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의 부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
잭 런던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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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이나 강인한 야성,
곤봉과 채찍으로 유지하는 소위 문명세계,
인간세계에 울리는 경종의 부르짖음.
벅은 잭 런던의 또다른 페르소나.

단편 ‘불 피우기’가 뒤에 수록되어 있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 방문객이 그 계곡을 찾는데 이해츠 족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놈은 찬란하게 빛나는 털로 뒤덮인 커다란 늑대인데 다른 늑대들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다르다. 그는 홀로 부드러운 숲을 건너 나무들 사이에 있는 공터로 내려간다. 썩은 사슴 가죽 자루들에서 누런 물줄기가 흘러나와 땅에 스며드는데, 주위에 풀들이 기다랗게 자라나 있고 식물들이 우거져서 그 누런 색깔을 보이지 않게 가린다. 그는 여기에서 잠시 동안 뭔가 생각하다가 떠나기 전에 한 번, 아주 길고 슬프게 운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혼자인 것은 아니다. 긴 겨울밤이 오고 늑대들이 낮은 계곡으로 먹이를 찾아 내려올 때면 그가 무리의 맨 앞에서 달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창백한 달빛과 희미하게 반짝이는 북극광을 뚫고 동료들보다 훨씬 더 높이 펄쩍펄쩍 뛰면서 그들 무리의 노래인 원시 세계의 노래를 부를 때면 그의 커다란 목이 우렁우렁 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 P132

"당신이 옳았어요, 선배. 당신이 옳았어요."
그는 설퍼 계곡의 선임에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난 후 사내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가장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잠 속으로 스르르 빠져들기 시작했다. 개는 그를 바라보며 앉아서 기다렸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긴 황혼 속에서 짧은 하루가 끝나 가고 있었다. 불이 지펴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이 눈 속에 앉아 불도 피우지 않는 것을 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혼이 저물자 불을 쬐고 싶은 개의 안타까운 열망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대신 개는 앞발을 교대로 크게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부드럽게 낑낑거렸다. 개는 귀를 납작하게 붙이고 주인의 꾸중을 기다렸다. 그러나 주인은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개는 크게 낑낑거렸다. 조금 더 지난 후 사내에게 살금살금 걸어간 개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에 개는 털을 곤두세우고 뒤로 펄쩍 물러섰다. 추운 하늘에서 펄쩍 뛰고 춤을 추고 밝게 빛나는 별들아래, 개는 큰 소리로 길게 짖으면서 잠시 더 기다렸다.

- 불을 지피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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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마틴 에덴에 이어 계속 잭 런던이군요. 저는 마틴 에덴부터.... ^^

프레이야 2022-09-18 19:45   좋아요 1 | URL
잭 런던 무척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저는 좋네요. 강하고 뜨겁게 살다 갔어요. 하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를 두고 가짜라고 표현했다죠. 세상 평가에 연연해하진 않았을 인물이지만. 영화 마틴 에덴도 잭 런던을 좀더 이해하기 👍
 

인생의 즐거움을 잃지 않는 마음

얘들아, 너희는 어리고 귀여워. 조금 더 지나면 학문의 숲을 떠나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게 돼. 그곳에서 춤추기도 하고 울기도 할 거란다. 모든 걸 잃고 모든 걸 얻기도 하겠지. 가끔은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해. 우리는 살면서 모든 걸 줄 수 있어. 준다는건 모든 걸 잃는 가장 매력적인 방법이란다. 단, 한 가지만은 잃어서는 안 돼. 이건 할머니가 임종 몇 시간 전에 나한테 해 준 말이야. 할머니는 시골 분이셨는데, 그동네에서 유일한 공산주의자였고 평생 새카만 재들에 뒤덮여 살았어. 그야말로 온갖 불행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지. 자식 하나는 장애가 있었고, 또 다른 자식은 포로수용소에서 죽었어. 그리고 평생 이런저런 질병에 시달렸단다. 내가 열두 살이나 열세 살쯤 됐을 때 할머니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어. 할머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예요? 난 그때 할머니가 해 주신 답을 잊을 수가 없어. 아가야, 가장 중요한 건 즐거움이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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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의 책 세 권째.
가볍고 폭신하고 따뜻하다.
오늘,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또 잘해내자!



