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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 진은영

 

 

 

호랑이를 왜 좋아하는지 몰라요
작은 나무의자에 어떻게 앉게 되었는지 몰라요
언제부터 불행을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는지
정원사가 가꾸지 못할 큰 숲을 바라보듯 말이죠
언제부터 너의 말이 독처럼 풀리는지 몰라요

 

맑은 우물은 여기부터
하나,
둘,
셋,

 

이 낡은 의자에서…… 언제쯤 일어나게 될는지
몰라요 나의 둘레를 돌며 어슬렁거리는 녹색 버터의 호랑이들
대체 뭘 바라는 거죠? 몰라요
이 시를 몰라요 너를 몰라요 좋아요

 

 

 

 

-  진은영 시집 <훔쳐가는 노래> 중 '인식론'

 

 

 

 진은영. 70년생.

시콘서트 감성지기 강승연이 새해 간절히 바라는 소망을 묻는데

자신은 더 딱히 바랄 것이 없으니 자신보다 더더 절실하게 소망하는 것들이 있는

사람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대답하는 심지 깊고 눈 맑은 시인.

철학을 전공한 자분자분한 목소리의 시인이 인식론을 노래한다.

나는 이 시집을 바구니에 담고.^^

 

 

 

 

 

 

 

 

 

 

 

몰라도 좋은 것, 몰라서 좋은 것 아니 몰라야 좋은 것들이 늘어가고

알아야겠다고 끙끙대던 것들이 그저 안개 속으로 그 형체를 허물어뜨리는 일이 잦아질 때

알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알아야할 것도 하나 없구나 라고 느끼게 될 때

알지 못하는 마음들, 꼭 충만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의 틈과 틈을 느끼게 될 때

그저 졸린 눈으로 병원 대기실에 앉아 아이를 기다리며 몰아치는 상념들이 내 바닥을 긁어댈 때

사랑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 살아가면 갈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 몰라서도 모르고 알아서도 모르는

그렇다고 꼭 알아야만 하는 것도 아닌, 알든 모르든 달라질 게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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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3-01-09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아는 시인이네요 ^^

프레이야 2013-01-09 22:58   좋아요 0 | URL
저는 몰랐던 시인인데 참 좋은 느낌을 받았어요.^^

꿈꾸는섬 2013-01-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궁금하네요. 읽어보고 싶어요.^^

2013-01-10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5 1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데이지 2013-01-10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는 시인이시네요...그분말씀이 따뜻하게 느껴져 저도 그 분의 시들을 쭈욱 읽어보고싶어져요^^ 근데 저는 시가 어려워요! 느끼면 된다는데 자꾸 밑줄 긋고 시를 자꾸 분석해보고싶은마음이 더 강해서 그런가봐요... 시는 둘째고 프레이야님의 마음속이 왠지 어지러워보이셔서 염려되네요..글이 회오리치고 있는듯 느꼈어요!! 괜한 염려겠지요??괜찮으신거죠?

2013-01-10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1-10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님, 시도 좋고, 시인의 심성도 곱고, 나는 다시 절망하고...
이렇게 날마다 징징대는 스스로를 너무 잘 안다는 게 저는 모를 일입니다.

프레이야 2013-01-10 19:28   좋아요 0 | URL
진은영 시인 목소리가 참 진중하고 담담하니 호감이 갔어요. 어떤 시인으로 남고싶냐는 질문에는 꼭 남아야한다고 생각해보지않았다면서 굳이 남아야된다면 정직한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더군요. 징징대는 거 저랑 같네요. 근데 그게 나쁜건가요뭐ㅋ 정신건강에는 오히려 나을거 같아요. 너무 잘 안다는것도 저랑 같아요. 알면 또 털고 나아가는 거죠.

페크pek0501 2013-01-10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를... 저는 요즘 왜 시를 멀리하고 있을까요...
으음~~ 나도 시집을 꺼내 봐야겠어요. ^^

프레이야 2013-01-10 19:32   좋아요 0 | URL
시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렵기만 한 것도 아니구요. 페크님, 이 프로그램 참 좋아요. 티비나 영화에서 본 강성연이 아니더라구요. 들어보시면 아실거에요. 아주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

순오기 2013-01-12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모르는 시를 읊어주는 프레이야님이 좋아요~
시는 몰라도 요것만 알면 되잖아요~ ^^

