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이스탄불 그랜드바자르를 거닐다 어느 호객꾼의 친근함에 끌려, 혹시 모르니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게에 불쑥 들어간 적이 있다. 여자 한 명 남자 두 명이 앉아 유쾌한 담소 중이었다. 내용은 모르지만 표정과 공기가 그랬다. 남자가 의자를 내어주며 차를 건넸다. 몸이 한순간 녹았다. 그게 보자는 아니었고 정신이 번쩍나게 뜨겁고 달달한 차였다. 잠시 의심했던 게 미안해졌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는 터키 전통차 보자 장수 메블루트가 나온다. 이 긴 소설의 결미에서 그는 절대 보자 파는 걸 그만두지 말아달라는 어느 우아한 부인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저는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보자를 팔 겁니다."  자신의 반복되는 일상과 의무를 지속적으로 원하고 지속적으로 이어나가는 일의 소중함! 그리고 확신에 찬 어조로 마지막은 이렇게 맺는다.

 

 

- 그는 거리로 나가 소리친다. "보오오자아아." 할리치만을 향해 마치 망각으로 빠져들듯이 골목을 걸어 내려갈 때 눈앞에 쉴레이만의 집 발코니에서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이제 도시를 향해 말하고 벽에 쓰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관점이었다. 마음의 의도이면서도 말의 의도였다. 메블루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라이하를 사랑했어."(634-635쪽)

 

이 문장에서는 위치를 바꾸어두었지만 앞의 내용에 보면 공적인 관점은 말의 의도, 사적인 관점은 마음의 의도라고 했다. 둘 사이의 거리가 좁을수록 좀더 행복하거나 옳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제 저녁, 만나면 부담없이 아이 때가 연상되는 친구들을 모처럼 만났다. 서로 어제 만난 것 같다고 말했다. 집에서 나갈 때는 비가 많이는 오지 않았는데 능이오리백숙집 앞에 다다르기 얼마전부터 비가  더 오기 시작하더니 뜨뜻하게 몸보신하라고 자꾸 퍼주는 그릇을 다 비우고 나올 때는 제법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한 게 어떤 연유로 하루전에 백숙집으로 바뀐 것도 우리나이엔 딱 좋은 일인 거 같다.ㅎㅎ 어둡고 춥고 습기찬 저녁이었지만 콧등에 땀을 흘리며 국물을 훌훌 먹고 나와서인지 춥지 않았다. 어째어째 괜찮은 카페를 찾아간 우리는 또다시 뜨뜻한 과일차를 한 잔씩 앞에 놓고 김이 모락모락 수다가 이어졌다. (나는 청귤차, 요새 청귤차 맛들였다) 이제 경조사가 많아지는 나이, 기쁜 일과 슬픈일을 하루 차이를 두고 연이어 치른 친구는 평소처럼 밝고 귀여웠다. 밤늦게 카페를 나오니 제법 어둡고 빗줄기는 더해져 을씨년스러웠지만 마음은 훈훈했다. 다들 마음의 의도와 말의 의도가 동일했던가. 그래 그래야지, 새해엔 그렇게 마음의 의도도 말의 의도도 정확하고 용감하고 다정한 사람이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동생 집들이겸 큰딸 생일겸(휴가 받아 왔다), 올해 89세가 되는 친정아버지 생신 축하를 하는 날이다. 동생이 음식을 잘한다. 조금 일찍 가서 도와주기로 했다. 내가 가기 전에 거의 다 해놓을 것 같지만 그래도. ^^  큰딸! 나이 드신 분들에게서 마음의 의도와 달리 나오는 말로 괜한 상처 받는 일 없는 시간이길... (요즘 90년대생의 특징을 이분들이 알 리 없다. 에고ㅠ). 나도 이해하게 되기까지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너도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겠지. 그땐 아마 두 분이 저세상 가 계실 수도...