_ 아버지가 두번째 직업을 가진 이후 나는 묘지에 자주 드나들었고 그곳에서 문학에 대한 취향을 갖게 되었다. 묘지의 석판은 책 표지와 흡사하다. 직사각 형태에 약력이 쓰여 있는 데다가 이따금 ‘영원히 당신을 기억하며’라고 적힌 짧은 문장을 광고 문구를 적은 띠지 같다. 가족의 성은 망자를 위한 책 제목이다. 성은 모든 걸 요약해준다. 내가 원했던 삶은 요약할 수 없는 삶이었고 대리석이나 종이가 아닌, 음악 같은 삶이었다.
- 가벼운 마음, 30-31p


찻잔세트도 마음에 든다. 모닝커피 한 잔은 늦잠 자고 있는 작은딸을 위해 남겨뒀다가 내가 다 마시는 중. ㅎㅎ 할아버지 첫 기일 맞아 엊저녁 귀향한 작은딸. 기차가 만석에 입석 승객도 많더라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편을 처음 본 건 여러 해 전 점자도서관에서였다. 다른 봉사자가 선점해 녹음 기회를 놓쳤더랬다. 표지가 이뻐 혹했다가 구매는 여태 미루고 있었는데 이번에 영접. 우양산과 찻잔세트 중 망설이다가 찻잔으로 들였다. 차근차근 읽어볼 생각에 기쁨. ^^

마지막 사진은 엄마 습작품. 집에 걸어 놓았길래 찍어왔다. 잔꽃을 잔뜩 피워올리고 싶은 마음이 전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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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7 12: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찻잔이 책이 쌓인 책상? 과 참 잘 어울립니다. 어머님 꽃들이 별같아요. 글씨도 예쁘시고 💕 저도 커피 혼자서 두 잔 마셨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2-09-17 13:11   좋아요 3 | URL
잔별들 그죠 ~^^ 별 소환하시니 또 생각나는 이야기가 … 책상은 맨날 복잡하네요. 커피는 원래 커다란 머그에 마시는데 조롷게 작은 잔이라면 넉 잔은 마셔야 할 것 같아요 ㅎㅎ 가벼운 마음 표지 색상이 넘나 고와요.

수이 2022-09-17 13: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뱅도 커피잔도 풍경도 어머님 글씨도 이 가을과 딱 어울립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4:33   좋아요 3 | URL
가을가을한 하늘과 바람이 다 하네요.
작은 파티 드레스도 곧 *^^*
비타 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페넬로페 2022-09-17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커피가 담긴 프루스트 커피잔 넘 가을에 어울려요.
낭독해주시는 프루스트의 글을 듣고 싶네요.
마지막 어머니의 작품은 그야말로 작품 그 자체입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4:21   좋아요 5 | URL
페넬로페 님 덕분에 구매욕 불끈!
마음 먹었던 건 역시나 오네요.
몇 권까지 낭독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후속은 제가 할 수 있을지 엿봐야겠어요.
찻잔이랑 소서 넘나 이뻐욤~^^

미미 2022-09-17 14: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글씨체가 참 고우시네요!
보는것 만으로도 마음이 화평해지는 느낌입니다.
서재 테이블도 아늑해요 프레이야님*^^*

프레이야 2022-09-17 14:35   좋아요 4 | URL
저건 그냥 장난으로 해봤다고 그러시네요 후년에 서화 원로작가 등업되게 화이팅 중이세요 ^^ 나이 들어서 그나마 뭔가 즐겁게 몰두하는 게 있어야겠다는 건 진리네요. 우린 📚 요거요 ㅎㅎ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미미 님~

coolcat329 2022-09-17 14: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참 예쁘네요. 저 프루스트 잔 볼수록 탐나네요. 어머니 그림도 따뜻합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5:31   좋아요 2 | URL
쿨캣 님 고맙습니다 ~
저 찻잔 이뻐요^^ 한 번에 두 가지 주문은 안 되미 두 번 나누어 해야했어요.
소서가 좀 특이해요 납작하게.

