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 유현준 / 을유문화사 (총379쪽)

 녹음시작 2019.3.20. (2번 파일 42쪽까지 녹음)

 

 

 어제같은 날은 카페라떼가 마시고 싶었다. 상가에서 커피를 사들고 나와 차를 출발하려고 하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공곶이에 수선화 보러 가는 걸 취소하자고. 비가 올 것 같고 내일까지 비가 온다고 하니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그 말을 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와서 이심전심이네 했다. 비보다는 가고 싶다는 마음이 쉬고 싶다는 마음에 밀린 거라는. 부산수필문예 편집장을 맡아 3년간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이번 봄호를 마무리하고 한숨 돌리고 싶었던 차였다. 조용히 혼자 충천하는 체질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 떠는 건 조금 있다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무튼 이심전심, 반가운 친구 목소리를 들으며 부산점자도서관으로 출발, 길이 제법 밀리고 하늘도 우중중충 날이었다. 부산점자도서관은 사상도서관 건물의 1층에 자리하는데 주차공간이 늘 부족하다. 주차요원의 미안해 하는 말이 제법 부드러웠다. 다시 아래쪽으로 내려가 모 회사의 주차공간에 차를 대고 걸어올라왔다. 도서관 접근성이 좀더 용이하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기에 좋을 것인데, 아쉬운 점이다.

 

 

1층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교육장이 보인다. 유리문이라 안이 들여다보이는데 오늘은 시각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점자교육을 하고 있었다.  아는 분이 보인다. 70대 중반 여성인데 늘 활기차고 밝은 분이다. 집안일과 요리까지 손수하시고 손글씨를 쓸 때면 남편이 플라스틱 긴 자를 받쳐준다고 하셨다. 선생님 읽기 어려우실 텐데, 라고 말씀하시만 나는 한 자도 어긋나지 않게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만큼 보기 좋게 잘 쓰신다. 점자배우기가 쉽지 않다고 귀여운 엄살을 부리지만 열심히 하신다. 아, 여기서 '열심히'라는 단어는 다시 쓰자. 법륜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분에게는 '열심히' 대신' '즐거이'나 '재미있게' 같은 말이 어울린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힘써 가며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즐기며 하고 계시니까. 내가 시각장애인들과 하는 모든 활동도 그렇다. 13년째 낭독녹음봉사를 하고 있는 것도 4년째 이분들과 문학관련수업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기쁘고 감사한 일들이다. 열심히 하지 말고 그냥 즐겁게 할 수 있으면 최고다. 총무과 선생님에게서 들은, 20대 후반 여성 정**씨가 점자교정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신나게 하며 스스로 보람으로 즐거워하는 얼굴이 떠오른다.

 

음성지원실로 들어갔다. 세 분의 선생님들이 작업중이다. 2번 녹음실로 목을 적실 차 한 잔을 들고 들어갔다. <고마워 영화> 수정편집 마무리를 시작하는데, 똑똑똑 노크소리에 문을 열었다. 2019 부산원북원도서로 내가 원하던 책이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과 함께 이 책을 건네받았다. 회원이 원하는 책이 우선이지만 나도 읽고 싶은 책을 녹음하게 되면 더욱 좋다. 일석이조이니까. 작년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에 이어 올해에도 내가 녹음하게 되어 영광! 빨리 읽어야지.

 

유현준의 책이라면 알쓸신잡2의 영향도 있겠지만 유홍준의 추천말처럼 '전문성과 대중성이 분리되지 않은 인문학적 해석'에 대한 갈증도 한몫하였지 싶다. 그것도 우리가 살고 있는 시공간 '도시와 건축'에 대한 해석으로. 도시와 공간을 읽는 눈이 생기면 흐릿하게만 보였던 우리 모습이 점차 또렷해진다는 건 저자의 말이다. 이 책의 부제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를 보면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표지와 본문의 일러스트도 저자가 담당했다. 멋진 표지 일러스트를 보여드릴 수 없어 안타깝다. 본문의 내용을 시각적으로 간단히 설명해 주는 사진, 그림, 도표에는 설명을 읽어준다. "**쪽 사진 설명 시작합니다. ~ 사진 설명 마칩니다." 글로 이미 적혀 있는 내용이라 그리 큰 지장은 없겠다.

