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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씨의 죽음
원고 쓰고 막 자려다 김선일씨 죽음에 관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착잡함에 오늘도 다시 밤을 새는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희망적 관측이 흘러나와 기대를 걸었으나, 그 희망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가장 우려 했던 최악의 사태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비디오를 생각해 보십시요. 대한민국의 한 국민이 처절한 몸짓으로 절규하며 국가에 자신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 호소에 귀를 막고 국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추가파병에 변함 없다."

이라크 전쟁은 우리의 '안보'와 아무 상관이 없는 전쟁입니다. 대한민국이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고 우리의 생명이 더 위험해지는 것도 아니고, 군대를 보낸다고 우리의 생명이 더 안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아니, 외려 그 반대지요. 군대를 보내서 이미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목숨을 잃거나 생명의 위협을 느껴왔습니다. 이것을 저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안보'라고 부릅니다.

김선일씨가 납치된 것은 지난 17일이라고 합니다. 그 전에 납치가 이루어졌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 동안 파병 준비에 바빴던 노무현 정권이 자국민이 피납된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답니다. 미국도 이 사실을 한국 정부에 통보를 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 통보를 해줬는데 우리 정부가 추가파병을 발표하기 위해 일부러 모른 척 했다는 설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게 저들이 말하는 '안보'입니다.  

정권은 김선일씨를 납치한 사람들의 정체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약속대로 김선일씨를 잔혹하게 살해함으로써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드러냈습니다. 그 와중에도 정권에서는 무슨 자신감에선지 아주 신속하게(!) 파병 원칙을 재확인하고, 이라크의 서희, 제마 부대가 얼마나 cool하게 활동하는지 홍보할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상식적으로, 테러리스트들이라면 미국에 협조하는 한국군이 이라크 사람들 돕는 것을 고운 눈으로 보겠습니까?

2.

김선일씨가 납치당했는데도 어제 광화문에 모인 사람은 고작 2천에 불과했습니다. 선거법 위반 발언하다 탄핵 당한 노무현을 구하자고 수만이 모여든 반면, 국가의 부당한 파병으로 생명에 위험에 처한 김선일씨를 구하는 자리에는 고작 2천이 모였습니다. 그 많던 촛불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요? 노무현이 아니라 이회창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면, 아마 거리는 파병반대의 물결로 넘쳐났을 것입니다. 이게 정치의식입니까? 이게 민주주의입니까?

도대체 이런 전쟁에 반대하고, 파병을 결정한 책임자들을 비판하는 것도 죄가 됩니까? 소위 노빠들의 극성 때문에 파병반대 얘기하는 것도 '모험'이 되어버렸습니다. 파병에는 반대해도, 그 결정을 내린 노무현 정권을 비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파병 결정해놓고, 비난도 받기 싫다는 겁니까? 파병을 하되 비난은 받기 싫으면 정권을 한나라당에 넘길 일입니다. 그럼 우리의 비판은 한나라당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저 역시 원칙적인 평화주의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정당한 전쟁과 부당한 전쟁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프간 전쟁의 경우 9.11로 3천명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당했고, 그 범죄를 저지른 빈 라덴이 아프간에 있었고, 아프간 정부는 그의 신병 인도를 거부했고, 그 전쟁은 유엔의 승인을 받았고, 유럽의 여러 나라를 포함해 다국적군이 참전을 했습니다. 이런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이해를 해 줄 여지가 있습니다. 정치인으로서 그 정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라크 전쟁은 다릅니다. 후세인과 알카에다는 아무 연관이 없고,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고, 그래서 유엔의 승인을 받지 못 했고, 누가 봐도 명백한 침략전쟁입니다. 게다가 무차별한 미군의 사격과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이라크 민간인들이 희생당했고, 포로로 잡힌 이라크의 군인들은 감옥에서 짐승 취급을 당했습니다. 이런 전쟁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범죄'입니다. 왜 이런 범죄적인 전쟁에 한국군이 참여를 해야 하는지, 누가 제게 납득할 만한 이유 좀 대 주세요.

3.

김선일씨를 죽인 자들은 해방투사들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입니다. 무고한 인명을 살상한다는 점에서 부시와 똑같은 전쟁 범죄자들입니다. 그들은 규탄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파병할 경우 그들이 파병국 국민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파병을 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의 기본임무를 져버리는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무책임한 일을 청와대에 앉은 분들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져질렀습니다.

