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가 떠올랐다. I Am Love, 의 마지막은 여주인공 엠마가 집을 뛰쳐나와 동굴에 누워 있는 장면을 비춘다. 자궁이 연상되는 이 광경은 거대하지만 차가운 집, 사방이 훤한 유리문 안에서 남자의 소유물처럼 영육이 감금된 채 살던 여자, 천박한 부르주아 사회에 이식된 가난한 이국여자가 맨발로 탈출해 꾸밈없는 자연으로 들어간 것에 불과한 게 아니다. 생명력 넘치는 사랑을 나누며 가장 행복해 보이는 그 표정은 아기처럼 순수하고 어떤 초월성이 느껴진다. ‘흙의 자궁’ 속에서 여자는 근원적 고향의 기억, 잊혔던 과거와 소리 내지 못한 자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편안해진다. 이후의 이야기는 이전의 이야기기와 다를 것이다.

메리 셸리는 <최후의 인간>(1826) 서문에서 동굴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담는다. 작가 자신을 은유적으로 사라지는 예언자, 모든 여성 예술가들을 잉태했던 신화 속 최초의 예언가의 딸로 그린다고 하며 이 장에 긴 발췌문이 적혀 있다. 구매하려고 보니 1권이 품절이다.

- 3장 동굴의 비유

‘창조‘는 자신을 ‘보이게‘ 만드는 ‘갈라진 거대한 틈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녀는 또다시 은신처인 ‘어둡고 지붕 없는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파편일지라도 자신의 진실과 홀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227

무녀의 잎들을 다 같이 꿰어 맞추는 메리 셸리처럼, 그 비전은 보부아르의 글에 나오는 동굴에 사는 침모의 예술을 지하에서 ‘베 짜는 여성‘의 강력한 예술로 전복적으로 변형시킨다. 베 짜는 여성은 여성 고유의 ‘낙원의 태피스트리’를 짜기 위해 자신의 마술적인 베틀을 사용한다. 그런 비전이 가능했고 현재도 가능한 곳이 동굴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동굴의 힘과 동굴의 비유가 주는 중요한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통해 동굴이란 단순히 과거가 회복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미래를 잉태하는 장소, 새로운 땅이 솟아오르는 ‘흙의 자궁‘(또는 윌라 캐더의『나의 안토니아』에서처럼 ‘열매 동굴‘)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 P2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부장제 문장(판결)으로 병들고 감염되었지만 ‘감금’의 온갖 상황에서도 예술가로서 정면으로 맞서 장르와 젠더의 화해할 수 없는 대립을 자아낸 여성 작가들. 훌륭한 성과를 낸 19세기 여성 시인과 소설가들의 특징은 2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여성의 겸손함이나 남성 흉내내기를 뛰어넘어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의 중요한 경험을 구체적으로 다루었다는 점. 둘째, 가부장적 시학이라 부르는 기준에 따라 남성적인 문학사와 관련해서 볼 때 이들 여성 작품은 종종 ‘이상해’ 보이는데 그것은 익숙한 범주 중 어떤 것에도 들어 맞지 않는 듯 보인다. 여성 문인들을 고립된 기인처럼 보았다. 이 ‘기이함’은 숨겨진 내용과 관련해 볼 때 여성 작가들은 남성의 장르를 수정하거나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꿈이나 이야기를 변장시켜 기록함으로써 작가됨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려 했다. 이런 감추기 전략은 동등한 힘을 지닌 남성들간의 전투적 전략이 아니라 공포와 질병에서 비롯된, 여성 작가들의 필요한 도피이자 문학적 일탈이다. 여성 작가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여성의 탐색이다.

- 2장 감염된 문장

이들 예술가는 누구나 ‘형식 문제‘란 대체로 ‘작품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도록 내용을 숨기기 위한 장치‘였다는 20세기 미국 화가 주디 시카고의 말에 공감했을 것이다. 또한 주디 시카고처럼 여성 작가들은 누구나 ‘이 이중성 때문에, 지배적인 미학에 의하면 나의 작품에는 항상 무언가 ‘옳지 않은‘ 것이 있는 듯 보인다‘고 고백했을 것이다." - P184

여성 작가의 불가피한 젠더의식을 강조한 페미니즘 비평은 ‘전에는 빈 공간이었던 곳에서 의미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공인된 줄거리는 물러나고 지금까지 배경의 익명성 속에 숨어 있던 또 다른 줄거리가 엄지손가락 지문처럼 또렷하게드러난다. - P186

‘어떤 남자도 추측할 수 없는‘ 이 이야기는 자신의 감염과 질병을 치유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고자 애쓰는 여성의 이야기다.
자신을 치유하기 위해 여성 작가는 우선 자신을 감염시켰던 문장(판결)을 쫓아내야 한다. 그녀는 공공연하게 또는 암암리에 ‘주름진 창조자‘에게서 들이마신 절망을 벗어내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 여성 작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자의 텍스트를 수정하는 것이다. 다른 은유로 표현해보자면, ‘유리 표면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여성 문인은 모든 여성이 지켜야 했던 사회적 규범을 그토록 오랫동안 반영해온 거울을 박살내야 한다. - P187


댓글(3)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1-07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읽기 만만치 않겠다는 느낌이 인용문과 프레이야님 글에서도 확 느껴지네요. 이렇게 다른 분들이 올려주는 글들 계속 읽으면서 이 책읽기 훈련을 미리 미리 해야겟어요. ^^

프레이야 2022-11-07 21:47   좋아요 0 | URL
알고 있거나 생소한 상당한 여성 작가들, 환기되는 의미심장한 내용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문장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최후의 인간, 한 권은 품절이네요. 구매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으세요?

