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 2007년 8월 10일 오후 1시 40분
곳 : 부산 바다 가까이에 있는 어느 아파트 주방
나오는 사람들 : 큰딸(중2), 작은딸(초3), 맘(4학년2반)
강원도땅에는 집중폭우로 인재가 일어나고 있는 오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중남부 땅과 사이버땅에서는 디워로 인한 말들의 폭우를 이래저래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지경이다. 더위에 지친 맘은 학원에 갔다가 돌아온 딸들과 점심을 차려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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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 : (은근히 살가운 목소리로)얘들아, 우리 디워 보러갈래?
큰딸 : (의외라는 표정으로) 아니, 난 그런 영화 안 좋아하는데..
맘 : (반갑다는 말투로) 사실은 엄마도 안 좋아해.
큰딸 : (단호하게) 나는 괴물 하나 나오고 끝에 가선 모조리 그 괴물 잡아죽이고 그런 영화 싫어.
맘 : (얼씨구) 반지의 제왕은 무지 좋아하잖아?
큰딸 : (눈을 반짝이며)그거랑은 완전 다르지?
맘 : 반지의 제왕은 왜 좋아?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아?
큰딸 : 호비트부터 시작해서 우선 책이 너무 재미있고 영화 속, 오랜세월 이어져온 전설과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다고.. 물고 물리면서... 대사도 멋있고. 배우들 연기도 얼마나 잘 한다고. 그리고 그 배경도 도시가 아니라서 좋아. 디워는 도시지? 참, 디워는 세트도 그 사람이 다 만들었어? 반지의제왕에선 6개월 이상 꽃을 기르고 가꿔 호비트 마을도 꾸미고 그랬다던데..
맘 : 그래도 결국 반지의제왕도 CG를 많이 이용했잖아? 디워도 영구아트필름에서 연구해서 우리기술로 CG 이뤄냈다네. 그리고 디워에도 이무기 전설 나온다던데.. 세트도 아마 우리가 만들었고 대본도 그사람이 썼지 않았나? 아마 그럴걸..
큰딸 : 그래? CG 아무리 멋져도 스토리가 찌질하면 난 재미없어. 트랜스포머도 난 그래서 하나도 재미 없던걸.. 친구들 다섯명이서 얼마전 영화 보고 왔는데 뭐라는 줄 알아? 두 명은 화려한 휴가, 세 명은 디워. 이렇게 편이 갈려서 다수결로 디워를 다같이 보고 나왔는데 보러 가자고 했던 애들도 완전 낚였다면서 후회했다네. 스토리도 너무 엉성하고 배우들 연기도 못하고 시시하다고. 재미없다더라...
맘 : 그런데 초등학생들은 재미있다고 한 번 보고 나면 또 보러 가자고 한다더라. 중학생만 되어도 나름대로 그렇게 평가할 줄 아는구나. 음..(진지)
작은딸 : 엄마, 그 영화 관객이 되게 많이 몰리고 있다던데.. 난 별로 보고 싶지 않지만..
큰딸 : (눈을 흘기며) 네가 뭘 안다고? 흥..
맘 : 엄마랑 취향이 비슷하네, 우리딸. 대사 듣기 좋아하는 거랑 스토리 재미없으면 다른 거 좋아도 별로라는 거랑.. 다 취향의 문제다 그지?
큰딸 : 엄마 어젯밤 본 무슨 토론 프로그램, 디워 얘기 한 거지? 애국심 어쩌구하며 별로 재미없다고 듣고서도 보러가는 사람 많던데 난 그러기 싫은데.. (흥분하며)우리나라에서 만든 거라고 무조건 좋다고 해야하는 건 아니잖아.
맘 : (이때다) 그런데 재미있으면 됐지, 영화 한 편에 뭘 더 기대하고 비평하고 그러느냐고 하는 네티즌들도 있던데.. 과연 영화 한 편이 재미만 있으면 그만일까? 영화도 대중예술인데.. 위험한 발상이지. 비평하는 사람의 입을 막는 군중심리 같은 분위기는 어떻게 생각해? 난 어제 진중권이 하는 말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던데..
큰딸 : (갸우뚱) 난 그런 영화 재미없던데.. 몰려다니는 것도 별로고.. 근데 진중권이 누구야?
맘 : (진중권을 간단히 소개하고 나서, 속으로) 그럼 무한도전은 왜 그렇게 재밌다고 야단이냐? ㅋㅋ
작은딸 : 잘 먹었습니다. 엄마~
맘 : 응. 참, 디워는 가족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중학생은 가족 아닌가 뭐? 가족영화라고 스토리가 엉성해도 된다는 건가. 디워는 안 봐서 뭐라 내 판단은 아직 할 수 없지만 말이야. 어린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도 스토리는 탄탄하지. 함축된 단순한 구조일 뿐이지 그안에 사건의 전개에 필요한 개연성과 필연성이 갖춰져야하지. 예를 들어 음악과 춤이 돋보여야하는 뮤지컬의 이야기구조도 단순하거든. 하지만 재미와 감동을 함께 주잖아. 단순한 것과 엉성한 건 다른데.. 초등생들의 이야기읽기 수준을 너무 낮춰보는 건 아닌지. 문제는 그런 이야기를 재미없어하는 우리집 딸들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데.. 모두가, 재미있으면 좋지 뭘 따지냐는 식은 좀 그렇다 그지?
큰딸 : 하여튼 난 그런 영화 별로야. 헉, 반지의 제왕에 비교하다니..(버럭) =3=3=3
맘, 찬물이나 뒤집어쓰러 간다.
한 시간 후,
아무래도 아이가 재미를 느끼는 부분이 궁금한 맘은 다시 묻는다.
맘 : 희원아, 옥수수 쪘다, 먹어봐. 근데 무한도전은 왜 그렇게 재밌어?
큰딸 : 으.. 피디가 자막을 재밌게 써서 웃기고 다른 오락프로그램은 나오는 사람들이 짜고 하는 거 같은 게 표 많이 나는데 이건 여섯명 모두 친해보이고 서로 자연스럽게 하는 게 좋아. 초대손님이 간혹 나와도 여섯명은 그대로 고정출연하면서 서로 잘 어울리고.. 진짜 우습잖아. 웃고나면 기분 좋아져.ㅋㅋ
맘 : (속으로) 역시 이물감이 없이 형식과 내용이 녹아났을 때 재미가 생산되는 거구나. 음.. 네가 재미있어 하는 거 엄마도 공감해보도록 할게.^^
e채널에서 본 프로그램 속의 그가 생각난다. 영화와는 별개로 몇가지 실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무한도전'에 박수를! 그러나 조금 겸손했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