파병을 할 경우, 이와 유사한 일은 앞으로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적어도 파병 때문에 이라크와 그 주변 아랍국에 사는 우리 교민들, 거기서 활동을 하는 우리 상사원들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습니다. 이게 현 정권의 '안보' 정책입니다. 그렇게 제 나라 국민을 위험에 빠뜨려놓고, 도대체 우리는 얼마나 더 안전해졌을까요? 김선일씨 죽음으로 몰아넣고 자기 삶에 더 안정감을 느끼는 분들 계시면 한번 나와 보세요.

김선일씨가 당한 비극은 언제라도 '나'의 불행, 내 가족의 불행, 내 친구의 불행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선일씨의 부모도 파병에 찬성했다지 않습니까? 설마 자기 자식이 거기에 희생당할 것이라 꿈앤들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저마다 다 그건 남의 일이라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불행은 불행하게도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안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희생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김선일입니다.

"한 사람 잡혀간다고 파병철회하는 나라 있냐?" 이게 정부여당의 일반적인 분위기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한나라당 애들이야 원래 그런 애들이라고 치고, '개혁'을 외치는 정부여당까지도 이런 무서운 생각을 서슴없이 내뱉는 상황입니다. 어떻게 이런 분들에게, 어떻게 이런 나라에 우리의 생명을 맡겨놓을 수 있습니까? 파쇼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전체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납치된 상황에서 버젓이 저런 발언할 수 있는 저 대담함, 저런 끔찍한 발언을 허용하는 우리 사회의 무감함, 그게 전체주의입니다.

4.

미국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을 배격해야 합니다. 하나는 NL류의 극단적인 반미 전민항쟁론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이익이 곧 우리의 이익이라 강변하는 극단적인 친미주의입니다. '한미동맹'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예, 중요하지요. 하지만 '동맹'이란 무엇일까요? 미국이 하자는 대로 간까지 빼주는 게 과연 '동맹'일까요? 그것은 '동맹'이 아니라 주종관계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통수권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노무현 대통령에게요? 아니지요. 국군통수권은 국군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부시가 갖고 있습니다. 부시는 대한민국 국군을 아무 데나 갖다 박을 수 있는 권한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왜? 노무현 정권이 부시에게 국군통수권을 양도했기 때문입니다. 주권을 수호해야 할 대통령이, 자기의 기본적 직무를 유기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조차 부시 정권이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해쳤다"는 비난이 나오는 판에, 제 나라 국익을 져버리고 진정한 동맹관계를 해치는 부시의 깽판에 장단 맞춰 춤이나 추는 게 과연 '동맹'입니까? 이것은 한 마디로 무능함과 나태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겁니까? 제 나라 국민이 이국땅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는 사태를 보고도 여전히 부시 눈치나 봐야 합니까? 이 나라에 도대체 외교전략이 있는 겁니까? 안보전략이 있는 겁니까?

파병철회해야 합니다.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국이라는 한국에서 파병을 거부할 경우, 부시 정권은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대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당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우리 역시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한미동맹' 좋다, 하지만 그 방식은 너희들 멋대로 정하게 놔둘 수 없다. 우리도 너희를 날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부시는 미국이 아닙니다. 미국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5.

김선일씨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와서 울부짖던 그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는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호소를 무시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점에 관한 한 우리 모두가 공범입니다. 파병을 결정한 이들은 주범이고, 파병을 묵인한 이들은 종법이고, 파병을 반대하되 힘있게 밀어내지 못한 모든 이들은 넓은 의미의 공범입니다. 앞으로 이런 비극적인 사건은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파병반대, 한국군철수를 위한 운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정치가 사람들의 의식을 개발시키는 게 아니라, 외려 사람들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킵니다. 선거를 앞두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중요한 사건이 터져도 사람들이 안 모입니다. 특정 정당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면 촛불도 켜지지 않습니다. 이게 그 잘난 인터넷 민주주의의 수준입니다. 어제 모인 2천 명, 그게 이 나라 평화주의 역량의 전부입니다. 바로 그래서 이런 비극적인 일을 막을 수 없는 것이지요.