바람돌이 2022-11-07 21:44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 있어요. ^^
 

“옛이야기의 매력”에서 브루노 베텔하임이 언급한 대목들이 이 장의 마지막, 백설공주 이야기에서 나온다. 오래전 시공사에서 발간한 책 두 권을 들춰보았다. 밑줄이 군데군데.
백설공주와 왕비는 동일 인물로 본다. 거울이 내는 가부장적 목소리에 길들여진 여성의 이중적 욕망이 난쟁이라는 미성숙함의 내적억압과 낯선 사람을 집에 들이려는 성숙한 자기욕망을 반복하게 한다. 거울과 유리관을 깨는 것으로 죽음과 침묵의 시간을 지나거나 불 붙은 구두를 신고 자아파괴적 광무를 추고서야 탈출에 이른다. 여성을 비정상적 정신의 소유자로 규정하고 소외시킨 ‘변덕’이라는 ‘덕성’을 변심, 변장을 넘어 변화로 변주해나가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소설 ”오, 윌리엄“에서 인물의 말을 통해 “작가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창조와 죽음, 생과 멸을 집행하는 권위가 남성작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기에 어두운 불빛 아래서 부단히 펜을 놀려 자기 언어로 이야기를 방사한 여성작가들의 대두, 흥미진진하다.


- 1장 여왕의 거울

여왕은 자신을 내세우고 과장할 양으로 세이렌의 빗과 이브의 사과 같은 여성적 계략을 전복적으로 사용해 천사 같은 백설 공주를 죽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술수는 딸을 통해 자신이 실현하려던 바와는 정반대 효과를 낸다. 한마디로 백설공주가 수동적인 처녀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공주를 영원히 아름답고 생명력 없는 예술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것은 바로 가부장적 미학이 젊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이다. 광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한 여왕의 관점에서 보면 여성의 인습적인 기술은 죽을 만큼 고통을 준다.
그러나 온순하고 자아가 없는 공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여성의 기술이, 그 기술이 자기를 죽이긴 해도,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성이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수단을 제공한다. - P130

릴리스나 메데이아처럼 자기 파괴적인 백설 공주는 자녀 살해와 그 시도에 내재한 자기 살해를 결심한 살인자가 될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이 고안한 빗과 코르셋처럼 확실하게 여성의 복식인 불타는 구두를 신은 채 백설공주는 이야기, 거울, 자아상으로 만든 투명한 관 밖에서 끔찍한 죽음의 춤을 말없이 출 것이다. 이 죽음은 그녀의 유일한 행위는 죽음의 행위이며 자아 파괴라는 치명적인 행위임을 암시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여왕이 추는 죽음의 춤이 침묵의 춤이라는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 P134

18세기 말까지 여성들은 글만 쓴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이 책 전반에서 우리가 보게 될 가장 중요한 현상인데) 가부장적인 이미지와 인습을 근본적으로 수정한 허구의 세계를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앤 핀치와 앤 엘리엇부터 에밀리 브론테와 에밀리 디킨슨에 이르는 자부심 강한 여성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라는 유리관에서 나와 여왕의 거울을 폭파했을 때, 오래전 침묵 속에 추었던 죽음의 춤은 승리의 춤, 언어를 향한 춤, 권위의 춤이 되었다.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문 중

다시 말하면, 여성은 펜이 나타내는 자율성(주체성)을 부정당하기 때문에 문화로부터 (문화의 상징은 펜이니) 배제되는 한편 스스로 신비한 타자와 비타협적인 타자라는 양극단을 체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화는 이 타자를 숭배와 공포, 사랑과 혐오로 마주한다. 여성은 ‘유령, 악마, 천사, 요정, 마녀, 정령‘으로서 남성 예술가와 미지의 것 사이를 중재하며, 동시에 남성 예술가에게 순수함을 가르치고 그의 타락을 지적한다. 그러면 여성 자신의 예술적 성장은 어떨까? 오랫동안 여성 문인들이 남성 작가의 텍스트라는 거울에서 본 천사와 괴물 이미지에 의해 그 성장은 근본적으로 제한되어왔다. 따라서 그런 이미지에 대한 이해는 여성문학 연구에 필수적이었다. 조앤 디디온이 말했듯이 ‘글쓰기란 공격이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하나의 강제이며[…] 누군가의 가장 사적인 공간을 침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P9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11-0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벌써 시작하셨군요. 보부아르 여성의 탄생도 완독하시더니 진도가 너무 빨라요. ^^ 저는 이 책은 그냥 마음 편하게 12월에 읽으려구요. 지금은 최대한 19세기 여성문학가들의 책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쪽은 진짜 읽은게 거의 없더라구요. ㅎㅎ

프레이야 2022-11-06 00:30   좋아요 0 | URL
전 일단 시작하면서 병행하려구요. 연계되는 생각이 꼬리를 무네요. 좋습니다^^ 더디 갈 거 같아요 저도.
 

