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모리악(1885.10.11. ~ 1970.9.1.)

“그의 소설에 드러난 깊은 정신적 통찰, 그리고 인간 삶의 드라마를 관통하는 예술적 강렬함”
- 1952년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수여 사유 중



아니 에르노는 그해 4월이 싫었다. 보부아르와 장 주네의 죽음이 연이어 일어나고(이 책엔 적혀 있지 않지만 보부아르의 성대한 장례가 치뤄진 다음날 장 주네는 마지막 원고 교정을 보러 파리에 와 있는 동안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두 달 후 희극배우 클로슈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은 1986년을 지나, 이맘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일을 지나, 독일이 통일되자 프랑수아 모리악이 했던 말을 에르노는 소환한다. 그리고 세계 전쟁이 또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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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장막 뒤에서 이루어진 세계의 애매모호한 미분화는 특정 국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모리악이 “나는 그들을 너무 좋아해서 그들이 둘이라는 사실이 행복하다”라고 말했던 독일이 통일됐다. 정치적인 종말론 루머가 퍼져 나갔다. “세계의 새로운 질서의 노래”가 공표됐다. 역사의 끝이 다가왔다. 민주주의는 지구 전체에 퍼질 것이다. 세계의 새로운 행보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까지 확실했던 적이 없었다. 폭염 한가운데 휴가의 무기력한 질서가 흔들렸다. 한 신문에 커다랗게 적힌 제목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차지했다”는 51년 전 같은 날짜에 실렸던, 종종 재현되는 것을 지켜봤던 또 다른 제목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했다”를 떠올리게 했다. 전투를 준비하던 한 전사가 불과 며칠 만에 미국 뒤에 있던 서양 열광들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프랑스는 클레망소를 허풍 떨며 보여줬고 옛날 알제리 시절처럼 군인 소집을 고려했다.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물러나지. 않는다면 3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더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어떤 사건을 그리워했다는 듯이 전쟁을 필요로 했고 단지 TV 시청자일 뿐이었던 사건들을 부러워했다. 오래된 비극이 욕망과 다시 만났다. 역대 가장 머리가 희끗했던 미국 대통령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히틀러”와 싸우게 됐다.
- 226, 세월, 아니 에르노



보르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문학적이고 다감한 아버지와 종교심 풍부한 어머니 아래 자란 모리악. 전쟁 때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고 전후 카뮈와 의견 대립도 있었다. 테레즈 데케루, 오드리 도투 주연의 영화만 보고 안 읽었네.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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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0 2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세월>이 뭔가 제가 생각한 소설과는 다른 느낌인듯하지 말입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는데요. ㅎㅎ

프레이야 2022-10-20 21:34   좋아요 1 | URL
함축된 문장 행간에 많은 걸 내포하지 말입니다 ㅎㅎ 살아온 세월이 안팎으로 에르노를 관통한 느낌요.

mini74 2022-10-20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테레즈 데케루 새파랑님 리뷰 본 기억이 납니다. 영화도 있군요 ~ 영화포스터 참 세련되고 예쁩니다 ~

프레이야 2022-10-20 21:35   좋아요 1 | URL
오드리 토투 넘 이쁘죵
표지 그림이 인형의집 표지그림과 같은 거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ㅎㅎ

coolcat329 2022-10-2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세월>을 샀는데요...왜냐면 아니 에르노 책 중 가장 두껍더라구요. ㅋ
근데 발췌문 읽어보니 좀 어렵습니다. 😅
아니 에르노 한 권도 안 읽었는데 세월을 첨부터 읽어도 될까 싶네요.

