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이나 친구 사이에서 싸우는 것은 쉽지만 사과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나 방법만 잘 알면 ‘성공적’으로 사과할 수 있다. 호주 공영방송 채널7은 최근 효과적으로 사과하는 요령 10가지를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방송에서는 “사과는 인간관계에서 매우 중요하다”며 “사과는 자신의 책임과 잘못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솔직한 인간관계를 맺는데 도움이 된다”고 전했다. 이 방송에서 소개한 효과적으로 사과하는 법을 소개한다. (담아왔어요^^)
 
1. 사과는 반드시 얼굴을 마주 보면서 해라.
사과는 직접 만나서 하는 것이 좋다. 싸운 뒤 서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전화나 메신저를 통해 사과를 하게 되면 자신의 진심을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 오히려 싸움을 더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싸운 뒤 만나는 것이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직접 마주본 상태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 상대방 기분에 철저히 맞춰 줘라.
사과의 궁극적인 목적은 상대방의 상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다. 사과를 할 때는 먼저 상대방의 기분이 지금도 화가 나 있는지 살펴야 한다. 아직 화가 난 상태라면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들은 삼가고 상대방이 좋아할 만한 말들을 적절히 골라 사용해야 한다.
 
3. 사과보다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이 먼저다.
무작정 사과부터 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상대방이 왜 화가 났는지 어떤 점이 불만인지 말하게 하고 이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상대방은 화를 어느 정도 풀 수 있고 자신도 어떤 점을 사과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4. 사과는 타이밍이다.
사과를 하는데도 적절한 타이밍은 아주 중요하다. 잘못을 저지른 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사과를 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서로 기분이 상하고 난 뒤 바로 그 자리에서 사과하는 것은 오히려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싸우고 난 뒤 서로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을 때쯤 사과를 하는 것이 좋다.
 
5.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하는 사과만큼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다. 연인사이라면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여성은 자신이 어떤 점 때문에 화가 났는지 상대방이 알고 있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사과의 의미로 꽃을 보내는 것은 좋은 방법이지만 만약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사과부터 하자는 마음이었다면 여성은 이 꽃을 쓰레기통에 버릴 수 도 있다.
 
6. 만나기 힘들다면 사과는 편지로.
만나서 사과를 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만나기 힘든 상황이라면 편지로 사과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진심이 담긴 편지는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인다. 사과를 할 때 가장 적절하지 않은 방법은 문자메시지다. 성의가 없어 보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다.
 
7. 사과는 여러 번 하면 좋다? NO!
반복된 사과는 진실성이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불러 올 수 있다. 상대방이 자신을 진실성 없는 사과를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앞으로도 자신이 한 사과를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8. 부모도 자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는 서로 사과를 잘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의 솔직한 대화는 많을수록 좋다. 특히 부모들은 사소한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진심을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부모의 솔직한 모습은 자녀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9.자녀도 부모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은 대부분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지 못하고 말로만 사과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녀들도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먼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부모에게 사과하면 부모는 자녀를 더욱 신뢰하게 된다.
 
10.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계속 ‘네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 싸우는 것은 서로의 인간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기에 앞서 자신의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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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6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사과를 apple로 오해한점 사과드립니다.
잘 새기고 사용하도록 노력할게요

水巖 2006-11-2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짱꿀라 2006-11-27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읽고 갑니다. 담아왔어도 좋은 글은 나누면 더 좋은 글이 된답니다. 고맙습니다.
글 잘읽고 갑니다. 좋은 한주 시작하시기를........
 

논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용(南宮适)이라는 자는 언행을 삼갈 줄 아는 인격자로서 공자에게 늘 인정을 받았다.

白圭之? 尙可磨也 斯言之? 不可磨也 (백규지점 상가마야 사언지점 불가마야 )

흰옥에 있는 티는 갈아서 없앨 수 있으나 말속에 있는 티는 갈아서도 없앨 수 없다

매일 읊으면서 자신의 말을 절제하고 수양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남용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지 공자는 그를 자기의 조카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어떤가..좋은 말을 쓰면서 스스로의 품위를 높여나가고

게다가 존경하는 스승 공자의 조카사위까지 되었으니.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입조심을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쳐왔으며

선현(先賢)들도 입조심, 말조심에 관하여 각별하게 언급하였다.

 

 知而不言 所以之天(지이불언 소이지천)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경지에 들어가는 최상의 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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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6-11-22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게 새겨야 것 같습니다. 원래 고전에는 훌륭하고 지혜를 가르쳐주는 말이 많이 나오거든요. 고전을 보는 처번째 이유거든요. 좋은 밤 되세요.