 

11쪽에 걸친 '여는 글'이 저자의 기본적인 생각과 이 책의 내용을 잘 말해준다. 전체그림을 그리는 통찰과 세부적으로 분류해 들어가는 분석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 수 있다. 목차도 긴 데 꽤 상세히 구체적이다.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잘 이해되도록 읽히고 젠체하지도 않는다. 말을 할 때와 똑같은 느낌이다. 정확히 말하고 똑똑하게 유머러스하다. 지루할 틈이 없이 쉽게 읽히고 흥미롭다.

 

여는 글에서 저자는 1994년 발견된 터키의 괴베클리 테페를 언급한다. 스톤헨지나 이집트 파라미도보다 6천 년 이상이나 앞서 지어진, 기원전 1만~8천 년경의 신석기 시대 유적이다. 구석기 시대 인류가 동굴 밖에 나오면서 짓기 시작한 최초의 이 건축물은 장례식을 치렀던 신전으로 추측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 건축물이 기원전 7천 년경에 시작된 농업혁명 이전에 지어졌다는 점이다. 60~70명 사람이 6개월에서 1년 동안 한곳에서 생활하며 건축에 매달려야 하니 지속적인 식량 공급이 필요하고 이렇게 원시적인 형태의 농업이 시작되었다는 가설이다.

 

구석기 시대 동굴화를 보면 인간은 동물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괴베클리 테페 기둥에 새겨진 조각에서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크게 조각되어 있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러한 모습이 바로소 동물을 길들여 가축으로 키우고 식물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재배해'의 오자인 것 같아 고민하다 그냥 '지배해'로 읽었다) 농업을 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이 만들어진 증거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믿음과 조직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 신전 건축이었다. 건축은 인류 문명의 효시인 농업보다도 먼저 시작된, 인간을 인간 되게 만든 본능적 행위다. (8쪽) 

 

 

이 책에는 전작에서 다 말하지 못한 건축과 도시에 비친 우리의 모습과, 건축가로서 실제로 우리를 둘러싼 공간들을 디자인하면서 알게 된 우리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부분은 주술이 어긋나 '담았다'로 내가 교정하여 녹음했다.)  부족하지만 이 책을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14쪽)

 

 

 서지사항과 목차, 저자소개, 여는글 다음으로 본문을 읽어 들어가면서 우리 자신과 타인, 우리 아이들, 우리 관계들에 좀더 이해의 폭이 넓어질 것이라 기대되었다. 알면 달라질 수 있을 가능성에 좀더 접근하게 된다. 오늘은 하늘이 제법 화창하다. 친구의 예상과는 달리. 내일의 날씨는 알 수 없는 것. 베란다문을 열고 고개를 빼서 왼쪽으로 보면 멀리 광안리바다가 반짝거리며 넘실거린다. 그 위로는 광안대교가 선을 그리고 있다. 고층아파트 숲 사이로 묘하게 어울리는 기하학. 자연과 인공철물이 그리는 풍경, 그 안에 쉼없이 하행상행 달리는 자동차들이 장난감 같다.

