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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1999년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생각한다.
_ 이토록 평범한 미래, 첫문장



여덟 편 중 두 편 읽었는데 벌써 참 좋다. 작가가 더 담담하고 단단하면서도 넉넉해진 느낌이다. 책날개 띠지 QR코드로 들어가면 김연수라디오로 연결된다. 각 단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들려준다. DJ를 하고팠다는 연수 작가 귀여우심. ^^
아직 다 나온 건 아닌 것 같다.


두 편 모두 내 기억을 부르는 무엇도 있어 그렇게 우리는 시간속에서 서로서로 연결되어 위안받는다. 1999년 나를 떠올려 보았다. 작은아이가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나서도, 잘놀고 잘먹는데, 밤잠을 안 잤다. 만 세 살이 될 때까지 밤마다 포대기에 업고 식탁에 서서 책 읽거나 뜨개질했다. 저멀리 내려다보이는 고속도로 위 자동차 불빛이 아스라히 꺼져가면 아이는 잠이 들었다. 나는 45킬로그램까지 살이 빠졌다.


어느 누구의 삶도 같지 않으면서 비슷한 전환점들이 있다.


김연수 작가는 2018년 세종시 강연에서 시간을 사는 또다른 방식에 대해 나직이 말했다. 아주 인상적인 내용이었다. 과거나 현재에서 보는 미래가 아니라 미래의 어느 시점에 서서 과거를 바라보는 눈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미래의 괜찮은 나, 그 눈으로 지금을 본다면 지금의 나는 훨씬 허용 가능한 인간이고 지금을 사는 마음 또한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주 잊어먹고 지냈다. 우리, 있을 것 같다고 생각지도 않은 미래의 구체적 평범한 하루에서 특별했던 과거의 첫날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하루, 그 관점으로 사는 삶은 세 번 사는 삶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에겐 그 방식이 유효하진 않을 것도 같고. “이토록 평범한 하루”는 세계에 지지 않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지혜와 긍정의 이야기다.


두 번째 이야기 “난주의 바다 앞에서”도 비슷한 위안과 용기를 불러준다. 세컨드 윈드! 폭풍우 치는 난바다 앞에서 지지 않는 사람들. 슬프고도 강하고 따뜻한,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그대 쪽으로.”
이 글을 읽고 추자도에 가보고 싶어졌다. 당장 교통편을 알아보았다. 일기가 조금만 나빠 보여도 배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추자도는 정말 바람이 거센 곳이구나. 아기 황경한과 눈물의 십자가 길! 그곳은 하추자도에 있다. 상추자도와 하추자도 다 보려면 섬에서 일박 하는 걸로 계획하는 게 좋겠다. 제주 대정읍에 있는 정난주 마리아의 묘는 여러해 전에 가봤다. 빗방울 떨어지는 어스름 저녁이었고 나 말고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 어미이자 아내,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한 인간의 삶을 떠올려보며 든 그때의 먹먹함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어둑신 내려앉는 스산한 그곳에서 나약하나 강인한 한 인간상을 떠올렸다. 김연수 작가는 이런 걸 새삼스레 말하지 않는다. 힘을 빼고 한 걸음 물러나 순진한 신념이 몰고온 생의 난파를 바라보고 “새 바람”을 건넬 뿐.



책을 에코백에 넣어 마산으로 잠시 나왔다. 세컨드 윈드는커녕 소소한 바람이나 쐬러 갈 일이었다. 동행자가 위에 인용한 첫문장을 떠올려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워낙 아무말이나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약간 긴장되었다. 한 고비였던 십 년 전에도 이제 끝났을 거라고 돌파구가 없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다고 했다. 나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듯 십 년 단위로 생을 정비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또 나아가보자고 뭐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인지 좀 울컥해져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가을 햇살이 따가워 맞춤이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구산마을에 당도했다. 평범한 하루가 오후 세 시 나른한 포구 마을에도 흐르고 있었다. 겉으론 모두 고요하다. 오늘은 고요한 것만 보리라. 할머니 세 분이 홍합을 까서 판다. 한 봉지 샀다. 홍합 손질해 보면 알지만, 이렇게 많이 만 원이면 거저다. 미역국 끓여야지. 캠핑카들이 제법 보인다. 양말 널어놓고 낮잠을 즐기고 있다. 조금 걷고 차로 한 바퀴 돌아 나와 구복마을을 통과했다. 저도로 들어가는 연육교, 시뻘건 다리, 콰이강의 다리란다. (그옛날 대학교정에 있던 일명 콰이강의 다리는 운치가 있었다) 동행자가 사진 담으러 간 동안 그 아래 카페 콰이,에서 그림자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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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0-13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작가 신작소설, 앞부분에 사인이 있군요.
제 책에도 있는지 한 번 봐야겠어요.
프레이야님, 일교차 큰 날씨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2-10-13 21:23   좋아요 2 | URL
설마 저만 있는 거 아니겠죠~^^
날씨가 많이 싸늘해졌어요. 감기조심하시고요

