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싹 내인생의책 그림책 5
스티브 브린 지음, 강유하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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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좋은 그림책을 만났다. 마음이 소란하고 복닥거리면 그림책 처방을 권한다. 단순한 글과 그림이 주는 정신적 위로가 생각보다 크다. 간결하고 꼭 필요한 말과 글, 장식을 벗고 소박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그림과 색채가 유쾌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좀 더 단순해지라고 그러면 웃을 일이 많다고 “오잉~” 하고 까불어주는 것 같다. “오잉”은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오는 어린 개구리의 대사다. 번역부터 아주 재미있게 옮겨 놓았다. 주인공 ‘찰싹’의 개구쟁이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원제는 ‘Stick’. ‘찰싹’은 잘 어울리는 우리이름이다. 개구리 ‘찰싹’은 뭐든지 자기 힘으로 혼자 하겠다고 설치고 나오는 서너 살 아이의 모습이다. 위험한 짓은 못 하게 해도 꼭 해보고야말고 아무 거나 못 먹게 해도 아무 거나 입으로 먼저 가져가는 아이. 그걸 일일이 통제하려다보면 엄마는 늘 아이와 전쟁을 치르듯 하루를 보내야한다. ‘찰싹’의 엄마는 느긋하게 앉아서 미소 짓고 바라본다. 가장 바람직한 엄마의 모습이다.

 ‘찰싹’은 혼자 해 보려는 시도를 하지만 아직은 서툴다. 뜻밖의 시도로 뜻밖의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어린 아이가 무작정 호기심에서 집을 나가 앞만 보고 걷다보면 집과는 더욱 멀어지는 일들이 흔히 있다. 내 가출 사건이 떠오른다. 세 살적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엄마에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더란다. 내가 집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던 덕에. 

 ‘찰싹’은 낯선 세상으로 모험의 길을 떠나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예상치 못한 모험만큼 그 교통수단이나 가는 곳이 흥미롭다. 늪의 풍경과 갖가지 동물들이 멋지게 그려져 있고 그곳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모험을 하게 되어서도 다음 장에 벌어질 장면이 늘 예상을 뒤엎는다. 전체적으로 ‘찰싹’의 빠른 이동을 보여주기 위해 속도감이 느껴지는 일러스트레이션이 생동감 있다. 속도감을 더 강조해야할 부분은 장면을 분할하여 그려 넣었다.

 이런저런 위험한 일도 잘 피하고 하루 동안의 모험이 끝났다. 해가 저물 무렵, 찰싹은 이제 홀로 되었다. 어린 ‘찰싹’에게는 처음 마주하는 낯선 장소, 낯선 시간이다. 차분한 인상을 주면서도 활기를 잃지 않는 색감이다. 여기서도 글은 거의 없고 호들갑스럽지 않다. 놀을 바라보는 ‘찰싹’의 뒷모습이 클로즈업 되어 있는데 그 덩치가 아주 커 보인다. 이제 ‘찰싹’은 모험을 떠나기 전의 어리기만 한 개구리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러나 정말 ‘찰싹’은 다 컸을까. 겨우 하루 동안의 모험으로? 돌아온 ‘찰싹’은 여전히 개구쟁이, 고집불통이다. 이 그림책에게 눈여겨볼 점이라면 촐싹대는 ‘찰싹’의 곁에 든든히 붙어있는 대상이다. 기다리고 있다가 포근히 맞아준 엄마개구리와 낯선 곳에서 방황하는 어린 영혼의 귀가를 도와준 타인. 모험과 성장은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다. 우리를 키워준 어떤 대상에게 직접적인 보상을 할 수 없어도 그 힘으로 우리는 자라는 것이다. 우리를 키우는 건 불안정한 시간과 공간, 예상치 못한 사건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그 속에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타인의 보살핌이다. 누군가 나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우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을 작가, 스티브 브린은 직접 하지 않는다.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지혜로운 방식인지, 마지막 장면을 보면 느낄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은 정말 흐뭇한 웃음을 준다. 돌아온 ‘찰싹’에게서 어떻게 그런 환한 빛이 나게되는지. 작가는 엉뚱한 척, 모르는 척, 돌려서 농담을 거는 것 같다. 사람은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빛나는 존재다. 결코 혼자서는 될 수 없지만. 아이들에게 나는 그렇게 빛을 주는 존재로 배경이 되어도 좋겠다.

 

 

 

 그림도 글도 유쾌한 그림책이다. 그림만 재미있게 봐도 상관 없지만 그림독해력이 있는 아이라면 글이 적으니 그림에서 많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그림을 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재미를 더해서 볼 수 있는데, 가령 거울이나 그림자를 이용하여 '찰싹'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번 더 반영해 준다. 하물며 자동차 타이어의 스틸 부분에 그 모습이 다 비칠 정도다. 섬세한 시선이다. 그런 부분에서 그림책을 보는 이는 '찰싹'이 혼자 가고 있지만 누군가가 늘 따라다니며 보살핌과 관심의 눈을 떼지 않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안도감! 이건 그림책을 보는 사람(아이건 어른이건)이 얻고자하는 가장 큰 미덕이다. 사람들의 표정과 동물들의 표정 또한 특징을 살려 재치있게 그렸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속도감이 중후반까지 이어지는 점은 아이들의 성미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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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쾌, 상쾌 그림책! 좋지요~ 보관함에 넣었어요^^

순오기 2007-12-0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생의 책이라~~~~ 출판사 이름이 정말 짱이야요!
참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나는 그렇게 빛을 주는 존재로 배경이 되어도 좋겠다." 아주 감동입니다!

