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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이정록 

 

원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뭘 써도
좋다 원고지 다섯 장만 채워와라! 다락방에 올라 두근두
근, 처음으로 원고지라는 걸 펼쳐보니 (10x20)이라 쓰여 
있는 게 아닌가? 그럼 답은 200! 구구단을 뗀 지 두어 달,
뭐든 곱하던 때인지라 원고지 칸마다 200이란 숫자를 가
득 써냈다 너 같은 놈은 교사생활 삼십년, 개교 이래 처음
이라고 교문 밖 초롱산 꼭대기까지 소문이 쫙 펴졌다 그로
부터 십오년, 나는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글이 콱 막힐 때
마다, 그 붉은 우물에서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른다
그때 나는, 이백과 같은 길을 걸어갈 거라는 막연한 운명
을 또박또박 적어넣었던 게 아닐까? 

 

---------------- 

내 앞에 '내 인생의 키워드'라는 물음이 던져진 적이 있다.
그때 난 '글쓰기'라는 답을 떠올리긴 했는데 좀더 확연한 대답을 못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어정쩡한 상태의 나를 발견했고 내 모자란 열정과 부족한 무엇에 때론 역으로 더 느긋해져버린다. 
변명하자면, 머리 좀 정리하고 곧 다시 심지를 당겨볼 생각이다.


내가 글로 처음 입상한 건 초등학교 사학년 때다.
교내 백일장에서 난 운문 '산길'이라는 시를 원고지 4-5장에 썼고 상장을 받았다. 
그때 내가 바랐던 건 엄마의 무조건적인 칭찬이었는데 엄마는 꼭 비평을 곁들인다. 
그후 날마다 썼던 일기글도 그렇고 시조대회 나갔던 일도 그렇고 칭찬에 비평이 곁들여지니 맛이 없다.
작은딸이 쓴 산문이 교내 학예전에 시화로 전시되어있다. 곧잘 쓴다.
나는 칭찬에 무능하지는 않았는지...  그건 그렇고,
나로 말하자면 누구처럼 막연한 운명을 적어넣었던 건 아닐 테고
누구처럼 두레박을 타고 이백이 솟아오르는 '붉은 우물'은 아니어도 검은 우물 하나는 있는데
그 우물 하나 내 안에 웅숭한 아가리 딱 벌리고 있는데... 

막연한 운명?
생은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막연한 운명, 뭐 그 비슷한 그림자는 감지하게 되는 게 또 생 아닐까.
큰아이가 수능을 치고 구술면접과 논술을 보고 돌아왔다.
일단은 성적표 나오기 전까지는 후련해하고 편히 있어도 좋을 듯하면서도
나나 아이나 조바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아이가 원하던 곳에 합격할 수 있기를 빈다.
그래도 이제 운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자.
당장 퍼머에 염색에 화장까지 하겠다고 야심차다. ^^
그 얼굴이 너무 깨끗해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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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11-21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4학년 때였던것 같아요 ^^
그땐 쓰는 게 참 재미났었어요
방학 숙제 중에 글짓기 숙제가 가장 좋았고 가장 먼저 했는데
지금은 쓰는게 먹고 사는 일이 되어서 쓰는 즐거움이 사라졌네요

프레이야 2011-11-22 08:41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도 4학년 때군요.^^
일이 되고 의무가 되면 즐거움이 덜한 거 맞아요.^^
그래도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도록 해봐요 우리!
뭐든 신이 나서 해야 결과도 더 좋겠지요.

순오기 2011-11-22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평을 가하는 어머니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주춤~~
검은 우물~~~~~~ 지난 번 아버지 이야기에 읽었던 거군요.^^
열심히 노력한 따님에게 좋은 소식 날아들기를 기원해요.

프레이야 2011-11-22 08:49   좋아요 0 | URL
어릴 땐 그게 참 야속하게 들리고 많은 부분 의기소침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애들한테 안 그러려고 하는데 저도 가끔 저질러요.ㅎㅎ
좋은 소식, 언니네 아들도요.!!
그동안 마음이 불안하여 아무것도 손에 안 잡히고 서재에도 안 왔네요.ㅠ

양철나무꾼 2011-11-22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정록 시인하면 '불주사'가 기억나요.
프레이야님, 오랫만이예요.
참 반가워요, 와락~^^

