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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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나는 글을 쓰겠다.”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기억을 잘 다루는 작가 중 한 사람.
사람의 기억이 타인에게 힘과 위로가 되는, 다감함.

‘내가 어렸을 때 익숙하게 듣던 목소리로 엄마가 말했다. "루시바턴, 못된 계집애 같으니.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 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야. 우리는 이 나라로 건너온 최초의 사람들이었어, 루시 바턴. 내 조상과 네 아빠의 조상 모두 너한테 우리가 쓰레기라는 말을 들으러 내가 이 나라를 가로질러 여기까지 날아온 게 아니라고. 그들은 선량하고 점잖은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매사추세츠 주 프로빈스타운의 해안에 닿았고, 물고기를 잡는 정착민이었어. 우리는 이 나라에 정착했고, 나중에 선하고 용맹한 사람들은 중서부로 건너갔지. 우리는 그런 사람이야. 너는 그런 사람이라고. 그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돼." - P142

세라 페인이 말했다. 자신의 글에 약점이 보이면 독자가 알아내기 전에 정면으로 맞서서 결연히 고쳐야 해요. 자신의 권위가 서는 게 그 지점이에요. 가르친다는 행위에서 오는 피로가 얼굴에 가득 내려앉았던 그 강의 시간 중 하나에서 그녀가 말했다.
사람들은 우리 엄마가 사랑한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 P157

그때 이후로 내게도 임종을 앞둔 사람들의 곁을 지킨 순간들이 있었고-나이가 들면 자연스러운 일이다-나는 육신의 최후의 빛이 꺼져갈 때 눈동자가 불붙듯 타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는그 남자가 그날 내게 도움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말했다. 나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죽음이, 엄마가 나를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 P163

"하나의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쓰게 될 거예요. 이야기는 걱정할 게 없어요. 그건 오로지 하나니까요." - P169

나는 작가가 되려면 냉혹해야 한다는 제러미의 말에 대해 생각한다. 또한 내가 늘 글을 쓰고 있고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며 오빠나 언니, 부모님을 만나러 가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아 안 간 것이기도 했다.)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내가 결혼생활에 안주하면 또다른 책, 내가 정말로 쓰고 싶은 책은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 P204

나는 늘 그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생각한다. 그 아이의 유년기가 끝난 건 그때였다고. 죽은 사람들, 연기, 이 도시와 이 나라에 가득 퍼진 공포, 그 이후 세계적으로 일어난 참혹한 사건들. 하지만 나는 그날에 대해 떠올릴 때 내 딸만 생각한다. 그전에도, 그후에도 그 아이가 그런 목소리로 외친 것은 들은 적이 없다. 엄마.

또 가끔 생각하는 건, 내가 세라 페인을 옷가게에서 만났을 때 그녀가 자기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그녀가 아직 뉴욕에 사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뒤로 그녀는 새 책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몹시 지쳐갔던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야기는 하나뿐이라던 그녀의 말을 생각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혹은 무엇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쓴 책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가 뭔가를 피해 비켜서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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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2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트라우트 작가는 기억
의 연금술사일까요 -

신작도 궁금해지네요.

프레이야 2022-10-26 00:28   좋아요 1 | URL
공교롭게도 에르노와 스트라우트를 동시에 읽었어요.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기억과 체험을 소재로 쓰고 그런 작가들이 많지만요.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작품의 결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개성이기도 하겠습니다.
신작은 읽어보셨을 수도 있겠지만 내이름은루시바턴 을 먼저 읽고 보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이것이 내 말의 초점이다”
34쪽 이 문장이 연이어 두 번? 원문도 이런지 궁금하다.

