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원인 유난히 준비물을 챙기는 편이다. 그래서 내가 전혀 신경을 안 쓰는데 어제는 전에 내게 맡겨둔 증명사진 여섯 장 중에서 두 장을 잘라가야한다며 미리 내게 말했다. 그런데 나도 잊고 아이도 잊고 오늘 아침 그냥 학교에 갔다. 아침에 문자가 와서 보니 '증명사진 안 갖고 왔다!!!!!!!!!!!!' 이렇게 짜증섞인 투덜거림이 들리는 거다. 앗, 내일은 놀토(노는 토요일)라서 하루 연기 할 수도 없고 그냥 내가 갖다주기로 마음 먹었다.
오후 2시 40분쯤 학교에 가니 수학수업 중이었다. 창문으로 얼핏 보니 아이 얼굴은 보이지 않고 복도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중앙에 둥그렇게 넓은 복도에서 각을 끼고 보니 아이 교실이 보이고 바로 희원이 얼굴이 보이는 거다.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무언가 열심히 칠판 쪽을 보며 설명을 듣다고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 풀다가 한바탕 웃기도 하고 손을 들기도 하고 그러고 있었다.
요즘 희원이는 중학교생활에 그런대로 적응을 하고 있다. 원래 고집도 세고 하기 싫은 일은 절대 못하는 성미인데 요새는 사춘기인지 잔소리를 싫어하고 뭔가 간섭하는 것도 질색을 하는 눈치다. 그래서 말 한 마디 할 것도 조심스럽게 하고 싫다고 하는 것은 억지로 시키지 않는다. 원래도 그랬지만... 어제 아랫집 아주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생각났다. "지금부터 진짜로 마음을 비워야합니데이...... 엄마 욕심 앞세우지 말고....... 어쨌든 사랑하는 게 최곤기라."
교복을 입은 아이가 수업 중인 모습을 보고 감격해서 울렁거리고 있는 주책 없는 엄마. 옛날 그 시절이 생각나면서 지금 돌아갈 수 있다면 진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났다.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나다가, 에고 뭔 소리야, 그 답답한 시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내가 이미 밟고 온 길 위에서 서서히 발을 옮기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어떨 땐 안쓰럽기도 하다. 그래도 내몰 수밖에 없는 게 또 현실이다.
가운데 복도에서 조금 더 서성거리며 그곳에 전시해둔 작년 한글날 백일장 당선작들을 읽어보았다.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이 3명 보여 더 눈여겨 보았다. 글감으로 '길'과 '가족'이 주어졌었나보다. 그 중 내리막길에서 얻은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오르막, 내리막 그리고 평지길이 모두 우리들 삶에서는 필요하다는 결론을 끌어낸 글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쉽게만 생각하기 쉬운 내리막길에서 굴러 무릎을 다친 후 내리막길을 더 조심하게 되었다는 아이의 생각이 참 미더웠다. 아랫집 남학생의 글이다.
지금까지 잘 해온 희원이도 경쟁에 밀려 다소 내리막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미리 마음에 두고 잘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어느 길에서든 마음의 나침반을 잊지 말기를. 다소 흔들리더라도 곧 방향을 잡는 나침반처럼 아이의 길에 내가 그런 존재로 남아주기를..
3시 20분이 되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아이가 튀어나왔다. 사진을 건네주고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이 왠지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