얄라알라 2022-09-17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짜 분위기가, 그냥....책이 폭신하셨어요?^^ 프레이야님.
어쩜 이렇게 자택 분위기가 따뜻하지요. 폭신따끈^^ 어머님 습작이라고 말씀하신 작품도 환함을 발산 중입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5:54   좋아요 3 | URL
울엄마가 원래 쫌 환하세요^^
가벼운 마음은 표지부터 카스텔라처럼 폭신폭신해요. ㅎㅎ 1984북스 저 책 시리즈가 다 그렇네요. 예전에 산 아니 에르노 사진의용도,는 폭신까진 아닌데 내용도 그렇고 서체만 바뀌어도 다른 느낌을 주는 것도 같고요.
주말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셀님은 내몸의 동반자 ㅎㅎ

얄라알라 2022-09-17 16: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셀님이라고 부르니, 이거 그냥 막 친근해지는데요...친근해지면 아니되는데 ㅎㅎ 저 지금 아픈 거 나았다고 뉴욕치즈케이크 흡입중인데 셀님이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8:45   좋아요 3 | URL
ㅋㅋ 셀님은 얄라님의 인격.
달달한 거 좀 먹어주자고요.

새파랑 2022-09-1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피잔 세트가 저렇게 두개 나란히 있으니까 너무 보기 좋네요 ^^ 마들렌만 있으면 되겠네요~!!

프레이야 2022-09-17 18:45   좋아요 2 | URL
두 개 세뚜로 들여야 ~
마들렌 대신 소금빵이랑 츄러스를 눈깜짝할 새 먹곤 정신 차려 보니… 사진을 못 찍었어요 새파랑 님 ㅎㅎ 정리 좀 하고 찍을걸. 저 마우스패드는 또 뭐죠 안 어울리게ㅋ

책읽는나무 2022-09-17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 굿즈는 커피잔이 답이었나?
접시를 선택한 자는 그저 침만 뚝뚝 흘려봅니다ㅜㅜ
넘 귀품있군요^^

프레이야 2022-09-17 23:57   좋아요 2 | URL
쿄쿄~ 접시도 이뻐 보이던데요
그래도 커피잔으로요^^

바람돌이 2022-09-18 17: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그림 꽃잎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듯.... 화병도 너무 예쁘게 표현되어서 맘이 설레네요.


프레이야 2022-09-18 19:34   좋아요 2 | URL
🦋 나비 ~~ 엄마는 저런 취미가 있어 참 좋구나 싶어요. 나이 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작업 한 가지는 있어야겠다 싶어요. ^^

바람돌이 2022-09-18 19:39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님은 책을 쓰시잖아요. ^^

프레이야 2022-09-18 19:47   좋아요 2 | URL
에너지 잃지ㅡ않게 경험을 많이 해야 된다고 느낍니다. 바람돌이 님도 화이팅^^

기억의집 2022-09-18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프님 이 페이퍼 보고 스티븐 킹의 빌리 서머스 이북으로 샀다가 취소하고 종이책으로 주문, 굿즈로 커피잔 선택했어요. 프님 페이퍼 안 봤다면 모르고 지나칠 뻔 했네요. 책과 커피잔 분위가 제대로입니다~

프레이야 2022-09-18 19:36   좋아요 1 | URL
👍 👍 커피잔과 소서 이쁘네요.
오늘 바람이 제법 시원해요. 태풍이 오려나 봐요. 살짝 지나가야할텐데요.

scott 2022-09-18 23: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과 달리 전혀 가볍지 않은 독서를 하고 계십니다!

마들렌 없이 마시는 커피의 진한 맛을 음미 하고 계신 프레이야님!

