명을 가볍게 다루는, 전쟁의 허상과 인간의 어리석음을 작가는 애통해하고 있는 듯하다. <북수장군과 의사 삼형제>가 그렇고 <까마귀의 북두칠성>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제발 미워할 수 없는 적을 죽이지 않아도 되게끔 빨리 이 세계가 변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저의 몸 따위는 여러번 찢어져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작가의 이런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에 대한 자비는, <켄쥬 공원의 숲>에서 한 바보스러운 아이 켄쥬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잘 알 수 있다. '과연 누가 지혜롭고 누가 현명하지 않은 지 알 수가 없군요. 단 어디까지나 완벽한 작용은 불가사의합니다. 이 곳은 이제 아이들의 영원한 아름다운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삼나무를 심어 훌륭한 삼나무 숲을 이루어 낸 켄쥬를 평가하는 말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을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으로 이 삼나무의 멋진 푸르름과 상쾌한 향기, 여름날의 서늘한 그늘, 달빛같은 잔디의 빛깔이 이제부터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짜 행복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지도 모릅니다.'

인간, 동물 그리고 식물, 이 모두는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이라는 이유로 나머지를 함부로 해도 된다는 권리는 없다. 이 모두는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공생 공존해야 하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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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간 개돌이 신나는 책읽기 1
김옥 글, 김유대.최재은.권문희 그림 / 창비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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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알록달록한 이야기들이 모여있는 이 동화집은 참 친근감이 든다. 어린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마음과 의외로 의젓한 마음이 나의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한다. 작가가 초등학교 교사라 그런지 그 또래 아이들의 심리를 잘도 읽고 있는 것 같다. 거기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들이 생동감 있어 좋다.

<책벌레>는 아이들이 흔히 거리감을 두기 쉬운 책(그것도 아주 두꺼운 국어사전)을 소재로 그곳을 집으로 삼고 살고 있는 책벌레들을 등장인물들로 하여 기발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먹자파와 연구파의 싸움을 보면서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연구파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집 책꽂이에 그냥 꽂혀있는 책들을 한번 펴보고 싶어질 것이다. 책벌레들을 만나고 싶을 테니까.

<학교에 간 개돌이>와 <내 귀여운 금붕어>는 각각 학교와 집에서 겪을 수 있는 아이들의 일상을 소재로 그들만의 소중한 비밀처럼 즐겁게 간직하고픈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가난해도 밝고 다른 목숨을 귀히 여길 줄도 아는 아이들이 나온다. <소중한 아이>에 나오는 아이는 또래보다 능력도 떨어지고 가정형편도 좋지 못해 따돌림을 당한다. 하지만 그 아이의 귀에 '넌 소중한 아이'라고 속삭여주는 선생님이 있으므로 살아갈 힘을 얻는다.

<모래 마을 아이들>은 짧은 판타지 동화로 보았다. 엄마의 과열교육으로 여러 군데의 학원을 다니느라 마음껏 놀이터에서 놀 시간을 빼앗긴 진이가 나온다. 그날도 바이얼린 학원에 가는 길에 모래놀이를 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놀다가 아이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가 된 후, 모래 마을에 들어가게 된다. 그 마을에서 진이는 모래 마을 아이들과 함께 만화영화도 보고, 불량식품도 먹어보고 학원에 갈 걱정일랑 할 필요도 없이 떠들고 논다.

모래 마을에 들어 갈 즈음의 시각이 네 시 삼십 분이었는데 그 마을을 나올 때 시각도 여전히 네 시 삼십 분이다. 이것은 판타지 동화를 이루는 장치 중의 하나이다. 억눌려 사는 아이들에게 판타지 공간에서의 시간은 영원한 꿈의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되돌아가더라도 모래 마을 아이들이랑 내일 또 놀 생각으로 진이는 씩씩해졌다.

<문이 열리면>에서는 부분적으로 이런 요소가 들어있다. 장사를 하러 나간 엄마를 방에 갇혀 기다려야 하는 어린 오누이에게 옷장 문은 둘만의 놀이터로 가는 비밀의 문이다. 옷장 속의 옷은 나무로 변하고 나무를 다 잘라 내고 다시 심는다고 옷을 죄다 방바닥에 던지기도 한다. 오빠는 숲 속에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되어 엄마가 먹으라고 놓고 가신 사과 두 개를 매달고 있다. 동생은 노란 부리를 가진 수다쟁이 새가 되어 옷장 속을 휘젓고 다닌다. 옷장 속이 놀이터와 골목길인 것처럼. 문이 열리면 그리운 엄마가 오는데, 좀체로 엄마는 오지 않고. 꿈길 따라 들려오는 엄마의 발소리에 아이들은 잠이 들려다 일어난다. 삽화의 아이들이 너무 귀여워 내 마음이 울컥한다.