프레이야 2007-12-0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노아님, '찰싹'이 한테 찰싹 마음이 붙게 될 거에요^^
순오기님, 출판사이름 좋지요. '소녀의 눈동자'로 처음 알게 되었어요.^^
 
엘리너 루스벨트 아이세움 지식그림책 22
바버러 쿠니 지음, 이상희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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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같은 출판사의 여성인물이야기 시리즈 <엘리너 루스벨트>(박정희 글, 정병수 그림)를 읽은 게 다섯 해 전이다. 그 책은 4학년 아이들과 함께 읽었고 큰딸도 당시 무척 좋아하며 거듭 읽었던 책이다. (이 시리즈의 여성인물이야기는 모두 권하고 싶다.) 작년에 아이세움 지식그림책 시리즈로 나온 <엘리너 루스벨트>는 미국의 유명 그림책 작가 바버러 쿠니가 글과 그림을 담당한 그림책이다. 3학년 아이들이 읽기에 적당하다.

 3학년 작은딸에게 이 책을 소개했다. 두 번 보고 나더니, 재미있다는 반응을 하지 않고 그림도 좋아하지 않아서 의아했다. 아이가 어떤 관점에서 그런 반응을 보인 건지 궁금하여 물어보았다. 이야기가 긴 창작동화를 좋아하는, 아이 개인의 취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아이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림조차 별로 잘 그린 것 같지 않다고 말해서 정서의 차이인가 싶다. 아이들은 그림책 속의 아이들 얼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그림책 속의 그림은 얼굴이 별로로 그려져 있다. 이목구비나 윤곽이 뚜렷하지 않고 게다가 침울한 표정이다. 이 그림의 포인트는 전체적으로 깊은 색감과 자연의 풍경속에 들어가 있는 인물, 장면마다 섬세하게 표현된 디테일에 있다. 아이는 그런 것에 그다지 끌리지 못하는 것 같다.

 이 그림책은 엘리너 루스벨트의 어린시절, 그러니까 엘리너가 성숙된 한 사람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일들에 초점을 맞춘다. 행복하지 못했던 유년의 기억과 열등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까지의 일들, 그리고 인생의 스승이었던 의미있는 타인을 만나는 대목까지가 이야기의 내용이다. 엘리너 삶의 구체적 연도는 그래서 중요하지 않다 싶었는지 전혀 표기되어있지 않고, 백악관에 들어간 이후 약자들을 위해 펼쳤던 구체적인 업적에 대해서도 생략되어 있다.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나약하고 억눌려있던 한 여성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세계의 주목할 만한 여성으로 활약하였는지, 결과보다는 그렇게 되기까지의 어린시절의 인상적인 일들, 그 과정에서 만난 작지만 잊지 못할 일들이다. 불완전하지만 가능성을 품은 어린이의 '자라나는 마음'에 바짝 다가가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책의 엘리너는 프랭클린 델라노 루스벨트의 영부인으로서 인물이 아니라, 세상의 위대한 여성으로 성장할 묘목인 지금의 여자 어린이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1884년에 태어난 고유명사 ‘엘리너’가 아니라, 시대를 막론한 일반명사 ‘엘리너’인 셈이다.

 그래도 엘리너의 삶을 소개하는 글로 읽으려면 군데군데 설명을 좀 곁들여주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아이들이 그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모르고 지나치기 쉬운 부분들이 다소 걸린다. 자료를 많이 찾고 썼다고 하는데 전에 읽었던 책의 내용과 사소하지만 좀 다른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 그림책의 의도는 구체적 인물 소개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 같아 따지지 않기로 한다. 그보다 다른 의도가 엿보이기 때문인데, 한 어린이가 환경과 성격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훌륭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조명하려고 한다. 후기에는 다소 구체적인, 엘리너의 업적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연보 정도는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못 생기고 말이 없고 책읽기를 좋아한 어린 엘리너는 너무 진지하기만 하고 겁쟁이라는 말을 듣고 심지어 엄마에게 '할머니'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그녀가 상대적 열등감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신감 있고 따뜻하며 스스로의 생각과 의견을 밝힐 수 있는, 능력있는 여성으로 발돋음하기까지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 소개된다. 아버지와 수베스트르 선생님이다. 이 책에는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안 나오고 그늘에 묻혀서 산 어린 엘리너에게 항상 용기를 불어넣어주고 진심으로 사랑을 준 존재로 그려진다. 아버지만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하늘이 주신 기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많았던 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들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였다고 하는데 마지막 장에 그려진 편지다발이 인상 깊다. 파란 리본으로 묶어둔.