박노자가 그랬던가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서 다행이라고.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다면 끔찍할 뻔 했다고. 배울 만큼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는 분의 정치의식이 이렇게 나이브합니다. 차라리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한국인 특유의 정치의식이 발동하여 아마 지금쯤 거리가 파병반대의 물결로 차고 넘피고 있을 겁니다. 아무리 정치에 환장을 해도 그렇지, 어떻게 시민들이 저토록 완벽하게 현실의 정당세력에 포섭될 수가 있을까요? 이럴 때는 정말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성급하게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아직 절망의 끝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저항하기를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쉽게 '열정'에 빠지는 사람은 아직 현실의 냉혹함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열정에 들떠 어떤 일을 하기는 쉽습니다. 그것은 창조력이 고갈된 가수가 대마초를 피고, 한계에 도달한 운동선수가 약물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진정한 가수는 대마초 없이도 상상력을 가질 수 있고, 진정한 선수는 약물 없이도 체력의 한계를 극복합니다. 진정한 저항은 섣부른 희망이나 뜨거운 열정 없이, 현실의 냉정함을 보고 존재의 밑바닥에서 힘을 끌어올리는 용기에서 시작합니다.

파병반대, 국군철수. 여당과 야당이 동조하고, 조중동의 지원을 받고, 김선일씨의 운명을 제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 수많은 무감함의 덩어리들에 맞서 싸우는 싸움입니다. 엄두가 안 나지요. 어제 MBC 저녁뉴스에 파병반대 움직임은 테러범들에게 놀아나는 것이라는 뉘앙스의 얘기를 하더군요. 그것을 들으며 얼마나 끔찍했던지. 하지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진정한 진보의 전선은 열우당과 한나라당 사이도 아니고, MBC와 조선일보 사이도 아니고, 한겨례와 조선일보 사이도 아니고, 바로 거기에 그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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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일백 2004-06-2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이는 거짓말 하지마라!
김선일씨의 죽음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죽음이 전벅으로 파병때문 이라고 강변하는 것은 흑심과 불순한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냉정하게 얘기하자. 정부는 김선일씨를 이라크에 강제로 보내지 않았다. 그는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고 출국과 해외로의 이동의 자유가 있는 대한만국 국민으로써 스스로 제발로 걸어서 이라크에 간 것이다. 이라크가 전쟁 중에 있으며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항이다. 그럼에도 김선일씨는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이라크로 간 것이다. 결과는 불행하게 끝이났고 정부는 거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일정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성황에서도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 한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이용 하여 정부의 잘못을 터무니없이 부풀리거나 왜곡하여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하게끔 몰아가는 것은 김선일을 두번 죽이는 일이다.
김선일의 호소를 정부가 무시하였다고!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그 주둥아리 놀리지 마라. 그렇게 없는 사실을 자신있게 주절댈 수 있는 너라는 인간의 배짱이 참 부러울 뿐이다. 적어도 책상머리에 앉아 글 몇자 끄적대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너보다는 현장에서 애간장 태워가며 한목숨 살리고자 노력한 그 사람들이 훨씬 진정성이 느껴진다.
까대기만 한다고 다 말이 되고 글이 되는 게 아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선동주의적 글쓰기는 당장에는 너를 통쾌하게 만들지언정 어느덧 그 선동주의라는 마약과 약물에 중독되어 너를 기필코 파멸시킬 것이다. 명심해라!
 
 전출처 : 쑥 > [퍼온글] 김훈-김규항-고종석의 문체에 대한 생각(1)

바로 앞 통신문에 계속 이어지는 내용이다. 이번 통신문에서는 문체에 대한 나의 몇 가지 생각을 적고자 한다. 먼저, 자신만의 독특한 얼굴 혹은 손가락을 가진 작가로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 사람이 김훈이다. 그는 소설가이기 전에 에세이스트였고, 에세이스트이기 전에 언론사 기자였다. 그는 자신의 직업과 표정을 그렇게 변화시켜가고 있지만, 나에게 소설가로서의 김훈은 좀 낯설다. 문학판의 각광에도 불구하고(그는 두번째 장편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첫번째 단편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런 건 그들만의 비즈니스이다. 작품이 있으니까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상이 있으니까 작품을 찾는 것이 문학/출판계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소설가의 손가락이 아니라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주제를 모른다거나 어리석은 것은 결코 아니다. 에세이로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는 밥벌이의 신성함을 누구보다도 지겹도록 맹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현재 오랜 기자생활을 그만 둔 그에게 소설쓰기는 그의 밥벌이, 즉 그의 비즈니스이다. 도둑질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게 아닌 이상 남의 밥벌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다. 그건 각자의 문제이다. 그래서 예컨대, 화장실 청소원에게 혹 그것도 밥벌이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을 넘어서 아주 무례한 일이다. 세상의 밥벌이에는 귀천(貴賤)이 없으므로.

