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절판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87쪽

내 삶은, 마치 그것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무감각한 기계 장치인 듯, 힘 있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어린 로에 의해 움직였다. 아이들의 세계가 강건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일념으로 그녀는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183쪽

치한(the rapist)과 치유자(therapist)라는 말은 글자로는 큰 차이가 없다.... 정상적인 아이-정상적이라는 걸 명심해-는 자기 아버지이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막연한 남성을 미리 본다.('막연한'이라니 좋구나, 폴로니우스를 걸고 맹세하지)-204쪽

현명한 엄마(너의 불쌍한 엄마도 살아 있었더라면 현명했겠지)라면-진부한 표현을 용서해라-여자애가 아버지와 접촉하는 동안에 사랑과 이상적 남성형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북돋아주었을 것이다. -204쪽

나는 역사적으로 보아, 연극을 원시적이고 타락한 형식이라고 믿어 싫어했다. 개별적인 천재는 많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석기 시대 의식 같고 사회 전체의 부조리를 담고 있는 것 같은 예술양식, 예를 들면 독자가 방에 혼자 앉아 기계적으로 술술 외우는 엘리자베스 시대 시처럼 말이다.-272쪽

일어나고 있는 운명은 정말이지 잘 짜인 추리 소설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소설 속에서 독자는 그저 단서에 잔뜩 눈독을 들이면 된다. 젊은 시절에 나는 실제로 해결의 실마리가 될 만한 곳을 이탤릭체로 강조해 놓은 프랑스 추리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맥페이트의 방식이 아니다. 아무리 그가 어떤 막연한 암시를 감지한다 해도.
(맥페이트는 운명의 여신으로 험버트를 조종한다. 우연에 의해서)-286쪽

본능적으로 나는 화장실이나 전화가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내 운명을 걸고 넘어지는 대상들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운명적인 물체들을 갖게 마련이다. 반복되는 경치일 수도 있고, 어떤 숫자일 수도 있다. 신들이 우리에게 중요한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조심스레 선택한 것. 여기서 존은 늘 비틀거리고, 저기서 제인은 늘 가슴이 아플 것이다.-287쪽

웃으면서 하는 친선경기 여행은 패스포트와 스포트의 차이를 지운다. 왜 구태여 멀리 나가야만 우리가 행복해지리라 꿈꾸는가? 환경을 바꾼다는 것은 파국을 앞둔 연인들, 오염된 패들이 의지하는 관습적인 오류가 아닐까-325쪽

그 사나운 환상 속에는 나의 거친 기쁨을 완벽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었다. 그 영상은 닿을 수 없고,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잿빛의 위대함이여.-359쪽

이제 비슷하게, 얼핏 스치던 광채, 현실의 약속-유혹적으로 그런 척할 뿐 아니라 고상하게 지키던 약속-이 모든 것을 우연은 망가뜨린다. 창백하고 사랑스런 작가의 더 왜소한 인물들로 바꾼다. 나의 환상은 프루스트적이고 프로크루스테적이다.-360쪽

잘 알려진 인물이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이런저런 발전을 거친다 해도 그의 운명은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고,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을 위해 마련해 준 논리적이고 관습적인 패턴에 따라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X는 그가 늘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이류교향악과 전혀 다른 불멸의 음악을 만들 수 없다. Y는 결코 살인을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Z는 결코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속으로 미리 다 정해 놓고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가 우리 생각을 얼마나 잘 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며 만족해한다. 덜 만날수록 더 그렇게 된다.-361쪽

우리가 정해 준 운명에서 빗나가는 경우 반윤리적이고 변칙적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은퇴한 핫도그 장사가 가장 위대한 시집을 출간해 내었다고 밝혀질 경우 우리는 차라리 그 이웃을 모르는 편이 나을 뻔했다고 생각한다.-362쪽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황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지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388쪽

선의였다! 그녀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질적으로 성급함과 지루함으로 감추었다. 반면에 나는 불쾌감을 느낄 정도로 인위적인 음성을 사용하면서 필사적으로 초연한 듯 얘기했기 때문에 듣고 있던 롤리타는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무례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 나의 불쌍하고 상처받은 아이여!-~388쪽

나는 일이초쯤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던 것 같ㄷ. 아, 여러분의 흔한 죄인들이 그러하듯 있던 일을 모두 지워버리려는 그런 뜻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그가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모두 내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아주 잠깐, 나는 내가 부부의 침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했고 침대 위에서 병든 샬로트를 보았던 것 같다. 퀼티는 굉장히 병든 사람이다.-415쪽