 

바빴던 한 해를 돌아보다 2019년 5월에 월간 <문학도시> "책 권하는 사회"란에 실었던 글을 옮겨둔다. 절판된 문학동네판 <하얀 성>(2006)으로 읽었지만 지금은 민음사판으로 새로 나와 있다. 민음사판은  2011년 발행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 오르한 파묵 장편소설 하얀 성

    

 

    

 

  지극히 터키적이고 보편적인_

2018년 12월, 카주라호공항 작은 서점에서 내 마음의 낯섦A Strangeness In My Mind(2017)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집 나간 고양이를 만난 듯 반가웠다.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아홉 번째 장편이자 최근작이다. 노벨문학상 수상(2006) 이후 인생 역작을 저술하는 희귀한 작가라는 평가답게 그의 최고대표작은 아직 나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한 편의 글로서도 완성미를 갖춘 노벨문학상 연설문은 영감靈感의 보고寶庫였던 내 아버지의 여행가방에 대한 헌사였다. ‘바늘로 우물을 파듯글을 쓴다는 그는 1952년 이스탄불의 부유한 대가족 속에서 태어나고 성장해 대학에서 건축학 전공을 접고 23세부터 소설쓰기에 전념했다.

 

오르한 파묵은 자신을 말하려면 이스탄불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내 마음의 낯섦에는 1969년 이스탄불에 돈을 벌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섞여 있던 12세 소년 메블루트가 등장한다. 이후 메블루트는 40년간 이스탄불 거리에서 밤낮으로 보자를 팔며 정직한 삶을 살았고, 내 마음의 낯섦은 그런 보통의 선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헌정이라 할 수 있다. 보자는 보리, 기장, 옥수수, 밀 같은 곡식의 반죽을 발효하여 만든 신맛 나는 터키의 고유 음료다.

 

17세기 이스탄불을 배경으로 하는 오르한 파묵의 세 번째 소설 하얀 성(1985)에도 보자 장수가 등장한다. 메블루트들의 선대였을 것이다. 호자와 노예가 파디샤의 엄명으로 무기 제작을 마치고 겨울밤을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며 침묵으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서다.

 

  - 우리는 거의 매일 밤 기다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바람이나 눈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늦은 시간 보자 장수가 마지막으로 지나가기를, 난로에 장작을 넣기 위해 불꽃이 사그라지기를 기다렸다. (190)

이런 문장은 종종 언급되는 보스포루스해협이라든가 아름다운 골든 혼 만의 야경, 경이로운 아야 소피아보다 더 터키다운 배경을 그려낸다. 호자는 선생을 지칭하며 무슬림 오스만인이고, 노예는 베네치아에서 나폴리로 가던 중 터키 갤리선에 잡혀 온 이탈리아인 즉 서양인이다. 작가가 이들에게 고유명을 지어 주지 않은 건 메블루트처럼 이들도 보통 사람들이고 보통의 우리 삶에 시공을 초월하여 병치될 수 있는 이야기가 하얀 성에 담겨 있다는 힌트가 된다.

 

모호하나 진실에 더 가까운_

오르한 파묵을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린 하얀 성의 표지그림에는 소리를 삼켜버린, 백설로 덮인 것 같은 미지의 성 위로 침묵한 병사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다. 탑의 꼭대기는 하늘을 향하지만 과연 실재하는지 장담할 수 없고 계단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다. 저 아래 계단에 병사 한 명이 일행과 떨어져 앉아 있다. 성 아래 어떤 풍경을 보며 무슨 상념에 빠져 있는 것일까.

 

파묵의 작품들이 다루는 주제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갈등,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 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그는 아니다라는 말로 일축한다. “이제 언급할 때가 온 것 같다. 인간과 문화를 서로 구분하기 위해 행해졌으며, 앞으로도 행해질 분류 중 하나인 동서양 구별이 실제 얼마나 적합하냐는 것은 물론 하얀 성의 주제가 아니다.(261)” 라고 작가의 말에 밝혀 두었다.

그는 동양인들의 우매성을 신랄하게 꼬집는 호자에게 서양 노예의 입을 빌려 말한다.

 

- 어쩌면 몰락이란 우월한 사람을 보고 그를 닮으려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167)”

    

  작가의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우열을 가리지 않되 동양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이다.