 

나는 김훈의 에세이들을 숭배하지만(나는 그것들이 국어교과서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소설들은 아직 한편도 읽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들은 출간되자 마자 사들였지만(어떤 건 몇 권씩),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세 장편 소설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대했다. <빗살무늬>는 품절된 이후에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내가 샀는지 못 샀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며, <칼의 노래>는 대폭 할인할 때에야 싼 맛에 샀고, <현의 노래>는 사두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 왔다. 그러니 내가 그의 소설들에 대해서 말할 지분은 별로 없는 셈이다.

 

대신에 나는 북매거진 <텍스트>(2004 4월호)에서 <현의 노래>에 대한 두 편의 서평을 읽었고, 이 소설에 대한 그림을 대충 그려볼 수 있었는데, 그건 읽지 않은 상태에서 그린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이하의 인용은 모두 두 서평으로부터의 재인용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그를 잘 안다고도 말할 수 있다(하긴, 소설을 제외한 그의 글과 인터뷰 대부분을 찾아 읽었으니까). 단적으로 말해서, 장편소설이라고 표지에 박혀 있더라도, 그런 걸 세 권이나 냈더라도 그는 아직 단 한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건 에세이스트의 손가락이 쓴 역사 에세이이고, 혹은 그에 대한 판타지이거나 모노드라마들이다. 그건 박상륭의 잡설들이 소설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떻게 해도 감추어지지 않는, 그의 문체 때문이다. 흔히 아름답다 혹은 현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 말이다. 요컨대, 그의 문체는 소설이란 장르, 품위 없고 잡스러운 장르가 요구하는 바 일상적 디테일, 저자거리의 언어를 담기에는 너무 고상하며 품위가 넘쳐난다. 그래서 어색하다. 마치 장미희가 떡장사를 연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아무리 소설이요!라고 외쳐도 내겐 똑 사세요!로 들린다.

 

<텍스트>의 두 서평은 모노톤의 복화술(김용필)문체의 아름다움이 놓친 몇 가지(조은영)란 제목으로 돼 있는데, 서평자들이 지적하는 바나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나 같은 얘기이다. 그의 소설은 모노드라마이며, 문체의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망쳤다는 얘기니까. 조은영 기자의 서평은 그렇다면, 김훈의 진정한 3인칭 소설, 최초의 3인칭 소설은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라는 조심스러운 진단으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물론 신중함은 기자로서의 조건이다). 그는 3인칭 소설은커녕, 소설 자체를 쓴 일이 없고, 앞으로도 별로 쓸 일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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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6-2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의 노래를 읽고 답답하니 느꼈던 내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글이다. 진정한 이야기꾼의 소설은 아니라는... 불필요한 장식성의 모호한 문체가 걸림이 되고 있었다.
 

희원이가 적녹색약이란 걸 알게 된 건 2학년 때 학교에서 하는 신체검사 때였다. 그러니까 3년 전, 신체검사 후 무슨 용지를 가져와서 내게 주었다. 적녹색약으로 검사결과가 나왔으니 조만간에 가까운 안과에 가서 전문의의 소견을 정확히 받아와서 학교에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아이들 아빠가 적녹색약이긴 해도 여자아이들의 경우에는 잠재인자로 있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던데 희원이는 좀특이한 경우였다.

그 때 안과에서 하는 검사를 보니, 정말 신기하게도 내 눈엔 보이는 숫자들이 희원이 눈에는 안 보이는 것이었다. 적색과 녹색 계열의 점들이 불규칙하게 섞여있는 가운데에 있는 숫자가 전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공계나 산업디자인 같은 쪽으로는 진학을 하기 어려울 수 있겠다고 했다. 평상시에는 전혀 어려움도 없고 불편도 없다.

