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우트 / 김현석 / 2007

2008년 내가 본 열세 번째 영화

 



같은 재료를 갖고 왔지만 ‘화려한 휴가’보다 부재료와 양념이 적절해
훨씬 감동과 재미가 더하다. 코믹영화인가 하며 가볍게 접근하다가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집단의 기억과 개인의 기억을 기막히게 조합하여 생의 놀라운 발견을 하게 한다.
27년이 지난 후 드러나는 개인의 진실을 통해 과거 암흑의 사건을 들춰낸다.
집단의 기억과 각성을 마취시키는 프로스포츠를 이야기의 줄기로 끌고 가면서
소소한 개인의 삶을 보여주지만, 개인의 삶이 역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진리를 뼈아프게 보여준다.
임창정, 엄지원은 물론 백일섭과 양희경, 박철민의 연기가 맛깔나다.




극장전 / 홍상수 / 2005

2008년 내가 본 열네 번째 영화



 

 

 

극장 이야기가 극장 앞에서부터 재생된다. 극장이야기 중의 이야기는 연극 ‘어머니’다
남의 눈물에 공감하지 못하는 무관심한 군상들, 농담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야기 같은 영화 속 이야기 그리고 남들의 이야기.
독특한 구성이 돋보이고 등장인물들이 중첩되어 복제이미지를 준다.
죽음과 삶에 대한 의미심장한 농담.

색다른 구성과 홍상수 식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출연 김상경, 엄지원, 이기우




올리버 트위스트 / 로만 폴란스키 / 2005

2008년 내가 본 열다섯 번째 영화

 


 

 

 

페긴 역의 벤 킹슬리와 올리버 역의 바니 클락이 악한과 천사의 이미지로 등장한다.
사형수 페긴의 독방에 찾아와 눈물로 감사의 인사와 진심의 용서를 청하는 올리버의
너그러움이 감동을 준다. 후원자의 손을 잡고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나 빛으로 나아가는
어린 올리버의 눈에 맺힌 눈물에 원작소설의 1834년 신빈민구제법에 대한 회의가 담긴다.

물질만능주의로 더욱 사악해지는 인간에 대한 구원이 지극히 선량한 영혼 올리버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고 싶게 한다.
고아원 장면과 런던의 뒷골목 풍경이 인상적이다.
악당 페긴이 유대인이란 사실은 고전소설의 선입견적 상투성.
벤 킹슬리와 바니 클락의 연기가 참 좋다.




마지막 사랑 /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 1990 (The Sheltering Sky)

2008년 내가 본 열여섯 번째 영화

 



길을 잃은 여인. 길을 잃고도 아주 환희에 찬 얼굴로 돌아오는 여인.
아마도 사랑 앞에선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맬 것이다. 무한대로..
1947년 프랑스 점령하의 모로코를 배경으로 아프리카의 풍광이 가슴 서늘하게 펼쳐진다.
관광객과는 달리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여행객’을 자처하는 키트는 사랑에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여행자를 자처한다.
하늘이 손에 닿을 듯한 높은 곳에서 남자는 자신의 품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여자를 안타깝고도 분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그들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제야 가까이 왔다는, 남자가 죽어가며 하는
대사가 절절하다. 감독이 까메오로 출연해 달이 차고 기울듯 사랑과 이별로 성숙해진
여인을 맞이한다. 
출연 데보라 윙거, 존 말코비치




양철북 / 폴커 슐뢴도르프 / 1979  (The Tin Drum)

2008년 내가 본 열일곱 번째 영화

 



다시 보아도 충격과 블랙유머가 혼재하는 영화다.

폴란드와 독일, 어느 영역에도 속하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오스카는

타고난 악마성과 성숙함으로 기성세대의 위선과 역사의 잔인함을 두드려
깨어 부수고 싶어 한다. 양철북을 두드리며 괴성을 질러 유리를 깨던 오스카는
첫사랑을 전쟁의 포화속에서 죽음으로 보내고 멈추었던 성장을 속개한다.
일그러진 세상을 향해 양철북을 두드리는 이 영화는 상징으로 꽉 차있다.
특히 오스카의 엄마가 물고기를 먹어대는 장면, 인간의 욕망에 구역질이 난다.
히틀러의 연설목소리를 잠시 들을 수 있다.




어톤먼트 / 조 라이트 / 2008  (Atonement)

2008년 내가 본 열여덟 번째 영화

 

 



 

독특한 시간구성과 색감이 풍부한 화면이 유려한 이야기로 펼쳐진다.
참회의 과정이 하나의 소설로 긴 이야기를 그려내며 상상력으로 죄갚음을 하고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던 사랑을 자신에게 되돌려주고자 한다.
그러나 잃어버린 걸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 속죄한다고해서..
키이라 나이틀리보다 13살 브라이오니 역할을 한 시얼샤 로난에 주목된다.
질투와 환상으로 괴로운 표정, 성숙과 미성숙의 경계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복수를 하는 장면 등, 심리묘사가 탁월하게 섬세하다.

처음부터 속도감 있게 들려오는 음악 속의 수동타자기 소리가 경쾌하면서도
브라이오니의 발걸음처럼 성마르고 예민하다.
브라이오니 역할을 하는 세 명의 배우,
13살, 18살, 노년의 그녀들 모두 눈여겨볼만하다.
귀족풍의 30년대 영국 대저택의 풍경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와

부상당한 군인들의 참혹함이 극명하게 대비되어 슬픔은 극대화 된다.
현실이, 진실이 아무리 가혹하더라도 그 앞에서 정직함을 버린 부도덕에 대한 참회,
그리고 되갚음을 사랑의 복수에 대한 회환으로 맺게한다.

군복 입은 로비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사랑의 고통이

뛰어난 영상미로 더욱 가슴 아프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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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2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와 양철북만 겹쳐요..양철북은 어린나이에 보고 충격 먹었던 영화였다죠.

프레이야 2008-02-29 11:23   좋아요 0 | URL
양철북은 다시 봐도 정말 그래요. 충격파가 여전합니다.

hnine 2008-02-29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양철북 보고서 충격 받았었지요. 어릴 때도 아니고 대학교 때였어요. 며칠을 생선도 못 먹고 커피도 못 마셨어요 (커피 마시러 가다가 총에 맞는 장면 나오죠 왜...).

프레이야 2008-02-29 11:24   좋아요 0 | URL
커피.. 그 장면 참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어요.