내가 들은 것은 바로 아이들이 노는 소리였다. 대기가 너무도 맑아서 이 뒤섞인 소리들의 화음 안에서, 장엄하고 미세하고, 아득하면서도 요술처럼 가깝고, 솔직하면서도 신성하게 신비스런 아련한 소리들 속에서 때때로 까르르 터지는 선명한 웃음, 탁 치는 방망이 소리, 장난감 마차가 덜그럭대는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왔다, 그러나 환히 떠오르는 골목마다에서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기에는 나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나는 알았다. 가망없이 가슴 아픈 것은 내곁에 롤리타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 소리들의 어울림 속에 그녀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임을.-420쪽

그리고 클레어 큐를 동정하지 말아라. 사람은 그와 험버트 험버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만 했고, 또 험버트가 몇달이라도 더 살기를 원했다. 그렇게 해야 험버트가 너를 후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을 게 아니냐. 나는 들소와 천사들, 오래가는 그림 물감의 비밀, 예언적인 소네트, 그리고 예술이라는 피난처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너와 내가 나눌 수 있는 단 하나의 불멸성이란다, 나의 롤리타.-4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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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1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8-21 2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8-23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가 선물해달래서 선물해주곤 전 아직 못 읽어본 작품이에요.
논란이 좀 되는 작품 같던데 맞나요? ^^;;

프레이야 2007-08-23 10:46   좋아요 0 | URL
무척 흥미로운 문체에요. 물론 원문해독이 안 되니 번역의 힘만 믿지만요..
당대에 논란이 많이 되었던 건 내용의 외설스러움보다 표현의 극단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나보코프의 뜻은 그걸 넘어 그 위에 있었어요.
인간본성의 외로움, 연약함. 미학적인 상징과 은유들, 빛나는 말장난들,
고전에 대한 지식과 현실적인(당시의) 법안들에 대한 상식이 바탕되어
읽히는, 좋은 책이었어요. 고전의 힘!
진달래님, 좋은 아침이에요. 바람이 좀 선선해요.^^
 
향수 (반양장)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Mr. Know 세계문학 20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마음만 먹으면 못 할 일이 없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의 손에 그 힘이 들어 있다. 이것은 돈이나 테러, 혹은 죽음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아무도 그걸 거역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꼭 한 군데 있으니, 그곳이 바로 그루누이 자신이다. 그는 이 사랑의 향기를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향수를 느낄 수가 없으니 그걸 바르고도 자신이 누군지 모른다면 도대체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는 세상과 자신, 그리고 향수를 비웃었다.-374쪽

이 향수가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향수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아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단지 그 효과에 굴복할 뿐이니까. 그렇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자신들을 매혹시키는 것이 향수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 향수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낸 나 자신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향수의 마법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아닌가. 이 향수는 내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자신들이 진짜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375쪽

자신들의 음울했던 영혼이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그들의 얼굴에 수줍은 아가씨 같은 달콤한 행복의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눈을 들어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처음에는 은밀히, 잠시 후에는 공공연하게 다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정도로 당당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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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7-06-2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내일이 수술날이죠 아마. 수술 하는 것도 힘들지만, 하고 난 뒤에도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을 거예요. 마음 굳게 먹고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프레이야 2007-06-24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님, 이리 격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엄마에게도 전할게요. 수술 후 힘든일들이 많을 거란 말,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약해지지 않도록 말씀드려야겠어요. 수요일에 예정입니다.
 
애니멀 크래커스
한나 틴티 지음, 권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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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바다에 뛰어드는 것은 묘지로 땅을 뚫고 떨어져, 관과 시체들에 꽈당 부딪히고, 땅으로 스며들어간 잃어버린 영혼의 조각조각이 나를 찾아 손을 뻗는 것을 느끼는 것과 비슷해.-15쪽

일어난 일을 무조건 생각하지 않으려고 봉해버리면 오히려 그 생각은 더 강해져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쉴새없이 해대며 더 괴롭힌다. 그러니까 너는 어쨌든 다시 그것과 맞부딪쳐야 한다...... 거기를 밟아버려.-24쪽

늘 우리가 잉글리시 머핀에 잼을 발라 먹던 바로 그 부엌 식탁 앞에 앉아 떨리는 내 손가락들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내가 행복했었다는 것을. 나중에 멍이 사라지고 나서 아내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같은 장소에서 내 피부를 쓰다듬으며 앉아 있었다. 몸을 갈가리 찢었다가 급하게 다시 꿰매어 붙인 것처럼 근육이 아팠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내 뼛속에서 울리는 낯설고 굉장한 어떤 것을 느꼈다. 딸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내 마음은 그 아파트의 그 방, 그리고 내 앞에 놓인 생활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말했다. 너한테는 돌보아야 할 아이가 있어.-28쪽