 

하얀 성이 이렇게 명료한 표피만을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표지그림이 내뿜는 강력한 자성磁性에 못 미칠 것이다. 작가가 부인하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함몰되어 작품 전반全般에서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풍부한 은유와 상징을 간과하지 말지어다. ‘더 진실에 가까운 것과 멀어질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파묵은 중세 유럽에 창궐했던 흑사병을 17세기 동양에 소환해 인간이 품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자각시킨다.

 

파묵은 하나의 종잡을 수 없는 기이한 스토리에 역사성의 옷을 입혀 특유의 지적인 마술적 사실주의를 그려낸다. 마지막에 드러나는 두 화자의 정체, 이마저 누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다. 환상이었을까. 우리 앎의 실체를 전복하며, 우리 삶의 본성이 그러하듯 모호성은 안개 자욱한 한 편의 아름다운 시적詩的 이야기,하얀 성을 견인하는 주동력이다.

 

 

낯설고 익숙한, 의미와 행위가 같았던 꿈 같은 나날_

하얀 성은 파묵의 다른 작품들처럼 동양과 서양, 낯섦과 익숙함, 옛것과 새것, 보수와 진보, 충돌과 갈등 그리고 조화를 자재로 쌓은 성채다. 특히 동서양의 종교, 문화, 학문을 넘어 동양과 서양이라는 소우주 간의 대립과 교류, 화합이 서로 취하고 나아가는 양상은 다소 익숙하면서 낯설다. 메블루트와 우리의 일상에 낯섦이 툭툭 치고 들어오듯 독특한 기법을 운용하는 데에도 낯섦과 익숙함의 포석이 깔려 있다.

 

쌍둥이 설정이 우선 그렇다. 외모가 흡사한 동서양 두 사람이 상대를 알아가며 학문과 연구에 몰입하고 세속적인 기쁨도 맛보며 오랜 동거와 몇 번의 이별로 이어가는 긴긴 인연의 고리, 이야기의 필사본을 16년 후 호자가 쓴 것인지 노예가 쓴 것인지 확신할 수 없게 만든 점, 허구와 역사를 교직한 서술기법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소설을 더욱 소설답게 한다.

 

소설은 1982년 문서보관소 궤짝 안에서 필사본을 발견하는 것으로 서문을 시작한다. 차분한 어조를 견지하며 극적인 구조를 굳이 두지 않으나 긴박한 스토리는 (노예)와 호자, 파샤와 파디샤가 만들어내는 선문답식 관계로 독자를 유인한다. 진중한 문체에 인물과 상황과 풍경의 의외성이 빚는 인간미가 훈풍을 유발한다.

 

호자와 나는 일별一瞥로도 서로 닮았음을 알고 놀라지만 쉽게 마음을 트지 못하고 탐색한다. 서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상대를 이용하려는 마음도 작용한다. 이들은 책상가운데에 등불을 두고 마주앉아 각자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쓴다. 순연한 유년 생활의 기억, 심층의 죄의식과 욕망, 꿈이 쏟아져 나오고 사소하지만은 않은 그 이야기에는 과장과 환상이 섞여 비로소 존재한다. 훗날 의 이야기가 의 이야기가 되지만 오랜 세월 함께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또 신기하게도 전혀 같지 않다.

 

- 그 당시 나는 나의 불행을 잊기 위해 잠잘 동안 행복한 꿈을 꾸면 그것을 종이에 써나갔다. 의미와 행위가 같았던 그 꿈들을. 잠이 깬 후,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시적인 언어로 세심하게 기록했다.(113)

그저 읽고 듣는 기쁨 이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읽은 후 어떤 결론도 유추해낼 수 없는 이야기(143)’에서 우리 삶의 원형을 찾을 수 있기에 이야기는 재생과 부활을 거쳐 영생한다. 살아남기 위해 파디샤를 기쁘게 할 이야기를 꾸며낸 그들처럼 이야기가 있어 우리가 생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_