 시선보다 중요한 건 시각이다. 한 사람을 보는 데에도 각도에 따라 다른 평가가 내려진다. 당시의 고루한 시각에서 비껴서서 엘리너의 참모습을 발견한 수베스트르 선생은 인생의 가장 값진 스승이다. 자신의 참된 가치를 알아 봐주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빛 같은 존재가 아닌가. 안타깝게도 아버지도, 수베스트르 선생님도 엘리너가 주목할 만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걸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엘리너는 여성을 꽃으로만 보려던 시대의 편견과 자신의 불우한 어린시절 환경을 긍정적으로 딛고 당당하게 피어난 사람꽃이다. 세상의 선입견에 맞서 자신의 능력을 기르고, 무엇보다 소외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구체적 도움의 손길을 주는 사려깊고 온기있는 '어린 마음'을 만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게 살았던 어린 엘리너가 세상의 아이들이 모두 호화롭게 사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여섯살 적 추억의 장이 가장 인상적이다. 과장되지 않은 차분한 글과 사실적인 그림이 돋보인다.

 바버라 쿠니의 그림은 하나하나 세밀하게 보면 읽을 게 많다. 스케치도 그렇지만 색감이나 명도가 무척 섬세하다. 불운한 시절을 보내는 어린 엘리너의 마음을 대변하듯 엘리너는 늘 침울하고 작게 그려져 있다. 그림마다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엘리너와 상반되게 다른 아이들은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다. 굴렁쇠를 굴리고 연을 날리고 사방치기를 하면서. 아니면 엄마의 양 옆에 앉아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두 동생들과는 달리 엘리너는 저 뒤에 숨은 듯 음울하게 서 있다.

 “엘리너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불을 켜는 사람이었어요.”

후기에 적힌 이 말은 혹여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사는 아이들이 있다면 스스로 촛불 하나 밝히라는 바람으로 읽힌다. 또한 세상 어두운 곳 구석구석에 촛불을 켜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이 책은 자신감이 없고 두려운 아이들에게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줄 수 있고, 엘리너 루스벨트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을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그림책이다.  3학년 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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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6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7-10-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딸아이도 그림이 마음에 안 들면 쳐다도 보지 않는 책이 있는데 댁에도 그런 딸이 있군요. 저라도 한 번 봐야겠네요.

홍수맘 2007-10-2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는 모르겠고 제가 좋아라 하는 작가의 그림책이네요.
제가 보면 되죠. 뭐!

뽀송이 2007-10-2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만 봐서는 이야기가 어려울 거라는 선입견이 들었어요.^^;;
책이 꽤 조근조근 할 것 같아요.^^
리뷰를 읽다보니 오히려 제가 한 번 읽어 보고 싶군요.^^

프레이야 2007-10-26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나무집님, 전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데 아이들 눈은 좀 다른지, 좀더 자극적인 색감에
길들여져서 그런지 싶기도 하구요. 색감이 풍부하고 진지한 느낌이에요. 섬세하구요.
애들 고집 은근히 있지요. 근데 함께 독후수업을 하면서 엘리너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꽤 호감이었어요. 좋은점을 부각한 것이니..

홍수맘님, 바버라 쿠니 좋아하시는군요. 전 처음 알았어요.^^
저학년 그림책이니까 아이들 보기에 괜찮구요, 엄마가 좀더 곁들인 이야기를 쉽게
해주면 더 도움이 될 거에요.

뽀송이님, 이야기는 어렵지 않아요. 3학년 정도가 읽기 좋구요.
글은 조근조근해요. 그러니 아이들을 확 끌어당기는 글은 아닐 수 있어요.
엘리너가 주목받는 여성으로 성장하기까지, 태어나서 18세까지의 삶이 압축되어
있어요. 남들이 단점이라고 생각한 점이 어떻게 아름다운 덕성으로 진가를 발휘
하게 되는지에 초점을 두어요.^^

비로그인 2007-10-26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책에대한 정보..혜경님통해서 많이 배우네요.^^
아직 미혼이지만...언젠가 두루쓰일 유익한 정보..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07-10-27 09:13   좋아요 0 | URL
클로버님~ ^^
20살 이후 읽은 동화 모음 봤어요. 모두 저도 좋아하는 책들이었어요.
늘 밝게 사시는 것 같아서 좋아요.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아름다운 꿈 2007-11-0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
참 책을 어떻게 봐야 되는지 아시는분 같아요
다시 읽어 봐야 겠네요

프레이야 2007-11-02 17:37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꿈님,
이 그림책은 자꾸 볼수록 그림이 많은 걸 조용히 말해주고 있어요.
분위기가 느껴져요. 마치 엘리너의 품성 같은 그런 분위기가요.^^
좋은 이야기, 기쁩니다.^^
 
딸은 좋다
채인선 지음, 김은정 그림 / 한울림어린이(한울림)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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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님의 생일선물로 보내드리려고 주문한 그림책이다. 다른 것과 함께 보내려고 직배하지 않고 우선 집으로 주문했다. 우선 책표지의 수수한 그림이 방긋 웃음 짓게 했다. 채인선님의 글은 전부터도 워낙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고 거기에 김은정님의 그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수수하고 소박한 색감과 섬세하고 나긋한 붓질이 느껴지는 그림이 추억의 사진처럼 풋풋하고 편안한 정감을 불러온다. 표지의 그림을 보면 큰딸이 5살 적에 찍었던 사진과 흡사하다. 그때 여름날, 내 선글라스를 쓰고 원피스를 입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던 아이가 10년이 흘러 엄마의 키를 훌쩍 넘어 자랐으니...