 

 

 

 

사람들은 건축물이 물질이라고 생각한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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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2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수필문예 편집장을 맡아 3년간 하시는 것도, 13년째 낭독녹음봉사를 하고 있는 것도, 4년째 이분들과 문학관련수업을 하고 있는 것도 기억해 둬야겠습니다. 13년이나 되신 줄 몰랐어요. 문학 관련 수업은 수필 수업인가요?
프레이야 님은 능력자이시네요. 큰 결심이 필요해 보이지 않으십니다. ㅋㅋ
아무쪼록 일 잘 하시고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런 분 알고 지내서 좋습니다.^^

프레이야 2019-03-25 21:31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응원 감사합니다 😊 늘 즐겁게 할 수 있길 바란답니다. 페크님 칼럼 좋아해요. 계속 꾸준히 써주시길... 꽃샘추위가 있긴 해도 봄은 봄이네요. 가까이에 있는 동네에 벚꽃터널이 아주 환해요. 마음에 등불 하나 환하게 내어걸고 가자구요.

서니데이 2019-09-1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내일부터 추석연휴입니다. 명절을 맞아 인사드리러 왔어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2019-10-01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0-06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水巖 2019-10-26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대전을 망서리다가 열게 되었기에 제일 먼저 알립니다.
초대전을 만들어주신 박물관협회 회장이시고 가회민화박물관장이신부으로 장소는 가회동에 있는 한옥마을에 가회민화박물관 전시장이랍니다.
초대일시는 11월 4일 오후 4시이고 13일까지 전시를 합니다.
지난반 고판화전 에 초대해 주신분이 모든 준비를 해 주시고 초대전이라 대관료는 물론 도록도 그곳에서 만드신답니다.
마지막 전시로 어리둥절 해 지고 마지막 큰 선물을 받은것 같군요.

프레이야 2019-10-26 18:14   좋아요 0 | URL
수암님 반가운 소식입니다. 축하드립니다 꼭 가서 보고 싶어요. 일정 맞춰 보겠습니다

2019-11-06 0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픽업 THE PICK UP / Douglas Kennedy / 밝은세상 (총 339쪽)

녹음 시작 2019. 1. 16 녹음완료 2019. 3.6.

 

기해년 새해 첫 녹음완료한 책이다. 어제는 경칩이었고 봄비가 촉촉히 오는 날이었다.

점자도서관으로 가려고 집을 나서는데 비는 그쳤고, 까마귀 소리가 텅 빈 하늘에 울렸다. 울음소리였는지 웃음소리였는지 누굴 부르는 소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자신에게 하는 독백일지도. 언어는 원래 자신에게 말걸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촘스키는 말했다지.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눈앞 벚나무 꼭대기에 커다란 까마귀가 후루룩 날아와 앉았다. 정말 컸다. 만어사와 유후인 마을에서 보았던 까마귀 이후로 처음이다.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듯 한참 올려다보며 주차장으로 걸어내려갔다. 또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작년 이맘때 나는 모로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뜻밖의 일에 부딪혀 죽은 나날을 보냈다. 뜻밖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려드니까. 더글라스 케네디의 소설집 <픽업>에는 12편의 소설이 담겨 있는데 모두 비슷한 인물과 상황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우리 눈에 빛이 부족하여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넘쳐 들어와도 오히려 시야가 흐려지고 대상이 뭉개져 버렸을 수 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듣다보면 박장대소하기도 무릎을 치기도 하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스님은 결혼을 선택하고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콕 짚어준다. 무슨 진정한 사랑씩이나... 자기 주제에...  다 계산하고 결심한 거 아니었느냐고... 덕 보려고 하는 마음 아니었느냐고... 의식에서는 부정하고 싶겠지만 무의식에서는 남녀 모두 어떤 계산을 하고 선택한 게 결혼이라고.  연애는 좋은 모습만 보고 보이려는 만남이지만 결혼은 생활이고 책임이다. 연애 때 대상의 단점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굳이 그걸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니까. 여기서 자기를 속은 건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이 책의 일관된 주제, "인생이 절망과 실패로 점철되어갈 때 우리는 왜 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하지 않는가?"에 무릎 꿇게 된다. 이렇게 인정하게 되는 순간, 대상을 미워하기보다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 많은 시간이 흘렀고 인생의 절반을 훌쩍 지나 종점으로 가는 길에 가속도가 붙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여생의 일들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때로는 열쇠뭉치들의 마지막 열쇠가 문을 여는 법이라지.

