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의 법칙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보니
주변에서 말을 잘하는 비결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제일 먼저 강조하는 것이 있다.
바로 '1:2:3'의 법칙이다.


하나를 이야기했으면 둘을 듣고 셋을 맞장구치라는
뜻이다. 맞장구는 내가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음을 드러내고, 둘 사이의 대화에 깊은 유대와
공감의 분위기가 형성되도록 도와준다.


'하이파이브'를 기억하자.
서로의 손바닥이 "짝!"하고 경쾌하게 맞부딪히는 것,
그것이 바로 대화의 맞장구이다.


- 이숙영의《맛있는 대화법》중에서 -

 

오늘 아침 고도원의 편지. 톡톡 튀는 여자 이숙영의 책에 나오는 글귀인가 보다.

맞장구의 미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맞장구를 쳐서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공감한다는 뜻을 전달하라는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오래 전 보았는데, 쾌활하게 이를 다 드러내고 눈웃음을 치며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 호감 가는 인상은 아니었지만 이 글귀를 보고 나니 약간은 호들갑스럽다고 느꼈던 그녀의 어조와 태도가 오히려 부럽다. 난 이걸 잘 못하니 말이다.

유난히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도 있다. 그녀를 보면 생기가 돌고 대화의 분위기 또한 자연스러워지면서 나같은 사람이 함께 있기에 더없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면서 나도 말을 술술 하게 되고 어느새 그녀의 분위기로 빨려들기 때문이니, 신기하지 뭔가. 맞장구를 잘 치려면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을 뿐만 아니라 상대의 진심을 잘 헤아려야한다. 말이 다 하지 못하는 표정이나 손짓까지, 또한 그들의 머뭇거림과 말줄임까지 더듬어보아야할 것 같다. 쉽게 내뱉는 말로 뜻하지 않은 상처를 주는 일도 없어야한다. 맞장구를 잘 치려면 상대의 박자를 잘 따르고 그 사이사이에 내 박자를 적재적소로 넣어야한다. 얼쑤, 추임새도 넣어가며... 오늘 만날 문우들에게도 대화의 맞장구를 잘 쳐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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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18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1-18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향기로운 2007-01-18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의 글을 보면 어딘가 막혀있던 데가 뚫리는 것 같이 시원해져요. 신기해요.. 말보다 글이.. 글 보다 눈빛이 더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마도 배혜경님은 두루두루 갖추셨을것 같아요^^

프레이야 2007-01-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s님/ 기다려져요^^
속삭이신 ㅂ님/그새 5개월이 되었군요. 기대됩니다. 고맙구요^^
향기로운님/ 전 절대로 갖추지 못했어요. 그래서 늘 숙제에요^^

프레이야 2007-01-18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ㅍ님/ 그러고보니 그래요. 1:3:2 ^^
어느분은 맞장구를 너무 자주 넣어주셔서 말이 자꾸 끊기는 경우도 있어요.ㅎㅎ
관심어린 시선만으로도 다독거림을 받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정말 있지요^^

비로그인 2007-01-18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는 1:1이 되려고 노력해요. 배혜경님과는 대화가 아주 잘 될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저 사람은 말을 정말 못하는 거 같아"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거꾸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과연 그사람 말을 집중해서 잘 듣고 있었는가
누구든지 자기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30분 이상만 그 사람 말에
"아 그렇지, 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다음은?"
이런 말을 30분만 해주면 누구든지 말을 잘 할 수 있게 된다. 

-김제동 어록 중에서-


춤추는인생. 2007-01-18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어요 그런사람에게는 정말 다 털어놓고 싶고 만나면 늘 편안해 지는것 같아요..^^
님 오늘 성공하셨나요?^^ 전 내일 꼭 그래볼래요....!!

프레이야 2007-01-1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라님/ 전 일대일에 약해요. 마음은 그렇지않은데 상대를 재미나게 못 해주니 괜스레 어색한 분위기 만들기 십상이죠 ㅎㅎ 그래서 맞장구 잘 쳐주는 사람보면 배워야지 싶어요^^ 김제동 어록,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네요.

