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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고정희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 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 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정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나이를 제대로 꽃피우기란

외로움을 제대로 바로 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 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는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그놈의 미운정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나이 마흔 고개를 제대로 건사하기란, 가을바람처럼 솔솔 불어드는 흔들림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내 감정에 휘둘려 취하기를 제대로 건사하기란, 집착과 헛된 욕심들을 제대로 내려놓기란,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인 얼굴로 내 얼굴을 제대로 건사하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과연 그래야 잘 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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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09-09-0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고정희님 시, 너무 좋아요.^^

프레이야 2009-09-04 23:29   좋아요 0 | URL
꿈섬님 고마워요.^^

바람결 2009-09-05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하나라도 제대로 건사할 줄 알면 참 좋겠습니다.
고정희 님의 시 한 편이 제겐 '작은 비수'가 됩니다.
모쪼록 내내 잘 건사하시기를, 내내 평안하시기를요!

프레이야 2009-09-05 09:17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댓글이 제겐 오늘따라 더, 낮은 기도의 말 같습니다.
차분히,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힘이 되어 고맙습니다.

2009-09-05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5 2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같은하늘 2009-09-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많은 것들을 건사하려면 인간의 도를 넘어서야하는건 아닌지...
그중에 하나라도 제대로 건사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

프레이야 2009-09-06 05:56   좋아요 0 | URL
그러지 못하니 천생 사람이죠 뭐.
인간의 도는 넘어서지 못하겠지요. 죽을때까지요.^^
 

   

The Road Not Taken

-Robert Frost




Two roads diverged in a yellow wood,
And sorry I could not travel both
And be one traveler, long I stood
And looked down one as far as I could
To where it bent in the undergrowth;

Then took the other, as just as fair,
And having perhaps the better claim...
Oh, I kept the first for another day!
Yet knowing how way leads on to way,
I doubted if I should ever come back.

I shall be telling this with a sigh
Somewhere ages and ages hence:
Two roads diverged in a wood, and I-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가지 못한 길

노랗게 물든 숲속의 두 갈래 길,
몸 하나로 두 길 갈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에 서서
덤불 속으로 굽어든 한쪽 길을
끝까지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른 쪽 길을 택하였다. 똑같이
아름답지만 그 길이 더 나을 법하기에.
아, 먼저 길은 나중에 가리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길은 또 다른 길로 이어지는 법.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먼먼 훗날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 쉬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느 숲속에서 두 갈래 길 만나 나는 -
나는 사람이 적게 다닌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게 달라졌다고  ('축복' 98-99쪽)

 

 장영희 선생은 이 시를 번역할 때 왜 

 "가지 못한 길"로 하셨을까. 

 "가지 않은 길"이 더 맞을 듯한데... 

   

  이 책에 김점선 화가가 그려넣은 그림이 오늘따라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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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6-2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좋은 십니다^^

프레이야 2009-06-24 19:27   좋아요 0 | URL
흔히들 알고 있는 시이지만 오늘 아침 다시 읽어보며 전과는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하늘바람 2009-06-24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를 처음 만났을 때 참 좋다 했어요
그땐 어려서 특별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의미가 없었어요. 고등학교 때여서
하지만 살아갈 수록 점점
가지 못한 길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의미가 생겨나네요
수많은 길들이요

프레이야 2009-06-24 19:27   좋아요 0 | URL
살면서 점점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생각이 나네요.
왜 가지 않았을까. 용기가 없어서? 우물 안 개구리여서?

hnine 2009-06-2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번 보면 열번 다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시 같아요.
오늘은 마지막 두 줄이 특히 눈에 들어오네요.
사람들이 많이 간 길을 택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간 길에 끌리는 사람이 있고,
그것이 그 사람 일생에 많은 차이를 가져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요.

프레이야 2009-06-24 19:29   좋아요 0 | URL
마지막 두 행이 의미있지요.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은 길을 택한 사람, 그를 우린 영웅이라 부를 수도 있을까요.
소소한 의미로 봐도 그런 사람은 쉽지 않지요.

무해한모리군 2009-06-24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역시 마지막 두행이 오늘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네요.
많은 사람이 다닌 길을 선택해서 그런가..

프레이야 2009-06-24 19:30   좋아요 0 | URL
저도 많은 사람이 다닌 길을 아무 생각 없이 선택했던 것 같아요.
다시 살라면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 어떨지 저 자신도 모를 일이죠.^^

비로그인 2009-06-24 16: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뒤돌아보지 말자!가 모토랍니다. 단순(혹은 무식)하게, 씩씩하게!

프레이야 2009-06-24 19:30   좋아요 0 | URL
만치님!! 야호! 그거에요.
뒤돌아보면 소금기둥이 될거에요.
묵묵히 앞으로 가는 거에요, 우리.

2009-06-25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5 19: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06-26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가지 못한 길~~~을 하나라도 줄여봐야지요.
그래서 주말에 부산역으로 고고~~~ 알죠?^^

프레이야 2009-06-26 01:21   좋아요 0 | URL
에너지 오기언니~~~ 역시~~~
넘 좋아요. 대환영이야요!
뽀송이님에게도 낼 연락해보려구요.^^

향기 2009-06-26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좋아하는 두 사람 ㅎㅎ
프레이야님 페이퍼보고 저도 방금 질렀어요 ^ ^

프레이야 2009-06-27 08:47   좋아요 0 | URL
호호~ 마음에 쏙 드실거에요^^

꿈꾸는섬 2009-06-27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이 시를 늘 품고 다녔었는데 시처럼 살고 있진 않네요.ㅎㅎ
하지만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 있는거죠?