이번에 학교 신체검사 결과, 또 적녹색약이니 안과에 가보라는 진단을 받았다. 희원인 이 일에 대해 좀 과민하게 반응했다. 반에서 자기만 그렇다며, 남자아이들이 알면 또 놀릴 거라며 숨기려들었다. 며칠 전 안과에 가서 검사를 하고 의사의 확인서를 받았다. 근데 양쪽의 시력이 0.4 차이가 났다. 난 이게 더 걱정되어 물어보니, 별로 걱정할 바 아니란다. 의사선생님은 꽤 털털해 뵜다. 어쨌든 불편하다고 안경 쓰기를 싫어하는 희원이에겐 다행이다. 2학년 때도 지금이랑 시력검사결과가 꼭 같았는데, 큰일 났다싶어 안경을 당장 두 개나 해서 끼고 다니게 했었다. 원시에 한 쪽만 시력이 안 좋으니, 안 좋은 쪽만 렌즈를 하고 다른 쪽은 돗수가 전혀 없는 안경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불편하다고 안 끼기 시작하더니 그 안경 다 어디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안과에 간 김에, 희령이도 적녹색약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검사를 해 보니 역시 그랬다. 아빠의 인자가  두 딸에게 다 나오다니. 그래서인지, 희원이도 희령이도 더 어릴 때 연두색을 노란색이라고 해서 나를 의아하게 했다. 안과를 나오며 투덜대는 희원이에게 난  "그래도 색맹이 아닌게 어디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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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6-07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울 신랑도 적녹색약인데... 증세가 어떤 거죠?
우리 딸이 숫자랑 색은 월령에 비해 굉장히 빨리 익혔는데, 이상하게 보라색만 못 익혀요.
불안 불안 불안...

프레이야 2004-06-07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색계열과 적색계열이 섞여있으면 두 색의 구분이 안 되는 거에요. 따로따로 있을 땐 아무 이상 없구요. 정말 신기하더라구요. 근데 마로가 보라색만 못 익히는 건 아직 어려서일 거에요. 마로는 잠재인자이면 좋을텐데...

nugool 2004-06-07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적녹색약이 의외로 꽤 있군요... 정말 신기하네요... 따로 있을 땐 이상없는데 섞여 있을 때만 구분이 안되는 것... 그럼 신호등은요?

프레이야 2004-06-07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호등은 괜찮아요. 따로 있잖아요. ^^ 근데 우리 신랑, 오래 전에요, 벽돌색 면바지보고 카키색 바지 갖다달라고 해서 절 완전히 혼란에 빠뜨린 적 있어요.^^

nugool 2004-06-07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행이네요.. 아~ 벽돌색이 카키색으로 보이는 거군요... ^^;;;

조선인 2004-06-0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좀 안심이 되네요.

프레이야 2004-06-07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새벽별을 보며님, 전 아마 아닐걸요. 그렇다면 저의 아버지가 색약이어야 하는데요.^^
제 남편은 카키색과 벽돌색 바지 헷갈려요. 처음엔 무척 놀랍더군요.

다연엉가 2004-06-0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으니 참 다행이네요.
 
 전출처 : 아영엄마 > 미리보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기획] 미리보는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맥스무비 2004-06-07 00:11]

전 세계가 기다려온 호그와트의 아이들이 올 여름 다시 돌아왔다. 지난 5월 31일 영국에서 가장 먼저 뚜껑을 연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하루만에 503만 파운드(106억)를 넘는 입장수익을 기록하며 영국 박스오피스의 역사를 다시 작성했다. 영국 영화사상 개봉 첫날 입장수입이 500만 파운드를 초과한 것은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처음이다.

1억 3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3학년이 된 해리포터(다니엘 래드클리프)와 해리의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마법사 시리우스 블랙(게리 올드만)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 캐릭터는 다양해지고, 전 연령대를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스토리까지 일취월장한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판타지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작품들이 결코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오는 7월 16일 국내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새로운 감독이 만든 ‘해리포터’가 선사하는 마법의 색깔은?