16장 보부아르의 유산
1980-1986년
“다행히도 내 힘으로 내 삶을 성취했다. 나에게 성취는 곧 일을 의미했다.”



1980년 사르트르 죽음 후 보부아르는 아픔을 이기고 문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찾기 위해 “작별의 의식”을 쓰고 1981년에 출간한다. 이 책은 노년과 질병이 가능성을 제한하고 삶의 상황을 바꿔 가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사르트르의 쇠락과 죽음을 이야기했다.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길이지만 상황에 따라 그 과정이 다 같지는 않을 것. 보부아르는 이 책을 사르트르에게 바치는 책이자 “노년”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혹독한 비난을 받았으나 이후 보부아르는 좋아하는 두 가지 일에 전념한다. 하나는 여성 해방을 지원하는 일 또 하나는 실비를 비롯한 친구들과 시간 보내기.
보부아르는 여성이 “바라 보는 눈”이 되고 여성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표현되고 경청되고 존중되기를 바랐다. 여성 권익을 위한 위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했다. 1982년 미테랑 대통령이 수여하려 한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거절한 보부아르는 문화 제도 기관이 아니라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클로드 란즈만이 12년만에 완성한 “쇼아” 서문을 비롯해 각종 글쓰기는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고 변화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역량이 있는 젊은 여성 세대에게 명령과도 같은 말이었다.
보부아르는 란즈만에게 권한을 차츰 넘기긴 했지만 1985년에도 여전히 “레 탕 모데른”을 지휘했다. 위스키를 끊지 못하고 타계하기 몇 주 전까지도 한결같이. 편집진은 보부아르의 “물리적 존재감, 힘, 권위가 매체를 살아 숨 쉬게” 했다고 증언하고 개인적 정치적 격랑 속에서 편집위원회를 붙잡아주었다고 기억한다.

자신은 체계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로 체계적 철학자이길 거부했으나 자신의 책에 철학이 들어가 있다면 그게 자신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라고 밝혔다. 미리 알 수 없는 미래, 그 의미를 갈망하며 사는 데에 인간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활화산 같은 에너지를 지닌 사람, 세상의 오해와 비난도 즐겨 맞으며 그 많은 일을 어찌 다 했는지 경이롭다. 보부아르에게 문학과 글쓰기는 정력을 내뿜어 자기정화와 통찰로 가는 최고 방편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되어가고 있는지, 하나의 질문을 유산으로 남겼다, 보부아르는.



#
우리는 젊었을 때 열을 올려 토론하다가 둘 중 하나가 이기면 끝장을 내며 의기양양하게 상대에게 말하곤 했지요. “당신 꼼짝 못하게 됐네요!” 이제 말 그대로 당신의 작은 관 속에서 꼼짝 못합니다. 당신은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고 나는 당신에게 가더라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당신 옆에 묻는다 해도 당신의 잿가루와 나의 유해는 서로 오가지 못할 것입니다.
- 작별의 의식, 들어가며, 중



1986년 4월 사르트르 기일을 몇 시간 앞두고 78세의 일기로 눈을 감은 보부아르의 유해는 몽파르나스 묘지에 나란히 안치되었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의 생이 그토록 오랫동안 일치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아름답다. “
함정임이 옮기고 현암사에서 정갈한 디자인 양장본으로 낸 “작별의 의식”은 1970-1980년간의 말년 사르트르를 사유의 견줄 데 없는 친구였던 보부아르가 보고 남긴 기록이다.

“존경은 산 자에게 돌릴 것, 죽은 자에게는 오직 진실만을 돌릴 것” - 볼테르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2-11-04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부아르는 참 흥미로운 인물 같습니다. 내년엔 꼭 제2의성을 읽을 수 있기를(올해는 이미 포기).. 이 책과 함께 읽어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22-11-04 11:20   좋아요 1 | URL
괭님, 보부아르 정말이지 활화산 같은 인물이죠. 경이롭더군요. 글자 보기에 별로인 을유 제2의성, 저도 내년으로 미뤄야겠어요. 다른 것 좀 보구요.

책읽는나무 2022-11-04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완독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부지런하신 프레이야님^^
요즘 낭독하고 다니시느라 힘드실텐데...
모쪼록 건강 잘 챙기시길요^^
저는 올 해가 가기 전에 완독해야 할 터인데...될지 모르겠네요ㅋㅋㅋ

프레이야 2022-11-04 18:38   좋아요 2 | URL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요 어느새... 다미여를 시작해서 이걸로 올해 마무리될 것도 같고요. 어쨌든 읽을거리 쟁여두고 배가 부릅니다. 창고가 꽉 찼네요 우린. 아쟈! 그나저나 보부아르 언니 정말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