프레이야 2009-06-27 08:48   좋아요 0 | URL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을때가 더 불행한 걸까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 이 말을 타고 모든 음악의 출생지로 가볼 수는 없을까

김 경 주


오늘 밤은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잠든 말들을 깨워서
추위를 이겨낼 수 있도록 술을 먹인다
구유를 당겨 물 안에 차가운 술을 부어준다
무시무시한 바람과 산맥이 있는 국경을 넘기 위해
나는 말의 잔등을 쓸어주며
시간의 체위(體位)를 바라본다
암환자들이 새벽에 병실을 빠져나와
수돗가에서 고개를 박은 채
엉덩이를 들고 물을 마시고 있듯

갈증은, 이미지 하나 육체로
무시무시하게 넘어오는 거다

말들이 거품을 뱉어내며 고원을 넘는다
눈 속에 빨간 김이 피어오른다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취한 말들이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이 말들의 고삐를 놓치면
전속력으로 취해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잠시 설원 위에 나의 말을 눕힌다
말들의 뱃살에 머리를 베고
(우리는 몇 가지 호흡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둥둥둥 북을 울리듯 고동치는 말의 염통!
말의 배 안에서 또 다른 개인들이 숨쉬는 소리
들려오는 것이다
밤하늘, 동굴의 내벽에서 들려오는 바람의 연령
나를 조금씩 인용하고 있는 이 침묵은
바닥에 널브러진 말들의 독해처럼
나에게 있는 또 하나의 육체,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말의 등에서 몇 개의 짐들을 떼어내준다

말들이 다시 눈 덮인 고비 사막을 넘기 시작한다
그중엔 터벅터벅 내가 아는 말들도 있고
터벅터벅 내가 모르는 말들도 있다
그렇지만 오늘 밤엔 취한 말들만 생각하기로 한다
음악 속으로 날아가는 태어날 때부터
바퀴가 없는 비행기랄지
본능으로 초행을 떠난 내감(內感) 같은 거, 말이
비틀거리고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분만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의식을 향해 말은 제 깊은 성기를 꺼낸다
기미(機微)란 얼마나 육체의 슬픈 메아리던가

그 사랑은 인간에게 갇힌 세계였다


 

- 김경주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 중

 

----

 

 

의식을 향해 연정을 호소하지 않아도 되는 말은 얼마나 행복한가.

말과 의식의 사랑.

의식의 바닥자리에 한바탕 분만의 피를 뿜어내야 할

필요가 없는 말, 그런 욕구가 없는 말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그런 언어는, 그런 동물은 얼마나 순수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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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지기 사진)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호두나무 잎에 어둠이 뭉쳐 있을 때 그 끝에서 새벽을

기다리는 외로운 산까치처럼 나는 살아왔다

거친 꽃을 내뱉으며 늙은 영혼의 속을 꺼내 보이는 할미꽃처럼

나는 살아왔다

그러나,

허물을 벗어놓고 여름을 우는 매미처럼

하나의 열망으로 노래하리니

꾹꾹 허공에다 지문을 눌러찍으며 물결쳐가는 노래여

절절 끓는 아랫목으로 불 들어가듯 가는 노래여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문태준 시집 <맨발> 중,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

*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는 스페인 여가수 마리나 로쎌의 노래, "가난한 이들의 달은 항상 열려 있다. 나는 심장을 바치러 온다. 바꿀 수 없는 문서처럼 나는 내 심장을 바치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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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8-05-20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애절하게 다가옵니다. '더 슬픈 노래여 나는 이제 심장을 바치러 온다.....'

사진의 음영처리가 멋있군요. 역시 ........

프레이야 2008-05-25 12:31   좋아요 0 | URL
수암님, 오월도 이리 가고 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전호인 2008-05-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에 폭 빠졌던 관계로 글은 읽지 못했습니다.
컴터 그래픽 처리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로 대단한 영상입니다.

프레이야 2008-05-25 12:31   좋아요 0 | URL
전호인님, 안녕하시죠? ^^
요즘 이래저래 글도 안 읽히고 안 쓰이고 그렇습니다.

2008-05-20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turnleft 2008-05-21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배경 처리가 굉장히 좋네요 +_+

무스탕 2008-05-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흑- 심장 멈추는줄 알았어요..

2008-05-21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5-25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 정말 좋은데요!!
 

' 라면은 퉁퉁 '
                 

 

 - 장경린

 

  

  우리 관군이 육전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동안 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연전연승 일본 함대를 격멸시켜

 

  전세를 역전시키고 있었다. 4번 타자

  김봉연이 타석에 들어서자

  관중들은 함성을 지르며

 

  묵묵히 걸어나갔다. 최루탄 가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 그들은

 

  콘돔이나 좌약식 피임약을

  상용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동아들이거나 외동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라면은 퉁퉁

  불어 있었다. 정확히 물을 3컵 반

  재어서 부어넣었는데, 어떻게 면발이 퉁퉁 

 

-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민음의 시21)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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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4-22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시사하는 바가 크군요~~

2008-04-22 15:5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