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여성해방 운동의 선봉자
1970-1980년

“1976년에도 결혼과 모성은 여전히 여성에게 함정과 같다.”

- 노년, 에이드리엔 리치
- 1980년 사르트르의 죽음
- 1972년 독일 저널리스트 알리스 슈바르처와 인터뷰
“보부아르의 말”



(발췌 요약)
일찌기 보부아르는 여성으로서 타자임을 느꼈고 그 점이 “제2의성”의 분석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타자임을 느꼈다. 늙어가고 있었고 다시 한번 자신의 경험으로 인해 남들의 경험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노화와 노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금기시된 분위기였다.
보부아르는 노년이 유일한 보편적 경험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모든 노화가 과격하거나 삐걱되거나 슬프게 다가오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여성 되기처럼 노인 되기도 개인의 신체적 심리적 경제적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지리학적 가족적 맥락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양상을 띤다. 나이듦의 상황이 그 경험에 극도로 큰 영향을 준다. 노년은 생물학적 사실이고 충분히 오래 산 인간의 보편적 운명이다. 하지만 노년이 모든 이에게 주변화와 외로움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노인을 평범한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이 아직은 혹은 더는 인간이 아닌데 인간인 것처럼 행동하므로 특별하게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이는 미래를 대표하는데 노인은 집행유예 상태의 송장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밖에서 보면 나이 듦이 안으로부터의 유폐처럼 느껴질 만하다. 보부아르는 독자에게 되기의 경험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노년은 1970년 1월에 출간되어 금방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보부아르는 노년에 따라올 수 있는 다양한 경험에 기대어 또다시 금기에 도전했다. 노년을 경험하고 글쓰기로서 성찰하는 이들을 인용했기 때문에 특권을 누리는 이들의 나이 듦에서 주로 끌어올 수 밖에 없었다. 노년을 사회적 정치적 범주로 논하면서 주체 경험이 하는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문학 자료를 인용한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
1976년에 보부아르는 결혼과 모성은 여전히 - 너무 많은 경우에ㅡ함정이라고 보았다. 아이를 낳고 싶은 여성은 진지하게 그 아이의 양육 조건을 숙고해야 한다. 아이들이 아플 때 일을 포기하고 집에서 돌볼 것으로 기대되는 쪽은 늘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잘 크지 못하면 그 비난은 여성에게 간다. 문제는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 노동 자체가 비하를 낳지는 않는다. 하지만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노동은 여성뿐만 아니라 모두가 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자기를 살아 있게 하는 일을 할 시간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부아르는 자신이 자발적 모성을 지지하는 운동가˝라고 했다.
그해에 대서양 건너편에서 페미니스트 시인 에이드리엔 리치(Adrienne Rich)가 《여성으로 태어나》를 출간했다. 이 책은 《제2의성》에서 다룬 모성에서 출발하여 모성의 힘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1976년 3월 여성대상범죄국제재판소가 브뤼셀에서 열렸는데 보부아르의 편지가 공식 의사록에 포함되었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해‘ 바로 다음에 이 위원회가 열렸으니 우습다면서 ‘여성의 해‘도 결국 남성 사회가 여성을 신비화하려고 마련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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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 오늘의 포스팅이라며 북플에 뜬다.
———

I‘m Nobody / Emily Dickson
11월, 무명씨의 또하루를 시작하며~
남은 두 달을 생각하며~


I‘m Nobody


Emily Dickinson



I‘m Nobody! Who are You?
Are you - Nobody - too?
Then there‘s a pair of us!
Don‘t tell!
They‘d banish us - you know!


How Dreary - to be - Somebody!
How public - like a fog -
To tell your name-
the livelong June-
To an admiring bog!


