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나 해러웨이의 [해러웨이 선언문]을 완독. 개론서를 읽어 이미 대략 개념은 잡혀있던 상태인지라 무람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그 과정들은 쉬우면서도 어렵지 않을까. 쉽다는 건 이미 퍼지고 있고 이미 활동으로 삶으로 스며들어갔기에 쉽다는 거고 어렵다는 건 보수적인 시스템으로는 반발하는 의견이 꽤 거세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포기는 결코 할 수 없지.
읽는 내내 (물론 개론서를 읽을 때부터이긴 했지만) 데리다와 브뤼노 라투르를 읽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글자만 읽었던 푸코도 읽어야겠구나 다시 느꼈다. 캐럴라인 냅이 왜 읽는 내내 떠올랐을까. 물론 [반려종 선언]에 내내 개 이야기가 나오니 저절로 캐럴라인 냅이 겹쳐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캐럴라인 냅을 읽는다면 조금 더 이 이야기가 밀접하게 다가올 텐데 개와 함께 살아가는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막연하게 고양이와 함께 하는 경험을 대입시켜볼 뿐이다. 만일 고양이와 함께 하지 못했다면 더 와닿지 않았으리라. 개와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기를 극혐하는 우리 엄마가 이 글을 읽는다면 기겁을 하시리라. 밑바탕에 깔려있는 게 많이 부족해서 지적으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문장들 꽤 있었지만 그가 말하는바 고개를 자주 끄덕거렸다.
며칠 전에 꿈을 꿨는데 섬뜩하면서도 이건 진리의 촉각과 비슷하구나 싶어 진저리를 치면서 만지고 더듬고 느끼며 소통했는데 정확히 내 몸은 거부하는 강한 밀쳐짐이 거의 공격적으로 표출됐고 나는 그 공격성을 최대한 자제하려 애쓰면서 소통되고 있구나 알았다. 마치 접신하는 기분이 이런건가 꿈속에서도 소름이 돋았다. 절반의 죽음과 또 그만큼 절반의 생명력이 한 존재 안에 깃들어있고 그 존재들과 정확히 같은 비례로 삶과 죽음에 대해 소통한다는 게 진저리치게 좋으면서도 싫었다. 아침 일어나고난 후 밥 안치면서 이건 아무리 봐도 도나 영향 같은데 싶어 그렇다면 나는 사이보그와 접신한 건가 홀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