춤추는인생님/ 오늘 그런대로 성공했어요.^^ 님, 오늘 하루 잘 보내셨지요?
전 오늘 행사 있어 나갔다가 옆지기 만나 칵테일 한 잔 하고 방금 들어왔어요.
아이들 줄 빵 사서요. 붕어빵 사오라는 희령이 주문으로 골목을 몇군데 뒤졌는데
늦은 시각이가 다 들어가셨더군요. 그래도 붕어 대신 피자빵으로다가... ^^

글샘 2007-01-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젤 못하는 거죠. 직업이 그런 거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선배님들과 있으면 또 선배님들이 좋아하기도 해요. 조용히 있으니깐.
말은 적게, 듣기는 많게, 맞장구는 많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려운...
월욜날 조용히 있어야쥐. ㅋㅋ 혜경님이 많이 말 하세요. ㅎㅎㅎ

水巖 2007-01-19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하고 당연한 소식

서재의 달인

아름다운 책방
닉네임 : 배혜경(mail), 서재 지수 : 67530

나는 한 송이 꽃, 상쾌함을 느낀다. 나는 하나의 산, 견고함을 느낀다. 나는 잔잔한 물, 사물을 그 모습 그대로 비춰본다. 나는 공간, 자유로움을 느낀다. -


프레이야 2007-01-1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저도 말 좀 많이, 잘 하면 좋겠어요. 꿔다 놓은 보릿자루로...ㅎㅎ
수암님/ 어머, 이런,,, ^^ 오늘 아침 상쾌합니다.
수암님도 건강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씩씩하니 2007-01-19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를 얘기하라는 말에 제일 많은 공감을 하고 갑니다,,
나이 들수록 누구를 만나든 말을 더 많이 했다는 생각에 만남 뒤에 약간 허탈해지곤하지요,,,
젊은 애들 앞에서는 또 왜 이리 하고픈 말이 많은지.....

프레이야 2007-01-19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님은 분위기를 밝게 하시는 분일 거에요^^
 
 전출처 : 동그라미 > - 나희덕의 산문집 '반통의 물'중에서

가시는 꽃과 나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 또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찔리면서
사람은 누구나 제 속에 자라나는 가시를 발견하게 된다.

한번 심어지고 나면 쉽게 뽑아낼 수 없는
탱자나무 같은 것이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뽑아내려고 몸부림칠수록
가시는 더 아프게 자신을 찔러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후로 내내 크고 작은 가시들이 나를 키웠다.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그를 괴롭히는 가시는 있기 마련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모나 육체적인 장애가 가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한 환경이 가시가 되기도 한다.

나약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시가 되기도 하고,
원하는 재능이 없다는 것이 가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가시 때문에 오래도록 괴로워하고
삶을 혐오하게 되기도 한다.

로트렉이라는 화가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사고로 인해 두 다리를 차례로 다쳤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보다 다리가 자유롭지 못했고
다리 한쪽이 좀 짧았다고 한다.

다리 때문에 비관한 그는 방탕한 생활 끝에
결국 창녀촌에서 불우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그런 절망 속에서 그렸던 그림들은 아직까지 남아서 전해진다.

"내 다리 한쪽이 짧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 적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가시는 바로
남들보다 약간 짧은 다리 한쪽이었던 것이다.

로트렉의 그림만이 아니라,
우리가 오래 고통받아온 것이
오히려 존재를 들어올리는 힘이 되곤 하는 것을 겪곤 한다.

그러니 가시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차피 뺄 수 없는 삶의 가시라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스려나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우리는 인생이라는 잔을
얼마나 쉽게 마셔버렸을 것인가.
인생의 소중함과 고통의 깊이를 채 알기도 전에
얼마나 웃자라버렸을 것인가.

실제로 너무 아름답거나 너무 부유하거나
너무 강하거나 너무 재능이 많은 것이
오히려 삶을 망가뜨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 그 날카로운 가시야말로
그를 참으로 겸허하게 만들어줄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뽑혀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가시야말로
우리가 더 깊이 끌어안고 살아야 할 존재인지도 모른다.


- 나희덕의 산문집 '반통의 물'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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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4 0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희망꿈 2006-12-1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같네요.