바람돌이 2008-02-29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북! 대학 1학년때 내가 좋다고 고백해줬던 첫번째 남자애랑 처음으로 같이 본 영화였다죠? 정말 민망해 죽는줄 알았습니다. ^^;; 아 그 남자애랑요. 몇달 못가 찢어졌어요. ㅎㅎ(절대로 영화때문은 아니지만.... ㅎㅎ)

프레이야 2008-02-29 11:27   좋아요 0 | URL
내가 바람돌이님 땜에 몬살아요.. ㅎㅎ

무스탕 2008-02-2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트위스트랑 양철북을 본게 확실한데 기억이 잘 안나요.
양철북을 마구 두드려서 유리가 깨지던 장면은 생각이 나는데 왜 그랬는지 앞뒤장면이.. -_-a
스카우트 보고싶어졌어요.

프레이야 2008-02-29 11:28   좋아요 0 | URL
무스탕님, 스카우트, 권하고 싶은 영화에요.

씩씩하니 2008-02-29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님 전 올리버 트위스트 볼래요..
울 애들 봄방학을 지겨워 어쩔 줄 모르는데..힘이 날듯해요~~~

프레이야 2008-02-29 11:29   좋아요 0 | URL
올리버는 얼마전 토요명화로 봤어요. 아이들 보기엔 지루할지
모르지만.. 바니 클락이라는 어린 배우가 어찌나 귀여운지..
내일이면 3월이네요. 하니님, 즐건하루!!

뽀송이 2008-02-2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카우트'는 왠지 저와 안 맞을 것 같아서 패스한 영화였는데 한번 찾아서 봐야겠어요.^^
님~ 오늘 하늘에 황사가 가득하니... 외출했다 돌아오는데 눈이 뻑뻑해서 혼났어요.^^;;
잘 지내시죠?^^

프레이야 2008-02-29 23:07   좋아요 0 | URL
뽀송이님, 스카우트, 저도 그랬거든요.
근데 참 좋은 영화였어요.
오늘 황사가 가득했나요? 저도 나갔다 왔는데 별로 못 느꼈어용..
환절기 건강 주의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순오기 2008-03-01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트위스트 하나뿐...양철북은 책으로 읽다가만...왜 그랬지? 다시 봐야겠네요.^^

프레이야 2008-03-02 09:21   좋아요 0 | URL
영화로 보면 훨씬 충격적일 거에요.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Jade 2008-03-02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카우트 별 생각없이 보러 갔었는데 묘하게 마음을 울렸던 기억이 있어요 ^^

아직도 기억에 남는 "비광"....ㅋㅋ
혜경님 내일은 황사가 심하대요~ 조심하세요 ^^

프레이야 2008-03-02 09:35   좋아요 0 | URL
제이드님 저도 그랬어요. 비광송은 ㅎㅎ 되게 웃기면서도 묘하게..
박철민도 '화려한 휴가'때보다 이영화에서 더 잘 살아난 것 같아요.
황사 심한 날 전 길가면서도 실눈 뜨고 어떨 땐 눈을 감고 걸어요.ㅎㅎ
 
1월, 당신의 추천 영화는?

 


 

 

 

 ‘주소지 말고’ 그놈이 살고 있는 집은 붉은 십자가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천국의 계단을 오르듯, 오르고 올라야 다다르는 그곳에는 숨죽이고 사는 사람들의 집들이 골목골목 웅크리고 있다. 집들은 어둠과 침묵에 휩싸여 본성을 억누르며 욕망을 참고 엎드려있는 짐승의 등짝 같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그 모습은 무탈함을 가장하고 있다. 남의 사정은 몰라도 되는 게 당연한 엄중호(김윤석 분)의 방식과 비슷하다. 자기 잇속만 챙기고 자기 앞가림하기에도 급급하게 살아온 그는, 그럼에도 사는꼴이 말이 아니다. 그런 그에게 특별한 일이 벌어지고 모르는 이웃의 집을 찾아가 사람들의 속사정을 알게 되면서 그는 점점 변해간다. 애초의 목적은 미진에게 미리 당겨준 몸값 이천 만원을 받기 위해서였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과 거짓 사이의 이야기들이 예상치 못하는 충격을 준다. 영화는 1박2일간의 숨가쁜 추격전이자 절망의 노래다.

 중호가 분노하는 대상은 끈질긴 빚쟁이와 자신의 밥줄을 끊어간 놈이다. 반면에 놈이 분노하는 대상은 약하고 선한 이들이다. 영화에선 어린조카와 힘겹게 사는 여자들로 대변된다. 이것은 다시 중호가 절박한 심정으로 올려다보는,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한다. 세상이 나를 모욕하고, 내가 편하지 않은데 왜 너희들만 선하고 아무것도 모르냐. 그가 저지른 살인에는 동기가 없어 보이고, 배운자들의 선입견으로 성불구니 뭐니 하며 제멋대로 해석되기도 한다. 영화가 영민의 이야기를 자세히 하지 않은 것은 그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나 접근을 하지 않는 사회를 빗대고 있음이다.

 분노라는 말조차 성립되지 않을 정도로 그놈, 지영민(하정우 분)은 타인의 감정에 대한 감각이 없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 감각이 죽어버린 것이다. 싸이코패스를 사건의 중심에 둔 건 우리 사회의 그런 불감증과 적나라한 악의 근성을 말하기에 적확하지 싶다. 영민의 어린 시절이나 성장배경은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누나의 입을 통해 과거의 충격적인 사건이 한 가지 드러나면서, 중호처럼 나는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아킬레스건을 따면 피가 다 빠져나간다는 말을 진술도 아닌 것처럼 하는 영민의 태연한 얼굴만큼이나 그랬다. 내가 가장 몸서리치게 공포스러웠던 부분은 그것이다. 살아야하는 이유 없지? 그러면 죽어야지, 라고 말하자 미진은 다급하게 말한다. 딸이 있다고. 그 말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일을 시작하는 영민, 그렇게 섬뜩한 얼굴이 사회가 무능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사람이 가장 공포스러운 때는 이런 얼굴을 보는 때이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노인이 생각났다.

