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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




이 병 률




칼갈이 부부가 나타났다
남자가 한번, 여자가 한번 칼 갈라고 외치는 소리는
두어 번쯤 간절히 기다렸던 소리
칼갈이 부부를 불러 애써 갈 일도 없는 칼 하나를 내미는데
사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들어서기엔 좁은 욕실 바닥에 나란히 앉아
칼을 갈다 멈추는 남편 손께로 물을 끼얹어주며
행여 손이라도 베일세라 시선을 떼지 않는 여인

서걱서걱 칼 가는 소리가 커피를 끓인다
칼을 갈고 나오는 부부에게 망설이던 커피를 권하자 아내가 하는 소리
이 사람은 검은 물이라고 안 먹어요
그 소리에 커피를 물리고 꿀물을 내놓으니
이 사람 검은 색밖에 몰라 그런다며,
태어나 한번도 다른 색깔을 본 적 없어 지긋지긋해한다면 남편 손에 꿀물을 쥐여준다
한번도 검다고 생각한 적 없는 그것은 검었다
그들이 돌아가고 사내의 어둠이 갈아놓은 칼에 눈을 맞추다가 눈을 베인다
집 안 가득 떠다니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만 같다
불을 켜지 않았다
칼갈이 부부가 집에 다녀갔다

 

----------

 

어둠이 갈아놓은 칼!

그것이 내 눈을 베다니, 그리고 내 영혼과 육체가 거하는,

내 집 안 가득 떠나디는 지옥들마저 베어낼 것 같다니..

나는 올 한 해동안 어둠이 갈아놓은 칼 한 자루 잘 벼려 놓았는지 모르겠다.

막연한 두려움과 비겁함에 어둠을 피해다녔던지도 모르고

그것에 바르르 성마른 태도만 취했던지도 모른다.

어둠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것에 푹 빠져 그것의 한 가운데에 들어앉아있어 볼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불을 켜지 않았다고 말한 것일까.

그 어둠이 나의 힘이 될 때까지 상처 입은 도둑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어볼까.

어둠을 이겨보겠다거나 떨쳐보겠다고 쉽게 말하지 않고.

그랬다!

어느 날 밤이었다.

어둠의 화단에 숨은 검은 도둑고양이의 눈이 희번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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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21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춤추는 인생님이 남겨놔야 하는 페이퍼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아주 잠깐 했다는..^^

프레이야 2007-12-21 09:31   좋아요 0 | URL
ㅎㅎ 메피님, 춤인생님이 좋아하시는 병률님을 좀 빌려왔어요.
(실은, 춤인생님이 주신 선물이었거든요 ^^) 아껴서 읽고 있어요.

춤추는인생. 2007-12-21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둠을 피해다니지 말고,그 어둠속에 푹 빠져야 한다는 말씀 깊이 공감해요 님.


아. 이렇게 가끔씩 흘려주시는 병률작가의 시. 슬쩍 보고 책장속에 묻히는 시집이 아니라. 님의 손에 오랫동안 머물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어요 혜경님^^




프레이야 2007-12-21 23:05   좋아요 0 | URL
님, 아껴서 야곰야곰 꺼내 먹고 있어요.
하나하나 너무 좋아요^^ 오늘 하루 어땠어요.
전 오늘도 가슴 벌렁거리며 아무것도 못 한 것 같아요.
님에게 카드도 아직 안 보내고 뭐하나 몰라, 이사람이..
좀 늦게 갈거에요^^
 

 해거리

 

그해 가을이 다숩게 익어가도
우리 집 감나무는 허전했다

이웃집엔 발갛게 익은 감들이
가지가 휘어질 듯 탐스러운데

학교에서 돌아온 허기진 나는
밭일하는 어머님을 찾아가 징징거렸다
왜 우리 감나무만 감이 안 열린당가

응 해거리하는 중이란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해걸이할 땐 위를 쳐다보지 말고
밭 아래를 쳐다봐야 하는 법이란다

그해 가을이 다 가도록 나는

위를 쳐다보며 더는 징징대지 않았다
땅 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
엎드려서
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
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
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어머님은 가을걷이를 마치신 후
감나무 주위를 파고 퇴비를 묻어주며 성호를 그으셨다


꽃과 열매를 보려거든 먼저
허리 굽혀 땅심과 뿌리를 보살펴야 하는 거라며


정직하게 해거리를 잘사는 게
미래 희망을 키우는 유일한 길이라며

 --------

 

 

바람결 님 서재에서 가져왔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시점에서 이 시를 마음의 선물로 받고 싶어서요.

차분히 생각하게 해주는 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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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2-19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거리'도 있군요. 하하


프레이야 2007-12-19 10:45   좋아요 0 | URL
한사님, 투표하고 오셨어요? ^^
해거리 잘 하고 거듭 나고 싶어요.