2006-12-1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나무집 2006-12-14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해 자전거를 배웠답니다. 딸아이가 자전거를 잘 타는데 같이 타고 싶더라고요. 아이와 함께 양재천을 달리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추워서 자전거를 탈 수 없어 아쉬워요.

sandcat 2006-12-14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월급 타면 꼭 사고야 말겠다는 것이 제겐 자전거였어요. 자전거란 이미지는 역시 희망과 어울리는군요.

프레이야 2006-12-14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희망꿈님/ 정말 우리의 삶이 그러한 것 같아요. 그래야 되구요^^
속삭이신 11:00 님/ 님의 기도로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힘 주셔서 고마워요.
소나무집님/ 전 자전거 타는 거 무지 좋아해요. 6학년 때 첨 배웠죠. 한번 배우면 안 잊히니까 지금도 가끔 타곤 하죠. 달릴 때의 느낌, 너무나 좋아요. 아이랑 함께 달리는 님, 보기 좋아요.

섬사이님/ 그래요 내 발로 밟고 저어나아간다는 게 그 힘인 것 같아요. 바람이 나를 밀어주기도 하고 땅이 나를 받혀주기도 하구요. 무엇보다 전 자건거를 타고 가면서 내가 끌고 나아가는 풍경들을 좋아합니다.

샌드캣님/ 희망의 은유로서의 자전거,, 잘 어울려요. 지금으 자전거 사셨나요?^^
저희는 식구수대로 자전거가 있는데 자주 안 타고 현관에 두자니 자전거가 갑갑해보이네요. 자주 굴려주어야하는데 말이에요^^

짱꿀라 2006-12-15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건거는 생각하면 지금도 고등학교 다닐 적에 타고 다니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 재미있게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천천히 가던 그때의 기억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결속력

어느 집단에서든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힘은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음식, 따뜻함, 신체적 보살핌,
돈이 제공하는 물질적 에너지며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
다.


-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몰입의 즐거움》중에서 -  

오래전 읽었던 '몰입의 즐거움'에 저런 구절이 있었구나.

여기 알라디너들의 결속력도 저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상대방의 목표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정신적 에너지.

그 목표란 크고 작은, 여러가지의 것이 있겠지만 반드시 선을 향한 것이면 좋겠다.

다름과 차이가 있어 아름다운 이곳, 더없이 조화롭게 결속되는 하나의 세상이지 싶다.

- 고도원의 아침편지 중 오늘아침 마음에 드는 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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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12-02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좋은 말이네요. 핵심이구요.
좋은 주말입니다^^

프레이야 2006-12-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딧불님/ 오늘 바깥 날씨가 쾌청해 보여요. 행복한 주말 시간 보내시기 바래요^^

비로그인 2006-12-0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알라딘에 들어오면 물고기들이 이리 저리 몰려다니는 그림이 보여요.
한마리 한마리는 작지만 큰 물고기를 납작하게 만드는 더 큰 물고기처럼 보이게 하는 작은 물고기들.

프레이야 2006-12-02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님 댓글을 보니 환상적인 그림책 '무지개 물고기'가 떠올라요. 한 마리 한 마리가 모여서 아주 큰 물고기로 보이게 하는 장면이요. 멋진 비유에요^^

실비 2006-12-0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상대방에게 쏟아주는 관심. 명쾌한 답이네요^^

마태우스 2006-12-0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난 곱창이 있으면 사람이 모이더군요. ^^

프레이야 2006-12-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님/ 맞아요. 모이는 곳엔 꼭 맛있는 게 있어요. 먹고 마시는 거, 앞에 없으면
왠지 어색하고 밍밍하잖아요.^^ 근데 전,, 곱창 못 먹어요.ㅜㅜ

실비님/ 12월이네요. 즐거운 첫 주말 보내시기를...

짱꿀라 2006-12-03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속력은 저는 따뜻함이라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사람을 이해하지를 못하거든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결속력은 자동으로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태우스님 말씀도 정말 맞는 소리이고요. 음식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서로를 이해한다는 뜻이 아닐런지요.
 