프레이야 2013-01-12 17:20   좋아요 0 | URL
히히 언니 싸랑해요.
나비님에겐 언제쯤이나 가볼까요ᆢ

2013-01-13 1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01-1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참 재밌다고 생각하고 들어왔는데 ㅎㅎ
시인이 재치와 유머가 넘쳐나는 느낌이네요 ㅎㅎ
ㅎ 저도 이 시집을 바구니에 담아놓아야겠습니당 ^^

프레이야 2013-01-16 22:20   좋아요 0 | URL
목소리가 꽤 차분하고 진중했어요. 마음에 들었어요.^^
겨울이라 그런지 시집이 자꾸 눈에 가네요.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같은하늘 2013-01-1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시인 몰라요~~
이 시도 몰라요~~
요즘 책이 어찌 생겼는지도 몰라요~~ㅜㅜ

프레이야 2013-01-18 09:23   좋아요 0 | URL
ㅎㅎ 같은하늘님, 책들이 삐지겠어요.
오늘도 행복하게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13-01-22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바쁜 일이 있으신가요?
새 글이 며칠째 없군요. 몇 번을 들어왔으나...ㅋㅋ
으음~~ 무슨 일일까요???

프레이야 2013-01-22 15:27   좋아요 0 | URL
페크님, 몇 번씩이나 헛걸음 하셨군요.ㅎㅎ
미안하면서도 기뻐요. 히히~
별일은 없었고 이래저래 생각들이 많았어요. 너무 쌓아두어 밀렸네요.
잘 풀어내야하는데, 어쩌나..
 

 

 

 

 

입동 /  황규관

 

 

 

 

낙엽도 이제 끝이 보인다

 

감빛 시간이 홀로 켜진 상태를

나는 고독이라 부르기로 했다

지난밤의 누추한 광기로부터

날이 밝으면 다시 고쳐 입을 옷매무새로부터

 

깊이 떨어져 있기로 했다

 

시간을 셈하지 않고

지는 싸움에 전력하는 눈빛을

이제 고독이라 부르기로 했다

 

가는 사랑과 오고 있는 사랑 사이에서

떠난 잎새와 남은 잎새가

남긴 파문 가운데서

슬픔을 더 많이 갖기로 했다

 

선도 악도 사라진 얼굴을 문지를 수 있는

거친 손바닥을 갖기로 했다

 

나도 그만 겨울이 되기로 했다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에서/  황규관  / 실천문학사

 

 

 

 

 

 

 

 

 

 

 

 

 

 

입동이 11월 7일이었으니 열흘이 지난 셈이다.

마음은 가을 끝자락을 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계절은 제 할 일을 놓치지 않는다.

초겨울 이즈음이면 마음이 늘 부산해지곤 했는데, 올해는 유난히 덜 부산스럽고 오히려 평안하다.

여러 해 앓았던 연말증후군도 일어나지 않을 듯하다.

겨울 들머리에 있는 오늘, 하늘도 바다도 새파란 물을 들여 단 한 점의 흠도 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제 만추를 놓아주고 두 팔 벌려 '겨울이 되기로' 한다.  겨울이 되어야 봄이 되는 것이니. 계절은 돌고 나도 흐른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 황규관

 

 

천 길 벼랑 같은 사랑을 꿈꿀 나이도 지난 것 같은데

이 한여름에 목마름의 깊이가 아득타

영등포역 맞은편 사창가 골목에서 눈이

마주친 여인의 웃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종말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새로운 시간은

갈라 터진 목마름을 넘어

텅 빈 몸뚱이가 될 때라 읽었는데

아직 태풍이 오지 않는다

거센 바람과 빗줄기가

허공을 힘차게 가른 다음에야

얹힌 슬픔은 북받치는 울음이 되겠지만

어지러운 인간의 길은

범람한 강물이 투명하게 지우겠지만

태풍은 지금 적도 부근에서 끓고 있는가

짓밟힌 골짜기에서 몸 일으키고 있는가

차마 절망하지 못해서

아주 아프게 그러나 빗물에 씻긴 무화과나무 잎처럼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가

목마름을 태울 새로운 목마름은

오늘을 절멸시킬 새로운 오늘은

 

 

 

 

 

밥 / 황규관

 

 

 

이게 다 밥 때문이다.