 딸은 좋다, 여기서 ‘딸은’이라는 말은 주어이기도 하고 목적어이기도 하다. 글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내용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다. 나는 딸 둘에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신 내 어머니의 맏딸이고, 결혼하여 지금은 두 딸을 낳아 기르고 있는 엄마이기도 하다. 가끔은 아들 하나쯤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으로선 딸이 둘이나 있는 내게 부족함은 없다. 이 그림책은 모든 어머니들에게 바친다는 헌사로 시작하는데 딸을 갖지 못한 어머니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갈지 궁금하다. 나는 조분조분 이야기하는 채인선의 꾸밈없는 글에 상당 부분 공감되었다. 대부분이 내가 딸아이 둘을 기르며 구체적으로 경험하였던 보석같이 빛나는 자잘한 이야기들이고 현재진행형이기도 한 일들이라 무척 공감되었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딸이 어릴 적에 (의도적이지 않았다해도) 엄마에게 베푼 갖가지 일들도 그렇지만 특히 사춘기에 있는 딸의 행동이 지금의 큰딸과 비슷하다. 엄마와 다툰 후 엄마의 화장대에 사과의 쪽지를 올려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건 작은딸과 큰딸 모두 잘 하는 짓인데 나는 이 책의 엄마처럼 아이들이 준 편지와 카드를 다 모아두었다. 그림 속에는 추억의 장면들이 많다. 제일 인상 깊은 건 엄마의 화장대인데, 그 위에 있는 물건들이 손때 묻은 추억을 불러온다. 나드리 코티 분과 탐스핀, 미로 화장품. 이런 제품들은 내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의 자개 화장대 위에서 본 것들이다. 특히 사진찍기를 좋아하는 남편이 딸을 나무 옆에 세워두고 찍어대는 셔터소리처럼 그런 상큼한 장면을 그려놓은 그림과 글에서 눈이 반짝했다. 찍히고 있는 딸의 얼굴도 사랑스럽다. 딸은 그렇게 아빠를 기쁘게 하는 방법을 안다. 그런데 우리집 딸들은 하도 잦은 일이라 어떨 땐 오히려 짜증스러워하는 게 다른 점이랄까. 채인선의 눈은 어쩜 이리 소소한 일상의 포착을 잘 하였나 싶다. 성장하는 나무처럼 딸의 성장을 지켜보는 카메라의 눈. 아빠가 딸을 바라보는 눈은 그렇게 그윽하고 안타까운, 섬세한 감정이 실린 눈이다. 딸은 파인더 안에 포근히 담아내어 간직하고 싶은 최고의 모델이다.

 딸이 사랑하는 이성을 데려와 부모에게 소개하는 장면부터는 내 어머니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다. 늑대같은 녀석, 곱게 키워놓은 내딸을 덥석 데려가겠다고? 그래도 어쩌겠어. 딸이 좋다는데. 그저 서로 잘 위해주고 보살펴주었으면...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과 포옹을 하는 한복 입은 어머니의 뒷모습과 가녀린 목덜미에 보이진 않지만 눈물이 서려있다. 18년 전 나는 결혼식장에서 유독 많이 울었다. 한복을 곱게 입은 어머니도 눈가가 젖어 나를 보고 계셨던 장면이 생생하다. 그때 어머니랑 포옹을 하진 않았지만 지금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때의 감정들을 되살려볼 수 있다. 내가 지금의 남편을 처음 집에 데려가 소개하던 날의 부모님 심정도 내가 딸을 키워가면서 서서히 느껴볼 수 있다.

 그림과 글의 충분한 미덕에도 나는 이 그림책이 조금 우려되는 면이 있다. ‘딸은 좋다’라는 말을 굳이 하는 건 딸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왠지 위로의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든다. 아직도 공공연한 남아선호사상을 지레 짐작하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남편은 성역할에 있어서 다소 보수적인 사람이었는데 두딸을 기르며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은 부모 양 성씨를 쓰는 페미니스트들을 보면 전에는 반감을 가졌지만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호주제 폐지도 적극 찬성이며 딸에게 자유연애를 바란다고까지 말한다. 어떤 면에서 나보다 더한 것 같아 가끔 놀랍다. 사람은 누구나 입장의 차이,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시각의 차이가 첨예하다는 걸 느낀다.

 

 

 

 또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자리할까 우려되는 점이다. 성역할을 고정하는 것 같은 내용 때문이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내 두 딸은 서로 다른 성향을 보인다. 여성 특유의 성향인 모성성이 상대적으로 적은, 어찌 보면 철저히 이기적인 큰딸이 오히려 좋아보이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읽으려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작은딸보다 그런 것에 다소 무심하고 자기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큰딸이 굳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 그림책에서도 그런 바람이 적혀있고 자아성취를 하고 있는 장면도 들어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딸은 모두 이럴 것이라는 혹은 이래야한다는 전제로 보이는 것 같은 구절들이 많아다소 조심스럽다.

