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을 시작한지 어언 45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치자면 태어나서부터 365일 먹고 들어가는 거니까 44년이라고 치고 숫자 감각 없지만 이럴 때는 명확해지고 싶고 1년이라도 바짝 아끼고 싶은 게 또 나이든 사람의 마음인지라. 39세 전까지는 이런 거 별로 상관 안한 사람이었지만 39세 넘어서니까 그렇게 되던데요. 남성 호르몬이 증가하고 있구나 이것도 39세 넘어서니 조금씩 몸으로 느껴집니다. 프랑스어책 함께 읽는 친구들과 읽는 페미니즘 책읽기, 이번 책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를 읽고 있습니다. 재독. 여성성이라, 그런 게 정말로 존재하는지 일단 그것부터 묻고 싶어요. 어디에 여성성이라는 게 장착되어있는지 몸 곳곳을 둘러보지만 잘 모르겠어요. 뇌를 휘휘 저어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곳에 여성성의 핵이 존재해서 여신처럼 여성성이 뿜뿜하는 경우는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별로 겪어본 적 없어요. 그렇다면 이건 본질이 아니고 누군가가 내게 가지라고 자꾸 내게 없는 걸 주입시키는 거 아닐까요. 알라딘 페미니즘 읽기 모임에서 친구들 따라 읽은지 벌써 옛날.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기. 처음 읽었을 때 충격과 경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건 그새 무디고 단단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신나게 걸레질을 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여전히 걸레질을 하는 동안에 오르가슴이 느껴지지 않는 천생 안티-현모양처인가 한탄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모양처라고 해서 걸레질 하면서 오르가슴 느껴지지 않을 거 같아요. 그게 느껴진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거 아닐까요. 남자들이 만든 포르노 영화 속 여성이 온갖 기괴한 포즈를 취하면서 황홀경에 다다른 표정으로 한 마리 짐승처럼 취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모양처 역시 집 안의 천사 역시 포르노 영화 속 여성과 다를 바 없이 남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란제리 원피스를 입고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고 걸레질을 하다가 아이의 똥기저귀를 갈면서 고급 향수 냄새를 맡은 것처럼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여보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 자 이제 푹 쉬세요 라는 달콤한 멘트를 날리며 퇴근한 남편의 수발을 들면서 행복해하는 여자가 이 세상을 통틀어 과연 몇이나 될지 헤아려봅니다.

페미니즘을 읽으면서 가장 신난 건 역시 나만 이상한 여자가 아니었구나 이건 그 누구나 결혼을 했다면 결혼한 거의 모든 여성들이 겪고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고 과정이구나 내가 또라이가 아니었구나 입니다. 살림을 하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이들 역시 얼마나 될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합니다. 하지만 말 못하는 짐승을 하나의 인간처럼 만드는 그 지리한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는 여자들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또 이상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인내와 굴종이 왜 당연시 여겨져야 하는지 그걸 알 수가 없어서 많이 답답한 시절이었습니다. 할 말을 하면 발라당 까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게 입만 놀린다는 소리도 듣고 팔자가 편하니까 그렇게 책을 들추면서 잡생각에 사로잡히는 거라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인내와 굴종을 강요당하면서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마룻바닥을 닦아야 하면서 오르가슴까지 느껴야 하다니 이건 노예와 다를 바 없는걸! 그렇다면 나는 이 노예 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교육을 받고 책을 읽고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인간이 되겠다고 생난리부르스를 추었던 건가. 이 모든 과정을 미리 예견하면서 엄마와 아빠는 나를 그렇게 우쭈쭈해줬던건가. 결혼을 하고 가부장제 제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 한 명의 타인과 살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신의 존재가 버겁게 느껴져 한동안 우울증에 사로잡혔다가 이제 애 좀 키웠다 싶어 한숨 돌리면서 우연히 페미니즘 공부를 하는 친구와 친해져 페미니즘을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안에 박혀서 할 것들이 많지 않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이건 직접 독방 생활을 해본 사람과 독방 생활을 겪어보지 않은 차이입니다. 예상했지만 막상 독방 안으로 들어와보니 너무 갑갑했고 그래서 미칠 거 같았고 이러다 미치겠구나 그랬고 미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여기에 가서 쾅 부딪치고 저기에 가서 쾅 부딪쳤습니다. 경시되고 무시된다는 거, 왜 전업주부라는 말이 맘충과 동의어가 되어야 하는지 요즘은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결혼을 하고 전업주부로만 살아가는 게 제일 안 좋은 게 주체성을 급격하게 잃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집 안의 천사로 항상 방실방실 웃으면서 반딱반딱하게 집을 깨끗하게 치우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가족 구성원들에게 먹일 때 제일 크나큰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건 누가 정했을까요. 주체성을 가진 살림 잘 하는 여자들이 정했을까요. 정말로? 궁금증이 입니다. 결혼 전에는 스스로 독립적 존재라고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는데 결혼 후 한 명의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삶이 너무 고되고 재미없고 지루해서 이럴 거면 나 차라리 평생 혼자 살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갈걸 그걸 결혼하고 바로 애를 갖고 아이를 낳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한탄조로 자주 말하기도 했지만 역시 이 길을 선택한 자의 행복은 또 행복대로 다가오고 있는지라 지금 그런 생각은 거의 갖고 있지 않아요. 내가 처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이 있으니 신화 속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싶습니다. 신화 속에서 살고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성녀가 될 생각도 몸을 팔고 영혼을 팔아서 조각상이 되고싶지도 않아요. 딸아이는 딸아이의 인생이 있을 테니 스스로 선택해서 잘 나아가겠죠. 그 누구를 사랑하건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임신을 하건 하지 않건 하지만 만일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때 아이가 겪을 그 불안과 두려움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지 정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물론 가능하다면 이런 식의 두려움과 고립감, 공포를 겪지 않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길 바라죠. 베티 프리단도 그래서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정립을 한 거겠죠. 친구들과 저도 그래서 베티 프리단을 읽으며 몸부림을 치고 있구요.