--------



무명인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쉿! 말하지 마세요.
쫓겨날 테니까 말이에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양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Emily Dickinson


미국 시인(1830~1886). 자연과 사랑, 청교도주의를 배경으로 한 죽음과 영원 등의 주제를 담은 시들을 남겼다. 평생을 칩거하며 독신으로 살았고, 죽은 후에야 그녀가 2000여편의 시를 쓴 것이 알려졌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생일> 중




———

자꾸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다. 속속 전해지는 뉴스와 증언들은 차마 다 보고 듣기 힘들 정도다. 이십 대가 많다보니 그 또래 부모 입장에서 차마 무슨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 년 전 가을, 지인의 부탁으로 초등학교 영어 방과후 수업을 맡은 적이 있다. 몇 달간이었지만 십인십색 아이들과 정이 들어 헤어질 때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월 말 핼러윈데이를 앞두고 그 주에는 핼러윈 특집 수업을 하였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들었다. 그날의 의미는 제쳐두고 전주부터 기대에 부풀어 있던 아이들은 사탕을 받고 소품을 만들어 분장하고 깔깔거렸다. 그게 다였다. 나는 아이들 구미에 맞게 분위기를 맞춰 핼러윈데이와 연결되는 단어카드와 소품들, 간식을 준비하고 재밌는 영상도 보여 주었다. 아이들은 그 모든 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따라했을 것이다. 놀이수업이었다고 해도 그마저 주입식이었다. 그 아이들은 몇 년 후 이태원에 놀러 갈 수도 있다. 이태원에 간 청년들은 예전에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 그렇게 의미도 모를 수업을 받았을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내 아이들 유치원 때도 그런 행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남은 소품 중 주황색 호박 플라스틱 바구니가 지금 우리 집에도 하나 굴러다닌다. 그것과 똑같은 게 쓰레기 나뒹구는 그 거리 구석에 오두커니 남아 있는 뉴스 화면을 보았다.
내 아이가 그곳에 없었다는 것만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사람으로서 참담하다. 국민으로서 분노한다. 유실문 센터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의 손길을 기다리는 짓밟힌 신발과 가방, 에어팟과 안경 들, 팔 년 전의 아우성이 환청처럼 들린다. 안전불감증과 무책임, 천박한 인식과 이기주의, 비방과 혐오가 만연한 나라에서 눈을 감고 다시 두 손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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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11-01 11: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작가님 글 참 좋아했었는데 ㅠㅠ 그리운 작가님입니다. 저는 뉴스를 못 보겠더라고요. 그냥 아무렇지 않은척 일상을 살아내는게 참 힘든 세월입니다.

프레이야 2022-11-01 11:49   좋아요 2 | URL
네. 아무렇지 않은 척할 뿐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요. 그렇게 믿고 싶어요. 팔년전의 트라우마가 당시 한달은 갔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에도 오래도록.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장영희 샘 글 좋아합니다. 김점선 화가의 그림과 잘 어울리고 쾌활함이 있지요. 두 달 남았네요 올해가. 날마다 생일이라고 생각해요. 명복을 빌며… _()_

새파랑 2022-11-01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 15년전이라니 까마득하네요 ~ 프레이야님 북플의 산증인이십니다~!!

저도 이젠 뉴스를 안보게 되더라구요 ㅜㅜ

프레이야 2022-11-01 21:06   좋아요 1 | URL
가끔 20년 전의 글이 뜨면 저도 놀라네요. 의인들 이야기는 그와중에 또 마음을 울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11-01 16: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영희 작가님의 글 따뜻하고 좋았던 기억이... 지금은 다 정리해서 없어서 아쉽지만^^;
저는 매일 아침 신문을 보는데 특히 어제는 많이 힘들더라구요. 감정적으로 바라보려니 더 힘들어서 지금은 이성을 가동중입니다.

프레이야 2022-11-01 21:10   좋아요 1 | URL
장영희 선생님의 온기 있고 긍정적인 글이 이런 때에 도움이 되는 면이 있네요. 감정적으론 어제보다는 오늘 좀 낫습니다. 마음이나마 모두 모아 드리고 싶습니다. 다 같은 마음이겠지요.
 

10년 전 읽었던 기억이 아스름하다. 개정판이 나왔다. 10년이 흘러 계절이 훅 바뀌는 시점에서 다시 읽는다. 사주명리학과 주역에 관심이 많고 눈이 맑은 자칭 선무당 친구에게 선물해야겠다.