 

 


 

 

 지영민은 그리스도를 감방동료의 지하방 벽 속에 가둬 죽이려했다. 이름뿐인 '망원' 교회, 높은 곳에 매달려있는 석재 그리스도상을 벽속에 매장한 것이다. 중호는 벽지를 뜯고, 사방으로 미친 듯이 그려져 있는 그리스도의 못이 박힌 손과 발과 무력한 얼굴에 둘러싸여 혼란에 빠진다. 세상에 도사리고 있는 적그리스도의 음험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고 변해간다. 그는 신자도 아니고 선한 자는 더욱 아니다. 그가 분노하는 대상이 점차 옮겨가는 과정은 ‘쓰레기’에서 ‘사람’으로 변해가는 그의 얼굴에 확연하다. 아직은 살아있을지도 모를 가엾은 생명에 대한 사회의 공모된 무감각과 무관심에 분노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조차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감정이다.

 영화는 밀폐된 공간으로 공포감을 극대화 시킨다. 그중 가장 예상하지 못할 곳은 우리들 삶의 한길에 버젓이 있는 공간이다. 누구나 드나드는 공간이지만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섬처럼 소외되어 있었다. 중학교 시절, 하굣길에 이상한 남자가 자꾸 따라와 너무나 겁이 났던 나는 골목길의 어느 작은 수퍼(구멍가게)에 들어갔던 적이 있다. 수퍼 아줌마가 있었고 사정을 이야기 하고 좀 있다가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집에 뛰어갔던 기억이 났다. 미진이 맨발로 기어들어간 그곳에서 영민은 턱없이 자신을 믿어주는 선한 아줌마를 아무렇지 않게 배반한다. 선함이 무지와 어리석음을 동반할 때면 안타깝다. 극도의 공포로 떨고 있는 미진의 간절함마저 그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십자가의 핏빛이 한칸 작은방 안에서 난사되고 그의 얼굴과 온몸에도 처절하게 튄다. 대조적이게도 바깥세상은 고요하고 나른하고, 경찰은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다. 그리고 중호는 혼자서 달리고 또 달린다.

 

 


 

 

 강한 자(악한 자)에게는 비굴해지고 약한 자(선한 자)에게는 강해지는 영민에게는 죄책감, 연민, 배려 등, 인간의 감정이 없다. 중호에게 일방적으로 맞던 영민이 끝부분에서 중호를 죽이려고 싸우는 장면은 중호의 선한 면이 상대적으로 좀 더 강해졌지 때문에 가능하다. 실제로 두 배우는 망치를 던지고 골프채를 6개나 부러뜨려가며 리얼한 액션을 펼쳤다.

 수족관에서 떨어져 나온 미진의 창백한 얼굴과 중호의 얼굴이 마룻바닥에 누워 마주하는 장면보다 내게 더욱 섬칫한 장면은 따로 있다. 미진이 잔혹하게 처형당한 그 방에서 중호는 휴대전화에 녹음되어 있던 미진의 목소리를 듣는다. 고단한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목소리다. 그가 그 초라한 방에 주저앉아 고개를 들자 작은 창문이 눈에 들어온다. 창살이 뜯겨져있다. 영민은 그곳으로 유령처럼 빠져나가 저 멀리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유유히, 순박한 얼굴을 하고, 세상 속으로 섞여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놈은 승천하고 중호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낀다. 세상의 낮은 바닥에 무참하게 쓰러진 중호가 낯선 남자에 오버랩된 영민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영민은 중호를 잔뜩 조소하며 거만하게 내려다본다. 영화 ‘오멘’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온몸에 싸늘하게 소름이 돋았다. 이 장면이 엔딩으로 왔으면 어땠을까 싶다.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와 조연들 모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특히 하정우의 표정과 대사는 오싹하다. 불안정하고 야비한 눈빛과 어리숙하고 순한 아이같은 표정의 교대, 당당한 근육질의 몸과 기우뚱하니 넘어질 것 같은 걸음걸이의 엇갈림 역시 놀랍다. 영화는 섬세하게 연출한 갖가지 소품과 소리없이 전하는 몇몇 장면에서 강렬한 묵언의 대사들로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윤석의 자연스러운 대사와 동작, 변해가는 인간의 얼굴도 놀라운 것이었다. 서영희는 '질투는 나의 힘'에서 눈여겨 봤는데 '궁녀'에서도 호연이었다. 좋은 눈빛을 가졌다.

 

 

 추격자는,  사악한 본성을 감추고 있는 세상에서 구원의 길은 묘연하기만 한 우리들의 무기력한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진아, 라고 침을 튀기며 절규하는 그의 얼굴이 제자리에서 뱅뱅 돈다. 다시 밤이 되었고 세상은 아이의 곤한 잠처럼 평화를 가장하지만, 추격자는 살아갈 일에 어지럽기만 하다.




- 추격자 The Chaser / 나홍진 / 2008

- 2008년 내가 본 열한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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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8-02-17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봤어요, 혜경님.
정말 탄탄한 영화더군요. 김윤석도, 하정우도 모두 좋았어요. 이 영화는 배경이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빛이 나는 영화였어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여 지나치게 잔인한 감도 있지만, 그마저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랄까요.

저와는 늘 다른 걸 느끼시고 그걸 써주셔서 언제나 잘 읽고 있습니다.

프레이야 2008-02-19 08:40   좋아요 0 | URL
단숨에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더군요. 잘 만든 영화, 하지만 엔딩은
사족 같았던.. 제 옆에 앉았던 어떤 아가씨는 나중엔 아예 고개 돌리고
있던데 다락방님은 눈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다 보셨을까 싶어요^^

다락방 2008-02-19 13:55   좋아요 0 | URL
앗. 저 눈도 안가리고 다 봤는걸요. 훗 :)

뽀송이 2008-02-18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님의 영화 리뷰보면 영화가 막~ 보고 싶어요.^^;;
님과 같은 느낌을 가져보려고 저도 모르게 애쓰게 되거든요.^^;;
이거 아마 중독증 이겠지요.ㅡ,.ㅡ
이 영화도 곧 보게 될 것 같아요.
오늘은 제법 햇살이 따스해요.^^ 포근한 하루 보내셔요.^^

프레이야 2008-02-19 08:42   좋아요 0 | URL
가슴이 조여오다 먹먹해지는 영화였어요.
머리를 둔기로 맞는 것 같은 장면도 있구요.
아이들 봄방학이 얼마 안 있어 시작되겠네요. ^^

뽀송이 2008-02-19 15:55   좋아요 0 | URL
저 오늘 보고 왔어요.^^;;
근데 거의 끝부분?에 급한 전화 받고 나왔어요.ㅠ.ㅠ
음... 그러니까 영민의 진술을 듣고 아주 많은 경찰들이 뼈를 찾겠다고 땅을 파헤치는 장면까지 봤어요. 아마 거짓 진술인 듯 한데 말입니다.ㅡㅜ 에휴... 궁금해요. 간략하게나마 귓말로 갈켜주세용.ㅡㅡ;;

2008-02-19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2-18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마음에 드는 리뷰군요. 관심이 없던 (아니, 이런 영화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자에게 '보고 싶다' 라는 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흡인력 좋은 글들.
덕분에 좋은 영화 알고 갑니다.^^

"집들은 어둠과 침묵에 휩싸여 본성을 억누르며 욕망을 참고 엎드려있는 짐승의 등짝 같다"

프레이야 2008-02-19 08:45   좋아요 0 | URL
제 맘대로 느낀 거라.. 다른분은 어떻게 느낄지 몰라요.^^
루드에스님 정말 깊은 절망과 아주 얕은 희망 사이에서 섬뜩해지는
영화였어요.