그 책들 덕에 몇 가지 얻은 것이 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하지만 그건 나만의 비밀이었다. 남편과 만나면서도 그 얘기를 바로 털어놓지는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이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혼자 남몰래 -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는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건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 P34

헤일리 선생님은 그해 말에 떠났다. 내 기억으로는 입대를 했는데, 시절을 감안하면 틀림없이 베트남에 갔을 것이다. 나중에 워싱턴 D.C.의 참전용사기념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봤지만, 없었다. 내가 그에 관해 더 아는 건 없지만, 내 기억에 캐럴 다는 그뒤부터 그의 수업 시간에는 내게 못되게 굴지 않았다. 무슨말인가 하면, 우리 모두 그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를 존경했다. 이것은 열두 살짜리들의 학급에서 한 남자가 이루어내기에 절대 작은 업적이 아니다. 그는 이루어냈다. - P86

나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한동안 간호사실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치통이 옆에서 나를 감싸안아주었고, 그렇게해준 그녀를 나는 지금도 사랑한다. 가끔 나는 테네시 윌리엄스가 블랑시 뒤부아의 이런 대사를 썼다는 사실에 슬퍼진다. "나는 늘 낯선 사람들의 친절에 의지하며 살았어요." 많은 사람들이 낯선 사람들의 친절을 통해 여러 번 구원을 받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범퍼스티커처럼 진부해진다. 나는 그 사실이 슬프다. 아름답고 진실한 표현도 너무 자주 쓰면 범퍼스티커처럼 피상적으로 들린다는 사실이. - P98

그의 목소리는 아주 달라져 있었고, 한마디 한마디가 나를 찰싹찰싹 때리는 것 같았다. 내가 말했다. "네, 선생님." 하지만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마음, 영혼, 혹은 몸이 아닌 뭔가에 우리가 어떤 다른 이름을 붙이건 그것은 지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것이야말로-대체로, 일반적으로ㅡ자연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 잘은 모르지만ㅡ그 또한 지쳐가고 있었다. - P100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집단보다 스스로를 더 우월하게 느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지가 내게는 흥미롭다. 그런 일은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난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건, 나는 그것이, 내리누를 다른 누군가를 찾아야하는 이런 필요성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저속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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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10-24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이 궁금해하시니까, 저도 덩달아...
문장이 중복되어 있는지, 원문 확인해주실 분 계시면 좋겠네요 ㅎ

프레이야 2022-10-24 10:30   좋아요 2 | URL
얄리 님 궁금증 풀리셨지요~^^
아래 댓글로요 ㅎㅎ

Jeremy 2022-10-24 14: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 원문에도 두 번 나옵니다. 강조의 의미?
진짜 쉽고 짧게 쓰는데도 잘 쓴 글처럼 느껴지는
Elizabeth Strout 의 마법.

˝But the books brought me things. This is my point.
(이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They made me feel less alone. This is my point.
And I thought: I will write and people will not feel so alone!
(But it was my secret! Even when I met my husband I didn’t tell him right away.
I couldn’t take myself seriously. Except that I did.
I took myselfㅡsecretly, secretlyㅡ very seriously!
I knew I was a writer. I didn’t know how hard it would be.
But no one knows that; and that does not matter.)˝
― Elizabeth Strout, My Name Is Lucy Barton pp. 24-25

프레이야 2022-10-24 11:25   좋아요 3 | URL
님 !! 짜잔 ㅎㅎ 확인 감사합니다 😊 속이 다 시원하네요. 워딩은 달라도 유독 이런 뜻의 문장을 자주 넣은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에도 많이 나오더군요. 올리브 키터리지,에선 그러지 않았던 거 같은데 왜 바뀌었는지 화자인 루시 바턴이라는 인물의 캐릭터로 그리 썼을까 싶기도 한데 독자가 읽기에는 화자 루시의 성격이 아주 똑 부러지게 느껴지는 어투입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가,보다 제레미 님 번역이 훨씬 좋습니다. 두 문장을 우리 문장으로 조금 다르게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요.

얄라알라 2022-10-24 12:17   좋아요 2 | URL
진짜, 이런 원문 바로 바로 찾으시는 Jeremy님!!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으시면 바로 찾으셔서 속결 답변까지 달아주시네요

덕분에 원문 보는 호강까지 누립니다.