알라딘 굿즈(프루스트옹 콜라보) 이보다 더 고급진 사진이 없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옆에 프레이야님 저서도 올려 놔요!ദ്ദി ˉ͈̀꒳ˉ͈́ )✧

프레이야 2022-09-19 09:05   좋아요 3 | URL
커피는 진하게요!! ㅎㅎ
남표니는 더 진하게 드립해요. 그 향이 훨씬 좋고요. 지금 로스팅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책상 좀 정리하고 찍을걸. ㅋ 세트로 잔이 이뻐 그냥 들이대었네요. 스캇님 월요일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세요~^^

희선 2022-09-19 01: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커피가 담긴 커피잔 멋지네요 저기에 커피를 마시면 프루스트를 만나야 할 것 같겠습니다 어머님 그림도 좋네요 앞으로도 즐겁게 그리시면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9-19 09:11   좋아요 2 | URL
굿모닝!
날짜가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잔 이쁘죵.
프루스트도 만나고 만나야 할 분들 많아 행복한 ^^ 엄마가 서예를 처음 시작한 건 오십 초반이었어요. 삼십년 정도 되었네요. 여러가지 개인사를 지나오면서도 꾸준히 즐겁게 몰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있는 게 엄마한테도 참 좋구나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희선 님

imoons 2022-09-25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눈길이 갑니다. 내용도 그런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을

프레이야 2022-09-26 00:49   좋아요 0 | URL
내용도 따스합니다^^
 
다 잘된 거야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뉘엘 베르네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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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망한 어린 외손자가 찾아오고 앙드레의 손을 화면 가득 비추는 장면이 영화에서 나온다. 쥐고 갈 것 없다는 듯 힘 없이 시트 위에 내려놓은 손!

(울아빠는 내가 가면 요즘 부쩍 내 손을 먼저 잡으신다.)

뉘엘이 공포영화를 보는 장면이 갑자기 나와 깜짝 놀랐는데 그게 <쏘우>였네. 안 본 영화다. 뉘엘은 태연하게 본다.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군. 이해된다. 동생 파스칼이 본 <안티크라이스트>는 지독한 영화였던 기억이…

프랑수아 오종 감독은 짧은 문장들로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원작에 꽤 충실히 연출했다. 시나리오 작업을 했던 작가라 그런지 문장이 시나리오 같다. 앙드레가 앰뷸런스에 타고 뉘엘이 파란 머플러를 벗어 목에 둘러주던 이별 장면, 따스하고 울컥했다. 앙드레가 파스칼에게, 언니한테 다음 글은 이 일을 주제로 쓰라고 말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넣은 듯. 울보는 싫다며 끝까지 유머러스한 아빠. 살면서 슬픔을 내치진 말고 항상 기쁨을 앞세우자. 정말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앰뷸런스 기사가 베른으로 가는 도중 앙드레가 그곳에 가는 이유를 알게 되고 설득하려 하나 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원작과 달리 영화에선 앙드레가 기사 두 명을 휴게소에서 마주하고 앉는다. 



아버지가 왼손으로 내 팔을 잡았는데 힘을 주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나는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내가 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좀더 크게 반복했다. 끝내게 네가 나를 도와주면 좋겠다.
사고가 난 뒤로 아버지는 이렇게 똑똑히 말한 적이 없었다.
내 팔을 떠나는 아버지의 손이 보였다. 아버지의 손은 완전히 내려가지 않고 시트 위에 정지되어 있었다. 연주를 마치고 마지막 화음이 울리는 동안 약간 벌어져 있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처럼.
아버지는 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느꼈지만, 내 눈은 표류하는 것 같은 창백한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 P61

"어제저녁에 뭐 했어?"
"다른 생각을 하려고 나가서 안티크라이스트」를 봤어. 언니는?"
"난 「쏘우」봤어. 다른 생각을 하려고………………"
「쏘우」의 주인공들 중 한 명이 스스로 자신의 발을 절단하는톱.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윌렘 대포의 발목에 나사못을 박는 맷돌.
동생과 나는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우리는 어렸을 때처럼 깔깔대고 웃는다. - P238

아버지는 앰뷸런스 안에 누워 있다.
"아주 좋아."
아버지가 행복해 보인다.
파스칼이 입맞춤을 하려고 앰뷸런스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동생이 나온다. 나는 동생을 쳐다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내 차례.
나는 아버지의 목에 머플러를 둘러준다. 파란색이 아버지에게 잘 어울린다. 미남이다.
"아빠………."
"그래… 그래………… 잘 있어…………"
아버지의 작은 입, 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짝이는 눈을 본다.
나는 아버지를 포옹한다.
아버지가 나를 부드럽게 밀어낸다.
울보는 싫어. - P263