관리소장은 종종 동물원 운영을 아내 마틸다와의 결혼생활에 비유했다.......
관리소장은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물들을 보고 진화에 관한 다윈 이전의 이론, 즉 기린의 목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몸을 뻗다보니 길쭉해졌다는 이론을 생각해냈다. 마틸다의 마음속에는 어떤 종류의 욕망이 있을까 그는 궁금해졌다.(p77)-73쪽

룰루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몸속의 피가 수평으로 흐르는 광경을 상상했다. 재미있을 거야. 피도 재미있을 거야. 힘들이지 않고도 가고 싶은 데를 쉽게 갈 수 있으니까. 룰루는 생각했다. 해가 지고 동물원이 문을 닫은 후 네 다리로 다시 서야 할 때면,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79쪽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아버지를 아버지 이름의 유리방에 보존해 두고 싶었다. 국수공장의 벽을 가로질러 씌어져 있던 한자를 그려 넣어서, 오일 튜브들을 진열하고 붓들을 펼쳐놓고 순서대로 작품을 걸어놓고, 한 귀퉁이에는 베개로 침대 자리를 돋워 세워 놓고, 아버지의 모든 것을 그녀의 힘으로 보존하고 싶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그는 곰은 한 번에 여섯달 동안 동면한다고 말했다. 곰의 심장 박동이 약해진다. 숨은 거의 쉬지 않지만 살아 있다. 메리는 곰이 그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상상했다. 당연히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배고픔일 것이다. 그녀는 슬픈 실밥 자국이 있는 그 동물이 그들 뒤를 비트적거리며 따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115-116쪽

사랑은 죽는 것과 같아. 작별 인사를 하는 것과 같지.
가끔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다. 가끔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156쪽

한 사람이 죽기 전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다. 암브루조는 마지팬을 생각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그는 재료를 찾아보았다. 아몬드 페이스트, 계란 흰자, 가루설탕. 그가 어렸을 때 노나는 페이스트를 밀어 동전 모양으로 작게 잘랐다. 그러면 암브루조는 꽃, 십자가, 테디 베어 등, 그만이 가진 틀로 찍어 사탕과자의 모양을 냈다. 그러고는 하나하나 먹었다. 혀끝이 마비되어 단맛을 느낄 수 없을 때까지.-165쪽

뱀이 얼굴을 지나갈 때 그녀는 숨을 죽였다. 비늘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뱀의 하얗고 편편한 배가 그녀의 쇄골을 건드렸다. 뱀의 무게가 축복처럼 느껴졌다. 뱀은 그녀의 팔을 감고 돌다가 어디로 갈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쿠션이 있는 소파 쪽으로 갔다. 그는 쿠션 밑에 들어가 자는 걸 좋아했다. 그녀는 천천히 그를 보내주었다.-200쪽

어스름 무렵이면 윌로비는 그녀를 찾아 돌아다녔다. 숲으로 들어온 후 미스 월드론은 크게 변했지만, 윌로비는 사람들이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하도 많이 보아서 익숙했다. 그 자신도 한두 번 경험한 일이었다. ...... 그가 숲에 대고 외치면, 곧 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뒤이어 땅을 울리는 작은 발의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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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과 수필 태학산문선 301
윤오영 지음, 정민 엮음 / 태학사 / 2008년 3월
구판절판


정이란 하나의 면면히 흐르는 리듬이다. 절단된 데는 정이 없다. 비정의 세계다. 정이란 시간과 공간에 뻗쳐 무한히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이고, 자연과 역사와 인간의 유기적인 유? 이 정의 구상이 곧 미다. 수천 년 전의 작품, 수만 리 이역의 작품이 우리에게 공명공감을 일으키는 것은 그와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유대가 있기 때문이다. 수명에는 한계가 있으나 생명에는 한계가 없다.-86쪽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도 평소에 文情과 文心을 기르지 않고 붓끝의 재주에만 맡기면 그 문장에 품위와 진실이 깃들이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과 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를 떨치고 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93쪽

왜 도연명의 황국이며 주렴계의 홍련이었을까. 날마다 일어나고 되풀이되는 신변잡사라고 그저 번쇄하고 무가치하다고만 할 것인가. 이런 것들을 다 떼어낸다면 인생 백년에 남은 것이 무엇인가. 생활 속에서 생활을 찾지 아니하고 만리창공의 기적이나 천재일우의 사건에서 생활을 찾으려는 것도 공허한 것이 아닌가. 더욱이 분분한 市井의 시비, 소잡한 정계의 동태, 불어오는 사조의 물거품, 그것만이 장구한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147쪽