L.SHIN 2008-02-19 10:15   좋아요 0 | URL
만약에 본다 해도, '영화보다 리뷰가 훨씬 낫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것
같은 그런 글입니다. 진공청소기같은 엄청난 흡인력이죠! (웃음)
나도 이런 글 쓰고 싶어요^^

무스탕 2008-02-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볼거에요!! 그래서 지금 혜경님 리뷰 안읽을거에요. 영화 보고와서 읽을거에요 :)

프레이야 2008-02-20 00:16   좋아요 0 | URL
ㅎㅎ 무스탕님 이 영화도 무장해제하고 보심이 더 나을 듯해요.
넘 쫄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고 보셔야해요.
보고 오셔서 얘기 나눠요^^

순오기 2008-02-20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봤어요.
마음이 심란하고 무거워지는 영화~~```

프레이야 2008-02-20 07:57   좋아요 0 | URL
보셨군요. 두개의 얼굴, 아니 세개의 얼굴이 기억에 박혀요.
박제된 미진의 창백한 얼굴, 중호의 무력한 얼굴 그리고
선하고 악한 영민의 얼굴..
 

 

 <라따뚜이>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비평가의 몫에 대한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에펠탑이 바라보이는 파리야경의 밝은 색감과 생쥐들의 지하세상의 어둠이 대비되면서 전체적인 색감은 화사하다. 주인공 생쥐 레미는 털 한 올 한 올이 살아있는 것처럼 실감난다. 깜찍한 표정 속에 진지한 면을 담고 ‘생각하는’ 동물로 태어났다. 특히 레미가 요리를 할 때 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악당 주방장과의 쫓고 쫓기는 장면에서의 박진감 넘치는 음악도 이야기 전개에 자칫 지루함을 덜어준다.



 

 

 

# 성장, 생쥐에서 요리사로

 올해가 무자년이라 쥐를 주인공으로 하는 어린이책들이 떠올랐다. 그중 고학년 동화 중 <외톨이 매그너스>가 떠오른 건 주인공이 생쥐인 점과 ‘성장’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다. 미천한 환경의 주인공, 꿈, 갈등, 역경 그리고 도전과 극복의 과정이 당연한 것처럼 따라온다. ‘출신성분이 별로인’ 생쥐 한 마리가 자신의 틀을 벗어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하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며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잇는다. 남다른 생각을 하는 생쥐는 무리에서 겉돌고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그들의 재능은 시기질투나 오해를 사게 된다. 자신의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 옳다는 말은 대체로 틀리다. 레미가 하수구에서 쓰레기 음식을 먹는 데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세상을 동경하며 ‘인간들에겐 분명 무언가가 있어’라고 생각한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레미는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천부적인 후각과 미각의 소유자인 레미는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또한 집을 떠나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세상과 낯선 무리에 대한 호기심을 늦추지 않는다. 레미가 가진 최고의 미덕은 이기적 유전자의 성정을 가진 인간과는 다른, 넉넉함과 포용력이다.

 



 

 

  

# 비평가의 몫

 윌리엄 진서는 <글쓰기 생각쓰기>에서 ‘비평가(critic)와 평자(reviewer)를 구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설명대로 ‘라따뚜이’라는 음식에 대한 글을 평자가 쓴다면 미학적 판단을 내려야하는 비평가의 글보다 훨씬 부드럽고 쉽게 읽힐 수 있어야 한다. 라따뚜이를 먹어볼 미래의 손님들에게 이 음식을 소개하면 되는 것이다. 즉 그것을 먹을 사람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할지 한번 생각해 보며 평을 쓰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평과 좋은 비평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원칙은 일단 ‘자신이 평가하는 매체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음식비평가가 왜 그렇게 빼빼하냐?’는 순진한 링귀니의 말은 통쾌하다.

 윌리엄 진서의 이 말은 영화 속 비평가 안톤 이고가 나중에 고백하는 대사와 일맥상통한다. ‘아무리 하찮은 음식도 어떤 비평가의 글보다 낫다’는 말이다. 과장된 일면도 있지만 이 말은 예술가들의 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양다리 걸치기 식의 비평은 재미없고, 올바르고 매력적인 비평가의 글이 진가를 발휘하는 경우는 허다하다는 것이다. 진서는 ‘비평은 좀 더 진지하고 지적인 행위이며 비평가는 어떤 책이나 문화현상에서 시작해 더 큰 문제로 뻗어나간다’고 밝혔다. 바람직한 비평가라면 새로움에 끊임없이 도전해야하는 요리사(예술가)들에게 먼저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걸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이나 창의성은 친구를 필요로 한다’는 영화 속 비평가 안톤 이고의 대사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고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밀쳐내려는 살벌함 속에서 한 영혼의 죽음은 예견되는 것이다.

 



# 음식과 글쓰기, 창작활동

 새로울 것 없는 재료로 날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어야 하는 작업은 피를 말린다. 영화 속 구스토가 안톤 이고의 날카로운 비평의 칼에 단숨에 쓰러진 것도 달리 생각해보면, 매너리즘에 빠진 구스토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환멸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래되고 소박하고 그게 그것인 재료들을 가지고 맛도 빛깔도 새로운 감동을 주는 걸 만들어내야 하는 게 요리사와 글쟁이의 천직이다. 이고는 뭘 주문하겠냐는 레미의 말에 ‘네가 잘 만들 수 있는 것, 뭔가 새로운 맛’을 만들어 보라고 소리친다. 입이 바짝 마르는 주문이다. 도대체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고의 혀를 어떻게 녹일 것인가.