프레이야 2011-11-22 17:45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동시에^^
'정말'이란 시집에 실린 시들이 모두모두 좋더군요.
걸쭉한 입담에 삶의 포용과 해학이 묻어나요.
몸은 다 나으셨나요? 전 다시 감기로 골골 머리가 깨질 듯합니다.
이번달 써야할 글들 하나도 못 쓰고 그만.ㅠㅠ
 

                                                    

 

 

 

 

 

 

 

김사인 시인의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글자 그대로 곱씹어보면
누군가를 무언가를 가만히 좋아하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조용하고도 깊이, 좋아하고 고마워하고 감정의 선율을 더듬어보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만가지 격정을 참아내고 안으로 삭이는 일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아래의 시는 조근조근 다가오는 말투가 진솔해서 더 곱살스럽다.
천생 곱살맞지 못한 나는 내 안에 그런 천성이 엄연히 있고 자주 나타내지 못함에, 또 한 번 욕심을 버리는 일만 남았다.
순연한 가을바람소리에 귀를 세우고 먼산바라기 하며 앉은 내 가슴팍에
빛바래고 구멍 난 나뭇잎 하나 스스럼없이 안긴다.
문득 나는 겁에 질려 있는 또다른 나를 보고 왈칵 참았던 눈앞이 흐려진다.
누군들 깊이 묻고 사는 것 한두 개 없을까마는. 그저 감사할 일만 남았다고 되뇌어본다.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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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1-11-01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어울리는 시를 님 덕분에 읽어요.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친 노래.
아~

프레이야 2011-11-02 07:41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 시월도 가고 이제 십일월의 둘쨋날을 맞이해요.
춥지도 덥지도 않고 상쾌한 바람이 너무 좋은 날들, 하시는 일 즐겁고 보람되기 바래요.^^

양철나무꾼 2011-11-0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용한 일' 저 짧은 시의 첫 구절을 제 맘대로 '마뜩잖다'라고 외웠었네요.
암튼...
저도...님이 그냥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11-0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저 선물해주실 기회 있으면, 꼭 이 책 해주세요...
아하하... 뻔뻔스러운. 시가 너무 좋아요.

텅빈 바다, 겁에 질린 얼굴, 가을비 뿌리는 대숲... 아, 어쩜 좋을까요.

[그장소] 2016-02-08 09:38   좋아요 0 | URL
가만히 좋아하는?

세실 2011-11-06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안녕하세요?
저도 이 시집 읽고 페이퍼에 '조용한 일' 적었는데 통했네요.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가끔은 이런 쉼이 필요하지요.
이시 참 좋아요. 그쵸?

자하(紫霞) 2011-11-08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시리다 못해서 뚫려버릴 것 같아요.
이와중에 돌배나무에 달린 돌배는 맛있겠다라는 어이없는 생각을...ㅋ
 

 

 

 

 

 

 

 

  

 

 

붕어빵 안에 붕어가 없듯, 시 '정말'은 이정록 시인의 시집 <정말> 안에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 '말'이다.
말말말... 실존도 형체도 없는 그놈의 말이 사람을 수시로 희롱하고 배신하는 시간,
그의 '정말'이 한 사발 막걸리 같다. 참말로 '정'하고 또 '정'많다.
그의 시는 하나같이 걸쭉한 언어로 녹슬고 얼어붙은 가슴을 때리고 산발한 머리를 친다.
가령, 아래의 시 '아버지의 욕'은 내 아버지의 그 옛날 잊히지 않는 욕을 떠올린다.
아침잠 많던 무결한 착한 딸에게 던졌던 해서는 안 되었을 욕을 떠올려주고,
세상에서 제일로 부지런하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 일만 하고 살아오신 듬직했던 당신의 등을 떠올려주고, 
세월의 강물을 따라 정처없는 나, 마흔여섯의 나에게 그 욕의 예언성을 확인해준다.
뭐한거야, 뭐하고 산거야, 라고. 

 

 

아버지의 욕  

 

- 이정록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 
어릴 적에 들은 아버지의 욕
새벽에 깨어 애들 운동화 빨다가
아하, 욕실 바닥을 치며 웃는다.