저속한 인품의 바닥이 보이는 문필의 가식, 우러날 것 없는 재강을 쥐어 짜낸 미문의 교태, 옹졸한 분만, 같잖은 점잔, 하찮은 지식, 천박한 감상, 엉뚱한 기상, 이런 것들이 우리의 생활을 얼마나 공허하게 하며, 우리의 붓을 얼마나 누추하게 하는가.-148쪽

'절실'이라 두 자를 알면 생활이요, '진솔'이란 두 자를 알면 글이다. 눈물이 그 속에 있고, 진리가 또한 그 속에 있다. 거짓 없는 눈물과 웃음, 이것이 참다운 인생이다. 인생의 에누리 없는 고백, 이것이 곧 글이다. 정열의 부르짖음도 아니요, 비통의 하소연도 아니요, 精을 모아 奇를 다툼도 아니요, 要에 따라 才를 자랑함도 아니다. 인생의 걸어온 자취 그것이 수필이다.-149쪽

위정자의 최대 무기는 권력이다. 권력의 힘이란 시랑猜狼과 같은 것이다. 지도자의 최대 무기는 덕행이다. 덕행의 힘이란 물과 같은 것이다. 지성인의 최대의 무기는 발언이다. 발언의 힘은 추상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인의 발언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확고한 신념이 아니면 발언할 수 없다.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침묵의 권리와 사색의 여유와 불협조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발언은 천근의 무게가 있고 흉중의 보도寶刀가 항상 보류되어 있는 것이다.-175쪽

내 생각과 서로 드나들면, 비로소 읽을 수 있는 내 친구의 글이다. 예상보다 항상 새롭고 절실하면, 이는 上手의 글이라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글이다. 말이 항상 의표를 찌르고 진실이 육박하며, 미지의 여운이 심층의 저변을 울리면, 이는 범상치 아니한 명문일 것이다. 나를 기쁘고 즐겁게 하기에 족한 글이다....... 음악인가 하고 읊어 보면 회화인 양 나타나고, 진리인가 생각하면 허망인 듯 잡히지 않는 기환奇幻, 사색의 무지개가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다가 책을 펴면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추고 옷깃을 바로 하게 하는 글, 모르면서도 매력에 사로잡혀 놓지 못 하는 글, 그런 글이 있다면 일생을 송독誦讀하고도 남음이 있는 기문이니, 대소심천大小深淺의 차가 무량으로 크기 때문이다.-204쪽

"음식의 맛의 생명의 염담鹽淡 맞추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문장에서 염담이란 무엇에 해당합니까?" "문장의 농담濃淡이지. 문장의 농담이 없으면 정물화에 음영 없는 것과 같고, 음악에 박자 없는 것과 같지. 문장은 이 농담에 의해서 함축도 있고 여운도 있고 기환도 있고 내재적인 리듬도 있어 비로소 시취詩趣를 갖게 되는 것일세. 고인이 농담 없는 문장을 기리켜 몰골도沒骨圖라고 풍자한 이가 있어. 우리 모양으로 문장이 미숙하고, 또 배워보려는 사람들은 이 깍두기에서 얻는 바가 있을 것일세."-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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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07-04-1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바보라고 말씀하신 윤오영 선생님의 정갈한 글은 우리말의 큰스승님이라 할 만하죠.
혜경님 뽑아놓으신 글을 읽으면서 마음을 닦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4-14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샘님, 특히 방망이 깎던노인과 사발시계, 깍두기 같은 글들... 참 좋더이다.
마음이 정갈해지는 글이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늘바람 2007-04-1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욱이 글을 쓰는 사람도 평소에 文情과 文心을 기르지 않고 붓끝의 재주에만 맡기면 그 문장에 품위와 진실이 깃들이기 어려울 것이 아닌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은 문정과 文思에서 잠시도 떠나지 아니함으로써 속기를 떨치고 文雅한 품성을 기른다. 여기서 비로소 아름다운 글이 써진다. 그러기에 한 편의 명문은 10년의 교양에서 온다고 했다.


이 글 저도 마음에 새기며 퍼담을 게요


네꼬 2007-04-15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어지네요. 저도 어떻게.. 정연하고 단아한 것까진 어려워도 좀 차분해질 순 있지 않을까요? -_-a

홍수맘 2007-04-15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요. <방망이 깎던노인>은 제가 학교다닐 때 교과서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 하네요.^ ^;;;

비로그인 2007-04-1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며 내 마음을 바로 하고 내 자세를 바로 하게 됩니다.