근데, the books brought me things.요걸 번역문 안 보고 영문부터 읽었더라면, 엉뚱하게 생각할 뻔했어요. ˝그 책들 덕분에 나는 생각에 이르렀다.˝라고 ㅎㅎ ˝그 책들 덕분에 몇 가지 얻은 게 있다˝ 군요^^
아 영어는 어려워요

Jeremy 2022-10-24 14:21   좋아요 2 | URL
ㅎㅎ, 제 생각엔 영어가 어려운 게 아니라 번역이 어려운 것 같아요.
길게 복문으로 쓴 건 그 나름대로, 짧게 끊어 쓴 건 또 그 나름대로.

전 영어가 원서인 책 뿐 아니라 요새는 한국책도
상 받은 뒤 영어로 번역되서 나온 걸로 그냥 읽는데
이렇게 알라딘에서 조각조각, 밑줄 그어 올려주시는 분들의 글을 읽으며
숨은 그림이나 cross word puzzle 맞추는 것처럼
제 책 뒤져서 해당 문구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네요.

제 생각엔 이상하게 직역처럼 의역한 번역문보다
알라알라님의 의역이 문맥상으로는 더 맞다고 생각합니다.
Be confident!! You‘re doing great.


프레이야 2022-10-24 15:08   좋아요 3 | URL
저도 얄라 님 번역이 낫네요. 이분 책 번역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에서도 거슬리는 문장이 여럿 있어요. 주어의 위치를 뒤로 옮기는 게 읽기에 나은 문장들. 무슨 말인가 한참 읽었거든요. 원문을 보니 저 부분 번역문도 마음에 많이 들지는 않네요. 스트라우트의 문체를 반영한 의도인지 번역 스타일이 그러신건지^^ 그러고보니 루시 어투가 시니컬한 올리브의. 말투랑 비슷하기도 하네요. 스트라우트가 만들어낸 인물은 참 생동한 느낌입니다. 속시원한 두 분 말씀 고맙습니다 ^^
 
세월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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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문학의 정점”
어린 시절부터 2006년까지 살아온 “그녀”의 개인적인 역사와 사회적인 역사가 세월을 직조한다. 그녀의 세월은 공동의 기억에 스민 내밀한 기억의 총체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 기억은 사회적으로 자주 조작되고 개인적으로는 미화되기 쉽다.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 “이 아니 에르노가 택한 도구다.

다음 세대들이 DVD와 각종 매체를 통해 우리들의 가장 사적인 일상의 모든 것, 몸짓, 먹고 말하고 섹스를 하는 방식, 가구들 그리고 속옷들을 알게 되리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사진관 삼각대 위에 놓여 있던 카메라에서 침실의 디지털카메라로, 지난 세기의 어두움이 조금씩 떠밀려 완전히 사라져 가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부활했다. - P299

그녀는 미래에 대한 감정을 잃었다. 가을에 마른 대로를 걸어 대학에 갈 때, 『레 망다랭」을 덮을 때, 나중에 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오스틴 미니"로 뛰어 들어갈 때, 학교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시간이 더 흘러 이혼과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처음으로 조 다상의 <라메릭>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미국으로 떠날 때, 3년 전까지만 해도 로마에 다시 오게 해달라는 소원을 빌며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졌을 때, 그녀 안에 있었던 몸짓과행동, 낯설고 좋은 것들에 대한 기대가 투영된 무한하게 깊은 어떤 것을 잃어버렸다. - P316

지우고 다시 쓰는 감각(palimpseste), 사전적인 정의에 의하면 새로 쓰기 위하여 긁어서 지운 수사본이므로 완벽히 들어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그녀는 여기에서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거의 과학적인, 어쩌면 지식으로 쓸 수 있는 - 무엇에 대한 지식인지는 알지 못한다 - 도구를 본다. 1940년부터 오늘을 살아온 한 여성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그녀의 계획은, 실현하지 못했다는 설움에 죄책감마저 더해져 점점 더 그녀를 붙잡는다. 분명 프루스트의 영향이겠지만, 실질적인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으므로, 그녀는 이 감각이 시작점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 P272

