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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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나는 노트북을 켜고 할아버지의 녹취 원고파일을 열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왔다.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21

내가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직했을 때, 할아버지는 무척 기뻐했다.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백 퍼센트 동의했다. 덕분에 책은 우리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는 징검다리가 되어주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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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국가 -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
김애란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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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역사는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는가? 말했다시피 이건 나이가 든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은 지혜로워진다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착각이다. 인간은 저절로 나아질 수 없고, 그런 인간의 역사 역시 시간이 흐른다는 이유만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가만히 놔두면 인간은 나빠지며, 역사는 더 나쁘게 과거를 반복한다.
즉 진보의 관점에서 보자면, 과거가 더 낫게 미래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반 일리치는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 P40

이 절체적 절망 앞에서 테바이의 왕 오이디푸스는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들을 알아내어 사형에 처하거나 나라에서 추방하기 전에는 그 역병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신탁을 받고 선왕 살인범을 찾기 위해서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른다.
두 사람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테이레시아스 : 나는 더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오./그러니 화가 나신다면 실컷 화를 내십시오.
오이디푸스 : 암, 화내고말고. 그리고 기왕 화가 났으니, 남김없이/내 생각을 말하겠소. 알아두시오. 그대는 내가 보기에/그대손으로 죽이지만 않았을 뿐 이 범행을 함께/모의하고 함께 실행했소. 그대가 장님만 아니라면/나는 그대 혼자서 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을 것이오.
테이레시아스 : 진정이시오? 그렇다면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는 자신이 내린 명령에 따라 오늘부터는/여기 이 사람들과 내게 한마디 말도 걸지 마시오./그대가 이 나라를 오염시킨 범인이기 때문이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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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essa 2022-11-28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뜬자들의 도시도 조아요

프레이야 2022-11-28 19:26   좋아요 1 | URL
주제 사라마구 100주년 기념 에디션이 나왔군요. 눈먼자들의 도시랑. 구매욕이 또 ㅎㅎ

Vanessa 2022-11-28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소? 당신에게 연민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내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나를 무해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거부하겠다는 거요? 유대와 사랑이 없다면 내게 남은 몫이란 증오와 악덕뿐이오. 하지만 다른 이를 사랑하게 된다면 내 범죄의 근원이 사라지고, 그러면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될 거요. 강요당했던 지긋지긋한 고독 때문에 내가 그렇게 악했던 거요. 그러니 동등한 존재와 함께 산다면 미덕도 반드시 살아날 것이오. 다감한 존재의 애정을 느끼고, 그러면 존재와 사건의 사슬에 나도 엮이게 되겠지요. 지금은 이렇게 외면당하고 있지만" - P189

하지만 착한 정령도 내 발걸음을 따라다니며 길을 인도했고, 심하게 불평이라도 하면 넘지 못할 것 같은 곤경에서 돌연 나를 구해주곤 했습니다. 때로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면 사막에 먹을 것이 준비되어 있어 기운과 활력을 되찾게 해주었습니다. 시골 농부들의 끼니처럼 변변치 않은 먹거리였지만, 내가 도움을 청했던 정령들이 가져다준 것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온통 메마르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어 목이 갈증으로 타들어 갈 때면 작은 구름이 나타나 하늘이 흐려졌고, 그후 몇 방울 떨어진 비가 내 목숨을 구하고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 P265

특별히 뛰어난 자질 때문에 강하게 움직이는 애정이 아니더라도, 어린 시절의 벗들은 나중에 성장해서 사귀는 친구들이 갖지못한 힘을 우리 마음에 발휘합니다. 그 벗들은 우리가 갖고 있던 어린시절의 성정을 잘 알고 있고, 그런 본성은 훗날 아무리 변한다 해도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지요. 게다가 어린 시절 친구들은 우리가 품은 동기가 진실한가를 훨씬 더 정확히 분별하고 우리 행동을 엄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 P276

내가 저지른 끔찍한 짓들을 하나씩 돌이켜보면, 한때 숭고하고 초월적인 미와 장대한 선의 비전으로 생각이 꽉 차 있던 존재였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말은 사실입니다. 타락한 천사가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이지요. 하지만 신과 인간의 원수들조차 외로움을 나눌 벗과 동료가 있소. 그러나 나는 철저히 혼자요. - P289

나를 존재하게 한 이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우리 두 사람의 기억도 금세 사라지겠지요. 태양도 별도 보지 못하고 뺨을 간질이는 바람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요. 빛, 감정 그리고 감각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몇 년 전 이 세상이 주는 이미지들이 내게 처음 열렸을 때, 여름의 쾌활한 열기를 느끼고 바스락거리는 잎사귀와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었을때 그리고 이것들이 내게 전부였을 때는 죽는 것이 두려워 흐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죽음은 내게 남은 유일한 위로입니다. 범죄에 더럽혀지고 쓰디쓴 회한에 갈가리 찢긴 내가 죽음 외에 무엇으로부터 안식을 찾겠습니까?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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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1-22 0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프랑켄 슈타인은 2017년 이었나, 제 올해의 소설 이었어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지요? 크-

프레이야 2022-11-22 11:34   좋아요 2 | URL
여러 관점으로 새로 읽게 되니 괴물의 이야기가 특히 안타까웠어요. 괴물의 대사들 와닿는 게 많고요. 여러 갈래로 오래오래 이야기될 거물급 ^^ 현대지성 책 자체도 좋네요:)

레삭매냐 2022-11-27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가진 진정한 가치는
시대를 바꿔 가며 다양
한 해석이 나타날 수 있
다는 점이 아닐까요.