오우아 2007-04-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의 맛은 염담, 문장의 맛은 농담이 절로 와 닿네요. 그러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맛은 무엇일까요? 혹 정(情)담이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04-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문아한 품성을 기르는데 10년 20년 기한이 없겠지요. 노력하고 싶어요.
네꼬님, 이미지 바뀌었네요. 귀여워요.
홍수맘님, 그래요 그 글 맞아요. ^^
승연님, 그래서 글도 골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우아님, 정담이란 말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짱꿀라 2007-04-1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었던 작품을 또 한번 이곳에서 만나게 되니 너무 기쁘네요. 잘 읽고 갑니다. 역시 옛글의 정취가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문장 한구절 한구절이 너무 좋습니다.

프레이야 2007-04-18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전 어느분의 선물로 읽게 되었는데 곶감을 수필에 비유한 적절함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 대목을 여기 옮겨적지 못했네요. 소박한 언어로 고아한 멋이 느껴지는 글들이었어요.
 
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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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한갓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역겨움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유일한 것은 인간이 이따금씩 혼돈 속에서 창조한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이 그린 그림, 그들이 지은 음악, 그들이 쓴 책, 그들이 엮은 삶. 이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가장 다채로운 것은 아름다운 삶이죠. 그건 완벽한 예술 작품입니다.-266쪽

그것은 '길'과 '길을 가는 자'입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걸어가는 영원한 길이지만, 어떤 존재도 그것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그것 자체가 존재이니까요. 그것은 만물과 무이지요.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들이 자라나고, 모든 것들이 그것을 따르며, 마침내 그것을 모든 것들이 돌아갑니다. 각이 없는 네모이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이며, 형태 없는 상입니다. 그것은 거대한 그물이고, 그물코는 바다처럼 넓지만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들의 피난처가 되는 성소입니다. 그것은 아무 곳도 아니지만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라고 그것은 가르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비천한 사람이 온전히 지속됩니다. 굽히는 사람이 똑바로 섭니다.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고 성공은 실패가 도사린 함정입니다. ...... 위대함은 스스로를 극복한 자의 것입니다.-2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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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하니 2007-03-22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패는 성공의 밑거름이고 성공은 실패가 도사린 함정입니다....위대함은 스스로를 극복한 자의 것입니다............
실패도 성공도 사실은 한뿌리라고 해야할까요....성공도 실패도 그런 개념들을 넘어설 때...진정 위대해질수 있는걸가요...

프레이야 2007-03-22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씩씩하니님, 이 책 무척 감동적이었어요. 늙은 아버지를 이해하고서 비로소 남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는 키티. 사랑의 속성과 인간의 연약한 본능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책이었어요. 인물이나 풍경이나 영화에서는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됩니다.

비로그인 2007-03-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인생의 베일 이라는 제목이 참 와닿는 것 같습니다 ^^

프레이야 2007-03-2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셔님/ 콜레라가 창궐한 지역에 가서 두려움으로 첫새벽을 맞는 장면이 책의 제목과 연결되더군요. 무척 감격스러웠어요. 미명의 몽환적인 자연, 그속에 베일을 벗기듯 드러나는 낡은 사원의 음울하고 장대한 모습이요. 한 여성이 성장하는 이야기가 무척 와닿았습니다.

비로그인 2007-03-2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옴이 이런 근사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던가요? 저는 그 옛날 <인생의 굴레>를 읽었던 기억만이 아물아물.. 님의 밑줄긋기를 보고 저도 보관함에 쏙 넣었습니다.

프레이야 2007-03-23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nci님, 저도 오래전 읽었네요, 인간의 굴레와 달과 육펜스를...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이 괜찮아서일수도요. 근데 오자가 서너 군데 있었어요.

치유 2007-03-28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흘러가도록....내버려 두질 못하고 부둥켜 안고 힘들어 하며
때론 고통을 더 부풀려 짊어 지는게 인생아닌가...싶은 //

프레이야 2007-03-2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 세월이 약이란 말이 실감나는 나이지요. 그럼에도 꼭 붙들고 애태우는 게
또 우리들인 것 같기도 하구요. 이 책, 마지막에 참 감동적이었어요. 아버지의 평생
에 어린 회환과 묻어버린 열정과 꿈을 이해하여야만 남성에 대한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결론이에요. 삶의 통찰력이 묻어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