# 차서 - 시간적 순차와 공간적 질서를 오버랩시킨 개념이 곧 ‘차서‘다. 예컨대, 벚꽃이 피면 봄이다. 그때 봄이란 벚꽃이라는 공간적 표지와 벚꽃이 필 수 있는 절기라는 시간의 흐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차서라고 한다. (51)

시작이 있으면 중간이 있고, 그다음엔 끝이 있다. 시작과 중간과 끝, 시간적 순서는 반드시 공간적 질서와 함께한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표현이다.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시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공간의 ‘휘어짐‘이고 공간은 시간의 ‘주름‘이다. 시공간의 리듬, 그것이 곧 ‘차서‘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는 차서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차서가. - P50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이 차서를 어그러뜨리는 체제이다. 순환과 비움이 아니라, 소유와 증식만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할 때는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돈을 버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 대한 존중감이자 타인에 대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다음에, 먹고살 만해진 다음에도 계속 부를 증식하고자 한다면 그건 바보거나 광인이다. 자연스럽지가 않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부를 일구고 나면 선비를 기르기 위해 삼대가 적선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지혜다. 뒤에서 배울 터이지만 재성(재물운)이 관성(관)과 인성(명예와 공부운)으로 순환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는 반드시 정신의 가치와 함께 가야 한다는 걸, 그래야 쉬임 없이 만물을 낳을 수 있다는 걸 터득했던 셈이다. "태양은 조건 없이 베푼다"(조르주 바타유) 혹은 "베푸는 것은 하느님과 같은 일이고/쌓아 두는 것은 지옥이라네" (비노바 바베) 등의 경구도 같은 이치의 소산이다. - P61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문명의 폭주 속에서 나를 잃어버렸다. 나에게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맞으려나. 감정, 자의식, 스펙, 대체 무엇이 ‘나‘인가? 그 어떤 것도 허망할 따름이다. 그래서 괴롭고 아프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본 적이 없었다. (………)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서문」, 『도덕의 계보』, 청하, 1982, 21~22쪽)
결국 자신과의 소외는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맞물려 있는 셈이다. - P63

굴드는 말했다. 과학이란 "자료와 편견 사이의 대화"라고. 과학이 이럴진대 운명학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음양오행은 하나의 매트릭스다. 음양오행을 터득하면 세상만사가 다 보일 것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딱! 자기의 내공만큼만 볼 수 있다. 또 그만큼만 삶의 현장에 개입할 수 있다. 거꾸로 말하면, 개입할 수 있는 그만큼이 곧 운이고 명이다. 그래서 꼭 도사가 되거나 심령술사가 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용법이고 발심이다. 내 운명을 우주적 인드라망 속에서 보겠다고 하는. 그 명을 오로지 나의 힘으로 운전해보겠다고 하는. - P66

나의 욕망은 곧 사회적 인과의 결과물이다. 나의 질병은 곧 시대적 징후의 산물이다. 나의 욕망, 나의 질병을 탐구하고 해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타자들에게 그것을 전파하고 순환시킬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그것뿐이다. 한꺼번에 다수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싶다는 발상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그것은 이미 그 안에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자기를 소외시키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구할 수 있을 뿐이다. 너무 협소하다고? 그렇지 않다! 어떤 개인도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의 존재성 자체가 사회적, 우주적 인연의 산물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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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1-02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 무당 친구! ㅎㅎ
그 친구는 작가인 프레이야님을 친구로 ^^
[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에는 차서가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차서가]

11월! 프레이야님
바쁘게 개정판 준비 하고 계실지도 ^^

프레이야 2022-11-02 00:49   좋아요 0 | URL
이야기하다보면 어느새 일주론으로 빠지는… 11월이라뇨 시간 참 잘 흘러갑니다.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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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폴 엘뤼아르의 시구에서 자신의 얼굴을 떠올렸던 “나”는 조금은 이른 결혼 후 남자와는 달리 암묵적으로 혹은 공공연하게 소비되는 여자의 삶 - 책임이 아니라 의무 - 과 사회적 성취 사이에 놓인 간극을 체감한다.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에 남자는 크게 기여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신경줄을 팽팽히 당기고 몸으로 감당해야 하는 쪽은 여자다. 그리고 그 시절의 끝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생각한다.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는”, 예감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운명. 지금에 와 되돌아보면 그 “얼어붙은 여자”는 바로 나 자신이기도 하다.