 그러나 이고가 감탄한 그 맛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감과 반감 사이에서 안톤 이고는 오래전 추억의 그 맛을 상기시켜준 음식에 멋진 향기의 와인 ‘슈발 블랑’까지 주문하며 행복한 회상에 젖는다. 마치 마들렌느 냄새에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프루스트처럼. 영화 <식객>에서 ‘최고의 음식은 세상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는 대사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새로움’이란 말 속에는 익숙함과 편안함의 장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새로운 맛’이라기보다 어릴 적 엄마가 한참동안 부엌에서 뚝딱거리며 ‘새로 시도하여’ 만들어 주셨던 요리의 그 ‘새로움’에 대한 환호인지도 모른다. 새롭다는 말처럼 주관적인 것도 없다. 내게도 추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늘 새롭게 떠올라 오게 마련이다.



 

 

 달리와 다빈치는 모두 어린 시절 요리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고 한다. 정명훈과 이승철도 요리를 잘 하고 요리책도 근사하게 내어놓았다. ‘무에서 유’라는 예술 활동의 본질을 잘 살린 장르가 요리라면 글쓰기 또한 그런 숙명을 타고 났다. 우리가 추구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허욕을 버리고 오래 지속되어온 이야깃거리와 사소한 것들에 맛과 향을 불어넣는 일에 충실해야겠다. 흩어져 있는 기억들이 모여 오래 소유된 기억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의 느긋함, 행복감. 안톤 이고의 까다로운 혀를 부드럽게 녹인 레미의 ‘라따뚜이’는 그런 것이었다.


 누구나 요리를 할 수 있다. 이 말은 레미의 멘토 격인 구스토가 늘 했던 말이다. 출신성분에 기죽지 말고 창의력을 발휘하라. 구스토의 유령은 생긴 것도 레미 만큼이나 귀여운 캐릭터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자부심은 요리를 하는 사람의 절대적인 자신감에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를 믿고 마음껏 ‘나’를 파는 것이다.




- Ratatouille / 브래드 버드 / 2007

- 2008년 내가 본 열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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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2-1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픽사의 3D 애니는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그 상막함을 완벽하게 모따기해주는 스토리와 캐릭터들이 늘 존재하고 있어요.^^ 차기 픽사의 작품들을 언제나 기대하게 해주죠.^^

프레이야 2008-02-12 16:56   좋아요 0 | URL
CG 애니메이션이지만 삭막하지않고 색감이 깊고 명암도 좋더군요.
애니이다보니 화면의 매력이 스토리와 캐릭터 못지않게 중요한것 같아요.^^

무스탕 2008-02-1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본 영화인데 혜경님 리뷰보고 보고싶어 졌어요 >_<
쥐 해에 쥐가 주인공인 영화 한 편 볼까요? ^^

프레이야 2008-02-12 16:57   좋아요 0 | URL
탕님 새해에도 꽃보다 작은 얼굴 예쁘게 간직하시기 바래요.
저도 살청님 뽐뿌질로 보게 됐지요. 쥐가 요렇게 귀여울수가요.^^

2008-02-12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2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호인 2008-02-12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과 함께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입니다.
할 수 있다는 의지만 있으면 방법은 무궁무진 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프레이야 2008-02-12 16:58   좋아요 0 | URL
아이들도 좋아하죠. 전 혼자 보게 되었네요.^^
할 수 있다는 의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라로 2008-02-12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영화 넘 좋아서 10번도 넘게 봤다죠!!!
영화관에서만 3번을 봤으니!!!하트

프레이야 2008-02-12 17:01   좋아요 0 | URL
우왓~ 10번도 넘게요? 전 그렇게나 여러번 본 영화는 하나도 없다우.
나비님처럼 예쁘고 귀여운 영화에요. ^^

BRINY 2008-02-1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무척 좋아해요~ 한동안 맛난 거 먹을 때마다 '라따뚜이!'를 외치기도 하고^^; 설치류랑 오랫동안 동거한 경험으로 봐서, 정말 생쥐를 많이 관찰했구나하고 감탄하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합니다.

프레이야 2008-02-12 17:00   좋아요 0 | URL
브리니님도요? ^^ 라따뚜이!! 하고 외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네요. 나도 한번 외쳐봐야쥐. 설치류는 실제로 보면 징그러운데
영화속에선 어쩜 그리 귀엽게 탄생되는지.. 레미의 하얀 수염까지
말에요.

깐따삐야 2008-02-12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야말로 웰 메이드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 너무 귀엽고 재밌는 영화였어요. 똑같은 음식 영화여도 '사랑의 레시피'는 그냥 그랬는데 말이죠. 혜경님 리뷰를 보니 다시 보고 싶어져요.^^

프레이야 2008-02-12 17:03   좋아요 0 | URL
사랑의 레시피,는 안 봤어요. 정말 귀엽고 재미있었어요.
영리한 레미와 어설픈 링귀니의 우정도 따뜻했구요.^^

해적오리 2008-02-12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의 영화 관련 페퍼를 읽으면 같은 영화를 봐도 어쩜 이리도 섬세하게 느끼실까 하고 감탄하게 되요. ^^

근데요 레미랑 살청님이랑 좀 닮지 않았어요? 외모두 그렇구 분위기도 그렇구...

프레이야 2008-02-12 22:23   좋아요 0 | URL
네네.. 아주 영리하고 귀엽다지요 ^^
청님이 그림도 잘 그려요. 요리도 잘 하시려나요?

해적오리 2008-02-13 08:24   좋아요 0 | URL
원래 먹는 걸 즐겨야 요리를 잘하는 뱁인데...요리는 꽝일거에요.(이거저거 너무 다 잘하면 정이 안가요, 그쵸?)
그케 조금 드시는 분 첨봤어요. 제가 젓가락질을 못하겠더라니까요....

프레이야 2008-02-13 10:32   좋아요 0 | URL
ㅋㅋ 만나셨구낭~

다락방 2008-02-1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이것도 좋았고 저 위에 깐따삐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레시피]도 좋았답니다.
:)

프레이야 2008-02-13 10:33   좋아요 0 | URL
레미가 넘 귀여웠어요. 사랑스러운 영화에요. 그죠^^

소나무집 2008-02-1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 찜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영화보다 리뷰가 더 좋은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프레이야 2008-02-13 19:04   좋아요 0 | URL
애니메이션이 별로면 안 좋아하실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전 다른 애니메이션보다 참 재미있게 봤어요.
사랑스럽고 귀여운 레미도 그렇구요.
전 오히려 '마고리엄의 장난감 백화점'을 보다가 자버렸다지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아니라 ‘결혼은 선택이다’라고 말한다, 이 영화는. 미혼의 이언희 감독은 자신의 나이와 같은 서른둘(우리나이로는 서른셋이면서 희수는 서른둘이라고 우긴다)의 여주인공 둘을 나란히 등장시켜, 다른 가치관을 가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중의 생각이 내면에 공존하고 갈등하는 한 사람을 보여준다. 내가 서른셋일 때를 돌이켜보아도, 영화 속 희수(이태란 분)와 정완(이미연 분)의 처지나 가치관이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여성을 대변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도시에서 별로 아쉬울 것 없이 살고 있는 이들 두 여성의 삶은 비슷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에 아주 다르다.