거리의화가 2022-10-13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감상 정말 좋아요^^ 역시 더 세심하게 읽고 나눠주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생각보다 좋으시다니 다행이구요^^ 이 책 읽고 여러 모로 시간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더랍니다^^*

프레이야 2022-10-13 23:43   좋아요 1 | URL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문제이네요 화가 님 ^^ 연수 작가님 더 노련해진 것 같아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셋 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요.

미미 2022-10-13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글도 사진도 에세이 펼쳐보는 느낌들어요! 카페 사진 분위기가 잘 꾸며진 가정집처럼 아늑하네요? 프레이야님 미역국 향이 참 좋겠습니다ㅋㅋ

프레이야 2022-10-13 23:44   좋아요 0 | URL
내일 미역국 끓여 먹어야죵 ^^
햇살이 어찌 잘 드는지 나른하니 노곤했어요
미미 님 굿나잇 ~

희선 2022-10-14 0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사진 어촌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곳이네요 사진으로 보니 좋네요 그곳에 사는 사람도 좋을지... 별 생각을 다합니다 나름대로 괜찮겠지요 소설에 나온 곳에도 가고 싶으시군요 언젠가 가 보시겠네요 콰이강의 다리는 다른 나라에 있는 거 아닌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14 01:30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다른나라에. ^^ 교정에 있던 건 우리들이 그렇게 이름 지어 불렀어요. 나름 운치있었지요. 지금은 없어졌을 겁니다. 교정도 많이 변했을거고. 어촌마을 참 평화로웠어요 오늘. 추자도는 내년이나 가보려나 싶어요. 배편 다 알아보고 그랬네요.

책읽는나무 2022-10-14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2의 김연수, 프연수님의 글과 사진이네요ㅋㅋㅋ
이뻐요^^
콰이의 다리!! 그래서 카페 콰이!!
인상적입니다.
1999년 저도 떠올려 보니 직장생활 하면서 속 끓인다고, 저도 몸무게가 43키로 나갔던 기억이 있어요. 2000년 결혼하고, 임신하고, 아이 낳고...몸무게 원상복구 되었는데 프레이야님은 육아가 고단하셨군요?
연예인 몸무게?...^^;;;
지나고 보면 나름의 고충도 추억이 되는 듯 합니다.

프레이야 2022-10-14 09:34   좋아요 1 | URL
지난 시간 되돌아보면 꿈만 같아요. 육아 … 다들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장합니다. 님은 셋이나. 콰이강의 다리, 영화 오래전에 보았는데 말이죠. 갔다와서 보니 저기가 나름 핫플인가 봐요. 야경이 멋질 것 같긴 해요. 가까우니 다음에 야경 보러 한번 가볼까요. 연육교인데 낮엔 시뻘건 흉물이었어요 ^^

2022-10-14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09: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4 1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우 2022-10-14 1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45킬로그램이라니~~ 너무 힘드셨겠어요. ㅠㅠ. 저도 비슷한 시기에 애 낳고 키웠었는데. 시간이 어찌 갔나 싶네요.

프레이야 2022-10-14 13:28   좋아요 3 | URL
호우 님 우리 모두 그런 때를 지나왔군요. ^^ 지금은 엄청 불어났어요. 아 옛날이여~
이번 김연수 소설집 참 좋네요. 생의 연륜이 쌓였다는 느낌도 들고 겹겹의 생각이 드는 이야기라 꼭꼭 씹어 먹고 있어요.
오늘도 좋은 가을하루 보내세요 ~

scott 2022-10-15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수옹 겨울 눈 가득 일때 이 책 제주도에서 완성 했다고 합니다! 프레이야님은 가을 마산에서 연수옹 열독! ㅎㅎ프레이야님의 주말은 이토록 평범하지 않게 멋지게 ^^

프레이야 2022-10-15 13:23   좋아요 1 | URL
그래서 제주 이야기가 제법 있었군요. 바람의 정원도 가보고 싶어졌어요.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중산간 돌아다닐 때 거긴 못 봤어요. 가게 되면 연수 작가의 그 단편을 떠올리겠죠. ^^ 아픈 이야기였어요.