 

전반적으로 냉소적이고 희의적인 어조를 보이지만 이런 태도가 생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라 말하는 건 다소 성급하다. 오히려 어차피 테러리스트 같은 생을 좀더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력을 잃지 않는 태도로 살 수도 있다. 심리를 뚫는 눈에 위트를 겸비하며 술술 읽히고 이야기의 반전도 흥미로운 <픽업>의 첫장에는 키르케고르의 이런 글이 인용되어 있다.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 있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 있다

내 솔직한 의견을 말하자면

이리 하거나 저리 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이다.

다만 어느 쪽을 선책하든 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든 후회라는 결과물을 피할 수 없다면 좀더 용감하게 시도하고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햇살 따스하다. 봄이라서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봄이니까 다시, 시작이다. 詩.作.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게 있는데 내일쯤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자. 모든 건 맞는 때가 있으니...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가 2019 부산원북원도서 후보 5권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지금 투표중이고 어느 책이 최종선정될지 모른다. 작년 최종선정도서였던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는 내가 녹음했다. 선정되자 마자 빠른 시일 내에 해야한다. 이번 해부터는 그래서 후보도서 모두를 미리 나누어 녹음하기로 한다. 나는 그 중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골랐다. 내용 전달력도 좋고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라는 건 알쓸신잡에서 보았고 글은 어떨지 내용이 기대된다.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5권 모두 시각장애인 용 전자도서로 작업 중에 있는데 그 작업이 끝나면 녹음도서로 작업하게 된다. 빠르면 다음주 수요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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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0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총 339쪽을 읽으시려면 쉬운 일이 아니겠네요.
픽업, 재미있나요? 요즘 단편 소설에 빠져 있어요. 장편과 달리 하나씩 읽어 나가는 재미가 있어요.

낭독하시려면 목 보호를 위해 신경을 많이 쓰셔야겠네요. 새 시작을 앞두고 있는 지점에서 충분히 쉬시며 하시기를요.
요즘 저는 말하는 것도 힘이 든다고 느낄 때가 있답니다. 나이 탓인지...ㅋ 건강합시다.

프레이야 2019-03-09 14:57   좋아요 0 | URL
페크 님 안녕하시죠. 진짜 체력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낭독도 말하는 것도 힘들 때가 있어요. 제대로 숨 쉬는 것도 조율이 필요한 거 같아요. 픽업은 쉽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정도인데 별점을 굳이 주자면 셋 반 정도 줄까요. 지리멸렬한 이야기이지만 재미있기도ㅠ하고요. 건강이 최고에요 아무튼 ㅎㅎ
 

기해년 새해가 절반 넘어 지나가고 있다. 모든 게 지나가고 또 다시 오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나는 거자혹반이 아닐까 라고 말했다. 돌아온 경우도 있지만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더욱 많으니. 사람의 마음이나 관계는 더욱 그렇지 싶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에서는 무언가가 사라지면 그 기억도 관계도 함께 사라지는 거라는 대사가 나온다.  정말 그럴까. 함께한 기억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그 시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라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몰려온다. 하잘 것 없는 게 되어 버리는 자신이 싫은 것이다. 그러니 돌아온 경우에는 마치 기적이라도 일어난 듯 감격, 감동, 감사의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이다. 다 인연이겠거니.