 남편을 멋지게 코디하여 입혀서 출근시키고(그렇지 않으면 자기 얼굴에 먹칠이라며), 로봇청소기를 돌려놓고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는 희수는 고층의 아파트촌에서 사는 미시족이다. 자기와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 남자를 택한 것도 어디 내놔도 안심되는 남자 같아서라고 떠벌린다. 사진작가로 주가를 올리기 시작하고 있는 정완은 쿨한 연애를 꿈꾸고 그렇게 살고 있지만 쿨해야 할 감정이 끈적한 사랑으로 치닫는 것 같다고 느끼는 순간 혼란스럽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다니던 그녀가 사고가 나면서 자신의 감정을 재정리하고 수습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정완은 시골에 계신 엄마와 외할머니를 찾아간다. 언제고 돌아가 쉴 곳이 있다는 사실은 참 중요하다. 세 명의 그녀들이 마루앞에 나란히 앉아 한 컷 사진을 찍는다. 환하고, 닮았다. 미혼모였던 엄마는 결혼을 권하는 할머니의 말을 받아 “직업도 있는데 뭐 하러 결혼해? 그냥 혼자 살아.”라고 말한다. 정완은 결혼은 할 마음이 없는데 아이는 갖고 싶다고 말한다. 이런 마음은 희수에게로 전해진 듯하다. 임신 5주가 된 몸으로 누드촬영을 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10년 지기 친구 정완의 걸작품이 될 것이다. 아주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흑백사진들이다. 한 번 찍히거나 찍어보고 싶을 정도로 이태란의 포즈와 함박웃음이 상큼하다.

 희수는 결혼이 딱 맞다고 스스로 말한다. 남편과 잠시 헤어져 있는 동안도 남편보다 집이 더 그리워 돌아오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녀는 천생 마당을 지키는 암탉에 가깝다. 마당은 나온 그녀는 불완전해 보인다. 나이는 많고 할 줄 아는 건 없고 게다가 이혼녀다. 정완은 일을 사랑하고 결혼의 속박을 싫어한다. 희수와 정완은 서로 ‘어깨 너머의 연인’이다. 내 안에 들어있는 또 다른 나. 겉으론 아닌 것처럼 보여도, 선택하지 않은(혹은 못한) 길을 어깨 너머로 쳐다보며 평생 아쉬워하거나 그리워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녀들의 자매애를 그리려한다. 그것은 정완의 말대로 “나 자신을 무엇보다 사랑하고 아끼기.”라는 흔한 충고로 압축된다.

 하지만 페미니즘의 의미로 여성들끼리의 자매애로 확대하기엔 무리가 있다. 그것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샤넬로 칠갑한 여자와 머리도 옷도 아무렇게나 하고 속옷도 짝짝이로 입는 여자의 차이만큼, 스물둘 팽팽한 피부와 서른둘의 간격만큼, 요리학원 수료증 하나 있는 여자와 번듯한 전문직 여성의 자존감만큼, 뭉치기엔 미묘한 혼선이 있다. 택배회사의 여자근로자들 사이에 우뚝 서있는 희수의 화려한 매무새는 도저히 섞일 수 없는 이물질 같이 보인다. 무시하거나 시기하거나, 아예 담 너머의 관계로 생각하는 듯하다. 영화는 이혼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살짝 꼬집는다. 직업소개소를 찾아간 희수의 장면이 재미있다. 영화에서 여성들의 자매애라면 희수와 정완, 정완의 삼대모녀간에 흐르는 묵언의 이해와 돈독한 관계로 비춰지고, 더이상의 것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스물두 살의 젊은여자나 부잣집 따님보다 차라리 스물두 살의 길 잃은 젊은 남자와 더 호감 가는 관계를 맺게된다.

 

 


 

 

 영화는 일본소설의 제목을 따왔다. 주인공의 설정은 비슷하지만 결말은 아주 다르게 하였다고 한다. 너무 현실적이라고 할까. 이들이 델마와 루이스 같은 ‘낭떠러지 날아서 뛰어 내리기나 절벽넘기’를 하지 않은 것은 우리 현실에 맞춰 현명하기까지 하다.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상적인 판타지를 보여주어 거짓말하기 싫었다고 했다. 우리는 결국 우리의 삶 안에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자유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어느 곳에 서 있든 선택결정권이 어디에 있느냐의 문제다.

 결국은 한 여성을 모델링하며 영화는 모성에 귀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모성이란 것에 함몰되지 않으려한다. 결미로 갈수록 이야기가 급발전하고 속도가 붙는다. 영화는 희수의 입을 통해 "엄마도 여자지?"라는 말을 흘려주고 정완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듣게 한다. 어느 날, 정완이 찍은 잡지기사 인터뷰 사진의 모델은 어느 노부부였다. 늦게야 두 번째 사랑을 이뤄낸 그들의 만족스러운 표정과 프로포즈로 받은 반지를 낀 쭈글쭈글한 손을 자랑스럽게 내미는 나이 지긋한 여성(우리가 할머니라고 부르는)의 얼굴이 사랑스럽다. 그녀를 행복하게 한 것은 선택한 사랑, 선택한 이별, 선택한 결혼이었다.

 

 


 

 

 이언희 감독은 카메라와 사진에 애정이 많은 것 같다. 전작 <...ing>에서도 사진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에서도 사진작가 정완을 내세워 여러가지 사진을 보여주고 카메라에 눈을 두게 한다. 그중 Leica D-lux3가 옆지기의 눈에 포착되었다. 4살 때 스페인으로 입양된 후 엄마를 찾아 고국에 온 스물두 살의 마르코가 들고 있던 디지털 카메라다. 당장 검색 들어가 디자인을 보고 침을 흘리고 있는 중. 영화에선 블랙이 나오는데 실버도 깔끔한 인상이다. 가죽케이스가 근사하다. 정완이 사귄 유부남의 프로필을 찍은 흑백의 초상사진도 멋지다. (옆지기는 이미연이 카메라 잡는 폼이 어설프다고 아쉬워했다^^) 그걸 잡지에 실어 자신의 감정을 노출한 걸 보면 아무래도 남자보다 여자가 더 용감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계산할 줄 모른다.