앰뷸런스 기사들한테서 방금 전화가 왔다.
거의 도착했고, 그들은 아버지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그들은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함께 농담도 나눴다. 기분이 아주 좋은 아버지가 스위스에 뭘 하러 가는지 말하기 전까지는.
앰뷸런스 기사들은 모르고 있었다. 알았다면 그들은 아버지를 이송하는 걸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무슬림이다.
자살은 그들의 종교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들은 공범이 될수 없다.
그들은 아버지를 파리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나는 동생 말을 끊는다.
"농담이지?"
"아니!"
"말도 안 돼."
"그래, 말도 안 되지. 그래서 내가 그들에게 말했어. 그 결정은 아버지가 하는 거니까 그들을 설득하는 것도 아버지 몫이라고.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아버지와 알아서 해결하라고."
"그들이 어떻게 할까?"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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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9-1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온해 보이는데, 어쩐지 다음에 이어질 내용이 예상보다 충격적일 것 같은 느낌이...
프레이야님, 추석연휴는 잘 보내셨나요.
이번주 월요일이 휴일이라서 그런지 한 주가 빨리 갑니다.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프레이야 2022-09-16 22:34   좋아요 2 | URL
예상보다 충격적이거나 그렇진 않구요. 냉정하게 삶을 돌아보게 해요. 예상대로에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존엄사인데 평온하게 맞이합니다. 와중에 위트도 있구요. 삶은 그래서 소중합니다. 서니데이 님도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살아 있음의 역설,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 완벽한 기쁨.

승리한 투사, 적을 죽여서 흡족해진 우월한 원초적 야수는 발을 당당히 딛고…… 56p



머리 위에서는 북극광이 차갑게 빛나고 별들이 춤을 추다 얼어붙고 대지가 눈의 휘장 속에서 무감각하게 얼어 버릴 때 에스키모개들의 노래는 어쩌면 삶에 대한 유일한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길게 끄는 울음소리와 반쯤 흐느끼는 듯한 구슬픈 소리는 생존의 고뇌를 표현한 삶의 애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오래된 노래, 개 종족만큼이나 오래된 노랫소리로, 슬픈 노래만 있었던 때 묻지 않은 세상의 태곳적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에 수많은 세대의 슬픔이 담겨 있어 그 비애에 벅의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신음하며 흐느낄 때 그 속에는 오래된 삶의 고뇌, 야생의 조상들이 지녔던 고뇌가 있었고, 그들에게 공포와 신비를 던진 바로 그 추위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벅이 그 소리에 그토록 끌린다는 것은 그가 문명의 상징인 불과 지붕의 세대를 거슬러 울음의 시대였던 거친 태초의 삶으로 완전히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 - P49

삶에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정점을 나타내는 환희가 있다. 그런 것이 살아 있음의 역설이다. 그 환희는 살아있기에 찾아오지만 살아 있음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야 찾아온다. 그 환희, 살아 있음의 망각은 감흥의 불꽃 속에서 자아를 잊는 예술가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싸움터에서 전쟁에 미쳐 자아를 잊고 생존을 거부하는 군인에게 찾아온다. 달빛 속에서 번개처럼 앞질러 가는 살아 있는 먹이를 잡기 위해 늑대의 오래된 울음소리를 내며 앞장서서 달려가는 벅에게도 바로 그 환희가 찾아왔다. 그는 시간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며 본성, 자신보다 더 깊은 본성의 일부, 그 심오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과 조수처럼 밀려드는 존재의 파도, 근육과 관절과 심줄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느껴지는 완벽한 기쁨에 압도당했다. 솟구치는 삶은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며 움직임 속에서만 자신을 드러냈고 별 아래, 움직이지 않는 죽은 물질의 표면 위로 환호하면서 날았다.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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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9-1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는 두 번째 이야기 <불을 지피다>가 너무 재밌고 충격이었습니다.

프레이야 2022-09-17 18:40   좋아요 0 | URL
네. 그랬어요^^
현대문학 단편선에서 좀 더 읽어볼 생각이에요
거기도 이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