프레이야 2022-11-27 23:52   좋아요 0 | URL
네. 그러게요^^ 시간의 흐름 따라 몇번씩 읽어줘야 할 작품들요. 생각을 물고 오네요.
 

아아! 대체 왜 인간은 짐승보다 감수성이 우월하다고 뽐내는 것일까요. 그것 때문에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하지만 인간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우연한 말 한마디나 그 말이 전하는 풍경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누워 잠을 잔다. 꿈은 잠을 독살한다.
깨어난다. 떠도는 생각에 하루가 더러워진다.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한다. 웃거나 운다.
서 가망 없는 슬픔을 껴안거나, 근심을 떨쳐버린다.
다 마찬가지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그들이 떠나는 길은 여전히 자유다.
인간의 어제는 내일과 다르리니
영원한 것은 변화무쌍함뿐!"


Percy Bysshe Shelley(1792~1822). 메리 셸리의 남편인 퍼시 셸리의 시 <무상에관하여>에서. - P123

삶이 고뇌로 켜켜이 쌓인 것이라 해도, 내게는 귀한 것이니 지킬 생각이오. 잊지 마시오. 날 당신보다 더 강한 존재로 만든 건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말이오. 키도 더 크고 관절도 탄력이 있소. 그래도 당신에게 대적하겠다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을 거요. 나는 당신의 피조물이니, 내 본래의 왕이자 주인인 당신에게 심지어 순하게 복종까지 할 생각이오. 당신 역시 제 역할을 해준다면 말이오. 오, 프랑켄슈타인, 다른 모든 이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면서 나 하나만 짓밟지는 말아주시오. 나야말로 누구보다 그대의 공정함, 심지어 관대함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란 말입니다. 기억해주시오. 나는 당신이 만든 존재라는 것을. 나는 당신의 아담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타락한 천사가 되어버렸소. 그대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내게서 기쁨을 박탈했어요. - P126

오두막을 향해 가면서 그가 사용했던 다양한 논거를 가늠해보았고 적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고 작심했습니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결심을 굳힌 것은 연민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놈이 동생의 살인자라고 여겼으므로 놈이 의심을 확인하는지 부인하는지에만 온통 관심이 쓸려 있었지요. 또 한 가지, 피조물에 대한 창조자의 의무 같은 것을 맨 처음 느꼈습니다. 놈의 악행을 탓하기 전에 놈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처음으로 들더군요. -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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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5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5 14: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대성당 (10주년 기념 리커버 특별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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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김연수 옮김.
재독.
어릴 적에 커서 빵집 주인 되겠다던 나,
그냥 빵을 좋아하고 잘 먹는 사람으로^^

그들은 지치고 비통했으나, 빵집 주인이 하고 싶어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빵집 주인이 외로움에 대해서, 중년을 지나면서 자신에게 찾아온 의심과 한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들에게 그런 시절을 아이 없이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말했다. 매일 오븐을 가득 채웠다가 다시 비워내는 일을 반복하면서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그가 만들고 또 만들었던 파티 음식, 축하 케이크들. 손가락이 푹 잠길 만큼의 당의糖衣. 케이크에 세워두는 작은 신혼부부 인형들, 몇백, 아니, 지금까지 몇천에 달할 것들. 생일들. 그 많은 촛불들이 타오르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는 반드시 - P127

필요한 일을 했다. 그는 빵집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꽃장수가 아니라 좋았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만드는 게 더 좋았다. 언제라도 빵냄새는 꽃향기보다 더 좋았다.
"이 냄새를 맡아보시오." 검은 빵 덩어리를 잘라내면서 빵집 주인이 말했다. "퍽퍽한 빵이지만, 맛깔난다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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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1-18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단편집 중에서 대성당이 제일 좋고요. 두번째로 좋은게 저 별것 아닌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에요.
진짜 두 편다 별 이야기 아닌데 힘들때마다 위로가 되는 그런 이야기더라구요. ^^

프레이야 2022-11-18 19:48   좋아요 2 | URL
님 저랑같네요. 대성당 처음 봤을 때 정말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요. 저 문장 오늘 보니 참 좋네요. 제가 빵순이랍니다. 케이크는 그냥 사랑이죠 ㅎㅎ

stella.K 2022-11-22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편한 일이 없다지만 오래 전 제과점을 직접
경영해 본 저의 지인이 정말 힘들다고 하더군요.
편하게 먹는 게 남는 거죠.^^

프레이야 2022-11-22 19:54   좋아요 2 | URL
네. 쉬운 일이 없지요. 하다못해 전원주택도 살 생각 말고 전원주택 있는 친구를 사귀라고요 ㅎㅎ. 꽃향기보다 빵냄새 이거이 우리 식으로 하자면 뜨듯한 국 한 그릇의 밥 아닐까요^^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

페크pek0501 2022-11-25 1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작품이 좋아서 줄거리를 어디 요약해 두었는데 못 찾았어요.
도대체 어느 폴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다시 쓰려니 김빠지고...ㅋㅋ

프레이야 2022-11-25 14:16   좋아요 1 | URL
잘지내시나요 페크님~^^
이 작품도 좋고 깃털들도 좋구요. 대성당이 이번에 또 특별판이 나왔네요. 제가 샀던 이 책도 당시 특별양장본이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