아이들은 놀이를 잘도 만들어낸다. 방을 어질러 놓았다고 화를 내시는 엄마, 학원을 빼먹었다고 혼을 내시는 엄마가 있어도 놀이를 하고 있는 동안의 아이들은 모든 걸 잊고 그것에 푹 빠진다. 즐겁다. 해방이다. 그리곤 커간다. 어느 순간 쑥 커버린 아이를 만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룻밤이라도 캠핑을 가 억압하는 엄마의 손에서 놓여나 놀다 온 아이를 맞이할 때 같은 경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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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14
필리파 피어스 지음, 수잔 아인칙 그림,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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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동화에 대한 관심에 우선 잘 짜여진 기념비적 판타지 동화를 몇몇 고르다 이 작품을 만났다. 판타지 동화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는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수시로 넘다드는 묘미가 독특하다. 정원에 대한 세세한 묘사는 눈앞에서 그리는 듯하다. 앞뒤가 잘 맞아 떨어지는 구조는 물론이고 주인공 톰과 해티의 행복한 결말이 읽는 이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한다.

톰은 무료한 생활을 잘 견뎌내기에는 호기심 많은 남자아이다. 선의라 하더라도 고립된 생활을 하게된 톰은 갑갑한 현실로 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우연히, 이모집의 버려진 뒷마당에서 아름다운 신비의 정원을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해티라는 여자아이를 만난다. 해티도 억눌리고 답답한 현실로 부터 도망가고 싶은 불쌍한 생명이다. 정원이라는 공간으로 벗어나기에 성공한 톰은 그곳에서의 시간이 마냥 즐겁다. 우여곡절 끝에 현실을 되찾은 톰은 갈등이 해소되고 '되찾은' 현실에서도 비로소 즐거움이 기다린다.

13번을 치는 괘종시계 소리는 톰이 정원으로 갈 수 있는 신호이다. '열두 시 이후의 시간들은 통상적인 시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시간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시간, 통상적인 60분안에 끝나지 않는 시간, 끝이 없는 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톰은 시간의 작용에 대한 강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톰은 '토요일을 향해 흘러가는 통상적인 시간을 정원에서의 끝없는 시간, 즉 영원과 바꾸고 싶었던'거다.

정원에서의 날씨는 물론 정원에서의 앞뒤가 바뀌곤 하였던 시간의 순서까지, '다 바솔로뮤 부인이 꿈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려고 했는지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톰이 간절히 바랐던 것도 '바로 함께 놀 친구와 장소'였기에, 정원은 그들의 마음의 시간을 따라 펼쳐지는 자유자재의 무대와도 같다. 그것은 꿈과도 같은 간절한 바람이다.

해티는 어린 시절의 바솔로뮤 부인이다. 부인의 말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정원도 항상 변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래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라고 자조 섞인 말로 아이들에게 말하게 되겠지. 마음의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시간의 벽 따윈 애초에 있지도 않는 물리적인 선긋기가 아닐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톰이 시간의 작용을 이해하려고 생각을 거듭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 톰은 또 다시 생각했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시계 속의 천사는 그렇게 맹세했어. 하지만 언젠가 시간이 끝난다면, 시간 자체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야. 시간은 어쩌면 꼭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아니, 교묘히 피해 갈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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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보 까보슈 - 3단계 문지아이들 3
다니엘 페나크 글, 마일스 하이먼 그림, 윤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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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주인공으로 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라면 대개는 아이들의 관심을 끌게되어 있다. 그만큼 개는 우리들과 친근한 친구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주종 관계가 아니라, 좋은 친구 사이로서의 개와 사람의 관계가 어떤 어려운 과정을 거쳐 구축되는지, 이 책에서는 통쾌하고 흥미진진하다. 사건은 '개'의 기억을 따라 시간을 넘나들며 전개되고, 긴박한 순간을 묘사하는 현재시제의 문장은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 사실감을 더한다.