프레이야 2022-10-21 10:19   좋아요 0 | URL
1984북스 이쁘지요. 그중엔 세월이 제일 두껍네요 ㅎㅎ 오자 있어서 조금 실망이지만요. 처음 읽으시면 세월을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쿨캣 님. 에르노의 생을 다 훑고 갑니다. 다른 책들은 거기에 세부적으로 나뉘는 시기의 글이네요. 2008년인가? 나왔으니 그전의 일들이 거의 다 들어가 있어요. 에르노의 예리하고 거침없는 생각과 문장, 모르거나 반갑거나 그런 이름, 지명 등등 나오면 찾아보게 되어요. ^^ 저도 아직 모두를 읽진 못해서 한 권씩 읽어보렵니다.
 

그녀는 내면의 목표를 빗겨나가 그저 어머니로서만 전진하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조용하고 편안한 이 삶에 정착하는 것이 자신도 모르게 이 삶을 살아버리는 것이 두렵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한 순간에도 그녀는 일기장에 절대 적혀 있지 않은 모든 것들, 함께 하는 삶, 같은 공간을 나누는 친밀함, 그녀가 수업이 끝나면 빨리 돌아가고 싶어 하는 집, 둘이서 자는 잠, 아침에 전기면도기 소리, 저녁의 돼지 삼형제 이야기 이러한 것들이 반복되는 일상, 잠시 떨어지면 삼 일을 넘기지 못하고 그리워지는 - 그녀가 중요하고 아낀다고 믿는 것들을 - 사고로 잃는다는 상상만 해도 그녀의 가슴을 옥죄는 모든 것들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 128



이제 욕망의 대상은 미래가 아닌 과거다 : 63년 여름, 로마의 그 방으로 돌아가는 것. 그녀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극한의 자아도취적인 시선으로, 내 과거를 선명하게 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부류의 여성의 모습, 어쩌면 나는 그것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3년 전,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그녀는 도로시 태닝의 그림을 봤다. 가슴을 내놓은 한 여자와 그 여자 뒤로 늘어선, 살짝 열려 있는 여러 개의 문이 있었다. 제목은 <생일>이었다. 그녀는 그 그림이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으며 오래전에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제인에어] 나중에는 [구토]속에 있었던 것처럼 그 안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등대로』『빛의 세월』같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자신의 인생 역시 그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자문한다. -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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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 시점은 1967년. 그녀라고 지칭되는 주인공(아니 에르노)이 결혼한 지 4년째인 해다. 평온하지만 작가의 꿈도 꾸지 않는 지금, 남편과 아이가 있는 자신이 아니라 혼자였던 때를 자주 떠올리며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 자신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고 느낀, 그녀가 3년 전에 보았다는 도로시 태닝의 그림 <생일>이 궁금해 찾아봤다. 가슴을 드러내놓은 여자의 뒤로 열려있는 여러 개 문. 어쩔 줄 몰라하는 듯 엉거주춤한 포즈. 당혹스럽게도 고요한 표정. 열려 있으나 바람이 통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 것 같은 초조함이랄지. 반대로 막연한 가능성들 앞에서 느끼는 혼란과 기대. 나중에 터져나올, 지금은, 침묵. 날개가 있으나 날지 않는 새처럼.

1910년생인데 백수를 넘기고 세상을 뜬 도로시 태닝은 이 그림을 들고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를 찾아갔다. 전쟁 중 미국에 건너간 막스. 그는 도로시를 본 지 일주일만에 1946년 애리조나로 사랑의 탈주를 했고 평탄한 결혼 생활을 했다.
도로시 태닝을 치면 도로시 태닝 샵이 뜬다. ㅎㅎ 막스 에른스트의 그림도 찾아보니 많다. 달리 비슷한 느낌.


1번 그림. 도로시 태닝 “생일”
2번 그림. 막스 에른스트 “물 속으로 뛰어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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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2-10-17 20: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그림인데 굉장히 혼란스러움을 주는 그림이네요. 보통 ‘생일‘이라고 하면 기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림 속 여자는 뒤에 열려있는 문 때문인지 어두운 색감 때문인지 행복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요. 예술은 또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는군요.

