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 쓰지 마라, 공부만 해." 어머니의 말이 모든 것을 정리해준다. 강압적이지만 안심이 되는 말. 하지만 내가 12년 동안 선생님에게서 듣고 또 들었던, 헌신과 희생을 자극하는 그 말들은 분명 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몸은 불결한 것이고 재능은 죄악이다. 기도는 근엄하지 않지만, 성녀들의 이야기, 고초를 당하고 사자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지고, 채찍질당한, 흰 어린 양이라는 뜻의 아녜스, 비슷한 시나리오의 블랑딘*, 심장 한가운데 칼이 박힌 마리아 고레티**, 그리고 잔 다르크, 잔 다르크 이야기에 나는 교실에서 울기까지 했다. - P76

노력을 하고 희생을 해도 예견된 행복은 채워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파렴치한 행동, 예를 들면 좋은 점수를 받으며 느끼는 기쁨,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는 즐거움, 어머니에게서 사탕을 훔치는 즐거움 같은 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조심한다. 하지만 내 타고난 장난기, 나의 조심성 부족은 어떻게 해도 숨길 수 없다. 공책에 얼룩을 묻혀놓고, 식탁에서 공부했다는 말을 어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바느질 천에 묻은 얼룩진 손가락 자국들 "청결은 영혼을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여러분!" 내 본모습이 드러난다. 흠집, 골치 아픈 단어. 흠잡을 데 없는 무결점 마리아. 어떻게 난폭함과 욕망 같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은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 P78

나는, 나를 숨기는 편이 나를 위해서 더 낫다고 느낀다. 이런 태도가 나를 구해주리라고 믿었고, 그래서 나는 욕망과 짓궂음, 견고한 어두운 측면을 내 안 깊숙이 숨기며 나를 보호했다. 마찬가지 방어 반응이었겠지만, 나는 성모마리아가 나에게 출현할지 모른다는 어리석은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성모가 출현하면 내가 성녀가 돼야만 할 텐데, 나는 전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파파야를 먹고 젓가락으로 밥을 먹고, 내 ‘그것’을 사용해보고 싶었고, 의사나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들의 설교에서, 나는 몇몇 부분은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린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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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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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외부인, 우리 안의 외부인


10년 전에 나온 “지상의 노래”와 약간은 겹쳐오는 이미지가 있다. 반복된 소재와 어느 정도의 클리쉐가 있지만 여운이 깊은, 오랜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났다. 교과서적이랄지 서사와 문장이 한구석도 치밀하지 않은 데가 없다. 당연한 것이지만, 첨자와 오탈자 없이 깔끔한 편집/교열도 마음에 든다.
2018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잡지 연재 후 코로나 점령기 동안 고치는 시간이 오래 걸린 셈이라며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의식의 표출이 절제되고 이야기가 조금 튀어 나온 것 같은 변화가 감지된다. 그 공정이 수월하지만은 않았으니 내용과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쓴다.
이야기에 일부 영감을 주었을, 지금도 세계 어딘가를 자전거로 떠돌고 있을 임송학 님도 어떤 분인지 궁금해 찾아보았다.

https://m.blog.naver.com/cafeoki/220799684093

어떤 진실은 말이 아니라 말을 안에 끌어안은채, 안에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면서 하는 행동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그럴 때 드러나는 것은 드러내지 않은 말이다. - P279

사람이 이렇게 외롭게 내버려진 채 잊힐 수 있는가? 황선호는 무거운 질문 앞에 자기를 세웠다. 그가 살던 도시와 이 도시 상의 물리적인 거리를 변명으로 앞세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그는 죽은 자의 외로움은 순전히 산 자에 의해 비롯되는 것, 그러므로 산 자의 죄라는 생각을 했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은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서든 살 수 있다. 낯선 곳에 있으면 낯설고 이상한 곳에 있으면 이상하지만, 살아 있는 동안은 낯설고 이상한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낯설고 이상한 곳에 있는 것은 이상하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섦과 이상함이 아니라, 그것은 외로움이다. 말할 수 없이 무거운, 견딜 수 없는, 더할 수 없이 철저하고 처절한, 절대적인 외로움. 이 외로움을 이길 외로움은 없다. - P300