마노아 2006-11-22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잊지 말아야 할 내용이에요.

부엉이 2006-11-22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메트로 신문 오늘의 운세를 보니 '경거망동하지 말것'이라고 써 있더군요. ㅋㅋ 말조심.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전호인 2006-11-22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게 말입니다. 입과 말에는 많은 속담이라든가 격언들이 있는 이유도 그래서 일 것 같습니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묻어두지만 어리석은 사람의 말은 입을 통해 전달된다"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산에서 길을 잃으면 골짜기를 헤매지 말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라는 말이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
무슨 뜻인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방향을 잃었을 때 북극성을 보듯이,
기본으로 돌아가면 길이 보인다.


- 전병욱의《영적강자의 조건》중에서 -  / 오늘아침 고도원의 아침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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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11-17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생활이 그래요,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새로운 곳이 보입니다.

짱꿀라 2006-11-17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이 다 기본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진리인 것 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도움이 많이 되네요. 하루도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프레이야 2006-11-17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마천님, 회사 옥상은 아니겠죠. ^^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게 달리 보이죠. 전체를 조망할 수 있고 단절된 느낌도 사라지구요. 내려다보면 어찔하지만 말이에요^^

산타님, 기본으로, 초심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그것도 반복하여 하다보면 습관처럼 내것이 되려나 싶으네요. 제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들뜨는 일이 많을 때면 잠시 다이얼을 돌려놓고 싶어져요.
 
 전출처 : 짱꿀라 > 행복의 명언들.....

 [행복의 명언들]

- 명사들이 말한 행복이란?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 임마누엘 칸트


기쁘게 일하고, 해 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 괴테


궁핍은 영혼과 정신을 낳고 불행은 위대한 인물을 낳는다. - 빅토르 위고


근본적으로 행복과 불행은 그 크기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작은 것도 커지고,

큰 것도 작아질 수 있는 것이다.

가장 현명한 사람은 큰 불행도 작게 처리해 버린다.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불행을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스스로 큰 고민 속에 빠진다.

 - 라로슈프코


행복은 지배하여야 하고, 불행은 극복해야 한다. - 독일속담


사람은 아무도 다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만들어 줄 수 없다.

- 그레이엄 그린


사람이란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 결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 라로시코프


행복의 계단은 미끄러지기 쉽다 - 로마속담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불행은 없다.

가만히 견디고 참든지 용기를 내쫓아 버리든지

이 둘 중의 한 가지 방법을 택해야 한다.

- 로망 롤랑


괴로울 때가 있고 즐거울 때가 있다.

고락이 서로 접하고 교대하는 가운데 심신이 연마되어 간다.

아직 깊은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깊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은 고락이 서로 접해 흐르는 물속에서 떠내려가는 한 조각의 나무는 아니다.

고락이 교대하여 흘러가는 동안에 숭고한 정신을 얻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다. - 채근담


최상의 행복은 1년을 마무리할 때,

연초 때의 자신보다 어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이다.

- 톨스토이


인간의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해서 자기를 하대하지 않으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 러셀


행운은 마음의 준비가 있는 사람에게만 미소를 짓는다. - 파스퇴르


행복이란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은

다른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데에서 싹트는 것이다.

- 월리엄 조지 조던


행복이란 미래의 여건이 아니라

현재의 관점임을 터득하고 나면 이 문제를 터득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휴. 프라이드


어떤 사람은 자기는 늘 불행하다고 자탄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행복함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세상을 헤매지만

정작 행복은 누구의 손에든지 잡힐 만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에 만족을 얻지 못하면 행복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 호라티우스


행복해지는 비결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만

노력할 것이 아니라,

노력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는데 있다.

- 앙드레지드


행복을 사치한 생활 속에서 구하는 것은

마치 태양을 그림에 그려 놓고

빛이 비치기를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 나풀레옹


미래의 어느 때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해서

지금 불행해하는 것은 진실로 어리석은 일이다.

- 세네카


행복의 비밀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있다.

- 제임스 M. 배리 경


매일 아침, 매일 밤 태어나 비참하게 되는 자 있고,

매일 아침, 매일 밤 태어나 즐거워지는 이가 있다. - W. 블레이크


불행에 대한 두려움은 불행 그 자체보다 더 나쁘다. - N. S. 코우리


타인과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도 평화롭지 못하다.

- 월리안 해즐리트


행복을 즐겨야 할 시간은 지금이다.

행복을 즐겨야 할 장소는 여기다.