프레이야 2022-10-17 21:02   좋아요 2 | URL
그죠.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이 갈등 중인 것 같죠. 당장 뛰어나갈 것도 같은데 맨발은 그냥 바닥을 딛고 있고 눈은 살짝 위를 향하고요. 자화상 같아요 실물과 닮았어요. 치마 양옆에 가시덤불이 말할 수 없는 내적 고난 같기도 합니다. 들여다보며 저 혼자 생각에^^

꼬마요정 2022-10-17 2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림이 굉장히 강렬합니다. 파이버님 말씀처럼 행복해 보이지 않기도 하구요. 밑에 그림은 더 우울해보입니다ㅜㅜ 근데 제가 운동을 하다 보니 제 눈엔 ‘복근‘이 제일 먼저 들어오네요... 설마 굶주림으로 인해 뼈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이 분의 삶이 궁금해집니다.
도로시 태닝 샵은 혹시 도로시 태닝에서 영감을 받은 걸까요?

프레이야 2022-10-17 21:34   좋아요 4 | URL
아마 상관 없지 않을까요 그거랑.
태닝 샵 이름이 도로시더라구요 ㅎㅎ
미국 화가인데 저서도 7권인가 있어요. 지성과 재능을 모두 갖춘 화가. 막스와는 나이차가 많던데 유명한 커플이더군요. 막스 에른스트도 오늘 알았네요. 복근이랑 가슴근육도 눈에 들어오고 목선이랑 가슴 모양도 이쁘네요. 굶주림은 아닐거고요. 저도 예전에는 복근이 있었는데 살에 묻혀 사라졌어요 두둥 ㅎㅎ
저 그림에서 에르노가 자신의 삶을 떠올렸다니 ^^ 세상에 대단한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흥미로워요 꼬마요정 님.

mini74 2022-10-17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른스트 소개 글에서 이 그림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엔 도로시아 테닝 하면 아마 화가가 뜰거예요 ~ 좋은 글과 그림이 만나니 참 좋습니다 *^^*

프레이야 2022-10-17 22:24   좋아요 2 | URL
네. 화가 찾아보고 확인하였지요 ^^ 비하인드 스토리가 재미있어요. 에른스트와 태닝의 다른 그림들도 좋구요 미니 님 역쉬!

희선 2022-10-18 00: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소설 속에 담긴 그림을 찾아 보셨군요 마지막 사진은 도로시 태닝과 막스 에른스트군요 그림을 보고 바로 좋아하게 된 건지... 도로시 태닝 그림은 초현실주의 같네요 바닥에 있는 동물은 뭘지...


희선

프레이야 2022-10-18 01:19   좋아요 2 | URL
보자마자 알아보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을까요. 에른스트가 초현실주의인데 태닝도 나중 그림 보면 내면세계가 복잡해요. 새는 자아로 해석될 것 같아요. 이 책에 찾아볼 인물과 작품, 저서, 영화, 역사적 사건 그런 게 많고 문체도 독특해 쉽지 않아요. 다 기억하지 못해도 찾아가며…

얄라알라 2022-10-19 10:12   좋아요 2 | URL
정말 강렬한 그림들이네요.
사진과 자화상의 모습 싱크로율 높아요.

그렇다면 꼬마요정님 보셨듯, 실제 도로시 태닝도 단련된 복근을?^^‘‘

희선님 저는 요새 ˝악˝에 대한 책을 읽고 있어서인지
검은 형체가 동물이 아니라 ˝악˝ 에의 유혹? 이렇게 상상되더라고요.

태닝 샵이 뜬다고는 미리 경고 주셨지만
태닝 샵 링크 피해서 더 알아보고 싶어지네요.

