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rst_박쥐 각본집의 마지막 부분이다.
2009년 개봉관에서 관람했었다. 다시 봐야겠다. ^^
목포에 노래비가 있는 가수 이난영의 옛 노래는 영화 엔딩에서는 기억에 없다. “고향” 2절 가사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다이어리처럼 작고 얇다. 본문 글자도 작다.
표지가 몽환적이다.
오필리어의 죽음을 그린 그림이 연상된다.
오필리어 주검 주변에 떠 있는 꽃들, 그 갈망과 욕망.
박 감독은 이 영화가 난해하다는 말은 인정 안 된다고 했다.
감독 스스로 어린 시절 내면의 경험이 담겨 있다고 한 이 영화에 감독님의 가장 많은 살과 피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정서경 작가는 생각했다는데, 그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외적 결과와 상관없이 흔들리는 감독의 모습을 보았을 때라고 한다.
아래 장면, 저너머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나란히 앉아 바라보던 영화 엔딩 장면이 생각난다. 여기서 환상적으로 변용된 일출 장면은 상현의 상상적 시점이었군. 파랗게 타오르는 거대한 태양. 고래들이 뿜어올리는 피 분수. 숯덩이가 되어가는 남녀.
두 육신의 소멸을 관찰하는 라여사의 이글대는 눈동자…

압권이다!

서서히 장엄하고 위압적으로 떠오르는 해를 노려보는 상현의 눈동자, 모세혈관이 일제히 터지면서 안구를 붉게 물들인다. 피눈물이 흘러내린다. 상현의 상상적 시점으로, 환상적으로 변용된 일출 장면. 파랗게 타오르는 거대한 태양에서 칼날처럼 뾰족하게 사방으로 뻗치는 햇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기묘한 빛깔들로 이루어진 뭉게구름, 피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고래들이 뿜어 올리는 피 분수, 날개 달린 거대 지네들이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하늘, 수십 명의 인간이 각기 다른 멜로디로 부르는 합창. 환몽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 꽁무니에서 본 모습-앞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라여사 뒤통수 너머로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보이는 상현과 태주.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치는 태주를 꼭 끌어안는 상현. 차를 들썩이며 숯덩이가 되어가는 남녀, 깜빡거리지도 않고 이 소멸을 관찰하는 라여사의 싸늘한 눈동자. 그러거나 말거나 옛 노래는 무심히 흐른다.

이난영

정들은 고향 길에서 순정에 어린 그대와 나는
언제나 변치 말자고 손잡고 맹서했건만
그대는 그 어데로 갔는가, 잊지 못할 추억만 남기고
정들은 고향 길에는 구름만 흘러갔고나....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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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9-08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아는 영화예요 많은 영화가 그럴 것 같습니다 앞에 제목이 쓰여 있지 않네요 각본은 전에도 나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화는 예전부터 각본이 나왔을까요 언젠가 영화 시나리오가 여러 편 묶인 책을 샀는데, 다 못 본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08 10:41   좋아요 1 | URL
이 영화 특히 각본이 좋으네요
표지도 이쁘죵
아가씨 각본집도 사야겠어요 ^^
 

집을 짓는 일은 삶을 짓는 일이다.
주변의 삶과 풍경도 달라지는 일이다.

건축가로서 예수의 삶. 이 상상에 이른 나는 급기야 건축가의 바른 태도를 다시 묵상했다. 건축은 우리의 삶을 이루게하는 직접적이고 적극적인 수단이니 건축 설계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건축 설계를 하는 건축가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엄에 대해 스스로 진실하고 엄정해야 하므로 심령이 가난해야하고 애통해야 하며 의에 주려야 한다. 특히 다른 이들의 삶에 관한 일을 하니 화평케 해야 하고 온유하고 긍휼하며 청결해야 한다.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해 권력이나 자본이 펴 놓은 넓은 문이 아니라 고통스럽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깨끗게 하여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아야 하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일을 거부해야 한다. 모든 사물에 정통하고 박학하고자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한다.
결단코 불의와 화평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그런 행동 때문에 집이나 고향에서도 비난받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람 사는 일을 알고자 더불어 먹고 마셔야 하지만 결코 그 둘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수시로 밖으로 추방하여, 광야에 홀로 서서 세상을 직시하는 성찰적 삶을 지켜야 한다. 오로지 진리를 따르며 그 안에서 자유하는 자, 그가 바른 건축가가 된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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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시대의 거울이며 도시는 기억의 박물관”
_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승효상

1952년생 건축가 승효상은 2016년 9월, 2년간의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 직무를 마쳤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자신의 책 “빈자의 미학”(1996)을 재론한다.