 

 그런 점에서 ‘딸은 좋은’ 이유의 하이라이트(마지막에 나옴)는 공감되면서도 어쩐지 모성의 미덕을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 시대착오적인 느낌이다. 딸, 아들의 성역할을 미리 규정짓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소 거부감을 불러올 수 있는 내용들이라 사실 내 딸에게 보여주기에는 조심스럽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형을 데리고 엄마역할 하기를 좋아하는 작은딸을 보며 모성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라고 느끼면서도, 그것이 아이에게 구속 같은 것으로 작용할까 염려되는 게 또 엄마인 나의 마음이다. 딸이 굴레에 얽매이지 않고 좀더 진취적으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의 관점에서 우리의 생각을 뒤집어 앞서가는 글과 그림을 보고 싶은 건 나 혼자만의 바람일까. 세상 모든 아버지에게도 드리는 그림책이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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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8-11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려되는 부분, 저 너무 동의해요. 아슬아슬하게 어떤 다른 편견을 주지 않을까 살짝 걱정. 언제나 그렇듯 혜경님 리뷰는 정곡을 찌르십니다.
: )

프레이야 2007-08-11 18:27   좋아요 0 | URL
네꼬님, 어린이책에서 은연중에 심어주는 편견이 많아요. 그런 부분이
때로 조심스러워요. 딸만 기르는 맘이라 지레 그러는 건지 몰라도, 그런부분이
걱정되는 건 오히려 지금 자라고 있는 남자아이들에게이지요^^
남자아이들이 간혹 성역할에 있어서 고정된 생각을 말할 때 전 깜짝 놀라며
수정해 준답니다.^^ 사랑받는 남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한다고?ㅎㅎ

보석 2007-08-11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를 키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 보입니다. 책은 읽지 않았지만 혜경님이 우려하시는 부분이 어떤 것인지도 짐작이 가고요. 어린이책을 쓰는 작가나 만드는 출판사는 다른 책보다 더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8-12 00:09   좋아요 0 | URL
보석님 말씀에 동감이에요. 어린이책이 더욱 신중하고 알차야하는
이유이지요.

뽀송이 2007-08-1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꼼꼼하신 혜경님의 부드럽지만, 강한 시선이 느껴집니다.
잘~ 읽고 추천도장도 꾸~욱 찍고 갑니다.^^
저^^ 이뿌죠.^.~

프레이야 2007-08-12 00:10   좋아요 0 | URL
아들만 둘이신 뽀송이님, 최고!!
토요일밤 아름다이 보내세요^^

소나무집 2007-08-12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려하신 그 부분 때문에 <아들은 좋다>도 나와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마 누군가 준비중이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08-13 08:45   좋아요 0 | URL
소나무집님은 둘 다 함께 사니 실감하시겠어요.^^
전 아들은 왜 좋은지를 체험하지 못하니 말이에요.ㅠㅠ

다가섬 2007-08-18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채인선의
다른 그림동화(두려움아 저리가)에서도 우려하시는 부분을 발견했던 기억이 나네요.

프레이야 2007-08-18 10:41   좋아요 0 | URL
다가섬님, 그책은 못 봤는데요.. 그렇군요.
채인선님의 시선이 좀 그런가봐요. 음..
님, 어린이책 많이 보시더군요. 리뷰들도 잘 읽었습니다..

sokdagi 2007-08-2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동화를 좀 추천받고 싶어서 올만에 왔어요^^ 역시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8-29 09:41   좋아요 0 | URL
속다기님, 더위가 한풀 꺾였어요. 지금 시원하게 빗줄기가 내립니다.
하~ 숨통이 좀 트이네요. 이 책은 위에 적은 대로 장점과 단점이 함께
있지만 단점에 대해선 딸이나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가며 읽을 필요가
있을 듯해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생각이 갇히지 않게 한다면 괜찮은
그림책이에요. 그림이 수수하니 우리 정서에 맞는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저희들 취향이지 요즘 아이들 취향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겠어요.
그래도 편안하고 좋은 그림은 아이들이 먼저 알아보기도 하더군요.^^

가넷 2007-12-27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그리신 분과 글을 지으신 분이 달라서 그런지, 글의 묘사하고는 약간 다르게 보이는 그림들이 몇 있었는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나네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 약간 불만스럽게 느껴지긴 했어요.^^;;

그런데 이 분이... 그 ... 가치사전인가 지으신 분이셨죠? 그건 정말 마음에 들었거든요.

프레이야 2007-12-27 18:02   좋아요 0 | URL
가넷님 오랜만이에요. 연말은 잘 보내고 계신지요?
채인선의 가치사전, 좋은 글이지요.
여기 그림은 참 수수하니 좋아요. ^^

비로그인 2008-07-17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채인선 작가의 <시카고에 간 김파리>가 새로 출간되었습니다.

프레이야 2008-07-17 23:12   좋아요 0 | URL
신간이군요. 관심 갖고 찾아보겠어요.^^
 
이건 꿈일 뿐이야 - 지구 환경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야기 베틀북 그림책 78
크리스 반 알스버그 글.그림, 손영미 옮김 / 베틀북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노르웨이로 여행 갔다 온 나이 드신 글벗이랑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난 후, 그분이 이쑤시개 몇 개를 건네주었다. 자작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 나라에선 이쑤시개도 자작나무로 만드는구나 싶어 웃었던 적이 있다. 그네들의 자작나무숲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게는 로망과도 같은 환상의 숲이다. 환상과는 달리 그들에게 그 나무는 환경이다. 생필품은 물론 가옥의 재료가 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사는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참 많은 것을 얻어서 살고 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게 사실이다. 이제는 받은 만큼 지켜주고, 돌려줄 것을 생각해야한다는 점에서 이 그림책은 의미 있다.