사내애들 키우다보면
막말하고 싶을 때 한두 번일까마는
아버지처럼, 문지방도 넘지 못할 낮은 목소리로
하지만, 삼십년은 너끈히 건너갈 매운 눈빛으로
'개자식'이라고 단도리칠 수 있을까


아이들도 훗날 마흔 넘어
조금은 쓸쓸하고 설운 화장실에 쪼그려 제 새끼들 신발이나 빨 때
그제야 눈물방울 내비칠 욕 한마다, 어디 없을까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나는
"광천 쪽다리 밑에서 주워온" 고아인 듯 서글퍼진다


"어른이라서 부지런한 게 아녀
노심초새한테 새벽잠을 다 빼앗긴 거여"
두 번이나 읽은 조간신문 밀쳐놓고 베란다 창문을 연다
술빵처럼 부푼 수국의 흰 머리칼과 운동화 끈을
비눗물방울이 잇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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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1-10-3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삼삼해지네요 ㅎ 꼭 이정록 시인이 고등학교 때 한문선생님이셨기 때문은 아니구요 ㅎㅎ

프레이야 2011-10-31 17:38   좋아요 0 | URL
이카님, 아삼삼해진다는 말씀, 어떤 느낌이 옵니다.ㅎㅎ
고등학교 때 한문샘이요? 멋진 인연이네요. 이런 멋진 시인을 스승으로^^

하늘바람 2011-10-3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문선생님이셨군요. 이정록시인이. 또 다른 느낌이네요.
이정록 시인 참 좋아요

프레이야 2011-10-31 19:32   좋아요 0 | URL
정말 좋더군요. 충청도 방언을 실감나게 쓴 싯구들도 너무 좋아요.
다른 시집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팍팍 드는 시인이에요.
 

 

 

 

 

 

 

 

 

 

 

 오늘 저녁 배캠에 나온 촌철시인 김경주가 소개한 시인은 김사인님이다.
유명한 <가만히 좋아하는> 외에도 꾸준히 시집을 내고 있는 그는 홍대 앞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김경주 시인은 거의 매일 그곳에 가는데 오늘도 갔다왔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한다.^^ 
오늘 소개한 시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과 '참새'였다.
철수씨는 '참새'의 '가난하기에 참 좋은 계절'이라는 구절이 참 좋다고 말하네.
'참새'는 찾을 수가 없어서 김사인 시인의 다른 시를 몇 찾아보았다.

일년 중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것 같은 요즘, 이런 계절, 하루하루가 가는 게 아까워 안달이 난다.
너무 빨리 가는 것도 너무 충만한 것도 겁이 덜컥 나는...
너무 빨리 다 먹어버리면 밥그릇이 외로울 것 같은,
너무 좋은 책은 휘리릭 다 읽어버리지 않고 몇 장 남겨둬야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만 같은, 딱 그런 기분.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 

              

-  김사인


하느님
가령 이런 시는
다시 한번 공들여 옮겨 적는 것만으로
제가 새로 시 한 벌 지은 셈 쳐주실 수 없을까요

"다리를 건너는 한 사람이 보이네
가다가 서서 잠시 먼 산을 보고 가다가 쉬며 또 그러네

얼마후 또 한 사람이 다리를 건너네
빠른 걸음으로 지나서 어느새 자취도 없고
그가 지나고 만 다리만 혼자 허전하게 남아있네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라는 시인데
(좋은 시는 얼마든지 있다고요?)
안되겠다면 도리 없지요
그렇지만 하느님
너무 빨리 읽고 지나쳐
시를 외롭게는 말아 주세요, 모쪼록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 "  " 연전에 작고한 이성선 시인의 <다리> 전문과 <별을 보며> 첫 부분을 빌리다 

 

 

 

늦가을


- 김사인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을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른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시간들 
  
 

- 김사인
 
 
 
48년 9개월의 시간 K가 엎질러져 있다
시원히 흐르지 못하고
코를 골며 모로 누워 있다
액체이면서 한사코 고체처럼 위장되어 있다
넝마의 바지 밖으로
시간의 더러운 발목이 부었다
소주에 오래 노출되어 시간 K는 벌겋다
끈끈한 침이 흘러
얼굴 부분을 땅바닥에 이어놓고 있다
시간 K는 옆구리와 가려운 겨드랑이 부위를 가지고 있다
잠결에 긁어보지만 쉬 터지지는 않는다
흘러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더러운 봉지에 갇혀 시간은 썩어간다
비닐이 터지면 시간 K도
힘없는 눈물처럼 주르르 흐를 것이다
시큼한 냄새와 함께 잠시 지하도 모퉁이를 적시다가
곧 마를 것이다 비정규직의 시간들이
밀걸레를 가지고 올 것이다
 
허깨비 같은 시간들, 시간 봉지들 

 