중심이 좀 옮겨갔다고 볼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솔직히. 언제나처럼 하고싶은 게 많아서 걱정인 마음은 좀 사라진 거 같아요. 사춘기 이래로 산후우울증 얻어 아직 말이 트이지 않은 아이를 독박육아하는 동안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미친 여자처럼 수 년을 살아왔던 게 제일 크나큰 위기였어요.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을 어떤 활동으로 펼치지 않은 이상 쳇바퀴가 계속 돌아가는 현상을 겪지 않을까. 본질적인 부분을 터치하지 않고 그저 순간의 위무로 모든 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여기지 않는 생의 태도가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욕심이 많은 거라고 볼 수도 있겠죠. 이 행복은 이 행복대로 계속 껴안고 가고 싶고 저 행복도 있다면 저 행복도 맛보면서 가고 싶습니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내 천국과 내 지옥을 선택할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그 힘을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책을 읽으면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직업란에 전업주부 말고 다른 뭔가를 써넣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직업란에 전업주부라고 썼을 때 그걸 쓰면서 스스로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시간에도 그런 것들을 곱씹게 됩니다. 딸로서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여러가지 부족한 면모가 많다는 걸 인정하고 있고 보다 더 나아지려고 하지만 구체적인 부분들에 있어서 얼마나 더 나아질 수 있을지 그걸 확신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이 있고 그 무형의 성질을 지닌 것들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야 할지 그 생각 자주 해요.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이 마인드가 제 안에 깊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 마인드를 많이 없애려고 혼자 많이 애를 쓰고 있어요. 왜 같은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게 하면서 살아가게 만드는가, 그 잘못과 그 무능함이 마치 여성의 잘못이고 여성의 죄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여적여 마인드를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는 걸 읽고 더듬는 동안에 알게 됐어요. 마찬가지로 남성 혐오를 하며 차별하지 않고 싶어요. 퀴어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고 싶고 퀴어 관련 글을 읽으면서 소수성과 혐오감, 차별, 이런 것들에 대해서 보다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성별 구분 없이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싶은 마음이 크고 그건 이미 여성으로 태어난 딸아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을 밝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도 더해집니다. 계속 딸아이를 이야기하고 자기 딸만 위하니 맘충이란 소리를 듣는걸까 또 얼핏 깨닫게 되지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딸이나 아들로 자라왔으니 굳이 모성애를 벌레와 동일시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이걸 어떤 식으로 드러낼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여전히 멍청한 남자들에게 갖는 혐오감은 있지만 그걸 과하게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요. 책 내용과 무관한 이야기를 한 것도 같지만 오늘까지 분량 읽으면서 느낀 것들입니다. 한번 적어서 정리를 해야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어 적었습니다. 현재 전업주부로서 한 남자의 아내로서 한 아이의 엄마로서 페미니즘을 읽는 까닭을 제 자리에서 정리를 해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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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29 1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 백개 드리고 싶어요 !!!! *^^*