 

새해 들어 이틀째 밤, 서울에 살고 있는 작은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냥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밤 11시였고 추운겨울밤이었다. 4층 원룸에서 내려와 찾아보던 중, 좀전에 담벼락 틈새에서 녀석의 옆모습을 봤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10개월밖에 안 된 녀석이 어디서 떨고 있을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놀라고 상심한 딸아이도 안쓰러웠는데 다행히도아이는 합리적으로 냥이를 찾기 시작했고 포기하지도 당황해 하지도 않았다. 조심하지 않은 상황들에는 화가 좀 났지만 일상을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제 할일을 하며 차분히 찾을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하였다. 나는 그동안 딸아이집에 가서 아이마음도 보듬어 주고 냥이가 사라진 방청소도 하고 밤에는 아이가 만들어온 전단지를 함께 붙였다. 그다지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동네 골목골목을 다니며 전봇대와 담벼락에 냥이 사진이 붙은 전단지를 단단히 붙였다. 가게 유리창에 붙이라고 선뜻 말씀해주신 성산로 18길 '23시 그린마트' 주인아저씨, 감사하다. 골목을 환히 비추며 우리를 내려다보던 가로등 불빛이 아니어도 밤공기가 그리 차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먹이와 물과 화장실을 집 밖에 내어놓았고 날마다 기다렸다. 먹이를 먹은 흔적이 있어서 멀리 안 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녀석은 진짜 집주변에서 2주일을 배회했던 것이다. 어젯밤 11경 다시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을 찾았다고. 전화 너머로 냐옹냐옹 소리가 들렸다. 케이지를 놓은 지 한 시간만에 걸려든 것이다. 고 불쌍한 것이 케이지 안에서 덜덜 떨고 있더란다. 케이지덫을 사려고 마음 먹고 있던 차에 그걸 빌려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있었고 그 덕분에 냥이를 다시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가출 2주일만에 돌아온 녀석은 살이 쏙 빠져 있고 흰색 털부분이 회색이 되어 있었다.

 

고양이가 사라진 2주일 동안 나는 온갖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 마음이 궁금했다. 열린 문으로 바깥세상이 궁금해 나간 고양이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사람의 이해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고양이에게 물어볼 수도 없으니 모를 일이지만, 모든 짐작은 사람 기준이 아닐까. 길냥이들의 영역 다툼에서 밀려 멀리 갔을 수도 있다는 누군가의 생각을 뒤엎고 역시 집 가까이에 있었다. 그리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 얼마나 춥고 두려웠을까. 집에 데리고 들어와 케이지를 열어주니까 아이발에 머리를 부비로 핥고 가릉거리며 바들바들 떨더란다. 사람을 알아보는구나 싶어 찡했다.

 

아침에 '평화의 꾹꾹이'라며 동영상을 보내왔다. 냥이가 돌아와 안정되면서 덩달아 딸아이도 순해졌다. 공부하느라 집에도 안 내려온 아이는 그동안 속상해 날카로워져 있었다. 나로선 냥이가 눈앞에 삼삼하면서도 다행히 어디 좋은 데로 갔기를 바랐고, 돌아오지 않아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고 있었다. 원룸에서 냥이와 동거하는 아이 마음은 알겠지만 좁은 방이 엉망이었다. 마음껏 사랑을 주고 한번은 떠안아야 할 상실감에  아픔을 겪는 아이를 보며 그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8월에 교환학생으로 가게 되면 냥이의 거처를 어떻게 해야할지 살짝 고민이다. 어쩌면 내가 데려와야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들이 정작 아무것도 아닐 수 있고 예상과 예감은 어긋나기 일쑤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새해 들어 첫 낭독녹음을 하러 가는 길에, 붕어빵을 사갔다. 점심시간 직후이긴 하지만 따끈하게 간식으로 나눠드시라고 점자도서관의 착한 선생님들에게 드렸다. 나도 두 개 먹고.

 

 

픽업 / 더글라스 케네디 / 밝은세상(총 339쪽)

녹음시작 2019.1.16. (73쪽 3번 파일까지 완료)

 

12개의 단편소설 모음집 중 '픽업'은 첫번째 소설이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편견이 엿보이는 문장이 있지만 그것이 작가의 편견이라기보다 자칭 타칭 인간쓰레기 주인공 찰스의 편견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그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더글라스 특유의 캐릭터와 스토리라인이 재미나게 읽힌다. 결말에서 뒤통수를 때리는 한 방과 함께 생의 통찰은 말할 것도 없다.