라로 2022-10-15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자 멋져요!! 음료수 색도 그렇고요,, 어떤 맛일지 마셔보고 싶어요!!
홍합으로 미역국 만들어 드셨어요?? 저 그런 거 엄청 좋아하는데... 맛있겠어요!!
아무튼 사진이랑 올려주신 글이랑,, 무슨 영화같습니다. 제목은 ˝하루˝ 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 문장과 올려주신 그림자 사진들이 너무 잘 어울려요.
˝나는 아홉수라는 말이 있듯 십 년 단위로 생을 정비해야 하는 때가 오는 것 같다고, 위기를 기회로 삼고 또 나아가보자고 뭐 그런 답답한 이야기를 나누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프레이야 2022-10-15 16:24   좋아요 0 | URL
옆에 코발트 색 액체 작은 잔에 든 거 그게 꽃추출물이라네요. 무슨 꽃인지 들었는데 까먹었다능 ㅎㅎ 그걸 부어서 마셨어요. 시원하게 상큼한 샷! 콰이에이드.
햇살이 좋아 그림자도 멋지게 보였네요.
홍합 양이 많았어요. 미역국 맛나게 끓여 먹었고 내일은 볶아서 다른 거랑 고명으로 얹어 잔치국수 할까 해요. 홍합 부추전도 한 장 부치고요. 집밥 스타일 좋아하는 라로 님 알죠^^
제목은 그냥 하루, 할까요. ㅎㅎ
애꿎은 여성호르몬 때문인지 그런 생각을 하며 고요하기도 북적대기도 하는 마음으로…
 

칼에 손가락을 베인 사람을 보면 내 손가락이 욱신거리듯 우리는 그녀의 글을 감각으로 느낀다. 살아낸 글, 살아서 건너오는 글, 그것이 바로 아니 에르노의 문학이 가진 힘일 것이다.
(중략)
그러니까 이제부터 그 상처로 당신은 무엇을 하겠느냐고…..

- 옮긴이의 말, 찢어진 것들을 다시 꿰매는 사람처럼, 중

이 여름은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책에 취하거나 목에 쥐가 나거나 호박색 태닝 기름을 바르는 일이 전부다. 그리고 달리기. 나는 ≪진정한≫ 문학을 발견한다. 선생님들의 문학, 친구들 중 가장 앞서가는 애들이 읽는 문학, 미대생이 내게 건네는 문학. 사강, 카뮈, 말로, 사르트르……… 사고(思考)가, 문장이 나를 뜨겁게 달군다. 고개를 들고 부유한다. 나는 강하고, 영리하다. 나는 여기, 부모님 집의 호텔에서 살고 있다. 클로파르 거리 전체에서 이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나혼자뿐이다. 인생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달콤하고 가벼우며, 슬프다. 내일 미대생이 나를 기다린다, ‘구토‘에서 ‘아니‘가 말한 것처럼 나는 완벽한 순간만을 좋아한다. 뒤섞인다.
나는 목소리를 잃은 새들이 점령한 나무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카페의 시커먼 벽에 붉은 줄로 된 금이 생긴다. 나는 싸구려 포도주와 열기로 반짝이는, 러닝셔츠와 작업복을 입은 몇몇 주정뱅이들 앞을 지나간다. 타인, 끝없는 우월감. 이 책들은 확실한 신호다. 사르트르, 카프카, 미셸드생피에르, 시몬드 보부아르, 나, 드니즈 르쉬르, 나는 그들 편에 있는 사람이다. - P182

