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그녀는 음악이고, 그녀는 거기, 숨쉬는 힘의 뒤편에 존재한다." (67)
예를 들어, 그에게 내 몸을 내주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어려운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려운 일은 몸을 내어주는 일보다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닐까. 유희처럼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일을 스스로 이야기할 때는 알지 못하면서 타자의 몸을 갖고 마치 도구화하듯 유희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얼마나 뒤틀린 일인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느낀 점은, 너는 너의 발끝에 묻은 때는 보지 못하고 다른 이들을 향해 훈계질하는 일은 즐겨하는구나, 싶어서 그런 걸 앞서 눈치챈 나의 눈치빠름에 좀 분노가 일기도 했었다. 이건 예전 남자친구와의 대화를 다시 떠올렸을 때 일.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된 거지만 우리는 각자 사랑을 할 때 최선을 다해 진심으로 한다. 열에 들뜬 그 마음들과 그 몸들이 발산하는 현상들은 모두 한결 같다. 이십대에 엘렌 식수를 읽을 때에는 그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이상한 번역 때문인지 아니면 엘렌 식수의 문장들이 원래 이러한 건지 그걸 판가름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몇몇 남자들을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출산을 겪고 지난한 결혼 생활을 끝내고난 후에 시간을 따라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과 다시 떠나가는 남자들을 마주하면서 비로소 엘렌 식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서서히 감이 잡히는 건. 때이름과 뒤늦음의 영역이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건 딱 그 타이밍이다. 몸에 서서히 번지는 환희의 감각을 언어화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더 냉철해질 필요가 있을듯 싶다. 글쓰기가 나르시시즘과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을 엘렌 식수 언니가 이야기할 때, 내 공간과 내 존재가 있어야 당신에게 그 공간을, 나를 내어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당신이란 존재와 당신의 공간을 내가 엿볼 틈이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그토록 발악을 하면서 발버둥을 쳤던 건 아니었나 싶은 뒤늦은 깨달음과 더불어 혹여 이 행태가 나란 존재를, 내가 내게 있어서 더불어 당신이란 존재에게 해가 되려나 저어하면서도 사뿐사뿐 아이처럼 발걸음을 놀리는 건 나의 본능일까, 아니면 글쓰기에 대한 나의 강렬한 욕망일까.
"여성"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식수는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실재에 있는 어머니라는 전-오이디푸스적 몸과 같이 "부재하고, 그러므로 욕망되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p.67). "여성"은 이 체계에 필수적이지만, 동시에 이 체계로부터 배제된다. 식수가 묘사하는 그런 종류의 위계적 체계의 한 사례가 라캉적 자아와 타자 사이의 관계 내에서 발견될 수 있다. 라캉이 "거울 단계"라고 부르는 시기에 최초로 일어나는 자아의 구성은 자아의 이미지를 되돌려주는 "타자"의 현존에 의지하고 있다. (41)
식수에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무한히 복수적이며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즉 그것은 "주요"기관들"이 없는 무한정한 몸"이다(p.87). 그녀는 이를 "남성적 섹슈얼리티"와 대조시키고, 남성 섹슈얼리티를 안정적이고 단일한 것, 즉 "페니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p.87). ([출구] 이후에 바로 쓰여진) [글쓰기로의 도착]에서 식수는 다른 성이 접근할 수 없는 성적으로-특수한 경험들이 있다고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모든 여성이 어둠과 빛 속에서 느끼는 것, 그것은 남성이 자신의 장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 즉 절개, 출생, 리비도적 폭발, 분열, 상실, 우리의 리듬 속의 쾌이다"(p.56). 그러나 남성이 그와 동일한 감각을 경험하지는 못하더라도, 혹은 최소한 여성이 경험할 수 있는 정도로 강하지는 않을지라도, 남성이 그와 "유사한" 혹은 등가의 감각을 경험하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고 식수는 주장한다 (p.56). "여성성이 금지되지 않을" 때, 혹은 한 남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수도꼭지를 중심으로 환상화하지 않을 때" (라고 생생하게 표현하면서), 이런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그녀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식수가 칼-그뤼버에게 인정했듯이, 그녀는 "남성적 주이상스"의 감각이나 경험을 "알고 싶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그것을 정말로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Rootprints, p.53). 그 이유는, 주이상스가 "여성적"이든 "남성적"이든, 그것은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언어 공간의 주변에, 심지어는 그 바깥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51)
식수가 언급하듯, 그 과정은 "느리고"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거침없다. "굼뜨고 미련한 것, 아둔한 것, 그리고 그 많은 말들을 찢어 열고 적시고 벌려놓을, 절대적으로 멈출 수 없고 고통스러운 솟아오름"(p.88). 그런 글쓰기로 언어가 일단 장악되면, 그것이 "여성의 것"이 되면, 모든 것은 바뀔 것이다. 식수의 글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 중 하나에서 그녀가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듯이 말이다. "이제, 나-여성은 법을 날려버릴 것이다. 지금부터 빠져나갈 수 없는 폭발로. 그 일이 일어나게 하라, 지금 당장, 언어 안에서" (p.95).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