vita 2021-11-30 09:48   좋아요 1 | URL
미니님 공감 백개라니!! 좋아서 팔짝팔짝 뛰고 있어요 :)

봄밤 2021-11-29 1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긴 리뷰를 공들여 읽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너무 기쁩니다. 기쁘고 반가운 글이에요!

vita 2021-11-30 09:49   좋아요 1 | URL
봄밤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반갑다는 말씀이 또 가슴에 깊이 남을 거 같아요. :)

행복한책읽기 2021-11-29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짝짝짝짝!!! 베타님 책 내용과 전혀 무관하지 않아 보여요. 공감이 더더 잘돼요. 멋져요!!!^^

vita 2021-11-30 09:49   좋아요 1 | URL
우리 이야기 맞죠? 행복한책읽기님 함께 계속 읽어보어요! :)

단발머리 2021-11-29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성의 신화> 해제 쓰신 분이 제 평생의 선생님이신데요.
비타님의 이 글은 그 해제 뒤에 넣어도 될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팬입니다*^^+

vita 2021-11-30 09:51   좋아요 2 | URL
멋모르고 읽으면서 모르는 게 넘 많아 좌절할 때마다 사탕 한 움큼씩 안겨주시는 단발님, 오래 배우고 익힐게요 그대 따라.

책읽는나무 2021-11-29 2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며칠 동안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까,말까 스멀스멀~~좀 괴로웠는데 비타님 글 읽고 아차!! 그렇지???하고 생각을 고쳐 먹게 되네요~^^
저도 많이 배우고 갑니다.
오늘은 비타 스승님 이셔요ㅋㅋㅋ

vita 2021-11-30 09:52   좋아요 2 | URL
나무님 괴로운 건 계속 가는 거 같아요. 괴롭지 않으려고 알려고 읽는 것도 있지만 읽을수록 더 힘들기도 해요. 언제나 배웁니다 나무님께!

hellas 2021-11-29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

vita 2021-11-30 09:52   좋아요 2 | URL
긴 글 좀 지루한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수하 2021-11-30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타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베티 프리단의 책은 아직 못 읽었지만 공감 백배하고 갑니다..
저도 곧 읽어보고 싶어요.

vita 2021-11-30 19:40   좋아요 1 | URL
반갑습니다 수하님, 앞으로 종종 뵙도록 해요. :)

공쟝쟝 2021-12-02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 우리 그때 칵테일 마시면서 했던 이야기 있잖아요. 순화된 표현으로 여돕여~!! 그리고 이 글 읽으면서 그 생각났어요. 혹시 그레타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 봤어요? 거기에서 조가 명대사를 날리거든요. 대사가 아니라 그 감정이 정말로 와닿았는데, 이 글을 보면서 그 장면이 생각났어요. 진짜 개 철철 울었는 데.... 페미니즘을 알고난 후의 우리들이 느끼는 분열의 감각은 그것을 모를 때의 감각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고, 그것이 모르는 것보다 나은 괴로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마치 저와 술과의 관계처럼요. 그냥 다 끊어내버릴 수는 없는 그런 것이 삶이기도 하니깐요. 주저리주저리. 아무튼 잘 읽었어요. 힘내요. 항상 응원해요!

vita 2021-12-02 18:03   좋아요 0 | URL
그 영화를 본듯 하면서도 안 본 그런 느낌인지라 다시 한번 찾아 봐야겠어요. 다 끊어버리면 수도원 가서 살아야 할 거 같아서 한편 어릴 땐 그런 마음도 품었지만 그러니까 우리는 계속 읽고 나아가야 할 거 같아요. 저는 아직도 방황중이고 그대를 만나 참 감사하기만 합니다. ♥️ 같이 술 마셔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