나는 나다라는 후렴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괴로워하는 호자에게 노예는 나는 왜 나인가를 자문하라고 충고한다. 나를 나라고 증명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결국 작가는 두 사람을 통해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다. ‘라고 하는 자아 안에는 주체와 객체가 공존한다. 주체는 객체를 밀어내기도 끌어당기기도 하면서 우호와 적대의 노선을 교차하며 상생한다. 그리고 전진한다. 여기서 호자와 노예는 하나의 자아인 로 통합되면서 각각 주체이면서 객체로 변별되기도 한다. 우리에게 다행한 점은 수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역할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하나의 로 가기 위한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걸어간다. 모호하고 아득하기만 한 '정체성' 이라는 '하얀 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갈 용기가 있다면 그들과 친구가 된다. 우리들의 그림자는 해가 져도 사라지지 않는다.(113)

 

파디샤의 명령으로 병사들과 행군하는 숲에서 불현듯 하얀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는 이 성을 보며 그에게도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끝나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완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서술한다. ‘가 기다려왔던 고통의 시간은 하얀 성을 찾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다. 즐거웠던 시간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얼마나 암울하고 비굴한 노예의 나날이었던가. 그러니 새로운 인생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고 이는 호자와 노예 즉 의 염원이기도 하다. 이들의 앞에 놓인 '새로운 인생'을 예감하는 이 대목에서 하얀 성을 묘사하고 있는 색채는 세상을 초월한 듯 고고한 아취가 풍긴다오르한 파묵은 인간성의 기품을 믿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인생'1994년 발간된 파묵의 또다른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당신이 어두운 숲속 구불거리는 길에서, 언덕이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p218)

 

의 불운은 그곳으로 가는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자 하나이며, 고통과 평화와 어둠을 완벽하게 두루 갖춘 길임을 깨닫는다. 우연의 경험이라 여겼던 일들이 필연임을, 그럼에도 그 성의 하얀 탑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함을 자각한다. 중요한 것은,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자기합일의 경지에라도 오른 것일까. 쉽사리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라면 화두도 아니었을 터. 하얀 성으로 가는 길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다소 절망적인 숙명으로 보인다.

 

-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p219)

 

숲은 무의식의 세계, 숲의 탐색은 무의식의 탐색을 은유한다. 불온하고 은밀한 어둠의 숲을 뚫고 나오는 여정은 짧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차가운 바람 속, 야생동물이 노리는 눈빛과 독버섯 가득한 유혹의 숲을 지나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로에 지친 두 눈 가득 여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그러니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완벽한 어둠과 동시에 완벽한 밝음을 내포하고 있기에.

 

 

정체성을 잃지 않는 법_

파디샤는 호자와 노예를 조이고 당기는 역할을 한다. 그는 이들에게 있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면서 싸우는 형제에게 이건 네 것이고 이건 내 것이라고 구별 지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홉 살에서 스무 살이 넘기까지, 파디샤는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지략과 담대함을 갖추었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 또한 강한 인물이다. ‘는 파디샤의 능력을 간파했고 그와 같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적어도 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다운 통찰력과 직관력을 부러워한다. 호자도 마음은 노예와 다르지 않지만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적대적이어서, 파디샤에 대한 열패감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파디샤의 위엄이 두려워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만 후반부에서 파디샤가 이들이 만든 부풀린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을 보고 나(호자와 동일체)는 실망감과 함께 분노감을 안는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거리낌 없이 쓰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로 가득 찬 거대한 세상에서 사그라들지 않을 빛이 된다는 진리를 얻었다.

 

16년이 지난 어느 날 호자와 노예를 아는 노인 에블리야가 를 방문한다. 에블리야는 이들이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놀라며, 오히려 기뻐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제3의 타인에게 도리어 감명을 준 셈이다. 그렇게 많은 세월을 같이 살았던 두 명이 어떻게 이토록 서로 닮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탄복한 그는 ’(호자인 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가 쓴 책을 읽으며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고 허공의 끝없는 부분, 존재하지 않는 초점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가 쓴 책을 즐겁게 읽으며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우리 집 뒤뜰이 보이는 그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았다(246).’ 그가 본 것은 실패한 무기에 대한 무용담이나 학자연하는 거만한 태도, 명성과 부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가꾼 뒤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점성술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수무책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일흔이 된 ''는 이렇게 생의 마지막 고백을 한다. ‘는 모방자이자 동일자로, ‘는 호자인지 노예인지 묘연하다. 내 속에는 타인의 얼굴이 다분히 투영되고 여러 가지 얼굴이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그 얼굴에 투사되는 갖가지 감정들은 불쾌하거나 유쾌한 종류로 이분二分되겠지만 그 뒤에 그늘처럼 드리워지는 건 늘 연민의 감정이다. 때로는 땅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생이 지리멸렬하거나 생명의 연약함에 태생적인 열등감이 치밀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의 곁에 있는 를 쳐다보고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눈짓을 보내는 것이다.