‘외부인‘은 그런 외지인들에게 이들이 새롭게 붙인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외지인이나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 소속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입니다.
‘외부인’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기들과 구별하기 원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된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외부인, 소속이 없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에서 배제해도 되는 사람,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출신과 성향과 목적과 관습, 즉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손님이 아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고 누리는 것이 당연한 무언가를 빼앗아갈 것이고, 내부를 더럽힐 것이고 마침내 혼란에 빠뜨릴 거라는 식으로 근거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 P311

《외부인들》은 류의 첫 소설이다. 그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의 대부분은 실제 있었던 일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이름이나 지명까지 그대로 사용했다. "나는 거의 가공하지 않았습니다. 내 어쭙잖은 상상력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이들의 그 생생한 경험을 훼손하지 않을까 조심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나오는 개들의 활약에 대한 삽화 역시 꾸며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꾸밈없이 쓰려고 해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독자가 있을까. - P325

"나는 그 도시에 없는 사람이에요. 벌써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그래요. 여기 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앞으로도 여기 있는 사람이기를 원해요. 친구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해요." 황선호는 보보체리나무 밑에서 그 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 나무는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가볍게 흔들렸다. 황선호가 끝내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한 그의 옛 동료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기운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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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네요?
전 사두기만 하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우 작가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 작가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하곤 하거든요.
하루키 작가도 늘 문학상 후보에 오르시던데 그렇다면 이승우 작가님도 만만치 않은 후보가 되실 수 있으실텐데? 그런 상상을 하곤 합니다^^

프레이야 2022-10-27 21:25   좋아요 1 | URL
흡입될거예요. 결말은 예상되는 이야기이고 어찌 보면 많이 해온 이야기이지만 빨려들어갑니다. 노벨상 수상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요.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는 소설가 같아요. 이국에서,도 정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볼 점도 많고 사유를 전개하는 문장도 좋고요. 오랜만에 읽었네요. 그동안 작품들 많던데 찾아읽을 것 같아요. ^^

희선 2022-10-28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마음에 드셨군요 저는 책 볼 때 그런 거 별로 마음 안 쓰는군요 아니 오탈자는 없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어떤 때 그런 거 많은 책을 다른 사람한테 줄 때면, 제가 미안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10-28 08:50   좋아요 0 | URL
그렇죠. ^^ 그냥 읽다보면 눈이 들어오니까요. 이게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띄어쓰기도 정확하면 금상첨화다 싶어요. 대부분이 당연히 그렇지만요.
 

광야. 만나. 자연주의자들의 개더링.
완전한 자유와 평화. 친구들의 집.

거주지가 아니고 통과해 가야 하는 곳이라는 점에서 보보는 광야와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환경이 열악하다고 불평하지 않는 까닭이 그 때문일 것이다. 더 좋은환경이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어차피 거주지가 아니니까 견딜 수 있다. 이곳에서는 어떻게든 연명하면서 통과하기만 하면 되니까. 열악한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의 이상한 평안함도 그런 인식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아마도 현실의 비참함을 이기기 위해 그런 인식을 만들고 부추기고 키웠는지 모른다. 그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P200

촛불이 일렁이며 기묘한 그림을 벽에 그렸다. 노래가 합창이 되고 좁은 실내가 공연장이 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구인가 그때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황선호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도 엉겁결에 일어나 사람들 속에 섞여 춤을 추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격랑이 마음속에서 일어났다. 이건 무얼까, 가슴속을 뜨겁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일까.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걸까.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 친근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음악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밤이 깊었는데도 노래와 춤은 멈추지 않았다. - P205