자기 삶을 바꿀 수 있는 수단으로서 결혼과 출산을 택한 여자의 이중성, 친절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게 다가 아닌 무신경한 남자의 역할, 비슷하게 겹쳐오는 불면의 밤과 몽유병자의 낮, 서투름에 불만과 불안과 고독이 목구멍에 차올라 땅속으로 꺼져버릴 것 같던 날들이 엊그제만 같다.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 개인의 기억이 데려오는 공동기억과 용인된 억압, 척하며 참고 말하지 못한 것들의 치열한 발화!

현재형 문장,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마침표 대신 의도적으로 가파르게 찍은 쉼표들, 날카롭고 절박한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차가운 대목들. 이 책을 쓰고 에르노는 결혼을 중지했다.

그래도 나는 그런 식으로 주고받았다. 진이 빠진다. 내가 책을 사거나 쓰레기가 꽉 찬 채로 내버려두는 이런 치사한 일은, 쾌락이나 진정한 반항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복수심이다. 결혼 초부터 나는, 항상 나를 회피하는 평등의 꽁무니를 쫓아다닌다는 느낌이 든다. 한 장면, 반항, 이혼, 모든 것을 흉내 내는 멋진 장면이 남는다. 성찰과 토론을 대신하는, 한 시간 동안의 마구잡이 초토화, 퇴색한 내 삶 속의 붉은 태양. 치밀어 오르는 열기를 느낀다, 분노의 떨림, 조화를 파괴하는 무례한 첫 문장을 내뱉는다, "하녀 노릇에 진절머리 나!" 그가 가면을 쓰는 것을 지켜 보고, 멋진 대답을 기다린다, 나를 자극하고, 잃어버린 언어와 폭력과 다른 것에 대한 갈망을 되찾는 걸 도와줄 대답을. - P230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이 바랐던 삶을 비교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의 삶과 비교하기에 이른다. 결코 남자들의 삶과 비교하지 않는다, 이건 대체 무슨 생각인가. 하지만 남자 동료들은, 절도 있고, 당당한 걸음으로, 고등학교에서부터 자신들의 자동차까지 갈 수 있고, 노동조합미팅에 가서 활동할 수도 있고, 서로 발언하고 듣고, 끔찍한 노동조건에 관해 투표할 수도 있고, 선생님은 학생들을 감시할 필요가 없다고, 선생님이 준 벌도 수정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들 업무의 한계에 대해 깐깐하게 다툴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추가 업무를 하지 않으려는 궤변론자들의 경이로움, 어쩌면 남자들의 습관. - P236

다시 불러오는 나의 배, 덜 놀랍다, 벌써 익숙해진 습관, 아파트에 스며드는 습한 여름, 아이가 공치기하는 호수 앞 광장의 잔잔한 열기, 그늘진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완전히 무력감에 빠졌다. 갑자기 멈춰서는 관광객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고 걸었다. 세상과 미래로부터 나를 고립시키는 무게감, 나는 어느 날 밤엔가 드러누우러 가야 하는 보리바쥐 병원의 고문대 위로 빨리 가고 싶지 않았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외동아이와 보내는 마지막 순간들을 즐기고 싶었다. 여자로서의 나의 모든 이야기는, 투덜거리면서 내려가는 계단의 이야기다. - P245

내가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나의 수련 기간은 끝났다. 그 후로는 익숙해진다. 집 안에서는, 커피 그라인더, 냄비 같은 것들이 내는 수많은 자잘한 소리, 집 밖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선생님, 카샤렐이나 로디에* 브랜드옷을 입은 중견 간부의 아내. 얼어붙은 여자. - P249

끝에 거의 다 왔다, 거의 다. 이제 나는 곧 내가 끔찍이 싫어했던, 주름지고 비장한 얼굴들을 닮아가리라. 미용실 샴푸대에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던 얼굴들을 얼마나 걸릴까. 더는 숨길 수 없는 주름, 쇠락이 바로 앞에 와 있다.
이미 나는 그런 얼굴이다.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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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29 1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산 아니 에르노의
<탐닉>을 읽다 말다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중단이라...