이런 핑계는 우리가 왜소해졌기 때문

수령 500년 된 느티나무 아래서

참 맑은 하늘을 보며

해방이란 폭발인지 초월인지, 아니면 망각인지

내가 내 맥을 짚어보았다

웃고 울고 사랑하고

그리운 동무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우리를 영영 떠날지도 모르지만

아들아, 밥은 그냥 뜨거운 거다

더럽거나 존엄하거나, 유상이든 무상이든

밥을 뜰 때 다른 시간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

정신도 영혼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이게 다 밥 때문이다

더 먹어라,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덜어주는 건

연민이나 희생이 아니다

밥은 사유재산이 아니니

내 몸을 푹 떠서 네 앞에 놓을 뿐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나무 아래서 걸어 나오니

아직도 지평선이 붉게 젖어 있다

 

 

 

 

황규관의 시집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다. 점자도서관 책꽂이에서 한눈에 들어왔으니, 우연의 선물로 너무 근사하다.

노동시로만 읽지 않아도 좋을 시들이 빼곡히, 뜨겁고도 차가운 노래가 한 장 한 장 펼쳐진다.

요즘따라 갓 한 밥 냄새가 참 좋다. 푸근하고 따스하다.  밥은 너의 몸, 나의 몸이었구나.

밥을 푹 떠서 벌써 비운 그릇에 한 숟가락 더 덜어주었던 살가운 기억, 그것으로도 족하다.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좀 더 읽고 또 옮겨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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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아이즈 2012-11-1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님 순간 황규관 시인을 황동규 시인으로 봤다는.. 어째 시풍이 다르다 했네요. ㅋ
첨 듣는 시인이지만 어째 리얼리즘 쪽으로 기운 듯.

저도 그만 겨울 준비를 해야 할 듯 - 시인 버전.
그나 저나 김장할 생각에 눈앞이 까마득...

프레이야 2012-11-18 23:15   좋아요 0 | URL
황씨 ㅎㅎ
저도 처음 본 시인인데 시가 아주 좋더라구요.
김장도 직접 하시는군요. 일도 하시면서 부지런하세요. 베리 굿나잇! 잘 자요, 팜님^^

M의서재 2012-11-19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 님, 오늘 저에게 참으로 필요한 시네요. 정말 좋아요.
밥을 먹었으면 밥이 될 줄도 알아야지. 뜨끔하며 갑니다.
아침 내내 살짝 우울했는데 이제야 정신이 돌아오네요.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2-11-19 20:48   좋아요 0 | URL
아침에 저를 깨우는 건 밥냄새에요. 갓 한 밥의 포실포실한 냄새. 나는 누구의 밥이 되어준 적 있는가ᆢㅎㅎ 안도현의 연탄 패러디에요. 늘 즐감하며 감탄하며 페이퍼 읽고있어요. 두 아기들과 편안한마음으로 저녁 보내시길요. ^^

자목련 2012-11-19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시집이 있어요(꼼꼼하게 읽지는 못했어요).. 반갑고 좋은!!

프레이야 2012-11-19 20:50   좋아요 0 | URL
아ᆢ자목련님 역시 시집 많이 읽으시니^^
좋은시가 많더군요. 본인에게 와닿으면 좋은 시이지요.

2012-11-19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두 팔 벌려 겨울이 되는 것이군요! 이 말이 어느 싯구보다 더 좋아요! 좋은 말 맘에 담아갑니다~^^

프레이야 2012-11-20 12:04   좋아요 0 | URL
섬님, 두 팔 벌려 와락.^^
겨울나무요!! 다 벗어던지고 두 팔 벌려 하늘을 안는 겨울나무, 저 그거 좋아하거든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요즘 맛나게 야곰야곰 먹고 있는 문정희 시집.

언어의 창조, 시의 창조, 세상의 창조. 파괴도 서슴치 않아.

잉태와 생산의 관능, 그 이름 다산의 처녀.

 

 

다산의 처녀 / 문정희 / 2010 민음사

 

 

 

 

 

 

이번 추석연휴가 다가오기 며칠 전부터 유난히 깨송편이 먹고 싶었다.

엄마에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려다 힘드실까봐 그만 뒀는데, 추석 날 저녁에 가보니 깨송편이 식탁에 있는 거다.

며느리랑 어린 조카 둘이랑 만들었단다. 오래오래 전, 엄마가 익반죽을 하고 꿀이 지르르 흐르게 깨속을 만들어주면

내가 90% 빚었던 그 깨송편을. 모양도 가지가지 크기도 가지가지, 좀 우스웠지만 얼른 한입 넣었다.

그런데 맛이 그게 아닌 거다. 달지도 않고 입에 착 붙지도 않고 윤기도 없고. 그래도 아무 말 않고 있으니 엄마가 먼저

송편이 옛날 맛이 안 나서 속상하다는 거다. 수입깨라 그렇단다.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예전에 모두 국산참깨라서

맛이 확실히 달랐다고. 실망한 얼굴로 맛 없어 하던 내가 마음에 걸렸던지 엄마는 그 다음날 내게 불쑥 전화를 하셨다.

