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둔 지 조금 된 책이다. 시인의 시를 아니 좀 어둡거나 무거울까 주저했다. 괜한 걱정이었다. 지금의 내게 적절히 와닿는 문장이었다. 만우절에 퇴원 후 한 달 열흘을 집에서 보내고 어제 다시 재활의학과의원에 들어왔다. 집에서의 하루하루는 나쁘지 않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고 할까.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라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침마다 가슴이 조였다. 나는 상대방이 주는 눈치에 민감한 편이라 상대는 아니라고 강변해도 내가 느끼는 부분은 진실하다. 어느 몇몇 날엔 고양이 모꾸가 햇살바라기 하는 걸 보며 책을 읽을 때 마음이 몹시도 평화로웠던 기억이 난다. 정말 행복했다. 그럴 땐 물리적으로 심장의 느낌이 다르다. 나머지 시간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아침을 먹고 드립커피를 마시고 설거지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제법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기억도 있다. 사람이 한때, 한동안 잘하기는 쉽다. 꾸준히 무던히 한결같이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사람이라면 진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오래 두고 봐야한다. 아무튼 난 눈칫밥 먹기 싫어 병원에 왔다. ㅎㅎ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밥이다. 표 안 나게 눈물이 어리기도 했고 목이 메기도 했다. 고양이 밥 주듯 간식 주듯 그렇게 살갑게까진 아니었어도 된다. 잘했던 것까지 묻혀버려 안타깝지만, 이렇게 또 흘려보내야지. 괜찮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또 주절거리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고 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많이 화나고 서운했다는 이야기다. 휠체어에 의지했던 내가 이제 두 발을 딛고 절뚝절뚝 걷게 되어 이게 어딘가 대견해 하고 있다. 많이 디뎌야한다고 해서 아픔을 참고 그러는 중이다. 조금만 더 참아줬으면 되는데 퇴원한 지 보름 지나 한판 하고 사십 일에 한판 하고... 짜증묻은 얼굴을 내가 자주 감수하고 방긋거리기엔 내 몸이 더 아팠다. 앞으로 살면서 내 몸 아프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다짐만 더 하게 된다. 기대심과 의존심을 버렸어야 하는데 또 실패다 싶은 순간, 이 책을 읽었다. 가방에 챙겨온 책들 중 첫번째다. 위에서 괜한 걱정이었다고 한 건, 시인의 오래전 문장을 읽고 나는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고 마음을 살펴 또 씩씩하게 사는 게 우리의 할 일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다. 특히 죽음에 대하여, 죽음을 죽인 후의 삶에 대하여 통찰한 문장이 새겨읽힌다. 좋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을 때의 사유라는 점은 지지고 볶아대는 이 나이를 부끄럽게 했다.
시인의 말에 의하면 죽음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 죽음만이 아니라 절망, 고통, 기타 등등 행복의 감정이 아닌 것들을 포함한다. 육체의 죽음 이전에 마음의 죽음이 먼저 온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같이 작은 죽음의 무덤을 넘고 넘어 생을 쌓아가는 것이다. 어느 한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다. 좋아지는 것도 단계적, 나빠지는 것도 단계적이다. 그리고 '나'를 이루는 모든 걸 걸머지고 넘을 수도 없다. 어느 것은 내려놓아야 하고 또 어느 것은 짊어지고 가야한다. 증발시켜버릴 것은 그렇게, 흡수하고 갈 것은 그렇게, 소화를 잘 해내야 할 것은 또 그렇게! 지구력과 인내심을 길러야한다. 모든 죽음의 의식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 근원을 시인은 '공포'로 보았다. 세계에 대한 공포!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고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 <악순환> 전문 (160쪽)
정면은 도시 뒷면엔 나무의 한시절과 자연을 마주한 베란다에 어느 날 테이블을 놓고 사는 일상 에피소드는 자연스럽고 어머니를 상실한 경험과 <양철북>에 대한 에피소드는 묵지근하다. 펭귄이야기는 또 재미있다. 펭귄은 섭취한 열량의 70%를 버티고 서 있는 데 소비한다고 한다. 두 발로 버티고 서는 일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아가가 처음 두 발로 서서 3초만 버텨도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난리법석을 떨지않았나. 우리는 모두 그런 단계를 거쳐 여기에 있다.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는 걸 잊지 말자.