사람은 얼마나 강한 충격타를 받아야 정신을 차릴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중략)

"정직한 분을 만나서 반갑습니다."(73쪽)

 

더글라스 케네디가 격찬을 받은 여행기로 <Beyond the Pyramids>, <In God's Country> 등이 있다는 건 책날개의 작가소개글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고마워 영화 / 배혜경 / 세종출판사 (총 315쪽)

편집 2019. 1. 16. (118쪽 5번 파일까지 완료)

 

작년에 녹음완료, 편집교정 중이다.

며칠 전 영화 <채식주의자> 임우성 감독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제목에 이끌려 책을 고르고 커피샵에서 누굴 기다리며 읽던 중

목차의 영화들과 서문이 마음에 들었고 영화 목록을 보다가 <채식주의자>를 발견했다고.

몇 안 되는 리뷰 중 가장 마음에 들고 가장 정확한 글이라고, 인연에 대한 내 문장에 공감하셨다.감독의 데뷔작으로 알고 있었는데 찾아보니 감상하진 못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며, <채식주의자>의 아름답고 슬픈 이미지들이 다시 스쳐간다.

한강의 원작과는 또 다른 느낌의 좋은 영화였다. 올해는 한 가지 중책을 더 맡아 좀더 바빠질 것 같지만 틈틈이 길을 떠날 것이고, 넓고 깊게 아름다움에 좀더 가까이 가보고 싶다.

 

 

 

물구나무를 서듯 거리에 뿌리를 박고 햇살을 받아 타오르는 초록잎들의 불꽃, 활짝 벌린 가랑이 사이로 피어나는 꽃들의 냄새, 아무런 생각도 마음도 없이, '누린내 나는 살의 죄'를 먹지 않아도 햇빛과 물만 있으면 생명을 이어가는 순연한 식물의 꿈으로 현실은 환원된다. 재생과 부활의 꿈이다.

   하지만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도 몰라. 꿈에선 꿈이 전부인 것 같잖아... 꿈에서 깨어나면 그래도..." (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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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1-1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프레이야 2019-01-18 15:07   좋아요 1 | URL
스텔라 님도 새해 복 많이 짓고 많이 받으세요. 전 조금만 받겠습니다. 이곳 바다쪽 햇살이 포근해요

수퍼남매맘 2019-01-1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2 주만에 돌아오다니 정말 기적이네요 .

프레이야 2019-01-18 20:23   좋아요 0 | URL
그죠^^ 넘 신기하고 반갑고 눈물겨운 거에요.
 
 전출처 : 프레이야 > 입동

이런 기능을 다 하네 북플이.
기억을 다시 불러주어 고맙군. 지금의 심정과 다르지 않아
재포스팅하여 공유한다. 세월이 흘러도 변한다기보다 오히려 생을 반복하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들, 달라져야할 것들도 있고. 바야흐로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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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1-18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새 글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저도 작년의 기록을 보면, 그 때와 지금이 큰 차이가 없는데, 그 사이 일년이 지났다는 것이 조금 낯설어요.
날씨가 차가워지고 있어요. 겨울이 가까워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주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18-11-18 18: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니데이님 안녕하시죠^^ 겨울이긴 하나 봐요. 갈수록 계절마다 참 애틋해집니다. 열공하시면서 바람도 쐬고 좋은 나날 보내시길.

카스피 2018-11-1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오랜만에 뵙는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8-11-20 09:30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어요. 잘 지내시죠^^

서니데이 2018-12-1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18-12-21 02:04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모르고 있었는데 사니데이 님 소식 전해주신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새해에는 좀 더 자주 뵐 수 있게 할게요.