송편 먹다가 맛이 없어 화나서 전화한다시며.ㅎㅎㅎ 

그래도 싸주신 깨송편 맛나게 먹었다. 속을 좀 많이 넣은 건 맛있더구만.^^

 

그날 옛날 사진첩이 거실에 나와 있었다. 뒤적여 보니 젊은 아빠 엄마가 들어있고 지금보다 풋풋하니 순수하고 참한

모습의 여동생, 지금보다 사프해 보이는 훈훈한 남동생, 그리고 지금보다 더 뽀얗고 반짝반짝한 내가 들어 있는 거다.

"나는 안 늙을 줄 알았다."

엄마의 말씀이셨다. 미모가 출중했던 젊은 날의 엄마사진을 보면 정말이지 세월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의 오십 초반 시절의 사진이 보였다. 아빠가 하시는 일을 늘 함께하며 바깥 출입을 잘 못하며 사셨던 엄마가

오십쯤 되니 바깥 활동도 하시고 원래 강한 지적 욕구도 채우고 어쩌면 그때가 엄마의 봄날이었을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나는 아파트로 두번째 이사를 하였고 엄마는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공부하셨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내 이사를 도울 생각에 긴 언덕길을 급히 내려오다 삐끗하여 발목뼈가 6조각이 나는 사고를 당했다. 골다공증이 있어 약간의 충격에도 뼈가 바스라진 거다. 정형외과에서 대수술을 하고 그해 무더위를 힘들게 보내셨다.

 

그러고보니 엄마의 무더위는 생에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세 번이다.

내가 고3일 때 폐결핵 진단을 받고도 휴학하지 않으려고 주사를 손수 놓아주시겠다고 매일같이 몇 달 동안

긴 언덕길을 오르내리셨는데 그해 여름의 무더위로 엄마는 더위 타는 체질이 되었다.

그리곤 다리를 다친 오십 세 여름을 지나, 5년 전 여름 직장암 수술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로 못 알아들을 헛소리를 하시던

회복실의 엄마.  수술 후 깨면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공격하는 걸 나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참담했던 심정.

 

오십에 다친 그 발목은 아직도 붓기가 남아있고 무리하면 욱신거린다며 발목을 들어 보이신다.

그곳의 피부색은 늘 푸르죽죽하다. 시무룩히 일별했지만 마음이 아프다.

엄마보다 한 살 아래 시어머니도 얼마전부터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 병원 다니며 깁스를 하고 계시더라.

수술밖에 답이 없다고. 나는 투덜거렸었는데 영 늙으신 어른들 뵈니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울컥하니 무거웠다.

두루 건강하시면 좋겠다.

 

올해 고희를 맞으신 어느 선생님 일을 하루 종일 도와 드리고 녹초가 되어 오면서,

오십 세, 꿈도 자존심도 충천했던 엄마의 그 시절을 돌려드리고 싶다는 되지도 않을 생각이 든다.

하기야 오십 세는 여자에게만 있겠나. 나는 아직 오십은 멀었(다고 할 수 있을까?)지만.^^

그저 항상 '지금'이 황금시절인 거지. 고죠~ ㅋㅋ

 

 

 

 

 

오십 세

 

 

 

/ 문 정 희

 

 

 

나이 오십은 콩떡이다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상 위의 콩떡이다

오늘 아침 눈을 떠 보니 글쎄 내가 콩떡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내 죄는 아니다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하여간 텅 빈 이 평야에

이제 무슨 씨를 뿌릴 것인가

진종일 돌아다녀도 개들조차 슬슬 피해 가는

이것은 나이가 아니라 초가을이다

잘하면 곁에는 부모도 있고 자식도 있어

가장 완벽한 나이라고 어떤 이는 말하지만

꽃병에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반쯤 상처 입은 꽃 몇 송이 꽂혀 있다

두려울 건 없지만 쓸쓸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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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0-04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을 드셨군요~ 정말 예전처럼 우리 땅에서 키운 것을 먹어야 하는데 안타깝죠.ㅜ
문정희 산문집만 읽고 아직 다산의 처녀랑 최근시집은 안 샀는데...
'콩떡이 되어 있었다'는 시인은 여전히 스카프로 멋을 내는 멋쟁이였어요.^^