국내에서도 전국 4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해리포터> 1, 2편. <해리포터> 성공신화의 주역인 감독 크리스 콜럼버스는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3편의 연출을 포기했다. 크리스 콜럼버스의 뒤를 이어 3편의 메가폰을 잡게 된 감독은 멕시코계 출신인 알폰소 쿠아론 감독. (처음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는다는 루머가 떠돌았지만 사실 무근으로 밝혀졌다.) 그는 남미 특유의 이국적 풍취를 할리우드에 접목하여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할리우드 입성작 <소공녀>는 ‘해리포터’의 원작자인 조앤 K.롤링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사랑의 기억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감성적 수채화 <위대한 유산>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춘들이 섹스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랑을 배워나가는 과정을 그린 <이투마마>는 피보다 진한 데킬라의 향취가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런 감독이 만든 ‘해리포터’는 어떤 색깔일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감독의 교체가 불러온 ‘해리포터’의 변화는 낯설지 않고, 오히려 반가움으로 다가온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메가폰을 잡아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은 것은 영화 <이투마마>의 촬영을 막 끝낸 직후였다. 다른 감독 같으면, 바로 연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겠지만 그는 달랐다. 이 작품에 연출 제의를 받아보기 전까지,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그는 이 작품에 대해서 아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해리포터’ 팬들은 그런 그에게 연출을 맡게 한 영화사 워너브라더스의 행동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를 보기 전의 일이다. 극장 문을 나설 때면, 관객들은 ‘해리포터’가 가진 매력을 스크린 가득 담아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연출에 매료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스티브 클로브스의 시나리오와 원작소설을 읽은 후에야 이 작품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마법과 신비한 괴물에 대한 이야기처럼 비쳐질지 모르지만 그 안에서 전개되는 주제는 내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고 현 시대와도 상당한 연관성이 있어보였다.” 지난 27일 런던 방케드홀에서 열린 기자 회견장에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군더더기 없는 직설화법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그리고 나서 “‘해리포터’ 시리즈엔 성장, 자아 정체성, 친구들과의 관계, 부모 없이 성장해야 하는 아이의 외로움, 사회적 계급, 인종주의 등과 같은 다양하고 보편적인 문제들이 녹아있다”고 덧붙였다.


'해리포터' 1,2편의 메가폰을 잡았었고, 3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선 제작자로 참여한 크리스 콜럼버스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연출 방식에 대해 흡족해했다. “그는 젊은 배우들과 호흡이 매우 잘 맞는다. 이 영화에선 그 점이 특히 중요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현존 감독 중 비주얼에 가장 강점을 가진 감독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스토리 텔링에도 특별한 감각을 갖고 있다.”

세트와 배우 기용 등이 이미 대부분 결정돼있다는 사실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에겐 하나의 혜택이었다. 그만큼 극의 줄거리와 스타급 출연진의 연기에 더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주어졌기 때문. 이번 작품은 이 영화에 참여한 배우들에게 두 가지의 도전을 안겨주었다. 하나는 아역 캐릭터에서 청소년으로 성숙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들의 연기 스승이라 할 크리스 콜럼버스가 빠진 촬영장에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전엔 내 미숙한 연기력으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에 출연할 수 없었겠지만,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밑에서 연기지도를 받은 지금은 그의 영화에 출연한다는 게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말한 ‘해리포터’ 역의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이번 영화를 통해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고 했다.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밉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인 헤르미온느 역을 연기한 엠마 왓슨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을 통해 ‘캐릭터에 감정을 불어넣는 법’을 배워 나갔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원작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모두 수긍하겠지만, 전편에 비해 이번 편은 분위기가 휠씬 어두워지고 화려한 액션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의 우울한 분위기는 폭우 속에서 진행되는 퀴디치 시합 장면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어둡고 괴기스런 하늘을 배경으로 해리를 위협하는 디멘터들의 위압적 모습은 관객들에게 섬뜩한 공포를 자아낸다.

알폰소 쿠아론은 스토리 속에서 호그와트를 좀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 캐릭터들의 성장한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와이드 앵글 렌즈를 다양하게 활용했다. 스토리 텔링의 도구로 클로즈 업을 사용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와이드 앵글을 활용하여 먼 거리에서 그들의 몸짓의 의미까지 화면에 담아냈다.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

조앤 K. 롤링의 다른 ‘해리포터’ 시리즈가 그렇듯,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는 수많은 상상속 동물들과 마법 변신술이 등장한다. 이 영화에 새로이 등장하는 상상속 동물들을 나열해 보면, 반은 말이고 반은 독수리인 ‘벅빅’ (일명 히포그리프), 루핀 교수의 또 다른 얼굴인 늑대인간, 그리고 유령처럼 나타나 영혼을 빨아들이는 아즈카반의 간수 ‘디멘터’등이 있다.