작가에게는 모든 게 글쓰기의
소재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네요.

프레이야 2022-10-29 19:43   좋아요 3 | URL
글쓰기의 소재가 될 수 없는 건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용기가 없을 뿐. 글 쓰는 사람 주변의 인물들이 긴장한다는 이유도 그래서겠지요. 자기 이야긴 쓰지 말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는데, 힘든 일입니다. 여러가지 시선이 있기에. 그런 점에서 문학으로 승화한 에르노가 존경스럽네요. 칼같은글쓰기로 넘어가야겠어요. 탐닉은 아직입니다^^
 

여고생 아니 에르노 시점.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

대학 강의실에서의 아니 에르노.
경멸과 욕망의 이중감정을 담은 언어 자각.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여자아이들끼리 나누는 대화, 소설, 잡지 <유행의 메아리>에서 읽은 충고들, 뮈세의 시 몇 편, 내가 큰언니라 생각하는 ‘마담 보바리‘의 지나친 몽상들 같은 작은 지식을 가지고,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홀로 찾아낸 쾌락의 욕구가 적절하지않다는 생각이 감추어져 있었다. 나에게 세상의 반쪽은 정말 미스터리였지만, 그 반쪽은 축제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남자아이들과 나 사이의 불평등, 신체적인 것 외의 다른 차이에 관한 생각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재앙이었다. - P115

나는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에서 제대로 행동할 줄 몰랐다. 쌀쌀맞은 동시에 바람기 있는 여자, 바보 같은 미소, 숨 막히는 경탄, 그리고 맡은 역할에 대한 피로, 더는 스쿠터를 타고 한 바퀴 돌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나 자신을 탓했다. 남자아이들은 언제나 남자아이들일 거니까. 영어 문법에서는 보편적 진리의 예로 "Boys will be boys" 라는 문장을 든다. - P128

내가 계시처럼 기다려온 그 학년, 그 반에서 종교가 나를 망가뜨리게 둘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대도시와 높다란 고택들 사이를 누비는 익명의 도로, 어린 시절에 내게 보상이 돼주었던 도시 루앙을 갈망한다. 축제의 도시였던 루앙은 결국 내가 매일매일을 보내는 도시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상점, 벽에 온통 스며든 커피 냄새, 날씨에 마법을 거는 노랫소리, 익숙한 생활과 죽음을 떠날 것이다. 나는 충분히 강한가.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고 어머니는 곰곰 생각하더니 외친다.
"네가 원하면 떠나라. 여자아이라고 엄마 치마폭에 영원히 남아 있으란 법 없다!" - P136

그를 이해하고, 그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상냥해지려는 노력, 나는 그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와, 그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 위해 내가 섭렵한 모든 것, 재즈, 현대미술, 심지어 어느 조류학자의 새소리, 어느 가톨릭 신자를 위한 샤르트르 대성당 순례와 기도, 그리고 물집 잡힌 발까지. 기쁘게 해주기. 어쨌든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가 아니라, <마지막 일몰>을 보러 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도 서부영화를 좋아할 권리가 있으니, 나는 혼자 알랭 레네의 영화를 보러 가면 된다. 상호교감이라곤 하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바꾼다. - P145

폴 엘뤼아르의 시에서 "나는 간다 생을 향하여, 나는 인간의 얼굴을 지닌다"라는구절을 읽었을 때, 나는 바로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남자들이 경멸적으로 우리를 계집애, 멀대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어휘 측면에서 명백하게 구분하지 못했고, 흔히 남자애들을 멍청이, 새끼, 고추들로 구분해 불렀지만 일다와 나는 이 단어들의 혐오스러운 의미를 잘 몰랐다. 연애할 만한 가치가 없는 하찮은 녀석들이란 뜻으로 나는 고추들이란 단어를 썼는데, 이 단어가 멀대라는 단어의 대응어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계단식 강의실의 남자동료들, 식당 친구들, 허공을 쳐다보는 기차 여행객들 중 누구에게도 나는 3주 이상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누리는 자유의 풍경 속에 있었을 뿐이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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