마지막에 실린 산문은 2013년에 쓴 글이다. '신비주의적 꿈들'이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최 시인은 서양 신비주의 공부에 들었다가 얻게된 정신분열증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문학의 자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다짐했다. 서양 점성술, 카발라, 타로 등이 포함된 서양 신비 체계는 이런저런 이유로 개인 심리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고 한다. 시인은 노자와 장자에 빠진 이야기를 하며 "노자가 아주 노련한 미스터리 시인이었다면 장자는 강직한 드라마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노자를 읽으면 배가 허해지고 장자를 읽으면 배가 볼록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결론적으로 말해 장자는 사회인습론에 더욱 깊이 빠져 있는 데 비해 <노자>는 우주, 사회, 개인이라는 세 겹 미스터리 신비주의를 완벽하게 시적으로 소화, 전달했다는 것이다.(181쪽)" 15년간 계속된 환청 병에 걸려 있을 때 노자를 접하게 되었고 전대미문의 신비주의라는 감이 들어 의식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고 썼다.
오늘아침 내 마음에 충고하듯 예전에 쓴 북플이 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글귀를 마음이 힘든 친구에게도 보내주었더니 슬기로운 병원생활을 응원한다며 시 하나를 보내 주었다. 정현우 시인의 '소라 일기'. 찾아보니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젊은 시인이다.
수초의 질감이 잠긴 하늘
해변에서 소라를 주웠다.
몇시간째 소라는 나올 수 없다.
기차역 차단기 앞에서 나는 놀라 뒷걸음치고
소라를 놓쳤다.
새들은
나만 빼고 어디로 다 데려가는지
처음부터 혼자는
그렇게 탄생했을지도.
슬픔은 오른쪽이야,
기억을 나사처럼 돌리다가
더이상 돌아가지 않는 오른쪽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소라에게 속삭였다.
앗, 소라! 최승자 시인의 마지막 산문에 소라가 등장한다. 신비주의 책을 읽다가 잠이 들면 유치한 색깔의 원색적인 짧은 꿈을 꾸곤 했고 심지어 원색 한복을 입은 여자 귀신들이 나타나 싱크대 위에 비닐봉지에 담긴 소라, 고둥 등을 놓고 갔다고 한다. 소라, 고둥은 카발라 상징체계에서는 맨 하급의 의식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고 한다. 카발라를 알기도 전에 꿈이 먼저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무의식의 세계는 깊고 방대하다. 기억의 집으로 가는 길을 잃어 외롭고 무서운 소라를 친구가 슬며시 던져준 건 순전히 우연의 일치이지만, 우리는 평소 일주론을 이야기하며 감당해야할 운명의 한계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자는 쪽이라 그 마음을 이해했다. 위무가 되었길...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이다. 하지만 슬픔도 고요히 벗삼으면 때론 잔잔한 물결이 밀려온다. 친구와 내가 동의한 건 나쁜 기억도 기억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점. 남산에 핀 꽃 한 송이 보내주어 우리는 그러고 웃었다. 당신의 소라, 안녕한가요!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먼 데 갔다 이리 오는 세계
짬이 나면 다시 가보는 세계
먼 세계 이 세계
삼천갑자동박삭이 살던 세계
그 세계 속에서 노자가 살았고
장자가 살았고 예수가 살았고
오늘도 비 내리고 눈 내리고
먼 세계 이 세계
(저기 기독교가 지나가고
불교가 지나가고
도가가 지나간다)
쓸쓸해서 머나먼 이야기올시다
- 2010년 <쓸쓸해서 머나먼> 전문
전에 12일간 있었던 병실이라 침상 위치는 다르지만 친숙하다. 옥상정원에 올라가보니 역시 구름이 멋진 그림을 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