프레이야 2012-10-05 08:50   좋아요 0 | URL
네, 언니^^ 신기하게도 먹고 싶었던 걸 해두셨더라구요^^
예전 맛은 덜 났지만 그래도 맛났어요.
문정희 시인은 예순 중반도 넘었지만 참 젊고 멋쟁이 같아요. 시도 참 좋구요.
언니는 만나봤으니 더 좋으셨겠어요. ^^

blanca 2012-10-0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깨 송편 완전 좋아해요. 안 그래도 어제 아이 친구 할머니분이 송편 주셔서 놀이터에서 먹었어요^^;; 아아, 프레이야님 어머니에게 이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송편 주신 할머니랑 잠시 했었는데 마음이 참 스산해지더라고요. 점점 약해지시는 부모님, 나이들어가는 나. 위에 문정희님의 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12-10-05 16:44   좋아요 0 | URL
놀이터에서 만나게되는 할머니는 얘기 나누면 참 좋아들하시죠. 아이 어릴적 저도 놀이터친구 있었어요ㅎㅎ 할머니친구요. 추석엔 역시 송편을 먹어야 제맛이에요! 블랑카님도 깨송편 좋아하신다니 더더 친해지고 싶다능ㅎㅎ 문정희 시인은 참 뜨거운 것 같아요. 저 시말고도 마음에 콕 박히는 게 많더라구요^^

자목련 2012-10-05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는 밤 송편이 제일 좋았어요. 요즘은 콩이 맛나더라구요. 저도 조만간 깨 송편을 좋아하겠죠?
엄마랑 지난 시간을 이야기할 수 있다니, 정말 정말 부러워요.

프레이야 2012-10-05 16:48   좋아요 0 | URL
혹시 자목련님 엄마는ᆢ?? ㅠ
어머니 말고 엄마요.
밤송편도 먹고싶어져요. 천고마비ㅎㅎ
전 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콩을 좋아해야 할까봐요. 건강을 위해^^

마녀고양이 2012-10-0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여자는 항상 '지금'이 황금 시대예요, 언니... ^^
우린 항상 한 미모에, 멋진 여자들이잖아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우, 하늘이요, 아주 높아요, 파아랗고 높아요.
가을이예요, 가을! 아하하, 자전거를 파주까지 타고온 이후 엉덩이 욱신거려 죽겠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22   좋아요 0 | URL
한 미모 ㅋ 저렇게나 많은 'ㅎㅎ'은 뭐야요? 진한 긍정? 응응?? ㅎㅎ
요즘 자전거 타기 딱 좋은 계절이죠. 파주까지요? 몇시간 걸려요?
나도 더 타고 싶어도 엉덩이 아파서 오래 못 타는데요.ㅎㅎ
의사가 운동을 권하던데 안 그래도 자전거 좀 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생각만하다 관두는 나는 ㅠㅠ 아니고 진짜 불끈!!

2012-10-05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시 너무 재밌잖아요~ㅋ

오십, 자존심도 꿈도 충천했던 엄마. 그러고 보니, 저희 엄마도...
결핵주사 이야기, 프레이야님 어머니가 위대하시다는 생각 절로 들었어요.

프레이야 2012-10-06 14:07   좋아요 0 | URL
섬님, 문정희 시인의 시, 이것 말고도 재밌는 거 많아요. ㅎㅎ
또 소개할게요. 이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아는,, 뭐 그런 게 있나봐요, 엄마랑은.

스파피필름 2012-10-05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깨송편 이야기는 포근하고, 엄마 이야기는 쪼금 가슴이 아프고, 시는 참 좋네요.
그럼요.. 지금이 황금시절인거죠. ^^

프레이야 2012-10-06 14:10   좋아요 0 | URL
스파피필름님도 황금시절 누리세요^^
오늘낮엔 좀 덥다 싶으네요. 차에 수명 다한 부품 교체하며 서비스센터에서 인사 드려요^^
낡고 익숙해진 것들과의 결별! 필요한 것 같아요. 하물며 차도 그러게요.

드림모노로그 2012-10-0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시간은 안 가고 나이만 왔다

앙큼한 도둑에게 큰 것 하날 잃은 것 같다


요즘 너무 바쁘기도 하고요. 문득 이 시를 읽는 순간 울컥해지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ㅋㅋㅋ
시간 날때 여유있게 들려서 서재 구경 하고 가겠습니다 ~
서재가 무척 알찬 느낌이 들어요 ^^ 무척 배우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
ㅋㅋㅋ

프레이야 2012-10-06 14:13   좋아요 0 | URL
울컥!까지 하시다니 많이 공감되셨나 봐요. ㅎㅎ
드림모노로그님 서재가 더욱 알차던 걸요:)
주옥같은 리뷰와 도서들 저도 차근차근 읽어볼게요.
'잃어버린 시간들' 리뷰는 특히 제게 너무 좋았습니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면 시집을 찾게된다. 특히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면 더욱,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가는대로.  