질책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빈자의 미학’이라는 말이 갖는 아름다운 가치를 이미 감지했으므로 실천만이 자신이 안아야 할 과제였다고 밝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비아냥과 욕설과 가난한 그의 주변은 스스로 다듬게 되는 동기가 되어 감당할 몫이라 여기면서, 자신이 썼던 말과 글이 누구에게는 상처로 남은 일을 못견뎌 하겠다며 ‘좋은 글쓰기가 좋은 건축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고백했다. 겸손하고 솔직하다. 관조와 성찰로 고양한 영혼을 담는 일, 절제와 비움의 철학을 공간화하는 일이 집짓기와 글짓기의 내적 질료이리라.
그래서 예전에 우리는 글’짓기’라는 용어를 썼을까. 그 말보다 글’쓰기’로 바꾸어 부르자고들 했고 그렇게 바꿔 불렀지만 다시 생각해볼수록 글’짓기’가 맞는 것 같다. 글도 집도 함부로 지어선 안 되겠다. 최선의 삶을 담는 일, 쉽지 않은 일이다.

“글쓰기 자체가 너무도 두려워지니 이제야 주변이 보이는 까닭일까?”(217쪽) -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_ 삶에 대한 진정성으로 가득한 이 절묘한 공간들을 어떤 현대건축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물론 달동네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위험하기도해서 재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건축이 우리 삶을 지속시키는 기억의 저장소인 한, 이런 아름다운 공간은 재개발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한다. 이것이라면 내가 건축하는 이유일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서울에 달동네라는 것을 모두 다 보고 확인하며 내 건축 속으로 불러 들였다. (중략)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방법론이다. 공동체 지속을 위해 도시와 건축은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했으며 20세기 초 서양에서 주장한 기능주의를 비판했고 그들의 목적적 건축 공간보다는 비어있는 우리의 옛 공간이 삶을 훨씬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소란한 시대에 침묵의 건축이 더 가치 있다고 그 책에 썼다.
(214쪽)


http://m.kyeongin.com/view.php?key=20211123010004372
2021 경인일보 기사 첨부. 김포에 이곳 가보고 싶네.


토요일 오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 부산의 산복도로 마을 높은 곳, 산에 둘러싸인 하늘 아래 첫 아파트를 만났다. 프로그램 이름은 “여기 있는 가”. ‘가’는 한자로 집 가.
알베르토가 직접 걸으며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나누며 길을 안내했다. 눈에 익은 거리와 풍경을 따라가다 좌천아파트가 나와서 눈여겨 보았다. 1969년 건축된 아파트라 많이 노후되었고 실입주민은 거의 일인가구 사십여 가구라고 한다. 11평에 방 둘, 주방. 특이한 건, 화장실이 1층에 공동으로 모여 있고 각 호실 번호가 달려 있다. 이런 구조는 처음 보았는데 장점도 있을 것 같다. 거미줄 널린 돌보지 않은 빈집이 많고 건물 자체도 약간 기울어져 수평계가 외벽에 붙어 있다. 알베르토가 수평계를 확인했다. 외벽 칠도 벗겨지고 내부 천장에 습기도 차지만 예전에는 여기서 일고여덟 식구가 살았다며 아이 업고 장 봐서 들고 고갯길을 올라왔다고 혼자 사는 여성분이 회상한다. 지금은 승강기가 오르내려 동네사람들과 방문객의 발이 되어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침에 길을 걷다 저렴한 유료지만 이와 비슷한 승강기 차 타고 고지대 마을에 갔었던 기억이 난다. 나이든 여자 두 사람, 젊은 아빠와 책가방을 멘 어린 여학생이 같이 타고 있었다. 출퇴근에도 등하교에도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전망이 좋았었지.

좌천아파트 저 아래로 부산항 전망과 부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몇 분이 마당에 나와 담소를 나누며 앉아계셨다. 자식들 걱정이시다. 건강하시길.

오래된 풍경에 밴 헙수룩함을 찾아다니는, 옆지기 사진.
두둥둥 구름이 저만치 아래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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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7 1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7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22-09-07 2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두렵죠....그래서 전 그림으로 대체했읍죠~~~ㅎㅎ

프레이야 2022-09-07 22:56   좋아요 1 | URL
저도 그림 잘 그리면 좋겠습니다 ㅎㅎ 일찌감치. 그런데 그려보고 싶은 욕망은 있어서 중학교 때 미술부도 했고 수채화 배우다가 집어치웠네요 몇년전. 언젠가 또 도전해 볼지도 몰라요.

mini74 2022-09-07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산하면 예전 어느 작가님이 청바지로 그린 풍경이 떠오르더라고요. 높은산까지 오밀조밀 집들이며 바다며~~ 옆지기님 사진 참 좋습니다. 미운 일 생겨도 사진보면 풀어지실거 같아요 ㅎㅎ

프레이야 2022-09-07 23:27   좋아요 1 | URL
ㅎㅎ 쪽집게 미니님.
산과 바다가 있는 부산 좋습니다.
산복도로 168계단을 올라가야하는데 승강기가 생겼어요. 피란민들이 살았던 마을.
홍콩과 베트남에선 로얄층 주택이 고지대를
차지하더군요. ^^

새파랑 2022-09-07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이 오래되보이지만 경치는 완전 최고네요~!! 바다가 보이는집에서 살고 싶습니다 ^^ 바다랑 가까운 부산은 좋은거 같아요~!!