일주일 동안 나는 그것이 내 안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을지 줄곧 생각했다. 그저 쾌락만이 아니다. 나는 메트로폴에서 크림 커피를 앞에 두고 그를 기다린다. 나는 자신을 프랑수아즈 사강 소설의 여주인공으로 여긴다. 대학생, 애인, 그는 법학도다. 기 베아르의 노래, ‘어제였어요, 오늘 아침이었죠. 거기에는 색깔이 있다. 의자,카페의 웨이터, 세 줄로 놓인 마티니, 쉬즈, 다양한 종류의 아페리티프,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순수한 장식이다. 지나치게 자리를 차지한 나무들, 유리창, 행인. 더 이상 이런 것들은 내 가족의 싸구려 가게를 떠올리게 하지 않으며, 내게 모욕을 주지도 않는다. 커다란창문이 있는 거대한 회색 외관, 차분한 커튼, 그토록 동경했던 부르주아 주택에도 관심이 없어졌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찾는다. 바로 그것, 자유로움, 어디든 편안하게 돌아다니며, 세상에 무관심한 것,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것…………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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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10-10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아니 에르노의 데뷔작인가요.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많이 알려지겠지만, 이전에 출간된 책들이 있어서 요즘 소개가 많이 나오네요.
프레이야님, 휴일 잘 보내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2-10-10 10:22   좋아요 2 | URL
네, 에르노의 데뷔작입니다.
저는 예전 것이지만 1984북스에서 새로 나오고 있네요.
책 모양새도 좋고 에르노 특유의 문장이 경쾌하게 읽힙니다.
또 휴일이네요 ㅎㅎ대체휴일이라죠. 좋은하루 보내세요 서니데이 님^^

레삭매냐 2022-10-10 11: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아니 에르노 책 꼴랑
두 권 읽은 게 전부더라구요.

아니 세 권인가.

제가 또 그 작가의 팬은 아니
라서 작년의 압둘라자크 구르
나의 경우처럼 찾아서 읽게
되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그래도 궁금하긴 하네요.

프레이야 2022-10-10 11:25   좋아요 1 | URL
호불호 갈릴 만한 작가지요
워낙 대담한 문체와 내용이라 저도 처음 접했을 때 놀라면서 계속 흡입되는 느낌이었어요.
이 기회에 좀 더 읽어봐야겠어요 ^^

그레이스 2022-10-12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6권 모셔놨습니다.
사진...은 아직도 오고 있는 중이구요^^

프레이야 2022-10-12 21:59   좋아요 1 | URL
당장 개정판들이 나왔네요.
저도 몇 권 더 영접했습니다. 책이 참 이뻐요 ^^
 

마무리

그는 잡지에서 자기에 관한 기사들을 읽어 보았다. 그 기사들에 묘사된 제 모습을 살펴보아도 자신의 정체성과는 도저히 연결시킬수 없었다. 그는 살고, 전율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느긋한 동시에 생명의 나약함에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낯선 섬들을 돌아다녔으며, 싸움박질하던 시절에는 제 패거리를 이끈 사람이었다. 그는 도서관에 가득 찬 수천 권의 책을 처음 보고 기절초풍했고, 그 후로 제 방식을 찾아내어 그 책들을 섭렵한 사람이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잠을 쫓아가면서 제 자신의 책들을 써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 모든 군중이 식사 대접을 하려 드는 엄청난 식욕의 소유자는 그가 아니었다. - P219

그는 자신의 특등실로 도망쳐, 증기선이 갑문을 확실히 빠져나갈때까지 거기 숨어 있었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그는 제 자리가 귀빈석, 선장의 오른쪽 옆자리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자신이 선상의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선상의 위대한 인물로서 그보다 부적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오후내내 갑판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졸다 깨다 했고,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틀이 지나 뱃멀미가 가라앉자 승객 전원의 명단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명단을 보면 볼수록 그는 승객들이 싫어졌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그들을 온당하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선량하고 친절한 사람들임을 그는 가까스로 인정했으나, 인정하는 순간에 단서를 달았다. 그들이 그 계급의 왜곡된 심리와 하찮은 지성을 가진 모든 부르주아들과 마찬가지로 선량하고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알량한 정신은 겉만 그럴듯하고 속이 텅 비어 있어 함께 대화하기가 지루했다. 한편으로 젊은이들의 떠들썩한 패기와 과도한 활동력은 그를 놀래켰다. - P245

저게 뭐지? 등대 같았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뇌 속에 있었다. 밝게 깜박이는, 하얀 빛이었다. 그것은 점점 더 빠르게 깜박거렸다. 덜걱대는 소리가 길게 났는데, 자신이 넓고도 끝없이 긴 계단을 굴러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계단 밑 어딘가에 다다라 그는 암흑 속으로 떨어졌다. 거기까지만 알았다. 그는 암흑 속에 빠져 있었다. 그걸 아는 순간, 그는 알기를 멈추었다. - P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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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10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읽어야 하는데...