 크리스 반 알스버그를 처음 만난 그림책은 ‘빗자루의 보은’이었다. 환상적인 일러스트레이션과 기막힌 반전에, 울림도 강한 메시지가 그림책작가로서의 알스버그를 상당히 매력적으로 각인시켜주었다. 이 책 <Just A Dream>(1990)은 내가 만난 알스버그의 두 번째 그림책이다. 환경보호에 대한 메시지가 강렬한 만큼 그림이 전하는 인식의 충격요법이 대단하다. 1990년에 쓰여진 책인데 우리나라에선 작년에 초판이었다. 이 책은 환경운동연합의 추천글에서 밝혀두었듯이 ‘환경에 대한 우리들의 무관심과 지금 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특유의 기법으로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작가는 어린이들을 설득하는 도구로 꿈의 이야기를 택하였다. 꿈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야기 방식은 상상력이 풍부한 대개의 어린이들에게 적합하고, 특히 그림책의 방식으로 유용하다. 적절하고 아름다운 일러스트레이션을 통해 글보다 더 많은 것을 충격적으로 제시하며 종합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글보다 그림에 눈이 먼저 가고 어른들이 미처 보지 못한 것까지 찾아내는 심안을 갖고 있다.  특히 한 눈에 각인되는 ‘사진’과도 같은 일초의 영상이 갖는 여운은 길고 강한 것이다.

  

 이 그림책의 장점 중에 하나는 우리의 가능한 상상력을 충분히 동원하여 피부로 와닿는 깨달음을 주려한다는 점이다. 물론 시각적인 자극이 크지만 그림과 함께 절제된 글을 읽고 있으면 소름이 살짝 돋는다. 유아가 보기엔 어른의 넘치지 않는 설명이 곁들여져야 더욱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 같고, 초등 1,2학년 정도는 혼자 봐도 무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림책은 되도록이면 어른이 함께 보고 이야기 나누어주기를 권하고 싶다. '내가 꿈꾸는 미래마을'을 그려보게 한다던지, '내가 할 환경보호 실천목록' 같은 걸 간단히 써보게 하는 정도면 좋겠다. 너무 넘치면 애들은 뒤로 나자빠질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주인공 월터는 여느 아이들처럼 과학이 발달한 미래세계를 꿈꾸고 있다. 나무 한 그루보다 심부름 로봇과 어디든 날아다닐 수 있는 작은 비행기를 갖고 싶어 한다. 텔레비전에서 재미있는 걸 시작할까 봐 분리수거하는 몇 분의 시간도 참지 못한다. (그래도 엄마일을 돕는 게 대견하다) 다른 날과 같은 어느 날 밤, 월터의 꿈은 월터가 누워있는 침대를 아주 낯선 미래의 세계로 안내한다. 아이가 꿈꾸어 온, 유용한 기계들이 그득한 미래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월터는 놀라운 경험을 하고 생존의 위험을 느낀다. 쓰레기산에 묻힌 침대, 이쑤시개 회사에서 자르는 나무들, 목이 따끔거리고 눈이 가려울 때 잘 듣는 약을 만드는 공장의 매연으로 콜록거리는 월터, 경적 소리 요란하고 정신없이 바쁜 사람들로 정체된 도시거리, 누런 매연에 휩싸인 그랜드 캐니언 그리고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있는 호텔. 은빛 에베레스트산 정상에까지 호텔을 지어놓은 인간들의 행태가 끔찍하다.


 개발로 몸살을 앓는 환경에 경악한 월터는 이어서 더욱 끔찍한 광경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생명 가진 것들의 종말에 대한 전주곡 같은 것이다. 치어들을 마구 잡아들이는 어부들로 인해 물고기 개체수가 절대적으로 감소해 있고, 계절이동을 하는 기러기떼는 먹이를 구하러 내려올 연못 하나 찾지 못하고 있다. “이건 그냥 꿈이야.” 월터는 이렇게 소리치고, 월터의 침대는 자기 방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착찹한 기분에 사로잡힌 월터는 이제부터 고민이다. ‘미래는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창밖은 새벽빛에 물들어 나무와 잔디밭의 형상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데 월터의 꿈속 미래는 머릿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좀 걸리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꿈 한 번 꾸었다고 우리의 행동이 곧바로 수정된다고 여기는 건 억지스럽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림책이 단순한 구조로 간결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미덕에 초점을 둔다면 여기서 월터의 행동이 조금 나아지는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스버그가 창조한 월터는 잠옷바람으로 밖으로 나가 '어떤 행동'을 한다. 우리의 아이들도 이렇게 할까?  희망사항이지만 그렇게라도 바람직한 행동수정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월터의 꿈속에서 월터는 시종 침대에 누워있거나 반쯤 상체를 일으켜 턱을 괴고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월터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고 어떤 경악의 표정도 짓지 않고 있다. 이것이 얼핏 납득되지 않을 수 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작가가 어릴 적 꿈의 세계를 잘 기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꿈 속에서 우리는 방관자일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지켜보기도 할 정도로 상황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 자세를 취하곤 한다. 그런점에서 월터의 꿈속 행동은 오히려 과장되지 않았고, 미래의 극한 환경을 어린이들로 하여금 차분히 보게하는 기회로 역할한다.