영감을 받은 단어들이 마법을 부려 등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세상은 없으며 그녀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고 있던 유일한 도구, 오직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모두의 언어 안에서만 쓸 것이다. 그러므로 써야 할 그 책이 투쟁의 수단인 것이다. 그녀는 이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가장 절실하며, 이제는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라진 음식들이 가득 놓인 식탁보를 감싸는 빛을 포착하기를 원한다. 어린 시절 일요일의 이야기 속에 이미 존재했던, 경험한 것들 위에 금세 쌓이기를 멈추지 않았던 그 빛, 지나간 시간의 빛을 구원하기를.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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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4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가장 사릉 💓 하는 <세월>


프레이야 2022-10-24 02:22   좋아요 0 | URL
🧡 🧡

파이버 2022-10-2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저도 읽고 싶은데 어떤 책 부터 읽어야할지 고민이에요ㅎㅎㅎ 유년 시절부터의 이야기라니 이 책 [세월]을 일단 보관함으로~

프레이야 2022-10-26 09:04   좋아요 1 | URL
첫 작품 “빈 옷장”부터 읽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파이버 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세월,은 전체를 담으니 그걸 먼저 보는 것도 좋다 싶고요. ^^

파이버 2022-10-26 13:51   좋아요 1 | URL
‘빈 옷장‘도 장바구니에 쏙 해야겠군요. 찾아보니 말씀대로 ‘빈 옷장‘이 데뷔작이네요!
 

책을 덮으며 스산한 우리네 생을 잔잔하게 덮쳐오는 파도에 눈물을 섞어 날려보낸다. 다른 사람의 인생도 하물며 내가 살아온 인생도 다 알 수 없는 것. 추측이 아닌, 단지 이해하고자 타인의 생에 한발씩 다가가다보면 자신의 인생이 벌거벗은 채 달려온다. 윌리엄처럼 캐서린처럼 루시처럼, 그들의 생처럼, 나! 아파요! 그리고 우리는 비슷하게 위로받는다.
이 책만으로도 읽는 데 무리는 없지만 루시 바턴의 생을 좀더 자세히 읽으려고 2017년에 문학동네에서 나오자마자 사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이제야 펼친다. 예전에 “다시, 올리브”를 읽다가 흥미를 좀 잃어 스트라우트의 책을 멈추었던 까닭이다. “오, 윌리엄!”에서는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하려는 말은… 같다는 거야” 이런 구절을 자주 달아 읽기에 난 좀 거슬리네. 루시 바턴이 화자로 나오는데 그 인물의 언어습관으로 그리 쓴건지 스트라우트의 문체로 그리 쓴건지는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 아마도 전자인 듯.

나는 내가 투명인간이라고 느낀다.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이다.
하지만 가장 깊은 수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설명하기가 아주 어렵다. 그리고 설명하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정으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게 내가 하려는 말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건 내가 자랄 때 우리집에는 욕실 세면대 위에 높이 걸려 있던 아주 작은 거울 말고는 거울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처럼 단순한 이야기일수 있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아주 근본적인 수준에서 나를 투명인간으로 느낀다는 말 외에는. - P82

윌리엄이 말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 당신의 공포에 대해 내가 뭘 해줄 수 있는지 알았던 적이 없어."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음, 문을 열 때 당신 먼저 몸을 들이미는게 아니라 나를 위해 문을 잡아주면 돼."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면 충분히 긴 바지를 입는 것도 괜찮겠지. 당신 카키 바지가 너무 짧아서 그걸 보면 겁나게 우울해지거든. 맙소사, 윌리엄, 당신 얼간이처럼 보인다고." - P144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 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천천히―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 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 -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 P168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건-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 - 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 P194

나는 알고 싶다.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캐서린, 늘 자기만의 특유한 향기를 발산했던.

요점은 결코 자신을 떠나지 않는 문화적인 빈 지점이 있다는 말이고, 다만 그것은 하나의 작은 점이 아니라 거대하고 텅 빈 캔버스에서, 그게 삶을 아주 무서운 것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윌리엄은 그런 나를 세상으로 안내한 듯하다. 그러니까 내가 최대한 안내될 수 있는 만큼, 그가 내게 그걸 해주었다. 그리고 캐서린도. -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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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 읽자.


1995년 자크 쉬락이 프랑스 대통령이 된 후의 일.