1권 읽다 말았네요.
영화 리뷰를 보고 나니 독서
욕이 급격하게 상실되더라구요 ㅠㅠ

프레이야 2022-10-10 11:28   좋아요 0 | URL
영화 보고 나면 책을 더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 있고 그걸로 됐다 싶은 작품이 있더군요. 마틴 에덴도 영화가 좀 더 활발한 느낌이긴 합니다. 잭 런던의 다른 글보다 문장이 아름다운 느낌이에요.^^
 

10장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서

그래서 보부아르는 ‘소설과 형이상학’ 강연에서 문학과 철학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개인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언어로 옹호하면서 비판에 답했다. 보부아르는 먼저
"나는 열여덟 살 때"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
·· 굉장히 많이 읽었다. 오직 그 나이대에만 가능한 순진함과 열정으로 엄청나게 읽어댔다. 소설을 펼치면 정말로 새로운 세계, 독특한 성격의 인물과 사건이 넘쳐나는 구체적이고 현세적인 세계로 들어갔다. 철학 책은 나를 지상의 가시적인 것들 너머, 시간을 초월한 천국의 평온으로 데려갔다. 진리를 어디서 찾아야 했을까? 지상에서, 아니면 영원에서? 나는 갈등했다.
......
보부아르는 문학이 "실제 경험만큼 온전하고도 혼란스러운 상상의 경험"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소설을 선택했다. 철학 책은 독자가 특정 상황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시각을 보게 만들기보다는 대체로 저자의 관점을 따라오게끔 종용하거나 설득하는 추상적 어조를 띤다. 그런데 보부아르의 말마따나 형이상학적 소설은 독자의 자유에 ‘호소‘ 한다. - P272

보부아르는 1940년대 초부터 역사의 문제에 천착해 왔다. 전쟁이끝난 이후로 보부아르는 자신이 어떤 입장에서야 하는지 고민했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이미 시작됐다고 외치는 "거짓 예언자들의 허무주의"와 함께 갈 것인가? 아니면 "방탕한 자들의 경솔함"과 함께 갈 것인가? 보부아르는 (정치적으로는) 현대 공산주의자들과 (철학적으로는) 헤겔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인류의 미래를 통합과 진보로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역사를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포스카의 이야기를 쓴 것은 결국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리석은전쟁, 혼돈의 경제, 쓸모없는 반항, 부질없는 학살, 생활 수준 면에서 개선이 없는 인구, 이 시대의 모든 것이 내게는 혼란과 제자리걸음처럼 보인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이 시대를 택한 이유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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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0-08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넘 좋았어요!! 읽은지 한 참 된 거 같은 느낌.
요즘 여성주의 책 읽으시나요??
암튼 저 이책 너무 좋았구요,,,,,
프야님도 잘 읽으시니 좋아요,,
물론 저보다 훨 잘 읽으시지만!!!

프레이야 2022-10-08 16:48   좋아요 0 | URL
딱히 여성주의로 규정하고 읽진 않지만 그런 내용에 초점이 가네요.
사놓은 책들 읽어야겠어요. 보부아르는 멋진 여성. ^^
제대로 읽어야 하는데 눈이 넘ㅠ
안구건조증에 좋은 방법 있을까요?응?
아렌트, 손택, 보부아르, 똑똑한 인간!
 

10장 문학과 철학의 경계에서(1945-1946)


1945년은 보부아르의 공적 이미지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해다. 보부아르는 점령된 고국에서 전쟁을 보고 정치적으로도 눈을 뜨게 되고 비시 정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일하면서도 파텔정부에 동조하지 않는 나름의 역할을 독창적으로 했다고 보인다. 당시 라디오 방송국은 단 두 개뿐. 1945년 4월 29일에 프랑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첫 선거가 있었다. 5월 7일에 독일은 랭스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8일에는 베를린에서 설명했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다.

이해 삼월에 사르트르는 뉴욕에 체류하면서 보부아르와는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을 보낸다. 이런 시간은 결과적으로 봐도 필요한 시간으로 보인다. 미국에서 돌로레스와 관계에 빠진 사르트르와 별개로 이 기간에 보부아르는 맹렬히 글을 썼다. 파리 신문 가판대에서 보부아르와 사르트르가 공동 창간한 “레 탕 모데른 Les Temps Modernes “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창간호 편집장으로는 사르트르의 이름만 올라갔다. 이 잡지를 통해 두 사람은 시대의 당면과제에 집중하는 참여 지식인이 될 수 있었다. “잡지는 굶주린 대중을 먹였다.(264)”

