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나 좋았다. 귓볼을 살랑이는 바람도 어찌 부드럽던지. 희원이 희령이, 그리고 친정엄마랑 나는 오늘 낮 3시 이 연극을 보러 갔다. 여기저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들, 특히 엄마들이 많이 보였다. 원작 그림책을 한 팔에 끼고 있는 아이들도 많았다. 화단 앞 벤치에 앉아 간식을 좀 먹고 들어가 휴대전화를 끄면서 우리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간 게 다행이었다. 역시 그림책의 아름다움에는 못 미쳤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의 글에 프리드리히 헤헬만의 그림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베틀북의 그림책에 오늘의 연극은 비할 수 없었다. 특히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부분과 천국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의 몽환적인 분위기가 연극에서는 그리 잘 나타나지 못했다.
만 4세 이상이면 볼 수 있도록 가족극이란 이름으로 공연한 연극이라 원작에서 나오는 그림자들의 추상적인 이름을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이름으로 바꾸어놓았다. 예를 들면 무서운 어둠, 외로움, 밤앓이, 힘없음, 덧없음 같은 이름들은 깽깽이(고장난 바이얼린), 키다리아저씨(부러진 전봇대), 구멍난 물뿌리개, 콩콩이, 가수, 이런 것들로 나온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좀더 밝고 경쾌하게 흘러간다. 아이들은 배우들의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연기에 깔깔대며 박수치고 좋아했다.
그림자 다섯과 오필리아가 등장인물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다. 특히 오필리아는 자상하고 넉넉한 가슴의 소유자로 유머러스하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에 아낌없이 자신을 내 주고 상대를 받아들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가족의 품을 그리워하는 떠돌이 그림자들을 모두 받아주고, 싸우려드는 그들에게 서로 아껴주며 사는 법을 따뜻한 어조로 가르쳐준다. 그 어조는 시적이며 연극적이다. 오필리아가 평생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연극의 대사들, 목소리가 작아 배우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배우들에게 대사를 나지막히 불러주는 역할을 하며 만족해한다. 극장 곁에 있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해도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극장은 우리의 인생이다. 인생은 연극이라는 진부한 비유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셀 수도 없이 많은 종류의 배우들을 이런 식으로 만나는 일에 오필리아는 만족해한다. 그녀는 극장을 사랑하는 만큼 삶을 사랑한다. 세월이 변하고 사람들의 삶도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극장은 문을 닫아야하고 오필리아의 삶의 막도 내려야 할 시간이 다 되어온다.
어느 날 죽음의 그림자가 여태껏 기다렸었다며 나타났을 때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온 마지막 그림자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지금까지 불쌍하고 버림 받은 그림자들은 받아들여준 것처럼 '죽음'마저 선선히 안고 천국의 문을 들어선다. 이미 오필리아의 일부가 된 그림자들까지 천국에 함께 입성하고 이들이 펼치는 '오필리아의 빛 그림자 극장'이 열린다. 이것도 원작은 '오필리아의 빛 극장'이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극이 끝나고 배우들과 무대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희령이가 고집을 부려 극단의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홈페이지 자료실에 올려놓을테니 다운 받아가시란다. 그거라도 고맙다.
집에 돌아와 그림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꿈처럼 아른하고 눈부신 그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 삶이 그런 것이려니. 꿈처럼 봄날처럼, 손 안에 들어왔다싶은 순간 어느새 빠져나가고 없는 찰나적인 것. 덧없음의 분위기가 이토록 사무치게 아름답게 그려진 이 그림책이 난 더 좋다. 희령인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눈치고, 희원인 도움을 청하는 그림자들을 친절하게 받아들여준 오필리아 할머니가 좋단다. 친정엄마는 연령이 연령이니만큼 더 와닿지 않았을까. 우리 곁에 항상 가까이 있는 '죽음'에 대하여 스치듯 한마디 하시곤 웃으셨다. 오늘밤 괜한 우울함에 빠지진 말았으면 좋겠다. 워낙 감상적인 분이라...
이 그림책의 리뷰를 전에 썼던 기억이 난다. 거기서도 친정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었는데, 난 이 그림책이나 연극을 보며 왜 자꾸 당신 생각이 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