 며칠 후, 월터는 생일에 갖가지 장난감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아이지만, 여러분은 그아이가 무엇을 직접 고르고 뿌듯해 할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날 밤 꿈에 월터의 침대는 두 그루의 튼실한 나무 사이에 놓여있었다. 잠시!  여기서 월터는 자기가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착각한다.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미래의 모습은 환경을 살리는 차원에서 과거의 모습이면 좋겠다. 며칠 전 꾼 꿈의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미래, 기계보다 초록 나무가 편안하게 자라고 있는 미래. 아이들에게 필요한 미래도시는 차가운 사이보그의 세계가 아니라, 나무숲 우거져 푸른 숨이 박동하는 세계인 것이다. 증손자가 수동식 기계로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 있는 너른 잔디를 깎고 있는 미래. 로봇이나 작은 비행기가 아닌 나무그늘 아래서 월터는 스르르 잠이 든다. 마치 오래 전의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차라리 이게 꿈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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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08-0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초등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환경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아주 유익하게 볼 수 있는 책이겠네요? ㅋㅋ 감사해요. 이런 책 알고 싶었는데.. 근데 리뷰도 너무 멋진데요? ^-^ 동화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가 제일 힘들던데..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드래요.

프레이야 2007-08-06 20:43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님도 논술샘이신가 봐요^^
알스버그의 환상적인 그림이 참 좋아요. 메시지도 좋지만요.
색감이 어쩜 그리 아름다운지.. 고맙습니다.^^

뽀송이 2007-08-06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림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느끼더라구요.^^
과학이 발달할 수록 파괴되어가는 자연을 잘 보여주는 그림책인 것 같군요.
잘 읽고 갑니다. 물론, 추천도 꾸~욱!!!

프레이야 2007-08-06 20:45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이 그림책을 보고 문득 생각이 들더군요. 아이들이 그리는 미래도시
그림은 대개 로봇이 등장하고 우주과학과 관련된 기계가 등장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런 미래, 초록미래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추천, 고맙슴다^^

해적오리 2007-08-06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본 카모메 식당에서 그런 구절이 나와요.
핀란드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여유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숲"이라 답하지요.
숲이 있어서 그렇다구요...
정말 공감이 가는 대답이었어요. 자연의 힘을 느낄 때마다 자연을 잘 보호해야 사람이 살겠단 생각이 절로 들어요.

프레이야 2007-08-06 23:23   좋아요 0 | URL
해적님, 그 구절이 참 옳다는 생각이 들어요.
침엽수림은 또다른 느낌일테지만 숲이란 숲은 그렇게 넓게 품어주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안길 수 있는 자연이 사람을 여유롭게도 만드는 것
인가 봐요. 숲! 나무 한 그루 두 그루에서 시작하는 것.

네꼬 2007-08-0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른 숨이 박동하는 세계라. 와- 멋진 표현이에요. 추천추천.
저는 알스버그 그림이 좋긴 한데 사실은 조금 무서워요. 주만지 같은 거 말이에요. -_-;;

프레이야 2007-08-07 21:08   좋아요 0 | URL
네꼬님도 알스버그 좋아하군요.^^ 주만지는 안 봤지만 빗자루의 보은도
그림이 좀 섬뜩한 장면이 있었어요. 마녀그림..
환상적인 색감이란!! 추천^^ 고마워요..
 
파리의 휴가 알맹이 그림책 6
구스티 글 그림,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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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여름 휴가는 그다지 즐거운 마음으로 근사하게 보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아이들을 위해 어디론가 데려가주긴 해야 하는데,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걷기 싫어하고 고생스러운 환경도 싫어하는 요즘 아이들, 어디를 데려가든 그곳에 수영장만 있으면 좋다는 식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전국의 땅이 바캉스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른다. 숙박비는 껑충 뛸 것이고 산과 바다가 인파로 물결칠 것이다. 그런 중에도 사람이 덜 붐비고 청정한 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나만의 휴가를 보내고 싶은 게 또 바람이기도 하다. 과연 어디가 있을까?  과연 파리는 어디로 휴가를 갔을까?

 내가 최윤정님을 신뢰하는 근거는 뭐라 꼭 집어 말할 순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이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나라의 그림책과 동화를 발굴해 통통 튀는 언어로 번역하여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이가 쓴 '슬픈 거인'을 좋아한다. ‘바람의아이들’에서 나온 알맹이그림책 시리즈 6권 <<파리의 휴가>>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구스티(Gusti)가 쓰고 그린 유쾌한 그림책이다. 4,5세 전후의 아이들이 보면 좋을 듯한 이 그림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혐오동물, 파리? 그리고 사람만이 갖는, 설레는 휴가? 어쩐지 얼른 함께 연상되지 않는 두 낱말이 간결한 이야기로 엮이면서 발랄한 웃음을 자아낸다. 능청스럽게 끌고 가는 이야기 들려주기 방식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과 그림도 한몫 제대로 한다.