시인의 상상력이 뻗어간 언어는 한없이 부럽기도 두렵기도 한 세계다. 나는 시인의 눈을 흠모하는 사람에 불과하여 늘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길 여러 해. 그렇다고 부지런하고 성실한 독자도 못 되고 그저 내게 시란 문득 생각나면 들르고픈 한갓진 찻집 창가 한구석 비슷한 것이다. 게으르지만 끊이지는 않는 지리멸렬한 시읽기. 너무 어려우면, 뭐야 이렇게 힘들어서야 원... 내팽개치고 싶다가도 어느새 마음 기울이고 있는 아둔한 연애 같은 것. 사는 일이 연애질과 닮았으니. 무심결에 만난 반짝반짝 빛나는 한 구절에도 불 꺼진 방에 불이 켜지듯. 시는 입술로 읽을 것!

 

<자두나무 정거장>의 박성우 시인이 '시란 아침밥 같은 것'이라고 느릿하고 구수한 전라도 말로 고백할 때, 아 그렇겠구나, 생각했더랬다. ebs fm 시콘서트 감성지기라 부르는 강성연의 질문 "시란 무엇이에요?"에 이은 대답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아침밥을 잘 안 챙겨먹는다고, 그렇지만 어느 날 한 번이라도 아침밥을 챙겨먹고 나온 날은 속이 참 든든하다고, 시는 그런 아침밥 같은 것이라고. 천년초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는 어느 농부가 아침이면 천년초들 앞에서 백석의 시를 읽어주며 하루를 여는 장면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다. 백석의 시를 아침밥으로 먹고 자란 천년초는 어떤 영혼의 성분을 지니게 될까 싶었다. 업의 업의 업의 인연법으로 몇 생을 살겠지만 우리 서로 구업은 짓지 말자. 아마도 농부는 그런 마음으로 천 년을 살자고 시를 아침밥으로 먹이고 또 먹었을까. 포슬포슬 갓 지은 하얀 밥알을 호호 불어 동글려 삼키듯.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만 올라 안타까운 고은 시인의  시집.

'시인 생활 50여년, 시집 여럿'이 책날개에 적힌 약력이다.

다른 시집보다 좀 두껍다. 장도 나눌 필요 없이 모두 114편의 시가 수록되었다.

읽다보면 새파란 날을 세우고 번득이는 눈으로 세상의 사막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청년의 영혼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게 아닐까. 여든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무지무지한 허허망망의 울음'('타클라마칸 사막' 중)이 갖는 힘, 거침없이 약동하는 상상력, 변혁과 초월의 열망,

언어 이전의 언어 그 너머의 너머를 향한 강렬한 바람, 발전과 발명에게 내리는 멈춤의 포고, 

세상 약자들에 대한 연민과 인식의 환기. 사람에 대한 믿음,

시간의 잔인함과 세월의 무상함에 무릎 꿇지 않는 패기와 생명력, 토속적이고 다정한 시어들, 생경한 조합들.

개그 익살 웃음이 판을 치는 세상이 못마땅해 '시 너 죽어줘 푹 죽어줘'('시에게' 중)라고 하면서도

'이거 죽어도 헛소리 아니오라 다 시가 되느니 다 시이니 세상이 시이니' 라고...('취중' 중)

 

시인의말, 에서 시인은 <내 변방은 어디 갔나>에 실린 모든 시 못지않게 절창이다.

 

그러므로 나는 태생(胎生)이나, 난생(卵生), 습생(濕生) 넘어서 저만치 실안개 어리는 化身일 것이다.

실재와 부재의 경계를 모르는 그것이며, 구상과 추상의 담장도 없는 맨마당의 그것. 그것도 아닌 그것.

 

오래전의 죽은 별로부터 산 채로 오고 있는 뭇 시대의 별빛을 받아오는 내 세월에 더이상 무슨 종교가 있겠는가.

오로지 내 몇십년의 백지가 아직까지도 내 교조(敎祖)이다.

다못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철없이 철을 읽듯이 어떤 깨달음도 느낌도 굳이 물리치고 싶은 나는 오늘도 그저 공으로 운다.

울음이야말로 다른 세계에서 내 세계에 귀기울이는 굿이다.  (232, 233p)

 

 

 

마지막 시 한 수만 인용.