프레이야 2022-09-07 23:02   좋아요 2 | URL
저 동네 뷰가 멋져서 동네분들은 다른 데 가고 싶은 생각도 없다고 합니다. 부산은 바다 가까워 좋은데 너무 인접하면 태풍 피해가 큽니다. 이번에도 그렇더군요. ㅠ
저도 바다가 보이는 집에서 살고 싶어요^^

바람돌이 2022-09-07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승효상씨 건축물 좋아해요. 건축에 대한 생각도 좋아하고요.
좌천아파트! 저렇게 오래된 아파트가 아직 남아있군요. 풍경을 찾아보니 언젠가 지나가던 길에 멀리서 본듯도 해요. 옆지기님 사진은 언제나 참 좋네요. ^^ 특히 마지막 사진요. 오래된 아파트에 남아있는 온기가 느껴질 듯해요.

프레이야 2022-09-07 23:12   좋아요 1 | URL
색감이 온후하지요 ^^
저도 좋아하는 건축가에요. 글도 어찌 좋은지.
건축가들이 대체로 글도 좋습니다. 왜 그럴까 싶은데 글 짓기와 집 짓기의 과정에 필요한 마인드가 비슷해서일까요. 집도 사람처럼 늙고 낡고 닳아져가는데… 낡고 오래된 집이라도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이 또 집이겠지요.

희선 2022-09-08 0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파트가 오래돼 보입니다 1969년에 지었다니... 누군가는 아직 저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생각하겠습니다 높아서 저기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멋지겠네요 사진도 멋집니다 멀리서 보면 멋지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어떨지... 이런 건 덜 생각하는 게 좋겠네요 저기에 사는 분들 마음만은 편안하길 바랍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08 09:07   좋아요 1 | URL
멀리서 보면 멋지고 사진은 또 그런 시각적 착각도 줍니다. 가까이서 보면 뭐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바로 그 점이 가까이서 봐야할 이유이기도 하고요. 나쁘지 않다고 여겨요.
멀리서 또 가까이서도 다각도로 보는 게 맞겠지요. ^^

책읽는나무 2022-09-08 0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승효상 건축가는 건축인들에게 존경받는 사람 중의 한 분이시죠^^
며칠 전 TV <건축탐구 집> 에서 승효상 건축가가 지은 수원화성의 주택을 보았는데요.
주택을 설계하시다니 의외다 하며 보았는데 역시 대건축가!! 설계한 과정에서 인품이 드러났어요.
남편분의 사진은 나중에 사진집을 따로 내셔도 되시겠어요. 갈수록 어떤 스토리가 읽혀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진이 더욱 젊어지는? 느낌이에요^^
아내분이 알라디너이셔서 덕분에 공짜로 구경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립니다ㅋㅋㅋ

프레이야 2022-09-08 09:08   좋아요 2 | URL
암요. 반듯한 철학이 있고 겸허하신 분. 부산 출생입니다. ^^
오래오래 작업하며 건강하시면 좋겠어요. 위에 경인일보 기사 첨부해 두었어요 방금 찾아보니 있네요. 김포에 가봐야겠어요. 언제 가려나 ㅎㅎ 저렇게나 멋진 공간을 또!!
옆지기 사진은 인정요 ㅎㅎ 이냥반도 참 사진집 한번 내라고 해도 워낙 몸을 사리는 스타일입니다. 공동 사진집은 있지만요. 주제별로 소재별로 흑백 컬러 아주 많은데 파일 창고에 저장만 하네요. 나름의 철학이 있나 봅니다.
 