아니 에르노도 안 읽었는데
도로시 태닝 그림까지..계속 물고 물며 가야할 길이 멀어요^^

새파랑 2022-10-18 04: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그림같이 문이 있으려면 집이 얼마나 커야 할까요? ㅋ 그림이 뭔가 신비합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10-18 08:33   좋아요 2 | URL
그러게요 ㅎㅎ 내면의 집이 평수가 엄청 큰가 봅니다. 문은 열 수도 닫을 수도 있는 것이라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그림 보고 영화 아이 앰 러브, 생각나더군요. 여자가 딱 저런 느낌으로 크고 화려한 집 한가운데 갇힌 짐승처럼 서 있는 장면이 있거든요. 결국 뛰쳐나가지요 ㅎㅎ

얄라알라 2022-10-19 10:12   좋아요 2 | URL
오! 속박으로 보시지 않으시는 군요. 프레이야님께서는!

내면의 집, 평수 엄청 큰 집^^

프레이야 2022-10-19 10:16   좋아요 2 | URL
얄라 님 무한히 열려 있는 저 아름다운 문들이 무려 !! 얄라 님도 갖고 계시죠^^
 

모두가 격동의 내일을 믿기 시작했다. 그것은 몇 달, 기껏해야 일 년이면 일어날 일이었다. 가을은 뜨거울 것이고 그러고 나면 봄이 온다(더는 생각하지 않을 때까지, 훗날 낡은 청바지를 발견하고 «68년 5월에 입은것이다"라고 말할 때까지). 또다시 5월"은 혁명의 회귀와 다른 사회의 도래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는 기대였고, 가브리엘 뤼시에르를 감옥에 넣고 머리가 긴 젊은이들 모두를 극좌파"로 간주하며 시위와 모든 것을 막는 법에 환호하면서 혁명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하던 이들에게는 강박이었다. 사람들은 일터에서 두 부류로 갈라졌다. 5월의 투쟁자들과 투쟁자가 아니었던 사람들, 그들은 같은 반감으로 나뉘었다. 5월은 개인을 분류하는 방식이 됐다.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그 시국에 어느 쪽에 있었는지를 물었다. 양쪽 모두 똑같이 폭력적이었으며 서로 그 어느 것도 용서하지 않았다 - P137

사회를 바꾸기 위해 통합사회당에 남아 있었던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마오, 트로츠키주의자들, 엄청난 양의 이념들과 개념들을 알게 됐다. 사회적인 운동, 서적들 그리고 잡지들, 철학가들, 비평가들, 사회학자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 부르디외, 푸코, 바르트, 라캉, 촘스키, 보드리야르, 빌헤름 라이히, 이반 일리치, 텔켈, 구조적인 분석, 서사학, 생태학. 어차피 『상속자들」이건, 섹스 자세에 관한 스웨덴 소책자이건, 모두 새로운 지식과 세상의 변화를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개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고 전대미문의 언어들 속을 헤엄쳤으며, 이 모든 것들을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한 달 만에 몇 년을 따라잡았다. 낡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공격적인 것들, 감동적인 것들, 더는 새로 배울 것이 없어도 터번을 쓴 보부아르와 사르트르를 되찾았음에 안도했다. 앙드레 브루통은 안타깝게도 2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 P138

우리는 일종의 취한 상태에서 마약, 환경 오염 혹은 인종차별주의를 주제로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토론을 마치고 나오면서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친 것이 없는 것이 아닌가, 헛수고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나 어쨌든 학교는 무언가에는 쓸모가 있었다. 우리는 끝도 없이 묻고 또 물었다.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일하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 우리는 모든 것을 시도해도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은 세상의 첫해였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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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외에도 걷고 앉고 말하고 웃고, 길에서 크게 소리쳐 부르고, 먹는 몸짓과 물건을 잡는 방식들이 유럽과 프랑스 시골을 바탕으로 둔 과거의 기억을 몸에서 몸으로 전했다. 개개인이 다르고, 착한 이들과 못된이들로 나뉘어도, 사진으로는 볼 수 없는 유산이 가족구성원들과 마을 사람들 그리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모든 이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습관들, 벌판의 아이들과 작업실의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까마득히 오랜 옛날의 아이들이 선행했던 모든 몸짓들: - P33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나이마다 자신이 살아온 해를 규명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과거를 어떻게 그릴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두 번째 줄에 있는 여자아이에게는 어떤 기억이 적합할까? 어쩌면 그녀에게는 지난여름의 기억외에 다른 기억은 없는 게 아닐까. 그녀 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 육체, 남자의몸, 상(像)이 거의 없는 그 기억.
그녀는 미래를 위한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 1) 날씬해지고 금발 머리가 되는 것, 2) 자유롭고 독립적인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밀렌느 드몽죠와 시몬드 보부아르를 보며 꿈꾸기. - P97