2018-12-24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12-3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새해인사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글과 인사 나누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입니다.
새해에는 가정과 하시는 일에 건강과 행복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항상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마음 더합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8. 8. 28 녹음

 

 

태풍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나 싶더니 다시 땡볕이 기세등등하다.

막바지 더위에 과일이 달게 익기를...매미소리도 제법 잦아든 요즘, 모기가 기세등등하다.

지난 주 작은아이가 데리고 있는 냥이를 며칠 봐주러 가 캣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왔다.

어찌나 귀엽게 구는지 지금도 눈에 삼삼하다. 녀석 ㅎㅎ

나를 할퀴고 살살 물고 하더니 그래도 내치지 않았더니 나를 아주 신뢰하고 안기는 관계가 되었다.

화장실을 치워 줄 때면 모래에 뒹굴고 먹을 거리를 챙겨줄 때면 어서 달라고 쌀알 같은 이를 드러내고

애기 소리를 내며 빤히 쳐다보고 누워 있기라도 하면 내 귓속에 골골송을 부르며 숨을 불어넣기도 하고

고 말랑말랑한 발바닥으로 내 얼굴을 더듬고 혀로 핥고, 나는 고 귀여운 입에 뽀뽀도 하였다.

그렇게 냥이와 난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더위도 불사하고 낮에 풍납토성을 찾아갔다. 마을 어르신이 허리 굽혀 잡초를 뽑고 계시는 옆에 가서

이 나무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모과나무에요. 저 위에 모과 파랗게 열려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아오리사과 연두빛보다는 좀 진한 모과가 대롱대롱 많이도 열렸다.

그 나무 둥치에는 황금옷을 입은 성자들이 꼼짝않고 매달려 있어 내 눈길을 끌었다.

매미는 본래의 자기 모습으로 태어나고자 침묵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 외피를 벗고 새로 태어나는 날  죽음은 안중에도 없이 열혈생명의 목소리로 울어대겠지.

한세상 제대로 울어재끼다 가겠지.

풍납토성 위로 하늘이 찌를 듯이 높았고 흰구름 두둥실 가벼이 걸려 있었다.

 

 

함민복 시인의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은 2013년에 출간된 시집이다.

총 세 개의 파일로 한 호흡에 시집 한 권을 녹음완료했다.

 

 

흔들린다 / 함민복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 버린다고

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

익선이 형이 아슬아슬하다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구나

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양팔저울 / 함민복

 

1

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

당신을 읽어나갑니다

 

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

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

 

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행

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

 

2

입과 항문

구멍 뚫린

접시 두 개

먼 길

누구나

파란만장

거기

우리

수평의 깊이

 

 

이 외도  '이가탄'을 한자로 달리 쓴 '이가탄'이라는 시는 신랄하고 재미있고 슬프다.

 

 

<황무지>는 황동규 옮김, 황동규 해석으로 엮었다. 역시 2013년 발간.

'황무지'뿐 아니라 다른 시까지 T.S. Eloit의 시를 좀더 이해할 수 있다.

주석도 많은 시집이지만 듣을 분들을 위해 적절히 배치하여 빠짐없이 녹음했다.

작년 강의 때 이 시를 녹음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하신 시각장애인 한 분의 요청으로

점자도서관에서 시집을 구매하였고 이제사 내가 녹음했다.

그분이 부디 찾아서 잘 들으시길...  그리고 늘 "내 예쁜이"라고 부르시던 아내분과 요즘도

건강하고 밝게 동행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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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9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9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9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8-29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해한모리군 2018-08-30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로 들으면 얼마나 더 좋을지요. 수고가 많으셨네요.

프레이야 2018-09-02 13: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 시집 낭독은 한 권에 30분 파일 세 개 정도면 되어요.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8-08-31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취미 같습니다.

blueyonder 2018-09-2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정말 멋져요!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네요.

프레이야 2018-09-21 21:3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