소나무집 2007-12-19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땅 속의 뿌리가 들으라고 나무 밑에/엎드려서/나무야 심내라 나무야 심내라/땅심아 들어라 땅심아 들어라/배고픈 만큼 소리치곤 했다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프레이야 2007-12-19 13:14   좋아요 0 | URL
소나무집 님, 님의 방명록에 책 3권 소개해 골라두었어요.
괜찮을라나 모르겠어요.^^
 

다락방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랍니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풍경이에요.

 

 

동행

                                                -박성우


멈추어 있는 듯
움직이는 리어카 더얼컹,
지푸라기 낀 바퀴는 굴러
관촌 주천들녘 농로 돌아
살얼음 낀 오원천(烏院川)
주천다리에 멈춘다

손잡이 놓은 여자는
콧물 훔친 목장갑 벗고는
봇짐처럼 실려온
여자아이의 볼을 비벼준다
킁, 해도 가만있는 아이
물코를 닦아 몸뻬바지에 닦는다

다리 위의 두 여자는
조용조용 중얼중얼
들판을 보고 먼 산을 본다

짐칸에 탄 아이가
고개 끄덕이자 몸뻬바지는
허리를 굽혀 리어카 당긴다

리어카 끌고 마을로 가는
몸뻬바지 며느리도
아이가 된 시어머니도
된서리 맞은 허연 볏단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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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12-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후후후후- 이게 여기까지 왔군! 아 좋아라.

다락방 2007-12-07 23:08   좋아요 0 | URL
으쓱 :)

소나무집 2007-12-07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어머니한테 치매가 온 모양이네요. 며느리도 같이 늙어가면 친구가 되는 것 같죠? 시어머니가 건강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네요.

프레이야 2007-12-07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덕분이지요^^
소나무집님, 그래요. 아이로 돌아간 어머니..
살청님, 시 선물도 명함 선물 못지않게 좋아요.
다락방님의 외모는 눈부신 걸로 이미 증명되었다구요.ㅎㅎ

다락방 2007-12-0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혜경님.
옮겨와주기도 하셔서 정말 감사해요.
읽으시고 좋아해주기만 하시면 그걸로 정말 족했거든요.
읽으면서 혜경님 생각했었어요. 아, 혜경님이 참 좋아할 만한 시다, 하고 말이지요.

얼마전에 혜경님의 에세이-그 뭐지요? 배꼽이랑 빨간색이 나오는 그 에세이요-
혜경님처럼 글 잘 쓰는 엄마를 둬서, 혜경님의 자녀들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눈부신 글이었답니다.
:)

프레이야 2007-12-07 23: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늘 마음으로 고마워하는 거 아시죠? 으쓱^^ 헤헷..
딸은 늘 애틋해요. 여자끼리의 무언가가 있지요.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Dylan M. Thomas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
Old age should burn and rave at close of d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Garve men, near death, who see with blinding sight
Blind eyes could blaze like meteors and be gay,
Rage, rage against the dying of the light......

--------


순순히 저 휴식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딜런 M. 토머스


그대로 순순히 저 휴식의 밤으로 들지 마십시오.
하루가 저물 때 노년은 불타며 아우성쳐야 합니다.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죽음을 맞아 침침한 눈으로 바라보는 근엄한 이여,
시력 없는 눈도 운석처럼 타오르고 기쁠 수 있는 법,
희미해져 가는 빛에 분노하고 또 분노하십시오.



-------




* Dylan M. Thomas

영국시인(1914~1953) 첫 시집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며 젊은 천재시인으로 인정 받았고

이후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위선에 맞서고 전쟁을

증오하며 생명이 넘치는 시를 쓰고자 했다.





-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축복>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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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03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딜란 토마스의 시 좋아요. 마구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군요.

프레이야 2007-11-04 09:01   좋아요 0 | URL
새초롬님, 굿모닝! 늦잠을 달게 주무시고 계시려나요.^^
네, 분.노.에요 (님에게 아니고)
방금 카페라떼 만들어 시나몬 살짝 뿌려서 마셨어요.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11월, 무명씨의 또하루를 시작하며~~~  남은 두 달을 생각하며~


I'm Nobody

Emily Dickinson


I'm Nobody! Who are You?
Are you - Nobody - too?
Then there's a pair of us!
Don't tell!
They'd banish us - you know!

How Dreary - to be - Somebody!
How public - like a fog -
To tell your name-
the livelong June-
To an admiring bog!

--------


무명인


난 무명인입니다! 당신은요?
당신도 무명인이신가요?
그럼 우리 둘이 똑같네요!
쉿! 말하지 마세요.
쫓겨날 테니까 말이에요.

얼마나 끔찍할까요, 유명인이 된다는 건!
얼마나 요란할까요, 개구리처럼
긴긴 6월 내내
찬양하는 늪을 향해
개골개골 자기 이름을 외쳐대는 것은.


*Emily Dickinson

미국 시인(1830~1886). 자연과 사랑, 청교도주의를 배경으로 한 죽음과 영원 등의 주제를 담은 시들을 남겼다. 평생을 칩거하며 독신으로 살았고, 죽은 후에야 그녀가 2000여편의 시를 쓴 것이 알려졌다.




-장영희의 영미시산책 <생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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