형제라는 호칭은 외부 사람들에게 배타적이고, 내부적으로도 형과 아우에게 주어진 태생적인 힘의 불균형으로 인해 시기와 다툼과 분쟁이 발생할 소지를 품고 있지만 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교수는 말했다. 그는 온 인류가 친구가 되는 완전한 세상에 대한 포부를 자주 피력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 위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 아래 있지 않다. 친구는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에게 옆에, 같이, 더불어 있는 사람이 부르는 이름이다. 인간이 가진 어떤 조건도, 예컨대 피부색이든 생김새든 몸무게든 성이든 종교든 재산이든 지능이든 나이든 취향이든 차별의 구실이 되지 않는다. 그는 모두가 친구가 되는 세상을 지향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친구로 불렀고 자기도 친구로 불리기를 원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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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터 흡입력과 사유의 깊이에 다시 놀란다.
이승우! “신성과 순수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

나는 그런 존재와 같다. 저 세계를 빠져나왔고, 그러니까 저 세계의 존재자가 아니고 그렇지만 이 세계에는 등기되지 않고 떠돈다.
그러니까 이 세계의 존재자 역시 아니다. 나는 헤카테,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문을 지키는 신에게 임시로 소속된 자이다. 헤카테는 교차로, 문턱, 건널목을 지배한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에서 서성이는 자이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거주지가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거주자가 아니다. 교차로와 문턱과 건널목은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없는 사람으로 있고, 살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 - P55

그것은 그 도시에서의 정착의 여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불안정할 때 삶의 뿔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길고 글쓰기는 잦다. 삶이 안정할 때 삶의 안정함을 토로하는 글은 짧고 글쓰기는 드문드문하다. 첫날 쓴 그의 글에는 비장한 기운이 흐르는데, 보보라는낯선 도시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이곳에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이곳에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서) 사라진 사람이었다.
어떤 글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기 운명에 대해 하는 예언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쓰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는 아마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 P56

진동하는 악취의 중요한 원인 제공자인 이 배설물들은 자동차나 자전거의 바퀴, 그리고 사람의 신발에 붙어서 형체를 바꿔가며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개들은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과 함께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람보다 많고 사람보다 의젓하다. 개들은 사람을 힐끗거리며 어슬렁거리고 사람들은 개들을 힐끗거리지 않고 어슬렁거린다. 개들은 배설을 가려서 하지 않고(가려서한다면 개가 아니지!), 사람은 개들의 배설물을 괘념치 않는다. 도시는 악취로 정복된다. 쏘고 베고 찌르는 것만 무기가 아니다. - P72

발밑의 현실이 하늘의 추상을 이긴다. 중요한 것보다 시급한 것을 먼저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치이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 속의 음식이 타고 있을 때는 가스불부터 꺼야 하고 화장실이 급할 때는 화장실부터 가야 한다. 시급한 일이 있으면 중요한 일은 미뤄진다. 시급한 일이 끊이지 않으면 중요한 일은 영원히 미뤄지고 끝내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 P90

순수는 보임으로써 더러워진다. 눈에 보임으로써 순수는 더러워지지만, 순수를 봄으로써, 즉 순수를 오염시킴으로써 눈은 화를 입는다. 그런데 순수를 보는 순간 눈은 화를 입어 보는 기능을 상실하므로 순수는 결코 더러워지는 법이 없다. 순수를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은 시선이지만, 시선이 가닿기 전에 눈이 먼저 상하기 때문에 순수는 오염되지 않는다. 순수는 오염되지 않지만 눈은 순수를 본(보려고 한) 대가로 오염된다. 순수를 보는 시선은 덫과 같다. 이 덫에 걸리는 자는 덫을 놓은 자이다. 말하자면 눈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탐욕의 시선을 구사한 데 대한 화, 일종의 형벌이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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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국가 폭력의 저항자

“모든 프랑스인은 공범이다. 이게 프랑스의 가치에서 나온 행동인가?”