-------
  

김사인 시인(金思寅, 1955년 ~ )
충북 보은, ,1981년 ‘시와 경제’ 동인으로 시 활동.
1977년 11월 18일 ‘서울대 반정부 유인물 배포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1987년 이후 조정환, 박노해와 더불어 1989년 3월에 ‘노동해방문학’ 창간
평론《한국문학의 현단계 》〈지금 이곳에서의 시〉
시집 《밤에 쓰는 편지》(도서출판 청사),《 가만히 좋아하는 》 (창비시선)
2006 제14회 대산문학상 시부문수상 ,2005 제50회 현대문학상 시부문수상
1987 제6회 신동엽창작기금 수상
1996 ~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 ,스토리뱅크 편집위원
-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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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10-12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사인 시, 저도 가만히 좋아하는 시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1-10-13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나 때문에 하늘이 더럽혀진다니,ㅠㅠ 별이 더럽혀질지도 모른다니,ㅠ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 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싶어
덜덜 떨며 이 세상 버린 영혼입니다

갑자기 슬퍼져요.
 

  9월이 소리없이 간 것 같다.
  어느새 기온이 확 달라졌다. 얇은 옷으론 바람이 제법 차게 느껴진다.
  시월도 벌써 다섯째날. 감기몸살을 며칠 앓았다. 마음을 더 앓았다. 마음간수가 잘 안 된다.
  목 아픈 데는 페퍼민트차를 계속 마시면서 지끈거리는 머리 싸매고 동면하듯 실컷 잤다.
  오늘은 좀 정신도 차리고 가까운 바다를 끼고 차를 달려가 상쾌모드로 갈까하는데
  오랜만에 또 명치가 아프다. 아마도 탐앤탐스 프레쯜과 커피 과잉 섭취인듯. ㅠ
  목은 아직 따끔거리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좋다.
  맑고 푸른 하늘에 두둥실 무념으로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구업이라도 짓지 말고 좋은 말 좋은 생각으로 살자고 다시한번 다짐해본다. 
  작심삼일이라도 계속 삼일씩하면 된다고 누가 말했지. 
  
  그저께 큰딸을 해거름에 학교로 데려다 주면서 물어봤다.
  하루중 어느 시간대가 제일 좋으냐고.
  밤이 제일 좋단다. 해가 짧은 겨울이 그래서 좋다고도 곁들인다.
  엄마는 이런 해거름이 제일 좋아.  해거름은,
  세상의 하늘이 조금은 낮게 엎드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해거름이면 내 안의 어린애
  가 좀 순해지는 것 같다.  울고 보채는 그 아이가 좀 잦아드는 시간이다. 
  허허롭지만 어딘지 또 충만해지기도 하는, 알 수 없는 깊이의 회색시간이 해거름이다.
 
  오늘저녁 배캠의 철수씨는 시인 김경주와 함께 또 두 명의 시인과 세 개의 시를 소개했다.
  먼저 장이지 시인의 시집 <안국동울음상점>에 실린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과 그 시를 읽기 전에
  김경주 시인이 더 좋아해서 꼭 소개해 주고 싶다고 말하며 들려준 '시인의 말'.
  그리고 최치언 시인을 소개했다. 김경주 시인의 낭송 목소리가 오늘은 저번주보다 듣기에 좋았다.
  자신은 컴맹에다 무척 아날로그적이라 스마트폰을 갖고는 있어도 전화 걸고 받는 용도 이외엔
  쓰는 게 없어 무늬만 스마트폰이란다. 자신이 스마트하니 스마트폰이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썰렁한 시인의 개그 ㅎㅎ 그럼 왜 스마트폰을 사서 쓰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안국동울음상점 / 장이지

 

   나선형의 밤이 떨어지는 안국동 길모퉁이, 밤 푸른 모퉁이가 차원의 이음매를 풀어주면, 숨쉬는 집들, 비칠대는 길을 지나 안국동울음상점에 가리

  고양이 군은 바닐라 향이 나는 눈물차를 끓이고 나는 내 울음의 고갈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진열장에 터키석처럼 놓여 있는 울음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고양이 군은 '혼돈의 과일들'이니'그믐밤의 취기'니 '진흙 속의 욥'이니 '거위 아리아'니 '뒤집힌 함지'니 하는 울음의 이름들을 가르쳐 주겠지

  나그네가 자신의 그림자에게 말하듯 내가 고양이 군에게 무언가 촉촉한 음악을 주문하면 스탄 게츠의 '이파네마에서 온 소녀'가 바다 밑처럼 깔리리. 나는 내 안의 함지에서 울음을 길어다 주는, 이 세상에서 내 울음을 혼자만 들어주는 소녀 같은 것을 상상하며 그 아이가 아픈 것은 아닌지 어떤지 걱정을 하게 되리

  밤이 깊도록 나는 눈물차를 이백처럼 마시리 내가 등신대의 눈물방울이 되는 철없는 망상에 빠져.

