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쾌청. 이제 낮엔 조금 덥다. 안 좋은 날씨는 없다던 존 러스킨의 말대로 모든 날이 다 좋다. 이러다 비나 한번 내렸으면 싶다. 아침에 눈 뜨면 옥상 올라가 늘 새로운 공기 들이마시고 식사 후 운동치료 받고 와 홍차 한 잔 하는데 글벗이 사진을 보내준다. 어제 이기대에서 만난 여러 야생화 중 괭이밥을 유리화병에 꽂고 그 옆엔 차 한 잔. 이 아침의 호사를 전송하며 함께하고픈 마음이 느껴져 마음 따뜻해진다.

내가 마시는 홍차는 어제 받은 책, 캐서린 맨스필드의 단편선집 “차 한 잔”이랑 같이 온 티백. 노란(뭔지는 모르겠지만 금속 소재) 앤티크 티스푼이랑 출판사 선물로 왔다. 티스푼이 궁금했는데, 기분 좋아지는 선물이다. 티팟이 그려진 무광 책표지도 우아하고 순한 질감이 마음에 든다. 나는 책을 손으로 쥐고 만지고 냄새 맡는 버릇이 있다. 번역은 코호북스라는 독립출판사에서 기획과 번역을 맡고 있고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는 구원 님.문장이 매끄럽다.

“버지니아 울프가 유일하게 질투한 글솜씨”를 보여주는 캐서린 맨스필드. 1888년 뉴질랜드 태생, 런던에서 작가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간 맨스필드는 1916년 블룸즈버리 그룹과의 인연으로 버지니아 울프와 우정을 키워나갔다. 엮은이 구호의 문장에 의하면 둘은 상호 존경과 유대감 그리고 라이벌 의식과 질투가 뒤섞인 복잡한 우정이었다고 한다. 1917년 맨스필드는 심하게 앓은 뒤 오른쪽 폐에서 결절이 발견되고 이듬해 2월 객혈을 하며 병세의 심각성을 자각하고 의미있는 작품을 못 남기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쫓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이전 1915년에 각별했던 막냇동생의, 말 그대로 ‘산산조각’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프랑스 방돌에서 동생을 애도하며 다짐한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있던 아름다운 시절에 진 빚”을 갚기 위해 글을 쓰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모두 살아 있던 나날, 어느날 그런 날이 다시는 오지 못할 거라는 자각과 함께 지금의 생을 얼마나 더 귀히 여기게 될까. 누구에게나 찾아올 그런날을 예민하게 만지며 생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엿보여 뭉클해진다. 이후 그는 “전쟁으로 인해 세상은 돌이킬 수 없게 달라졌으며 예술가들은 그 변화를 반드시 작품에 반영하고 새로운 세상에 어울리는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287쪽)”고 한다.

1920년 겨울부터 1922년 여름까지 스무 개월 동안 스무 편의 단편을 썼고 특히 1921년 여름부터는 옥스퍼드대에서 1911년에 만나 동지이자 남편이 된 존 미들턴 머리와 스위스에서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걸작을 연달아 집필했다. 1923년 1월 요양소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정열적인 집필도 그렇지만 문장으로 쓰지 않고 많은 말을 깔아둔 투명문장이 특별한 느낌을 불러준다. 아주 독특한 “이상함”이라는 느낌이라는 평을 받는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일상의 안팎이란 속속들이 말하지 못하고 속속들이 느껴지는, 삼키기도 뱉기도 어정쩡한, 위선과 속물근성이 이성 아래 짓눌린, 이상한 것들 투성이지 않은가. 쉽게 빨려들어가는 문장.

<만에서>, <인형의 집> 등 뉴질랜드 작품을 특히 높이 평가한 윌라 캐더는 그 특별한 재능을 두고 “무언가가 분명 존재하지만 글자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암시는 인쇄기로 찍기에는 너무 삼세해서 글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타나며 이것을 발견한 독자는 저자가 글쓰기에서 가장 희귀하며 가장 소중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291쪽)”고 했다. 노회한 재능이며 필요한 재능이다.

목차에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연대순으로 16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 “차 한 잔”부터 읽으며 차 한 잔 마셨다. 꿀꺽 차 한 모금 생각없이 넘기다가 화들짝 사레들리는 기분! 욕망과 위선을 귀엽게 꼬집는다.

어스름 속에서 낯선 여자를 만나다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내용 아닌가. 이 여자를 집에 데려가면 어떨까. 책에서 읽고 연극에서 보는 그런 일을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흥미진진할 것이다. 나중에 놀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상상해보았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데려왔어. “ 이런 상상 속에서 로즈메리는 앞으로 한발짝 나가 옆에 있는 흐릿한 존재에게 말했다. “우리 집에서 같이 차를 마셔요.” (245쪽) 

뒷쪽에 흑백 사진 몇 장과 자필을 볼 수 있는 사진이 있다. 자유분방하고 강단이 느껴지는 필체다. 물론 영어 필기체이지만.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6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ersona 2022-05-18 15: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늘 멋져요!^^ 트와이닝스의 잉블이 날개같은 사쉐에 담겨져 있네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2-05-18 17:31   좋아요 4 | URL
잉블 호호~ 작은 것 하나로 만족감 상승요. 커피 중독되어 있다가 홍차 오랜만에 마시니 좋은걸요. 티백이라도 ㅎㅎ 사진 보내준 분은 티를 즐겨요 평소.