 

 

화개(花開)

 

 

바야흐로 꽃의 날이다

 

다 그만두고

너도 울어라

나도 울어라

 

 

 

고은의 <내 변방은 어디 갔나>와 곽재구의 <와온 바다>는 팔월 말에 도서관에서 업어와 야곰야곰 보면서 9월의 절반을 지났다. 반납 기한을 넘긴 불량대출자를 자처하며. 9월은 내 탄생월이기도 해 나이만 한 개 더 먹고 지나가는 것 같다고 다소 생각이 많아지는 즈음에 선물처럼 내가 꼭 들어야될 말을 들었다. 불평하지 말고 지금에 감사하고 룰루랄라 하며 살라고, 기도하고 명상하며 덕담만 하라고. 콕 집어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지도 모른다. 불평은 자신만을 위한 기도에서 온다고 했다. 아닐 땐 발버둥치지 말고 엎드려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 멀가까이서 늘 나의 안녕을 염려하고 물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 눈물나게 고맙다. 잘 지내요...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잘 지냈어요... 잘 자요. 친구와도 동감했듯 '별일 없이 산다'는 건 쉽지 않고도 고마운 일이다.

 

 

와온 바다, 곽재구

 

고은 시집 하나 더 <두고 온 시>

 

 

 표지가 아주 산뜻하다.

 문정희 <다산의 처녀>, 장석남 <젖은눈>과 함께 도착.

 

 

 

 

 

 

 

 

 

 

 

 

 

고은 시집 검색하다... 이런 여행에세이가 있었네. ^^  저 작가들 이름과 목차만 훑어봐도 급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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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19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년초들 앞에서 백석의 시를 읽어주는 농부. 그분은 시인보다 더한 분이시군요.

이번 가을, 든든하시겠습니다 ^^

프레이야 2012-09-19 21:03   좋아요 0 | URL
나인님, 든든해요!!
그 농부처럼 누군가에게 하루를 시를 읽어주는 것으로 시작하면 어떨까 싶어요.
자신에게부터요.^^

비로그인 2012-09-19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 하면..저는 고정희님이 떠올라요...백여권 남짓한 시집들을 책장한구석에 잘 안보이게 쌓아 두었는데...이제 다시 꺼내볼 때가 온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2-09-19 21:05   좋아요 0 | URL
아른님, 반갑습니다.^^
다른 분 서재에서 뵌 것 같아요. 고정희 시집을 소장하고 있지 않아 부럽습니다.
잘 안 보이게 쌓아두신 시집들 하나씩 가을바람 쐬어주시지요.^^ 좋을 것 같아요.

치니 2012-09-19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팽개치고 싶다가도 어느새 마음 기울이고 있는 아둔한 연애 같은 것.' - 끄덕끄덕.
프레이야 님 오늘 이 글, 참 좋아요. :)

프레이야 2012-09-19 21:06   좋아요 0 | URL
치니님, 삶을 산다는 게 참 연애질 같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좋아해주셔서 전 느무 기쁘지요.^^

2012-09-19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19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자목련 2012-09-2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친구와 고은 시인의 <차령이 뽀뽀>라는 동시집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서 괜히 더 반가운^^
전 <내 변방은 어디 갔나>과 <순간의 꽃>을 가까이 두었지만 차분히 읽지 못했어요.
프레이야님 덕분에 그 시집을 펼치는 오후가 될 듯해요...

프레이야 2012-09-19 21:09   좋아요 0 | URL
차령이 뽀뽀!! 이름이 너무 이뻐요. 동시집이 있군요.
고은 시인의 언어와 상상력은 정말이지 뭐라 부연할 말이 있을가요.
'고통의 꽃'도 있군요. 역시 문학을 사랑하시는 자목련님^^ 고마워요.

자목련 2012-09-20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순간의 꽃>인데 고통의 꽃이라고.. 수정했더니 시각이 바뀌네요.
읽고 또 읽어야 진짜 사랑하는 건데.. 그렇지 못해요..

프레이야 2012-09-21 09:33   좋아요 0 | URL
네, 순간의 꽃!!! 바로 찾아서 찜해둘게요.

들꽃 2012-09-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에 먼댓글로 오게 된 곳이네요! 시란 아침밥 같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잘 거르지만, 한 끼 먹고 온 날은 든든하다고. 아직도 시를 즐겨 읽지는 못하지만, 확실히 이전에 비해서 시만이 줄 수 있는 선물이 어떤 건지 어렴풋이 깨닫고 있어요. 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시읽기를 권했는지.

글 첫 문단이 좋아서 세번 곱씹어 읽었습니다. 다른 이의 글을 읽으면 이래서 괜한 충만감이 드나봐요.