우리는 규칙과 요령 그리고 임시기관 같은 것들의 지지부진함을 안고, 대파업의 흩어진 시간을 되찾았다. 몸과 몸짓 속에는 신화적인 것이 있었고 지하철, 버스 없이 파리를 완강히 걷는 일은 기억의 행위였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목소리가 68년에서 95년을 리용역에 모았다. 우리는 다시 믿었다. <다른 세상>, <사회적인 유럽을 만들자는 새로운 말들이 사람들을 차분히 흥분시켰다.
그들은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말들을 반복하며 경탄했다. 과업은 행동보다는 말이었다. 쥐페는 정책을 철회했다. 크리스마스가 왔고 원래의 자신으로, 선물로 인내로 돌아가야 했다. 12월의 시위는 끝났고, 그것은 서사를 만들지 못했다. 다만 밤중에 행진하는 군중들의 모습만 남았을 뿐 사람들은 그것이 세기의 마지막 대파업인지 깨어남의 시작인지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무언가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엘뤼아르의 시 구절,
온 세상에 / 몇몇뿐이었던 그들은 / 각자 혼자 믿었다네 / 갑자기 그들은 군중이 되었네를 떠올렸다. - P258

놀라운 일 없는 나날들에 두려움, 격분, 희열의 파도가 쳤다. 우리는 앞으로 10년 동안 수천 명을 죽이게 될 «광우병> 때문에 더 이상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난민들과 불법체류자들이 있는 교화의 문을 도끼로 부수던 장면은 분노를 샀다. 갑자기 불공정한 느낌과 감정의 폭발 혹은 의식이 사람들을 거리로 나가 행진하게 만들었다. 10만 명의 시위자들이 외국인들의 추방을 용이하게 만드는 드브레 법률안에 맞서 배낭에 배지를 보란 듯이 달고, 검은 여행 가방과 « 다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행진했으며, 집에 돌아가서는 서랍 속에 기념으로 간직했다. - P259

국회를 해산하고자 하는 시락의 우스꽝스러운 욕망 덕분에 좌파가 선거에서 이겼고, 조스팡이 국무총리가 됐다. 그것은 96년 5월, 환멸을 느꼈던 밤의 만회였고 덜 나쁜 재정립이었으며, 다른 것들은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기초 의료 보험 혜택과 근로시간 주 35시간으로 자신의 시간을 가지며, 모두가 좋은 삶을 살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에 적합한, 자유와 평등과 관대함을 추구하는 조치들의 재건이었다. 우리는 우파 정부 아래에서 2000년을 넘기지 않게 됐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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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월을 읽으면 부르디외도 읽어야 돼요? ㅠ.ㅠ

프레이야 2022-10-20 21:36   좋아요 0 | URL
안 읽어도 되겠지요. ㅎ 이름만 들어본 피에르 부르디외 딱 나와가지고요.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찾아보니 읽고 싶은 게 몇 권 눈에 들어와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팍 꽂혔습니다. ^^

서니데이 2022-10-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995년 전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면, 많이 멀지는 않지만, 아주 가까운 것도 아닌 느낌 같네요.
아니 에르노의 책들은 색감이 좋은 책이 많은데, 이 책도 괜찮네요.
프레이야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2-10-20 23:14   좋아요 0 | URL
그렇게 세월이 흘렀지만 되돌아보면 엊그제 같고요. 1984북스 책들 색감도 만듦새도 포근포근해요. 본문 글자체도 참 이뻐요.
굿나잇 서니데이 님. ^^

yamoo 2022-10-2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르디외 책들은 번역되너 나오는 족족 다 구매했습니다만...
읽은 작품은 별로 없어요. 번역들이 거의 개판이라...^^;;

프레이야 2022-10-21 13:51   좋아요 0 | URL
번역이 그러면 참 난감하네요.ㅠ
그중 그래도 추천할만한 책은 어떤건가요?
처음 읽는 사람에게요

yamoo 2022-10-21 17:36   좋아요 1 | URL
텔레비전에 대하여가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데...
번역이 걍~~
그래두 그나마 읽을 수는 있어요...^^;;

프레이야 2022-10-22 04:49   좋아요 0 | URL
네. 참고할게요 야무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