자밀라 부파차
_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일원. 무슬림 여성.

지젤 알리미
_ 반식민주의 인권 변호사. 프랑스 여성운동의 상징적 인물.

보부아르는 회고록 두 번째 권을 일단 제목 없이 출판사에 넘기고다음 시기 자료 작업을 하러 국립도서관에 갔다. 그 시기는 《레 망다랭》에도 많이 썼지만, 소설은 자전적 글쓰기만큼 삶의 우연을 잘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예술적인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다. 삶은 거대한 통일성으로 엮어낼 수 없는 예측 밖의 무의미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 P395

알리미는 고문에 책임을 져야 할 프랑스인 고위 관계자들을 고소하자고 부파차를 설득했다. 보부아르가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해줄까? 자칫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부파차는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몰랐다. 보부아르는 자기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인 펜으로 지원에 나섰다. 보부아르의 자밀라 부파차 옹호론은 6월에<르 몽드>에 게재되어 변호위원단 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변호위원단의 목표는 이 일을 널리 알리고 전쟁 중에 일어난 프랑스인의 수치스러운 만행을 밝히는 것이었다. <르 몽드>에 기고한 글에서 보부아르는 사람들이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야말로 이 추악한 일의 가장 추악한 면이라고 했다.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관심한 그들 자신에게 어떻게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있나? - P401

보부아르는 지식인들이 문화에 접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읽을 만한 글을 써야 한다. 이야기를 통하여 그들의 정신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어넣어야 한다. - P404

사르트르 철학의 별이 빛을 잃어 가는 동안, 보부아르를 향한 페미니스트의 관심은 높아졌다. 오십 대의 보부아르는 전복적 언어 구사에 단련되어 있었고 독자의 자유에 호소하는 상상적 경험을 창조하는 기술도 뛰어났다. 하지만 보부아르는 전복적언어와 상상의 자유 이상을 원했다. 여성들의 진짜 삶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의 제정을 원했다.
이십 년 사이에 페미니즘 제2물결이 탄력을 받았다. 1960년대까지 가족 계획은 금기시되었고 피임약 판매는 법적으로 제한되었다. 1960년에 경구 피임약이 미국에서 판매되기 시작했고 영국은 1961년부터 기혼 여성에 한해서 판매를 허가했다. 프랑스에서 피임약 판매는 1967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영국 미혼 여성이 피임약을 살 수 있게 된 것도 이 해부터다). 보부아르는 이 변화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제2의 성》은 전 세계 여성들과 페미니스트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 P411

프랑스에서 피임은 1967년에 합법화됐지만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었다. 주간지 <르누벨옵세르바퇴르>가 유명인 몇 명의 이름이 들어간다는 조건으로 선언문을 실어주겠다고 했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바로 그 유명인이었고 기꺼이 그들의 대의에 동의했다. 자기 집을 모임 장소로 내어주기도 했다.
그 후 몇 달 동안 일요일마다 보부아르의 집 소파에서 선전 운동을조직했다. 그들은 343명에게 서명을 받아 ‘343인 선언‘을 1971년 4월5일자 <르누벨옵세르바퇴르>에 성공적으로 발표했다. 선언의 메시지는 단순했다.

프랑스에서 매년 1백만 명의 여성이 낙태를 합니다. 의료 시설에서는 낙태가 비교적 간단한 시술이지만 법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열악하고 미심쩍은 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비밀리에 낙태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1백만 명에 대하여 침묵해 왔습니다. 나도 그 1백만 명 중 하나임을 선언합니다. 나도 낙태를 한 여성임을 선언합니다.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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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젤 알리미가 등장하는군요. 여성주의 책 읽기에서 몇번 나오던 분....

프레이야 2022-10-26 22:03   좋아요 0 | URL
용감하고 존경스러운 언니들 참 많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