그 외에도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의 또 다른 볼거리로는 야간 구조 버스라 불리는 마법의 자동차와 해리의 분노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마지 아줌마, 그리고 론의 생쥐 스캐버스와 헤르미온느의 고양이 크룩생크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전편보다 더욱 업그레이드된 신기술을 보여준다. 진짜 새처럼 움직일 때마다 섬세하게 흩날리는 벅빅의 깃털은 예전 영화들 속의 CGI 작업에선 볼 수 없었던 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산물이다. 벅빅 못지 않게 제작자들의 고심을 안게 한 것은 루핀 교수를 사나운 늑대인간으로 변신시키는 작업이었다. 무수한 공포영화에서 수없이 등장한 캐릭터 늑대인간과는 차별화된 늑대인간을 만들고 싶었던 제작진은 종래의 털 달린 늑대인간에서 벗어나 털 없는 늑대인간을 만들어 냈다.

롤링의 원작소설에서 생생히 묘사된,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두려운 존재일지도 모를 디멘터를 창조하는 작업도 물론 만만치 않았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디멘터가 극중 다른 생물체들과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 특수효과팀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요구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기 위해 6개월을 매달렸다. ILM의 특수효과팀, 의상 디자이너 재니 테마임(디멘터의 모습과 동작을 가장 자연스럽게 연출해줄 의상 소재 개발)까지 총동원되어 창조한 디멘터의 모습은 결과적으로 감독에게 대단한 만족감을 안겨주었다.

사진제공:워너 브라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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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2004-06-07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폰소 쿠아론의 전작들에 비추어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엄청 기대가 큽니다. 기발함과 가벼움, 동화적인 요소 대신에 감성이 내재한 무거움과 슬픔을 맛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도 시리즈 중에서 3편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프레이야 2004-06-07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아즈카반의 죄수 편은 기대가 되네요. 어서 개봉하면 좋겠어요. 여름방학선물로 아이랑 보러가게요.
 
 전출처 : 밀키웨이 > [퍼온글] 헥토르

얼마 전, 영화 <트로이>를 봤습니다. 제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린 사람은, 아킬레스로 분한 브래드 피트도 파리스로 나온 올랜도 블룸도 아니었습니다. 그 전까지 이름도 몰랐던 헥토르 역의 에릭 바나가 가장 멋졌습니다.  헥토르야 말로 사나이 중의 사나이, 남자 중의 남자! 옵빠ㅡ 꺄악! >0<

문제의 근원은 파리스가 금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준 것이겠지요.


크레티,  파리스에게 황금사과를 건네는 헤르메스   올랜도 블룸과 약--간 닮았나요?

제우스의 명에 따라 헤르메스는 이다 산에 있는 목동 파리스에게 사과를 가져갑니다. 물론 세 명의 여신과 함께죠. 파리스는 원래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인데, 그를 임신했을 때 그의 어머니가 태몽으로 불길한 꿈을 꾸게 되고, 그로 인해 트로이가 멸망할 것이라는 신탁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이다 산에 버려져 자랐고, 커서는 님프 오이노에와 살며 양을 키웠죠. (영화에선 그저 이 여자 저 여자 집적거리면서 왕궁에서 잘 살고 있었지만.)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가 새겨진 황금 사과를 파리스는 과연 아테나와 헤라와 아프로디테 중 누구에게 줄 것인가. 세 여신은 각각 로비를 하죠.


루벤스 <파리스의 심판>

헤라는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영광과 공명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아시다시피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선택하지요. 어리석은 것... 쯧쯧..  


헨드리크 발렌 <파리스의 심판>

투구를 쓰고 신조 올빼미와 같이 있는 여신이 아테나,  가운데에 공작과 같이 있는 여신이 헤라, 에로스(큐피드)와 같이 있는 여신이 아프로디테지요.