 이야기 전개가 지루한 면이 있었지만 화면의 색감이 뛰어나다. 희수의 대표색은 블루와 오렌지이고 정완의 대표색은 보라와 검정이다. 이들이 입고 나온 의상의 색깔과 침대이불의 색상까지 통일하여 맞춰두었다. 세심한 색의 배치이면서 그들의 두가지 다른 면, 즉 우리 안의 양면성을 함께 보여준다. 어둠과 빛, 그 모든 것이 혼재하는 모순덩어리. 결미에서 희수의 급변하는 태도가 설득력이 약하지만 우리는 때로 감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납득시키기 어려울 때가 있는 법. 정완과 희수의 티격태격 장면을 통해 갈등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스스로 선택하는 삶'이라면 어느 쪽이든 자유로움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선택한 연인'의 다른 이름이다.




- 어깨 너머의 연인 Love Exposure / 이언희 / 2007

- 2008년 내가 본 아홉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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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08-02-0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깨너머의 연인>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막연한 동경을 하지요.
제목이 내용이랑 딱 맞네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일듯^*^
님 행복한 설날 되세요~~

프레이야 2008-02-05 16:19   좋아요 0 | URL
원작소설의 '어깨너머'는 뭘 의미한건지 잘 몰라요. 안 읽어봤으니까요.
주관적인 제 감상이라 제목이랑 내용이랑 감독이 의도한 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미연이 살이 많이 빠졌더이다. 그래도 전 이태란이
더 좋던걸요.^^ 세실님도 즐거운 명절 보내세요^^

씩씩하니 2008-02-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님..벌써 여덟번째라니...
결혼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영화가 맞을까요..함 볼까 생각해봅니다...
전 지난 주말 애들 아빠가 전체 관람가(사실 알고 보니 12세 관람가였지요~) 영화 한 편 볼까 하며 빌려온 '사랑방선수와 어머니'가 2008년 젤 첨 본 영화였지요~
님..올해도 열심히 보구 이렇게 맛난 리뷰 마이 올려주세요~~
영화를 보고도 님이 리뷰를 보면 다시 새롭게 영화가 읽히곤해요..ㅎㅎㅎ

프레이야 2008-02-05 16:22   좋아요 0 | URL
결혼, 하고도 후회하고 안 하고도 후회하겠지요.
무엇이든 내가 진심으로 선택한 길이라면 고난까지도 덜 힘들게 받아
들이며 살 수 있겠죠. 하지만 그런 생각자체도 하나의 환상이 아닐까
싶어요. 딜레마입니다. 사랑방선수..., 그런대로 재미나지요? ㅎㅎ
하니 님, 설연휴 즐거이 보내세요^^

순오기 2008-02-05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못 봤는데, 이미연 때문에 보고 싶은 영화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다들 있겠죠? ^^

프레이야 2008-02-05 19:42   좋아요 0 | URL
영화적으로는 아쉬움이 많았어요. 이미연 좋아하시는군요.
전 인디언 섬머와 중독에서 그녀가 제일 기억나요.
순오기 님도 설날 맛난 거 많이 드세요^^

수경 2008-02-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혜경님 설 잘 보내시구요. 새해 다시 한번 인사드립니다. 복된 한해 되시길. 가정 내 언제나 좋은 일만 가득한 한해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윗 어른들.. 아이들 챙기시느라 바쁜 명절이 되실 것 같아요. 건강하게 명절 보내세요..

인사 드리러 들렀어요.. 행복 가득하세요.

프레이야 2008-02-05 20:09   좋아요 0 | URL
수경 님 와락~ 여기서 글로 뵈니 짠해져요.
서재에 돌아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제 바람이지만은 않을거라고 믿어요.
내일 아침 시댁 갈거에요. 별로 먼곳도 아니고 음식도 간소하게 하니까
전 편한 백성이라고 볼 수 있죠. 세뱃돈 받는 나이는 물 건너 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명절연휴라는 게 마음 푸근하게 하는 맛이 있어요.
음식 너무 많이는 안 먹을게요. 히힛..
수경 님도 연휴 즐거이 보내시기 바래요. 늘 평안하시길 바래요 *^^*

비로그인 2008-02-06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하다는거. 요즘 사람들, 네 짐을 떠안고 싶지 않다, 라고 얘기하면서
자기는 자극받기를 원하죠.
결국, 쿨하다는 건...자꾸 관계로 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너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그런 생각이 들어요.

프레이야 2008-02-06 07:39   좋아요 0 | URL
리사님 영화에서 말하려고 하는 또다른 이야기 '관계'를 딱^^
집어주셨어요. 관계로부터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다른 이름 맞아요.
싱글 희수는 쿨하게 헤어지자고 말하면서도 집착하는 자신을 발견해요.
비겁하다고 느끼죠. 모든 관계에 있어서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은
상처 받기 쉽게 마련일까요..

다락방 2008-02-09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저는 이 영화, 깜짝 놀랄정도로 재미없었어요. 뭔가 저랑 맞지 않는다고 느껴졌던걸지도 모르겠어요. [싱글즈]의 느낌을 기대했다가, 뭔가 억지로 쿨한척 하려는 듯한 느낌과, 과장된 표현들이 거부하게 만들더군요. 역시 어떤 영화는 혜경님의 리뷰쪽이 훨씬 나은듯 해요.

프레이야 2008-02-09 22:35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영화적인 완성도는 정말 별로였어요.
이야기도 지리멸렬하구요. 리뷰쪽이 훨씬 낫다는 말씀에 히죽~ ^^
싱글즈, 오래전 봤지요. 엄정화와 장진영 멋있어요.
시나리오를 같은 사람이 썼다지요.
 

