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쥐어짜면 물기가 서서히 배어나오고 그러다가 물이 주르륵주르륵주르륵 떨어져나오고 종내 폭포수처럼 콸콸콸 물이 쏟아져나온다, 대체 영혼 어디쯤에 그토록 많은 물이 숨겨져 있었는지 알 까닭은 없으나. 고정희 시인 글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런 게 느껴져서 선배들이랑 시인의 시를 갖고 논평을 하면서 그런 비스무리한 감상을 말한 적 있다. 그걸 다시금 깨닫게 하는 허수경의 문장들, 진이정 시인 이야기도 중간중간 계속 나온다. 아침부터 등교하는 딸아이 밥 차려주다가 고생했다 눈물 참느라.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계속 읽다가 문득 우리는 신화 한가운데에 머물거나 신화 너머에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홀로 있었던 시간이 많고 공부라는 건 혼자서 책상이건 어디에 머리를 처박고 홀로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니 유독 고독에 강했던 그였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싶었다. 읽는 내내. 어머니가 멀리 계시니 내가 내 어미 노릇을 해야겠노라고 한 문장에서는 뭔가 뻥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지 않고 그 가운데 어떤 거대한 강이 흐른다 치면 아마도 내가 내 어미 노릇을 하는 것 더불어 내가 내 자식에게 내 어미 노릇을 하는 것 내 어미에게 내 어미 노릇을 하는 것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이라도 내 친구들에게 내 어미 노릇을 하는 거 아닐까 싶어서. 맞닿음. 



































023

가소로운 욕심

기숙사에 살 때, 내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풀밭으로 토끼들이 자주 나타나곤 했다.

어느 날 저녁, 시간이 없어서 저녁밥은 못하고 당근 오이나 잘라서 먹자, 하고 당근 껍질을 벗기다가 녀석들을 보았다. 나는 당근을 던져주었다. 오물오물 단방에 먹어치웠다. 그후로 자주 나타나서 내가 당근을 던져주면 오물오물 먹었다. 이제는 당근이 집에 없는 날에도 나타나서는 내 방 앞 잔디밭을 어슬렁거렸다. 따로 당근을 사들고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 기숙사로, 비록 당근 때문이지만 찾아오는 녀석들이 참 예뻐서 나도 모르게 욕심을 내고 말았으니...... 녀석들 중 두 마리의 목에다 리본을 달아준 거다. 한 녀석에게는 푸른색을, 한 녀석에게는 붉은색을, 여름 내내 우리는 참 친해졌다. 용하게도 녀석들은 언제나 리본을 달고 나에게로 왔다. 껑충거리면서도 잃어버리지 않았나보다. 어느 날 나는 기숙사 주차장에서 차에 치인 토끼를 보았다. 그리고 푸른 리본도 보았다. 나는 또 욕심을 내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이다. 내 것이라고 표시하기, 얼마나 가소로운 욕심이었는가, 마치 누군가를 사랑할 때, 내 것이라고 표시되기를 바랐던 그때의 눈먼 나처럼...... (52-53)

028

점심 비빔밥

교실에는 작은 석유난로가 있었다. 겨울이면 그 난로 옆에 도시락을 두었다. 아침에 도시락을 그렇게 난로 곁에 두면 양은 도시락 속에 든 밥은 학교까지 오느라 찬바람을 맞고도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사 학년 땐가, 우리 반 담임 선생님은 도시락 반찬으로 아이들 집안의 빈부가 가늠질되는 게 보기 좋지 않았는지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밥하고 가져온 반찬하고 큰 양동이에 부어 같이 비벼 먹자." 모두 도시락을 내어놓았고 가지고 온 반찬도 함께 양동이에 부었다. 비벼서 서로 나누어 먹었다. 비빔밥을 먹다보면 선생님 생각이 난다. 굶는 아이들을 위해 도시락 다섯 개를 가져오셔서는 양동이에 붓던 처녀 선생님. (58)

042

우리 모두는

우린 모두 사실은 신화적인 존재지요. 이를테면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의 탄생을 알려준 것은, 어떤 거대한 그러나 아름다운 짐승이거나 풀이거나 열매이거나 오래된 우물이거나 하지요. 호박, 딸기, 복숭아, 참나무, 돼지, 양, 호랑이 혹은 용, 빛이거나 뭐거나 하는 것이 당신 어머니의 뱃속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르구요.

우리는 다 신화적이지요.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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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10-15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그 푸른 리본에 대해서 글을 쓰고 있던 참이었는데 말이지요. 내것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비타님^^

vita 2021-10-15 23:11   좋아요 0 | URL
단발님만 기다리셨나봐요 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좋아요. 저 예전에 알라딘 서재에 막 글 올리면 단발님이랑 보슬비님이 간혹 댓글 달아주셨는데 ㅋㅋㅋㅋ 그 생각 나서 한참 웃었어요. (그러니까 좋아요_도 좀 누르고 가서 댓글도 좀 달고 그러란 말이야~ 라는 음성지원이 살짝 들리는듯한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