 전출처 : 거친아이 > 제4인칭 그리고 참칭

김병익 칼럼]제4인칭 그리고 참칭
[동아일보 2004-05-12 18:59]
[동아일보]

일본 여류작가 쓰시마 요코(津島佑子)의 소설 ‘나’(유숙자 옮김)의 작가 서문에는 ‘제4인칭’이란 말이 나온다. 나, 너, 그의 세 가지 인칭 외에 또 다른 제4인칭? 작가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소설 속에서 진한 글자로 표기되는 ‘나’는 ‘나 아닌 나’, 그래서 1인칭으로 표기될 수 없는 또 다른 나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가령 무당이 신들려 죽은 혼령의 말을 빌려 ‘나’라고 할 때의 그 나는 무당 자신이 아니라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하는 혼령을 가리킨다. 그때의 나를 작가는 제4인칭이라고 부르고 있다. 작가는 소설 속의 화자를 자유롭게 옮겨 가며 또 다른 나를 등장시키는 데 제4인칭의 효과를 활용하면서 이 발견을 스스로 매우 신선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라는 말 뒤에 숨은 ‘나’▼

쓰시마는 이 4인칭의 발견은 아이누족의 설화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쓴다. ‘사양(斜陽)’으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太宰治)의 딸인 그는 홋카이도(北海道) 바로 아래의 아오모리(靑森)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의 설화를 많이 들었고 그 설화의 구승(口承) 속에서 ‘나 아닌 나’의 존재를 깨달았다고 한다. 쓰시마는 4인칭으로서의 ‘나’를 일본 소설의 전통인 사소설(私小說)에 적용할 수 있다고 했는데 사소설은 1인칭으로 서술되지만 그 소설 속의 1인칭은 작자 자신과는 또 다른 존재인 ‘나’로 봐야 한다는 것이고 그 나를 4인칭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쓰시마가 말하는 4인칭적 존재는 아이누족만이 아니라 구비문화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이었을 것이다. “옛날 옛적에 가난한 농사꾼이 살았더란다”라고 시작되는 우리 할머니 이야기에서 그 이야기가 사실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득한 조상들로부터 전승된 것임을 “…더란다”라는 말로 돌리고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가 “오 여신이여,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 노래하라”로, ‘오디세이’가 “뮤즈들이여, 세상을 무수히 편력한 그 사내의 행적을 말해 주오”라고 시작하는 것도 기억의 원천을 향한 제4인칭의 호명(呼名)이다. 성서의 저자가 복음의 원천으로 ‘성령’에 기대는 것도 이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구비문화 시대를 벗어나 문자 기록의 역사 속으로 들어와서도, 그리고 이성적 존재로서의 ‘나’라는 주체적 존재성을 자부하면서도, 특히 큰 이야기를 할 때 주체적인 1인칭으로서의 나가 아닌 또 다른 인칭으로 나의 말을 대변하는 일은 많다. 가령 흔하게 동원되는 ‘양심의 소리’ ‘역사의 심판’ ‘민족의 외침’ 혹은 ‘우리의 주장’이 그것들이다. 나의 개인적 의사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큰 존재에 의탁하여 제시한 이때의 주어는 관념적이어서 모호하지만 집단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어서 호소력이 강하다. 구비문학에서는 화자가 4인칭으로 초월적인 존재를 불러내는 것과는 달리, 오늘의 주장 발언에서는 화자가 집단적 혹은 관념적 주체 뒤로 숨거나 속으로 들어가 익명화한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그래서 강제력은 강화하면서 책임감은 희석하는 효과를 얻는다.

▼자기 주장에 ‘국민-시민’ 남용▼

근래 더욱 뜨겁게 정치인들이 ‘국민’의 뜻이라고, 운동단체들이 ‘시민’의 의지라고 발언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자신의 의사를 국민이란 추상적인 전일체의 이름에 의탁하거나 자기 의지를 시민들의 일치된 주장으로 강변하는 것이라면, 그 발언은 신자의 탐욕을 ‘하나님의 뜻’으로 설교하는 것과 그리 먼 거리의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참칭(僭稱)’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방금 무심히 ‘우리’라고 써 버렸다. 책임 있는 주체로서 발언해야 한다면서,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우리’란 말로 숨어든 것이다. 아아, ‘나’의 말로써 말하기 어려움(!)은 자유로운 민주주의 시대에도 여전한가 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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