프레이야 2012-09-25 11:14   좋아요 0 | URL
서늘한달빛님, 고맙습니다.
작은 것에서도 충만할 줄 아는 능력, 시 읽는 마음이 아닐까 싶네요.
가을햇살 만끽하시길요^^
 

 

[내꺼]

 

 

김선우

 

 

 

젊은 여자 개그맨이 TV에서 연애시절 받은 편지를 읽는다

편지는 이렇게 끝난다 [니꺼가]

세 음절의 그 말을 힘주어 읽은 후 어깨를 편다 젊은 남자 가수가

노래를 한다 밥을 먹다가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해진다

'내꺼 중에 최고'가 노래 제목이다 내꺼 중에 최고......

 

보채는 당신에게 나는 끝내 이 말을 해주지 않는다

[누구꺼? 당신꺼 내꺼]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게 싫어, 라고 말하려다 관둔다 내가 좀더 현명하다면

[당신꺼]라고 편안히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여인을 업어

강 건네준 후 여인을 잊는 구도자의 자유자재처럼

모두에게 속하고 어디에도 영원히 속할 수 없는

말이야 천만번  못하겠는가 내 마음이 당신을 이리 사랑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당신꺼]라고 말하지 않는다

햇살을 곰곰 빗기면서 매일 다시 생각해도

당신이 어떻게 내 것인가 햇살이 공기가 대지가 어떻게,

내 것이 아닌 당신을 나는 오 늘 도 다 만 사 랑 한 다......

 

 

 

 

 

 

 

 

 

 

 

 

 

 

 

 

 

 

-------------------------

 

햇살은 바람은 공기는

바다는 하늘은 대지는 공평하다.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인 그것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속한다.

 

'이 모든 소유격에 숨어 있는 마음의 그림자노동'

 

그래서 힘들었구나, 그래서 힘이 드는구나.

소유하려함으로써 나는 노동을 하는구나 중노동을 하는구나.

그것도 햇살의 반대편 그늘의 노동을.

다만 사 랑 하 면 될 일을.

다만 고 마 워 하면 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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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8-11 0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격'이라는 문법 용어에도 우리는 민감해지지요.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거의 본능인가요.
어차피 갈때는 다 두고 갈것을 말이지요.
김선우 시인의 낭낭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12-08-11 10:12   좋아요 0 | URL
소유격은 목적격을 염두에 두는 것이니, 목적격 없이 주격만으로 사랑하는 삶은
어떤 걸까 생각해보게 되어요, 나인님.^^
김선우 시인은 산문도 참 낭낭한 것 같던데 나인님은 목소리를 직접 들으신 것 같으네요.
입추가 지났지만 더위는 아직 기승이에요. 오늘 비가 온다더니 일기예보가 전혀 맞질 않네요.
모쪼록 즐기는 여름 되시길^^

L.SHIN 2012-08-11 18: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살을, 대지를, 공기를, 바다를, 이 지구를
내 것이 아닌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고, 나도 이 세상 그 무엇도 소유하려고 하지 얂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은 이런 나를 잘 이해 못 하는군요(웃음)

약 15년 만이네요, 내 마음에 닿은 시가.

프레이야 2012-08-11 19:26   좋아요 0 | URL
이해는 원래 불가한 영역인긴봐요. 지구인은요ㅎㅎ
외계엘신님은 지구도 사랑하네요. 역쉬!
시가 15년만에 마음에 와닿으셨다니 너무 그리
오래진않은것 같아요^^ 무언가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요뭐. 히히~~

실비 2012-08-11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유하려함으로써 나는 노동을 하는구나 중노동을 하는구나.'
이부분이 왠지 공감이 가는 이유는 몰까요. ㅎㅎㅎ
여러생각과 공감이 교차되는시네요 ^^

프레이야 2012-08-12 00:08   좋아요 0 | URL
실비님, 그 구절은 제 소감이에요.^^
사랑을 소유하지않고도 사랑을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싶어요.

네꼬 2012-08-13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가 시고 어디가 감상인지 알 수 없는, 통째로 아름다운 페이퍼군요!

프레이야 2012-08-13 19:15   좋아요 0 | URL
네꼬님, 박성우 시인은 '시는 아침밥'이라고 말하던데요
제게 시는 뭘까, 하다가도 이런 시 한 구절에 그냥 와락 안길 때가 있어요.
품넓은 가슴 또는 기댈 수 있는 어깨 같은 것이랄까요. 히히~ 좋아요, 네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