 


 

 

 

 미네르-바는 ‘옛날 옛적’(벌써 우리 기억에 그렇게 되었나) 아픈 시대의 모습을 압축한 공간이다. 마치 열두 폭 병풍 뒤의 가려졌거나 숨기고픈, 숨막힐 듯 힘겨운 현실의 공간 너머 충분히 있을 법한 화려함과 욕망의 공간이다. 지혜와 학예와 전쟁의 여신을 상징하는 그 이름이다. 수도여고 2층에 정성들여 세트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겉은 수더분하지만 속은 제법 불빛 찬란하고, 폼 잡은 인간 군상들이 갖가지 옷차림을 하고 잔뜩 긴장하여 앉아있다. 단연 돋보이는, 가장 여유만만해 보이는 인물은 가네마루, 봉구(박용우 분)다. 호리호리하면서 탄탄한 몸매에 댄디한 수트와 모자를 걸친 그가 들어서자 무대에 아름답지만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 여가수가 등장한다. 그녀의 이름은 하나꼬, 춘자, 해당화이다.

 1944년 10월에서 45년 8월, 미네르-바 안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혜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독립군 점조직 최말단의 가방끈 짧은 사장(성동일 분)과 주방장(조희봉 분)은 김구 주석의 명령하달을 받아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도 하는 충청도 토박이다. 그들의 작전은 간단하기 이를 데 없고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란 식이다. “간단혀!” 한 마디면 끝이다. 이들의 작전 수행은 내내 웃음을 유발한다. 우둔함과 충직함이 불러오는 우발적인 실수연발로 주연배우들의 몫보다 이들이 전달하는 재미가 더했다.

 


 인물들은 베일에 가려있었다. 일본인인 줄 알았던 인물들이 알고 보니 거의 조선인이었고 가문의 등급을 올리기 위해 일제에 충성하고 있는 개들이었다. 전당포 주인(안길강 분)을 포함해 봉구와 춘자의 비밀도 깔고 들어가지만 영화 초반에 거의 짐작 가능하다. 웃음이 유발되는 지점은 그들 또한 어딘가 좀 모자란다는 사실을 관객이 느끼고 안타까울 때이다. 봉구의 액션도 춘자의 노래도 그렇다. 전혀 재즈가 아닌 노래를 재즈라고 부르는 가창력 없는 하나꼬(춘자)와 그녀의 몸짓만 보고도 열광하는 남자들 모두 내면에 욕망만이 이글대는 사람들이다.

  ‘가문의 부활’은 내가 보지 않은 영화이지만 정용기 감독의 이 영화는 많은 부분 재미와 감동의 양 날개를 균형 있게 펼치며 이어가려는 의도가 보인다. 다소 매끄럽지 못하게 이어지는 장면의 연결이 턱 턱 걸리긴 했지만 여러 인물에 초점을 맞춰 하려다 내용을 전개하려다보니 코믹과 스펙터클한 면의 조화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너무 무겁지 않게 가려고 한다.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일본의 역사왜곡과 일제에 의한 우리 문화재 약탈을 비꼬아 놓았다. 우리 문화재를 흠모하면서도 비하한 일제의 만행을 슬쩍 꼬집어 그들의 심리를 역이용하기도 한다. 석굴암 본존불상의 미간백호상과 백제검,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약탈만행을 역이용하는 희대의 사기꾼, 가네마루와 민족혼이 밥 먹여주냐며 한 밑천 잡아 일본도 조선도 떠나려는 하나꼬, 이들이 손에 쥐려고 하는 것은 ‘동방의 빛’이다. 아니, 그냥 다이아몬드다.

 

 

 

 

 가네마루는 석굴암 본존불상의 미간에 박힌 삼천 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위해 정밀하게 역사를 왜곡하여 증거자료와 함께 총감에게 접근한다. 잔뜩 달아오른 총감은 일제의 무모한 광기를 상징하며 또하나의 우둔함을 보인다. 결국 “동방의 빛, 그런 건 없어.” 라고 말하는 봉구는 패자일까, 승자일까. 승자는 역사를 만들고 패자는 전설을 만들지, 라는 대사는 이름 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힘든 줄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온 수많은 패자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들린다. 역사는 길고 전설은 더 길다.


 영화는 정치적 색채를 피하고 너무 잘 난 인물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1944년에서 1946년까지의 분위기를 고증하는데 집중하기보다 현대적인 분위기가 가미된 신선함이 있다. 인물들은 어딘가 나사가 하나쯤 빠져있고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며,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식의 사건 전개로 웃음이 이어진다. 가네마루 역의 박용우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꽤 매력적인 캐릭터인데 나쁘진 않지만 꽉 채워지지 않는 허술함이 있다. 그의 연기는 내게 언제나 그랬는데 그게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대사를 말할 때에 힘이 안 느껴져서 그런가. '호르비츠를 위하여'에서 어벙하지만 순수한 피자청년으로 나왔을 때가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앤딩 크래딧이 올라가며 흘러나오는 노래 ‘Forever life'는 박용우가 불렀다. 음성이 괜찮다.

 

 



 

 광복 후 미네르-바는 물갈이를 했다. 1946년 1월, 봉구가 찾아갔을 때 그곳에는 황군의 제복은 사라지고 미군들의 군복이 왁자하다. 춘자는 이제 하나꼬일 필요가 없고 토롯토(발라드 같다)를 재즈라고 여전히 우기며 부른다. 영화에 봉구와의 사랑 같은 뻔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넣지 않은 게 마음에 든다. 민족혼을 고취시켜야겠다는 강박도 없다.  "대한독립만세. 기여, 아니여? .. 기여!"  성동일의 웃기는 대사다. 웃다가 찡~, 그러다 또 웃었다. 좀 작위적이면 어떠랴. 예상한 웃음이라도 다른 볼거리와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야기가 나쁘지 않다. 독립을 위해 힘쓴 분들을 희화화 했다고 반격이 들어올 수 있는 영화라고 하기엔 전체적으로 가볍게 웃음을 주며 소박한 사람들에 초점을 두었다. 미네르바의 주인과 주방장도 바뀌지 않았다. 전쟁을 주관하는 여신 미네르-바는 여전히 현존한다.

 

 


- Once Upon a Time / 정용기 / 2008

 

- 2008년 내가 본 여덟 번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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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2-04 0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문의 부활 만든 감독인가요? 평이 엇갈리고 있어서 고민 중이에요. 혜경님 감상을 들으니 어쩐지 좀 시원해진 느낌이에요^^

프레이야 2008-02-04 08:24   좋아요 0 | URL
감독은 나중에 알게되었는데 그렇더군요. 너무 가볍게 가지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정도로 웃으며 보았어요. 애초에 코믹을 걸고 나온 거니까요. 액션이 좀 어색하고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곳도 있었고
주연배우들의 연기도 좀 모자랐지만 그런대로요.. ^^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