- 로버트 인젠솔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마음의 평온함을 뜻한다.

- 시세로


오래가는 행복은 정직한 것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라하텐베르히


행복은 무엇보다 건강 속에 있다.

-G. W. 커티스


불행은 진정한 친구가 아닌 자를 가려준다.

- 아리스토텔레스


마음이 어진 사람은 조그마한 집에 살아도 행복하다.

- 홍지성


우리와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것은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다.

- 칼 스피들러


늘 유쾌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에 신경을 쓸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로 미덕을 실행한다.

- 빌헬름 폰 홈볼트


너무 불행해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너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다.

- 아서 쇼펜하우어


그렇다면 자신이 느끼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한번 채워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행복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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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andcat >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죽음은 삶이 아닌 것, 곧 삶의 부재 상태이며 미래완료형으로 인간이 일용할 필수 관용구이다. 삶의 의지로 가장 충만할 때 종종 죽음의 수사가 동원되는데 가령 ‘죽고 못 살고’, ‘죽기보다 싫거나 죽자 사자’ 하고, ‘죽기 살기로 기를 쓰는’ 식이다. 먹을거리들의 죽음은 날마다 사람의 삶을 살찌운다. 소의 죽음, 배추의 죽음으로 인간은 먹고살지만 자질구레한 일상으로 날마다 죽어나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날아다니는 새가 하늘을 사유하지 않듯, 자신의 죽음은 사유하지 않는 게 사람이지만, 죽음이 과연 삶과 따로 생각할 수 있는 주제이겠는가.

죽음은 영원한 익명의 상태이며 죽음의 형식은 권총자살한 소설가 로맹가리의 유언처럼 “나를 마침내 완전히 표현”하는 방식이다. 죽음에도 생명이 있어 시대에 따라 대접이 달랐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우리의 자세는 대부분 비슷하다. 바로 죽음을 맞는 자세는 감연하기 짝이 없고, 나의 죽음, 내 가족, 지인의 죽음만은 엄마의 품처럼 아늑하며 무덤처럼 고요하기를.(달리 ‘젖무덤’이란 말이 생겼겠는가!)

건강한 사회, 건강한 죽음
일본 만화 『시마 상무』(히로카네 겐시, 2006)를 보면 노인복지로봇이 나온다. 최첨단 기기가 장착된 옷을 노인이 입으면 책 한 권 드는 힘으로 쌀 한 가마니를 번쩍 들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로봇을 만드는 엔지니어가 복지와 의료, 기계의 힘으로 수명을 억지로 연장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삶, 건강한 사회겠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과학과 의료기술 등 물리적인 부분이 덜 발달한 탓도 있었지만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긍정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죽어갔다. 오늘날은 되려 수명을 연장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시대이며 한편으로는 초고령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나이든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수명이 정해져 있듯 한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의 임계치라는 것이 있고, 그 인구가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면 노인복지로봇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연장시키고 싶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만 안락사 문제에서 짐작되듯 그것의 한계와 기준, 가치가 무엇인지 논란이 분분하다. 이렇듯 한 사회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시사하며 그것은 또한 한 사회가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미리 엿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현대인의 죽음은 과거에 없었던 각종 질병과 복잡한 사회구조로 인해 흡사 백수광부처럼 달려드는 경우가 많다. 때로 테러나 건물 붕괴로 어이없이 희생당하기도 한다. 교통사고 사망률과 자살률이 높은 우리나라의 죽음은 그러나 어느 때보다도 삶과 멀어진 느낌이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건물을 지어대고, 지구의 평균온도를 올리고 있는 삶의 양태 때문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란 죽은 자임을 연습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대로라면 그만큼 철학이 부재한 시대가 요즘이 아닌가 싶다. 죽음에 대한 태도는 어떻게 변해왔을까?

경건한 죽음
죽음에 관한 방대한 저서 『죽음 앞의 인간』(필립 아리에스, 2004)을 보면 19세기 초에는 임종환자의 최후 성찬식 때 가족은 물론 안면이 없는 사람들도 집안이나 환자의 침실을 방문하여 만인이 참석한 가운데 죽어갔다고 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죽음이 오히려 아름다운 유혹이었고, 바다나 광야처럼 방대한 자연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 일반적으로 죽음은 더 이상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취급되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한 광적인 탐구의 시대였던 르네상스와 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찼던 중세의 시공을 지나 19세기 말 도래한 산업혁명은 죽음에 대한 인식 또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오늘날의 죽음은 죽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듯이 회피하거나 배척하며 외양을 왜곡하고 조작할 정도로 두려운 것으로 바뀌었다. 과거 죽음의 현장은 차가운 의료기기와 수술등, 심폐소생술이 주는 공포감 가득한 병상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속한 혈족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죽어가는 침상 주위로 결집했고, 죽음이 공동체를 통과함으로써 빚어진 불안감을 다 함께 애도하면서 표출했다. 죽음으로 인해 허약해진 공동체가 감지된 위험을 만천하에 선언하는 의식이자 마지막 절차가 바로 장례였고, 그것의 형태는 축제였다.