비시 정부 때 발행된 신문들을 정간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보부아르는 “레 탕 모데른” 편집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잡지에 기고한 윤리학과 정치학 에세이들을 1945년에 처음 출간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적 논지와 반대되거나 확장한 생각들을 주장하고 펼쳐나갔다. 이는 오래전부터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 사르트르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던 부분이거나 이미 있어온 인간 운명의 어두운 부분을 내밀하게 통찰하여 발전시킨 생각이다. 변명으로 드러내는 체념적 염세주의로 치부되는 것, 즉 인간의 타락과 죽음을 불건전하게 과장하는 염세적 철학이라는 비판에 보부아르는 인간의 비참함은 실존주의만의 새로운 면모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인가, 대신 보부아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를 썼다. 자신의 생각을 에세이와 소설, 희곡으로 펼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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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의 철학은 거짓과 체념의 위안을 거부한다. 지배 혹은 복종이 그저 인간의 본성이라는 생각은 변명일 뿐이다.
- 사람들은 덕(virtue)을 쉽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또한 덕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별로 심란해 하지 않고 체념하듯 받아들인다. 덕이 가능하지만 어려울 수 있다고 보려 하지는 않고 말이다. (276)


# 소설 “타인의 피”
점령기에 쓰고 1945 발표.

_ “우리 각자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것에 책임이 있다.”
타인의 피,에 제사된 문장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한 문장. “타자에 대한 책임과 개인의 행복을 조화시키려는 실존주의자의 노력을 무척 인상적으로 극화한 작품이다”라는 평을 받았다. 엘렌과 장이 주인공이나 펭귄북스 뒷표에는 남자 주인공만이 한 사람의 주인공으로 소개된다.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철학이 아니라 보부아르의 철학을 적용해 극화했고 “제2의 성”(1949)에서 다뤄질 주제들을 예고했다. 여성의 행동방식, 남성과 여성이 개인으로서 사랑을 경험하는 방식의 차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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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는 작가의 사명은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걸고 살아가는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극의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세상은 여성에게 남성을 대할 때와는 다른 이상과 제약을 내세운다. 보부아르는 엘렌의 각성과 장의 각성을 나란히 보여 줌으로써 여성은 남성처럼 존중을 받지 못하고 존중을 요구하지도 않는 불공평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267)


# 유일한 희곡 “쓸모없는 입들”
1945년 10월 29일 파리 공연

# 1946. 12. 소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 소설 속 불멸의 화자와 역사적 구조 역시 보부아르가 장차 제2의 성,에서 전개할 “남성은 언제나 구체적인 힘들을 장악해 왔다”는 주제를 드러냈다. 포스카를 통해 현대와 가까운 시대에 만나는 여성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는다. 사랑을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뭔가를 할 수는 있는가?”다. (289)

# 보부아르가 보았던 진실은 사람들이 변명으로 자유에서 도피한다는 것이다.(275)

# “상황의 힘”에서 “자신과 사르트르의 유대감에 관해서는 형용할 수 없는 앎” 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보부아르는 “처음에는 자기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고 여성성은 어떤 식으로든 귀찮았던 적이 없다라고 했다. 사르트르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한다고 했고 그녀가 남자 아이처럼 양육 받고 자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보부아르는 그 문제를 파고 들었고 그제야 비로소 세상이 얼마나 남성적인지 깨달았다. 자신의 유년기를 형성한 수많은 신화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다르게 형성했다. 자서전 집필에 대한 생각을 뒤로하고 여성성의 신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느라 공립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작업에서는 자신의 여성으로서 경험이 아니라 여성의 조건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었다. (284 발췌)

이 내용 읽어보니, 서로 인정했듯, 사르트르는 어찌됐든 보부아르에게 좋은 영향을 준 관계였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받고 한마디만 던지면 촉발하는 영리한 인간 보부아르. 여성성의 신화와 여성에게 주어진 조건에 대한 자각. 대화를 나누며 눈을 뜨고, 사유의 근원이라기보다 견줄 데 없는 대화의 촉매로서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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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아르는 나중에 ‘상황’ 개념이 제2의 성,을 독창적인 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여성성을 본질이나 본성이 아니라 “문명이 특정한 생리학적 여건으로 빚어낸 상황”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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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09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도 책을 참 빨리 읽으십니다.
마지막 사진 참 단아하고 이뻐요^^

프레이야 2022-10-09 19:14   좋아요 2 | URL
울유 벽돌 제2의 성 표지죠~
저 사진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성숙해 보이고 가장 아름다운 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