그녀는 어느 순간에 자신이 배워온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녀의 몸은 젊고, 그녀의 생각은 늙었다. 그녀는 일기장에 이론이 만능열쇠라는 생각에 진저리가 나고", "다른 언어를 찾고 있으며", 원초적인 순수함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적었으며그녀는 낯선 언어로 글쓰기를 꿈꾸고 있다. 그녀에게 단어란 밤이 드리워진 천의 가장자리에 수를 놓은 일"이다. 권태에 반박하는 "나는 의지이고 욕망이다." 같은 문장도 있으나, 무엇에 관한 의지이고 욕망인지는 쓰여 있지 않다. - P112

20년 후의 여성은 상념이자 유령이다. 절대 그 나이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진 속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보면서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 광기라는 것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 광기를 순간적으로나마 보존하기 위해 글쓰기만을 - 어쩌면 남자도 - 생각한다. 그녀는 과거, 현재의 장면들과 밤에 꾼 꿈들 그리고 미래의 상상이 그녀의 또 다른 자아인 "나" 안에서 교차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전혀 «개성»이 없다고 확신한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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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설은 읽지 않았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잘 살고 있는 거니?
여러가지 찾아보고 가보고 싶은 곳 알아보고
또 추억도 뒤지며 멈칫멈칫, 휘리릭 읽어지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여운이 길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 여덟 편.

나는 노트북을 켜고 할아버지의 녹취 원고 파일을 열었다. 그러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왔다. 주석에는 할아버지가 번역한 프랑스 철학자 루이 라벨의 책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적혀 있었다.

육체는 우리 외에는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아주 협소한 영역 안에 우리를 가둬버린다. 그러나 영적 삶은 이와 반대로, 우리를 존재하는 것의 공통적인 첫 시원으로 이끌어간다. 또한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 P220

"그래, 거울을 보면 돼. 거울은 바깥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쪽으로 되돌리지. 그럼 인간의 인식을 안쪽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그렇다면 존재를 확장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이겠어?".
"세계를 더 많이 인식하는 것인가요?"
"이질적인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거지. 그게 바로 사랑의 정의야. 그렇다면 신의 정의는 모든 이를 받아들인 존재, 모든 이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존재일 수밖에 없겠지. 모든 세계를 인식하는 게 바로 신일 테니까. - P235

그리고 서서히 깨닫게 됐네. 지금 이 순간, 신은 늘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그치면 바로 그 존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이란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걱정과 슬픔,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지만, 그 생각이 사라질 때 비로소 정신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그 정신의 삶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서로 겹쳐지며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 현상의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나는 매 순간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가 다시 기뻐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고 화낼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겹쳐진 정신의 삶, 그 기저에 현존하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노력하기로 했지. 이 삶에 감사하기로. 타인에게 더 다정하기로. 어둠과 빛이 있다면 빛을 선택하기로. - P242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달을 향해 걷는 것처럼 희망의 방향만 찾을 수 있다면, 이라고. 그래서 저는 치매에 걸려 우연히 떠오른 생각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 아빠의 마음을, 마치 치매에 걸린 것처럼 사전 경고도 없이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는 신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살아보기로 한 거예요. 그래서 불을 질렀습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었어요. 이해만 있었죠. 소방관들이 우리집의 유리창을 깨는 걸 보고 제 속이 얼마나 시원했게요. 가슴이 얼마나 벅차올랐게요. 저는 비로소 자유를 얻었거든요. 그 순간 전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진 거예요."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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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6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16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