-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를 사랑했다.(238)

 

마지막 장에서는 ''''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으로 독자를 휘몰아 간다. ‘호두나무 높은 가지에 긴 끈으로 묶은 그네 하나가 희미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247)’ 것처럼, 독자는 얼른 감지되지 않았던 기나긴 이야기의 파노라마를 율동감 있게 그리게 되며 마음속에 달강거리는 그네 하나를 감지할 것이다. 그네는 오르락내리락, 앞으로 뒤로 내 지나온 시공과 다가올 시공을 이끌며 하나의 거대한 반원을 그린다.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 이야기! 이야기의 끝에서 그들이, 그들의 삶이 도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내면에서 조용한 떨림이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_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행복은 높고 아득한 하얀 성에 있지 않고 바로 저 창문 밖, 살랑바람 불어대는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다. 작가 자신이 시인했듯이 서로 닮은 두 사람이 거울을 보는 행위가 상징하는, 두 가지 얼굴의 자아가 상충과 화해를 거듭하는 과정은 문학작품의 빈번한 소재이지만 파묵은 그 위에 자신만의 고아한 색채를 입혔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행복에 관해서도 이 책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결론을 재현하지만 작가는 영민한 눈을 반짝이며 진실한 이야기꾼답게 낮고 맺힌 목소리로 풀어놓는다호자의 말처럼 우리의 뇌가 쓰레기로 가득 찬 서랍 같은 것일지라도 이제 서랍은 뭔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채워도 좋지 않은가. 그들이 벽에 걸었던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았듯 우리도 거울을 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때다.

 

-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마력에,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들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주장했다.(103)

 

 

 

    

 

여자애와 도망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첫문장)-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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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9-12-3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엔 그렇게 마음도 말도 정확하고 용감하고 다정한 사람이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프레이야님 따라쟁이~~!!^^;

그렇잖아도 프레이야님 따님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우.
물론 다들 훌륭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만!^^
새해엔 프레이야님이 소망하는 대로 그렇게 마음도 말도 정확하고 용감하고 다정한 사람이시지만 계속 그렇게 하시리라 믿고
또 다른 좋은 글감들과 영감이 넘치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프레이야 2019-12-31 00:1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아이들처럼 많이 자랐네요. 시간이 어쩜 이리 흘렀대요.
안부, 고마워요. 희령인 교환학생으로 베를린 자유대학에 가 있어요. 50일쯤 후 귀국해요.
기숙사 음악실에서 좋아하는 피아노도 연주하고 친구들과 여행도 하며 잘 지내고 있더군요.
그래도 자주 외롭다고 엄마아빠 보고 싶다고 여우같은 메시지를 보낸다우.
저 위 ‘하얀 성‘에 대한 글 마지막에 인용한 문장이 너무 와닿지 뭐에요.
그점에서 저는 용감하지 못해요. 자주 망설이며 지레 겁먹고 물러서곤 하지요.
새해엔 그런 점에서 좀더 정확하고 용감해지려 합니다. 노력해야겠지요.^^
열공하는 라로님도 새해 계획하는 것들 다 이루시고 지금처럼 행복하게 건강하게!!! 아셨죠.
저도 좀더 외연을 넓혀보고 느긋하면서도 집중적으로 걸어가 볼게요.
영감이 넘치는 한 해가 되길.... 좋으네요.^^ Happy New Year!

2019-12-3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3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12-3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새해인사 드리러 왔습니다.
2020년 경자년을 앞두고
새해에도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소원하는 것을 이루는 시간이 되시면 좋겠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프레이야 2019-12-31 23:4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해요 . ^^ 이제 30분 남짓 남았네요. 새해 새날에 새마음으로 좋은 나날 이어가길 바라요. 행운 가득한 한 해 되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