다비드 <파리스와 헬레네>

    트로이 전쟁의 가장 중요한 여인 헬레네는, 어릴 적부터 빼어난 미모로 소문이 자자했고, 12살에 이미 아테네 영웅 테세우스에게 납치되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찌나 아름다웠던지 신랑감을 결정하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정도였다니.. ㅡ.,ㅡ  신랑감 후보들은 후에 헬레네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싸울 것을 다짐하도록 동맹까지 맺지요.  이쁘면 장땡...

헬레네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돕기로 했던 동맹은 오뒤세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꾀였습니다. 헬레네의 아버지 틴다레오스는 어느 한 사람의 신랑을 선택했을 때, 다른 사람들과 결투를 벌이게 될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해준 댓가로 오뒤세우스는 헬레네의 사촌 페넬로페를 데려갔지요. 좌우간 지혜로운 사람은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는 법이라나요. 결국 그녀의 아버지는 헬레네의 신랑감으로 메넬라오스를 선택합니다.

    메넬라오스와 백년가약을 맺은 헬레네가 잘 살고 있는데, 어느 날 파리스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보호를 받으며 스파르타로 가게 되고(영화에서는 신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정중하게 대접했습니다. 당시 주인과 객 사이에는 결코 서로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엄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 관습을 깨뜨리고, 메넬라오스가 외조부의 장례식으로 크레타에 가 있는 동안,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헬레네를 설득하여 함께 트로이아로 도망갔지요. 남의 부인을 탐하지 말라 하였거늘..  이 때 헬렌에게는 9살 난 어린 딸이 있었다고 하네요(영화에선 아님). 게다가 집안에 있던 보물까지 다 챙겨 갔다니, 참 대단하지요?

   이렇게해서 동맹을 맺었던 연합군이 결성이 되지요. 그녀로 인해 트로이는 십 년 동안, 전쟁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고 결국은 멸망하게 되지요. 신탁대로군요. 후에 파리스가 전쟁 통에 죽게 되었을 때, 그녀는 파리스의 형제인 데이포보스(영화에선 이런 사람 없었는데..)와 또 한 차례 결혼을 한답니다. TㅂT 잘 한다...

  트로이 패망 후, 전 남편 메넬라오스는 그 동안 그녀를 증오해 단칼에 베어버리려 했지만, 막상 그녀를 보자  그 동안의 분노는 사라지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무릎을 꿇는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역시 이쁘면 다 용서되는 것인가.. ㅡ.,ㅡ  생각해 보니 그녀의 잘못도 아닌듯 했다고....(얼씨구)

  그리하여, 다시 헬레네는 메넬라오스를 따라 그리스로 향하지요. 10년간의 전쟁이 막을 내리자, 당연히 그리스군들의 원성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그 모든 것은 헤레네의 죄악 탓이었으니...  하지만 정작 그녀가 반라(왜지?벗으면 용서되나?)의 모습으로 그리스 군대를 지나가게 되자, 그리스군의 불만과 노여움은 눈 녹 듯 사라져 버렸다.  이봐이봐.. ㅡ_ㅡ;;


프랑수아 델로메 <파리스를 꾸짖는 헥토르>

    헥토르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파리스의 형이죠.  헥토르는 그리스어로 <지탱하는 자>, <저항자>라는 뜻이라는군요. 그는 전쟁이 시작되면서 트로이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트로이 제일의 용사입니다.  헥토르는  아킬레우스 못지 않게 중요한 인물로, 솔직하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있는 이상적인 영웅이었답니다. 집에서는 선량한 아버지이고 다정다감한  남편이었다고 합니다. 옵빠ㅡ >0<

  그는 전세가 기운다 해도 절망하지 않았으며, 유부녀인 헬레네를 납치한 파리스에게 분노(그림)했고,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제안했지요. 그러나 일단 그 일로 인하여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되자, 그는 선두에 나서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헬레네에게도 극진한 배려를 했다고 하니, 정말 남자다운 멋있는 사람이라고 밖에는.... 허나 결국은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잃고 말죠. 으흑...TㅁT


다비드<헥토르를 애도하는 안드로마케>

사랑하는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두고 떠나가버린 헥토르... 그러나 헥토르가 죽은 후 바로 트로이가 함락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동맹자들의 원조를 받아 항쟁을 계속했지요. 하지만 결국은 트로이의 목마로 인해 함락되고, 이로써 고대국가 가운데 가장 튼튼하게 건축된 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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