작가는 후기에서 '개를 길들이려고 하지 말고 개에게 길들여지지도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빚어지는 여러 행태들이 철저히 '개'의 눈으로 볼 때는 얼마나 모순덩어리인가를 깨닫게되면, 이 말의 의미에 조금은 가까이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까보 까보슈>에서 '개'로 이름지어진 주인공 개는,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 좋든 싫든 - 또 하나의 목숨있는 개체로 인식된다. 개의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 속에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목숨있는 것들이라면 굳이 개면 어떻고 고양이면 어떻고 사람이면 어떤가? 누가 그 위에 있을 수도 그 아래 있을 수도 없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개와 고양이는 서로 사이좋게 지낸다고 하지 않나?

사람이 아닌 '개'로 이름지어진 나 아닌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 우정의 집을 짓고 지켜나가려면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하다'고 작가는 적고 있다. '좋은 훈련이란 서로의 자존심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는 일이'며 '제대로 된 훈련사는 자기 자신을 훈련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스스로가 인간다운 품위를 지키며 행동하고자 한다면 자기곁에 사는 개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정의 규칙이다.'

'사과'라는 아이는 개를 '개'라는 그저 진실한 이름으로 지어 부른다. 더하거나 빼지 않고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그래서 존재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상징의 의미라고 할까? '개'가 '사과'의 변덕스런 행동을 이해하게 되는 것 또한 의미가 크다. 좋은 친구 '하이에누'의 말대로 '모든 애들은 다 사과같'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게된다. '개'가 관찰한 아이들은 하나같이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놀이를 바꾸고 관심사를 바꾸고 얼굴까지도. 마치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후닥닥 바꾸고 있다. 게다가 전혀 예상할 수도 없다. 순식간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고 만다.' 아이들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 결과 얻은 중요한 사실이다.

'개' 또한 편안한 생활에 스스로를 길들이지 않는다. '하이에누'와 '멧돼지'의 집에서 그런대로 걱정없이 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개는 두 친구를 떠난다. '왜냐고? 그건 중대한 질문이다. 아마도 하이에누의 말처럼 산다는 일은 아무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늘 변하는 게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어느 것에도 누구에게도 군림이나 종속이 아닌, '나'대로의 자존심으로 나답게 살아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 목숨이 있을까?

'개의 자존심이란? - '개답게 살아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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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눈 - 3단계 문지아이들 11
다니엘 페낙 지음, 최윤정 옮김, 자크 페랑데즈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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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은비아'. 소년의 이름이다. '소년은 이름이란,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동물원의 늑대나 마찬가지가 된다. 살아 온 이야기를 모르면 다른 동물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그저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푸른 늑대'. 한 쪽 눈을 감고 한 눈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는 이 늑대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어, 한 마리 짐승 그 이상의 존재이다. 소년은 늑대의 눈에서, 늑대는 소년의 눈에서 자신의 아픈 지난 이야기를 읽어낸다. 세상에 대해 한 쪽 눈을 감아 버린 푸른 늑대의 상처입은 마음과 눈, 그리고 힘든 삶을 살아 온 소년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서로의 눈을 통해 생생하게 투영된다.

사람에 의해 훼손된 이들의 삶은 '다른 세계'를 만나면서 치유된다. 아니, 그들의 눈에 서로 깊이 빠져들면서부터 이미 상처는 서서히 낫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어 주는 상대는 바라만 보아도 얼마나 가치있는 존재인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비밀을 지켜 주는, 아름답고 조용한 알래스카의 눈......' ' 그래, 맞아. 멋져. 이건 두 눈으로 볼 만한데.'

푸른 늑대는 이미 낫기 시작하고 있었던 한 쪽 눈을 '짜잔!'하고 뜬다. 고의로 한 쪽 눈을 감고, 세 개의 아프리카 이야기를 푸른 늑대에게 해 주었던 소년도 '짜잔!'하고 눈을 뜬다.'다른 세계'는 다름아닌, 그들이 잠을 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꿈꾸는 세계이며,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안식처다.

표지의 늑대와 아프리카 소년이 우선 독자의 호기심을 와락 자극한다. 원가 틀림없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리라 기대하게 만든다. 역시 다니엘 페나크의 상상력과 의외로 뭉툭하게 잘라버리듯 끝맺는 결말은 매력 덩어리이다. 가볍게 한 번 웃으며 무게있는 이야기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옮긴이의 말 중, 작가가 했다는 말이 퍽 인상적이다.
'만약 어떤 소설을 그 소설이 태어나게 만든 관념으로 요약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 작품은 소설로서는 실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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