 파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가 시작되자 수영하러 가기로 결심하고 방을 나선다. 준비성도 뛰어나 바캉스용품을 골고루 챙겨간다. 썬크림까지 챙겨간다니 준비성 없는 나보다 낫다. 조심성도 있어서 물에 첨벙 뛰어들기부터 하지 않고 한 발씩 담구어 물온도를 먼저 본다. 드디어 다이빙! 다이빙 포즈가 멋지다. 배영을 하며 룰루랄라 노래도 잘 부른다. 여기서도 수영을 못하는 나보다 낫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파리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만 이어지면 재미가 없지. 이제 파리에게 뭔가 시련이 덮친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축구장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게 떨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가 인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파리가 여기서 당할 것이냐? 죽을 힘을 다해 폭풍우 속에서 탈출에 성공한 파리의 귀에 들리는 한 마디란!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불쌍한 파리 같으니라구. 이일로 파리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아이들과는 좀 다른 영악한(아니, 영리한) 파리다. 달아나면서, 가지고 간 수건까지 챙겨왔으니 똑똑하다할까, 야무지다할까.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리가 사는 집의 아이가 아니라, 아이가 사는 집의 파리 한 마리다. 물론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가 파리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역할을 맡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파리는 현대판 영웅으로 보고 싶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작은 영웅심 같은 게 새까만 파리에게서 보인다. 하지만 영웅에 대한 생각을 전복시키는 점이 매력이다. 이 작은 영웅은 시련에 맞서기보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긴박한 상황을 재치 있게 피할 줄 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그것을 향유하려는 소시민적 영웅이다. 이야기의 구조도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절정을 이루는 영웅이야기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누가 도와준다기보다 스스로의 용기와 지혜로 탈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덩치로 보면 파리보다 엄청나게 큰 아이의 발이 마지막에 보이는데 파리는 이 아이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다시는 자신의 행복이 위험에 처할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현명하다. 사방에 목숨을 노리는 것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파리는 목숨을 이어왔고 이제 느긋하게 휴가 한 번 즐기자는데 그것마저 어려움에 부딪히니 파리 신세가 참 말이 아니다.

 파리를 사랑스럽게 그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이 독특하다. 콜라쥬 기법을 동원하여 천이나 단추, 벽지 같은 걸 이용했고 검고 굵은 윤곽선이 선명한 인상을 준다. 간결한 그림과 어울리게 짧고 쉬운 말로 어린 아이 눈높이에 맞춘 번역어휘도 마음에 든다.

행복!!  그것은 사람이든 파리든 추구하는 것이지만 향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나, 오늘 참 좋은 날이었다, 로 맺는 일기를 쓸 수 있다면 그런대로 행복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단순하게, 욕심없이.. 그런 하루의 연속을 기대한다면 너무 안이한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게 또 사람이고 파리인 것을.

그나저나 휴가계획은 세우셨나요?  가까운 곳에 물놀이나 가지요.

하늘에서 거대한 게 풍덩 떨어질 일은 없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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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7-2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빠리가 아니라 파리였군요. ㅎㅎㅎ
저는 아직 아무 생각이 없는데요. ^^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데는 가기 싫고 해서... 인간 신세도 참 말이 아니네요...

프레이야 2007-07-20 08:44   좋아요 0 | URL
파리, 가보고 싶은 곳 중의 하나지요. ㅎㅎ
저도 아직 무계획이랍니다, 글샘님.^^

바람돌이 2007-07-20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빠리인줄 알았다는... 파리가 휴가를 가다니 일단 우리집 아이들이 열광할 기본 조건을 갖추었군요. 아이들은 뭔가 상식과 다르다고 생각되면 무지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ㅎㅎ

프레이야 2007-07-20 08: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해아가 특히 좋아할 것 같은데요^^

소나무집 2007-07-20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저는 휴가 계획을 못 세워요. 남편은 8월 말에나 휴가 받을 것 같고, 친정 엄마 일도 있고 해서요.

프레이야 2007-07-20 14:14   좋아요 0 | URL
전 7월 말인데.. 엄마가 항암주사를 투여하기 시작하는 날과 겹쳐서
어떻게 될지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이들을 위해서는 어디라도 데려가줘야
하는데 말이죠. 8월말이 휴가면 그런대로 조용한 곳에서 보내실 수 있겠네요.
참, 어머닌 어떠신지요?
그리고, 이 그림책은 무지 재미나요. 기발한 착상과 그림과 글 ..

향기로운 2007-07-20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계획이지만, 여름휴가를 제대로 즐길수나 있을런지.. 그냥저냥 또 평이한 일상처럼 무심코 지나갈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프레이야 2007-07-20 17:53   좋아요 0 | URL
어딜 꼭 가야 휴간가요? 뭐..
조용하고 평범하게 지내는 것도 좋지요 ^^

가넷 2007-12-2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저도 프랑스의 파리로 생각했었어요.

보니까 참 기발하더라구요. 아이들이 좋아 할 것 같았어요.^^

프레이야 2007-12-27 18:06   좋아요 0 | URL
네, 파리요^^ 재미있는 그림책에요..
프랑스 파리도 가보고 싶지만요.

sokdagi 2010-05-27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가에게 좋은 책선물이 될 것 같아요. 님 덕분에 좋은 책 소개 받고 갑니다. ^^

프레이야 2010-05-27 10:2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그림이 되게 웃겨요. 파리 눈동자가 되굴되굴^^
바람의아이들 '알맹이그림책' 시리즈가 모두 마음에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