  그러나 새벽이 오기 전에는 돌아가야 하리 내일의 일용할 울음을 걱정하며 내가 일어서려 하면 고양이 군은 '엇갈리는 유성들과도 같은 사랑'을 짐짓 건넬지도 모르리 손에 가만히 쥐고 있으면 론도 형식의 화상이 은은히 퍼지는.

  지갑은 텅 비었지만 울음을 손에 쥐고 고양이 군에게 뒷모습을 들키면서, 보석비가 내리는 차원의 문을 거슬러 감동 없는 거리로 돌아와야겠지 비가 내린다면 맞아야 하리 비의 벽 저편 어렴풋 내 울음을 듣는 내 귀가 아닌 내 귀의 허상을 응시하면서 비가 내린다면 역시 맞아야하리.



 '시인의 말'을 먼저 들려주었는데 그걸 못 찾겠다. 아무래도 시집을 사야할 듯. 

  

장이지 시인 : 1976년 전남 고흥출생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성균관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7년 시집 <안국동울음상점> 랜덤하우스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 장이지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김경주 시인이 두번째로 소개한 시인은 최치언.
극작가로 더 유명한 학자풍의 시인이란다. 두명의 시인을 알게 되어 오늘도 기쁨.

  

최치언 / 1970년 전남 영암 출생.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200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시화집 『레몬트리』, 희곡 『코리아환타지』『밤비내리는영동교를홀로걷는이마음』『충분히애도되지못한슬픔』『언니들』등. 극작가 및 총체극 연출가로 활동 중. 2009년 대한민국연극대상 희곡상 수상.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 최치언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하였다.
홀로 남아 썩는 것들아!
내가 아니었으면 오직 너였을, 혼자되지 않을 것들아.
어떻게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사랑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본 하늘은 온통 핏덩어리처럼 흘러내리는데 
 

그리고 우린, 다시 각자가 되어 먼 곳으로 떠났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 최치언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는다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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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0-0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에 특히 시 읽기 좋은 것 같아요, 프레이야님. 시는 잘 못 읽고 여전히 잘 모르지만 시를 많이 배웠어요, 알라딘에서. 저도 이제는 시집 한 권 뚝딱 읽을 수 있을 거예요, 반드시. 처음 왔을 때 저도 처녀자리라 너무 반가웠는데 여전히 따뜻하고 정겨워요, 프레이야님 서재는.

프레이야 2011-10-06 00:03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처녀자리 ^^
배캠의 저 코너 김경주시인이 시 소개해주는 코너 수욜마다 하는데 참 좋으네요.
저도 몰랐던 시인과 시, 반가운 만남이에요.

June* 2011-10-05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경주라는,
 이름 석 자만 보아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동시에 강해지고 있다고 느껴요.
 응, 저도 아이리시스님의 말마따라 가을에는 소설보다야 시가 더 좋을듯해요.
 

프레이야 2011-10-06 00:05   좋아요 0 | URL
김경주 시인의 시 소개가 꾸밈없이 자분자분 괜찮더군요.
김경주 시인의 시는 시집 한 권밖에 안 봐서 잘은 몰라도 느낌이 좋은 시인이에요.
가을에 모두 시인, 아니 시인의 벗이라도 되어볼까나요.^^

진주 2011-10-06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먼 곳에서 만나 가까운 곳으로 걸어갔다"
페이퍼 제목만 보곤,
'아아 가을이 되니 ㅎㄱ님이 상당히 시적이시다'라고 감탄했어요.
아닌게 아니라 제가 시 제목이란 건 맞혔네요~ㅎㅎ


프레이야 2011-10-07 08:17   좋아요 0 | URL
진주님 더없이 좋은 하늘, 시월 잘 보내고 계신지요?
시적이기로 말하자면 진주님의 두줄시를 따를까요? ㅎㅎ
가을이라 그런지 시가 자꾸 걸어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