근사체험을 통한 죽음 이후의 세계를 연구하고, 지난해에 〈한국죽음학회〉를 창립하여 국내에 ‘죽음학’의 존재를 알린 최준식 교수는 “지금 한국사회를 휩쓰는 웰빙 못지않게 ‘웰다잉(Well-dying)’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며 “주위 사람들과 품위 있게 이별하고, 자신의 생을 차분히 돌아보는 ‘죽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최 교수는 또한 영면실에 비해 중요도가 상당히 떨어지는 영안실에 대한 엄청난 관심에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영안실은 갈수록 화려하고 고급화되고 정말 필요한 영면실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똥으로 굴러도 이승이 낫다’, ‘죽은 정승이 산 개보다 못하다’는 속담이 죽음에 대한 한국인의 부정적 인식을 반영하는 단적인 사례들이라며 죽음에 대한 강렬한 거부감은 엄청난 의료비와 장례비로 귀결되고, 그 부담은 살아남은 자들이 떠안는 부조리함에 대해 꼬집는다. 오랜 역사 동안 ‘영적(spiritual) 문화’를 간직해온 한국이 산업화란 암초를 만나 물질문명에 더욱 매달리게 됐으며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현세만이 가치 있다는 편향된 생각을 갖고 세속적 가치에 천착하고 있다는 그의 지적은 놀랍게도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 지닌 문제점과 상통한다. 마치 나(우리 세대) 이후에는 세상이 끝날 것처럼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살리는 대안을 외면하는 삶의 태도 말이다.

최첨단 시대에 미개한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그의 책 『죽음, 또 하나의 세계』(최준식, 2006)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살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조금 과장해서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의 부정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둘로 분열되어 있는데, 자신이 이 세상에서 고유하다는 것을 앎으로써 장엄성을 간직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썩어 문드러져서 땅 속으로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이원적인 딜레마를 숙지하는 게 또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는 전쟁도 결국은 죽음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동물 가운데 인간은 유독 남을 엄청난 규모로 처참하게 살육하는데 프로이트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이 영생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다. 오토 랑크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사람을 죽이고 희생 제물로 바침으로써 경감된다. 즉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은 죽음이라는 벌, 혹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벌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전쟁도 자신의 불멸을 확인하기 위해 일으키는 것이며 전장에서 적을 죽이면서 너는 죽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나는 ‘불멸의 존재다.’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을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은 영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절 때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셨다(부활하셨다)!”고 외치는 것이고, 그런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꾀하는 것이다. 인간 이외의 생명들에 대한 무차별 살육과 불로장생을 향한 현대인의 욕망, 종교의 부흥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 설명될 수 있을까?

죽음과의 화해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멕시코에는 ‘죽은 자의 날’이라는 기념일이 있다. 1년에 한 번,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친인척을 방문하기 위해 돌아오는 날이다. 그 날이 되면 설탕으로 해골을 만들고(설탕처럼 달콤한 죽음?), 나무나 종이로 만든 해골 가면을 쓴 후 죽은 이의 사진이나 갖가지 꽃과 음식으로 재단을 만들고 밤이 새도록 먹고 마신다. 시인인 옥타비오 파스는 “멕시코는 죽음과 친하고, 죽음을 농담 삼고, 죽음을 애무하고, 죽음과 함께 자고, 죽음을 축하한다.”고 했다. 우리는 주변인,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죽음을 환기하곤 실존의 기저에 깔려 있는 본질적인 허무와 직면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죽음을 둘러싼 창백한 아우라와 허무를 외면함과 동시에 조금 덜 허무하기 위해 무덤 같은 일상에 기꺼이 묻히고 만다.

존중되지 못하는 오늘날의 야만적 죽음 또한 개인에게 주어진 수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나무와 같다. 처연하게 선 채로 죽음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죽음의 방식을 선택하기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연히-또는 필연적으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되었듯이, 죽음은 어느날 잘못 배달된 소포처럼 무람없는 얼굴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저 오늘의 죽음을 충실히 살자.

죽어라, 그대가 죽기 전에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의 경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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