꼬마요정 2022-05-18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예술입니다!! 꽃과 홍차, 찻잔과 숟가락 너무 잘 어울려요. 거기다 책 제목 또한 얼마나 어울리는지...
캐서린 맨스필드는 <가든파티>랑 <죽은 대령의 딸들> 정말 좋았는데, 이 책도 살포시 담아 갑니다^^

프레이야 2022-05-18 16:58   좋아요 3 | URL
요정 님 그 두 작품은 여기 안 들어있으니 잘되었네요. ^^ 책 이쁘고요 선물도 굳이어요. 전 처음 읽는 작가라 알게 되어 기쁘답니다. 매력적이에요. 세상엔 읽을 게 너무나 많네요.

파이버 2022-05-18 2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출판사 선물도 찻잔도 모두 돋보이네요 사진 너무 예쁩니다. 책표지도 도자기느낌이 나는군요.

프레이야 2022-05-18 23:17   좋아요 2 | URL
파이버 님 티스푼도 이쁘장해요 ^^
좋은 작품을 만나게 되어 기뻐요.

책읽는나무 2022-05-19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 맛이 절로 날 것 같은 풍경입니다.
책을 읽을수록 차를 계속 들이켜야할 것 같은?^^
프레이야님의 지인분도 프레이야님처럼 사진 예술가입니다. 오늘 아침은 자목련님의 작약사진과 프레이야님 올려주신 괭이밥꽃 사진과 홍차 사진으로 그야말로 눈 호사를 제대로 샤워중입니다ㅋㅋㅋ

프레이야 2022-05-19 08:33   좋아요 2 | URL
눈샤워 다하셨나요 ㅎㅎ
작약 보러 자목련 님네로 가봐야겠어요.
차 한 잔 하세요 책나무님^^

페크pek0501 2022-05-19 16: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차 한 잔, 이란 말이 참 좋네요. 그대와 차 한 잔, 이면 더 좋겠고요. 그대가 꼭 사람일 필요는 없겠지요. 꽃이어도 좋고 구름이어도 좋고 바람이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바람 부는 날에 바람과 함께 마시는 차 한 잔... 저처럼 건조한 사람이 이런 감성적인 댓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순전히 프레이야 님의 페이퍼 덕분입니다. 님의 글을 읽으면 제 마음이 촉촉해집니다. 고맙습니다. ^^

프레이야 2022-05-19 17:15   좋아요 2 | URL
그대와 차 한 잔^^ 넘나 좋은걸요. 오늘도 바람 구름 햇살 모두 좋아요. 땀이 납니다. 캐서린 맨스필드의 문장이 부럽더군요. 수련이 필요할 듯요. 문장으로 쓰지 않았는데 분명 그 문장이 읽히는 이상한 문장요.
마법처럼. 말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랄지. 배워야겠어요 페크 님. 곧이곧대로 다 말하지 않는 문장이랄지요.

mini74 2022-05-19 1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첫번째 사진 넘 예쁩니다 ㅎㅎ 왠지 이 책엔 꼭 차 한잔이 필요할 거 같아요. 저 꽃이 괭이밥이군요 귀여워요 ~~ 프레이야님도 사진 참 잘 찍으십니다 👍

프레이야 2022-05-19 17:59   좋아요 2 | URL
노랑 애기똥풀인가 했어요. 괭이밥도 귀여워요. 노랑노랑. ㅎㅎ 차 한 잔할까요, 에 담긴 많은 뜻이 이 작품에선 또 날카로웠아요. 체호프 느낌도 나고요.

그레이스 2022-05-20 10:31   좋아요 1 | URL
애기똥풀은 꽃잎이 4개, 괭이밥은 꽃잎이 5개^^

프레이야 2022-05-20 10:4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 님 ^^ 확실히 입력요

희선 2022-05-20 0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버지니아 울프가 질투한 글솜씨군요 두 사람은 친하게 지내기도 했네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 좋을 듯합니다 살아 있는 나날, 지금이 귀한데 그걸 잊고 사는군요 책 제목이 차 한 잔 이어서 찬 한 잔 하면서 책을 만나면 더 좋겠습니다


희선

프레이야 2022-05-20 10:25   좋아요 3 | URL
네. 희선 님 좋은 작품을 좋은 책을 만나는 것도 삶의 큰 즐거움이에요. 오늘은 약간 흐린 듯한데 좋아요 이런 날씨도. 차 한 잔 마시며 하루 시작하세요 ^^

그레이스 2022-05-20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도 좋고 글도 좋아요!
프레이야님은 글을 예쁘게 쓰신다는 생각이!

프레이야 2022-05-20 13:5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님.
차 한 잔과 함께 눈 부신 오월 보내고 계신지요. ^^

마음을데려가는人 2022-05-20 15: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 한잔 앞에 두고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네요. 저에겐 생소한 작가인데 낯선 여자를 집으로 데려가 차 한잔 마시는 상상(?) 이라니 너무 매력적인데요? :)

프레이야 2022-05-20 15:34   좋아요 2 | URL
좋은 작품 알게 되었어요^^ 차 한 잔하다 나중 뒤통수 한 대 밎는 기분이실거에요. 매력적입니다. 냥님 얼굴이 넘나 사랑스럽네요.

서니데이 2022-05-20 1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분홍색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건 홍차와 티스푼이었네요. 책이 옆에 있어서 북마크 종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날씨가 매일 더워지는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과 기분 좋은 금요일 되세요.^^

프레이야 2022-05-20 19:44   좋아요 3 | URL
네. 이제 제법 덥고 땀이 나네요
해가 지니 좀 나아요. 어느새 주말이 성큼 ^^
티스푼이랑 깜찍한 선물이어요. 서니데이 님도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