위대한 시인의 시란 한 줄이 빠지면 세상이 그만큼 가난해지는, 그런 시예요. - P26

그는 매우 종교적인 기분이 들었다. 자책과 비하로 가득 차 겸손하고 유순해졌다. 그런 마음으로 죄인들은 고해소로 가는 것이다. 마틴은 죄를 깨달았다. 그러나 고해소의 온순하고 초라한 자들이 눈부시게 당당해지는 미래의 제 모습을 예견하듯 그도 그녀를 소유함으로써 당도하게 될 비슷한 미래를 예견했다. - P47

또 다른 진보는 바지에 줄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사안에 눈을 뜬 마틴은 바지의 계급 간 차이에 신속히 주목했다. 무릎이 불룩한 노동 계급의 바지와 달리, 상위계급 남자들이 입는 바지는 무릎부터 밑단까지 똑바른 선이 내려왔다. 그는 또 그 이유를 알아냈고, 누나의 부엌에 침범해 다리미와 다림질 판을 찾아냈다. - P73

마틴에게는 독주를 마실 필요가 소멸되었다. 그는 새롭고도 더 심오한 방식으로 취했는데, 루스에 취했다. 그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지르고 그로 하여금 언뜻 본 고등하고 영원한 삶을 갈망하게 한, 그녀에게 취했다. 그리고 그는 책에도 취했다. 책들은 그의 뇌에 욕망의 구더기를 수없이 풀어놓아 뇌를 갉아먹게 만들었다. 또 그는 수행 중인 개인적 청결 관념에 취했다. 원래 건강하긴 했지만 청결해짐으로써 그의 건강은 최상이 되었고, 전신이 육체적 행복을 구가했다. - P74

천국에 있는 성자들, 어떻게 그들이 공정하고 순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을 찬양하지 않으리. 그러나 진창 속에 있는 성자들, 아, 그들의 존재야말로 영원한 경이가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악의 구렁텅이에서 떠오르는 도덕적 장관을 본다는 것, 자신을 들어 올려 진흙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멀고도 희미하게 아름다움을 처음 본다는 것, 나약함과 사악함, 그리고 모든 참담한 야만성으로부터 솟아나는 힘과 진리와 드높은 정신적 자질을 본다는 것……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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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요? 그들은 이 세상에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뭔가 유익을 얻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말하자면 무상으로 하는 걸 의미해요. 만약 인류가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가장 중요한 핵심을 놓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_164쪽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거울 속의 거울>은 원인과 결과로 성립된 인과=논리적인 연결 고리가 아닌 전혀 다른 관점에서, 소위 음악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차례차례 이어가는 콘셉트입니다.

새로운 시도네요. 어떤 생각으로 진행하신 건가요?

이 작품에서 각종 사상이 의미를 지닙니다. 예를 들면 부負의 드라마투르기도 그래요. 그리스 신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기둥이 아니라 기둥 사이에 있는 (부의) 공간이라 해도 될 정도로 결국 보이지 않는 것, 즉 여백이야말로 사실은 가장 중요한 부분인거죠, 이는 노자의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노자는 이런 말을 남겼어요.

"찰흙으로 그릇을 만들지만 찰흙이 에워싸는 허무의 공간이야말로 그릇의 본질(유용성)이다."

또 "서른 개의 바퀴살이 바퀴통(중심)으로 모이지만, 바퀴살 간의 허무의 공간이야말로 바퀴의 본질(유용성)이다"라고 했지요.
그렇다면 사이에 있는 (공허한) 공간을 본질로 봐도 좋다면, 문학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해왔습니다. 이야기하기는 사실 ‘말하지 않는 것’, 즉 ‘그림’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에 주목하게끔 하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는 겁니다. (106-107쪽) - P106

이쯤에서 다시 궁금해지는데요, 언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어딘가 깊은 신비의 세계에서 오는 걸까요?

언어는 정신세계의 어딘가 깊은 데서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도 그런 식으로 설파하죠. 즉, 눈에 보이는 이 세계는 많은 단계들 중에서 맨 마지막, 소위 가장 아래에 있으며, 어떤 에너지 혹은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밀도 높은 것이라고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말하자면 가장 밀도가 높은 형태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카발라로 치면 아홉 단계가 더 있어요. 이 아홉 세계는 제각기 다릅니다. 이 정도로 밀도가 높지는 않고, 좀더 투과성이 있죠.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눈에 보이는 창조는 신의 길 끝에 있다고. - P241

그렇습니다. 죽음은 삶에서 내가 내 신체에 행하는 파괴 행위의 총합이에요. 그러나 이 파괴 행위는 애초에 우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전제조건이기도 하죠. 우리는, 우리 의식은, 사실 문자 그대로 말하면 죽음의 자식입니다. 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동시에 의식의 기초인 물질적 신체, 즉 물질적 뇌를 점점 더 파괴시켜가야 하니까요. 문득 전생의 개념이 떠오르는군요. 어느 특정한 긴 혹은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사람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다른 관계 속에서 태어납니다. 물질적 세계로요. 다시금 새롭게… 그래서인지 그 어떤 마술적 세계상에서도 달은 물질적 신체를 상징해요. 달은 차고, 또 집니다. 달이 져서 보이지 않는 동안 달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몰라요. 초승달이 뜨면, 그러니까 아주 가느다란 초승달이 보이면, 전통적인 히브리 문화에서는 달의 등장을 독립된 두 명의 증인이 확증해야만 했어요.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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