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등 시민 - 엄마를 위한 페미니즘 소설 선집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 시대의창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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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 [출산]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일시 정지. 축축한 고양이가 제니의 다리 사이로 스르륵 미끄러진다. "아기 한번 보세요." 의사가 말한다. 하지만 제니는 아직 눈을 감고 있다. 어차피 안경이 없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아기 한번 보세요." 의사가 또다시 말한다.
제니는 눈을 뜬다. 옆에 실려와 있는 아기가 보인다. 걱정스러울 정도였던 보랏빛이 벌써 사라지고 있다. 제니는 생각한다. 좋은 아기다. 마치 그 나이든 여자가 ‘좋은 시계네요‘라고 말했을 때처럼, 아기가 튼튼하게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아기는 울지 않는다. 처음 보는 빛 아래서 눈부셔하고 있다. 탄생은 제니에게 주어진 것도, 제니가 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제니와 아기가 이렇게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발생해버린 것이다. 간호사는 아기의 이름이 쓰인 팔찌를 준비 중이다. 따뜻하게 천으로 단단히 싸여 제니 곁에 누인 아기는 스스륵 잠이 든다. - P121

아기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마치 사과처럼 포장되어 방으로 들어오자 제니가 아기를 확인한다. 아기는 온전하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제니는 새로운 단어들에 휩쓸리고, 제니의 머리카락은 점점 짙어진다. 제니는 원래의 자신이기를 그만두고, 서서히 다른 누군가로 바뀌어간다. - P123

산책하고 백조한테 빵도 주자. 그리고 나는 크게 웃고, 노래를 부르고, 키도를 간질이면서 낡은 모성의 기쁨을 끌어올린다. 아이를 놀이방에 넣어놓고 귀에 귀마개를 쑤셔 넣은 다음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는 불온한 욕망은 내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아이가 일어나자마자 침실로 뛰어 들어가 아이의 배변 훈련용 바지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갈 준비를 하는, 내 속도에 맞춰 아이를 다그치지는 않는 진짜 엄마여야 한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시큼한 냄새를 풍기면서 코를 질질 흘리던, 어린 시절에 알던 녀석들, 전혀 아이를 돌보지않는 지친 이웃이나 약간 머리가 어떻게 된 할아버지에게 버려진 네놈들을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엄마들은 가난하고 양육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지. 반면 나는 아름다운 아파트에 살면서 바람을 넣어 부풀리는 아기용 욕조, 아기 저울, 엉덩이 크림도 갖고 있지. 우린 달라. 그리고 아기의 첫 3년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 정신분석학의 저주. 나는 그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 그 저주는 24시간 내내 나를 괴롭히고, 물론 나만 괴롭힌다. 나는 아이를 전적으로 혼자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 P130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슈퍼마켓에서 일어나는 정신분열이다. 절대 예측할 수 없다. 나는 통로를 따라 카트를 민다. 밀가루, 오일, 고등어 통조림, 망설임. 이건 늘 적신호다. 옆에 있는 다른 여자들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쾌활하게 선반에 있는 물건들을 쓸어 담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통조림과 쿠키 상자 앞에 서서 라벨을 읽으며 엄청난 집중력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있다. 내일그리고 남은 주중을 위해서는 분명히 먹을 게 아주 많이 필요하다. 하지만 뭔가를 사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 먹을 것들이 늘어선 통로를 오르락내리락한다. 식료품들은 점점 흐릿해지면서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흘러나오는 음악,
조명, 다른 여자들의 결단력,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소름끼치게 한다. 나는 영양 공급성 건망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 자리에서 즉시 내빼버리고 싶다. 나는 가까스로 치즈와 포장된 편육 제품 몇 개를 대충 카트에 던져 넣은 다음 음식으로 터질 것 같은 카트와 위풍당당하게 그 카트를 밀고 있는 여자들 뒤에 얌전히 줄을 선다.
슈퍼마켓에서 나온 후에야 편히 숨을 쉴 수 있다. 냉장고 앞이나 슈퍼마켓 카트 뒤에서 느끼는 실존적 구토, 얼마나 훌륭한 농담인가. 그가 들으면 좋아할 것이다. 견습 교사 기간의 모든 게 비루하고 중요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째째한 불평,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징징거림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나 피곤해, 손이 두 개밖에 없다고, 당신 일은 당신이 하는 게 어때. - P139

중학교는 일이 훨씬 더 쉽다. 재미는 없지만, "경력 쌓기." 그것은 남자들의 몫 중 하나고, 내 남편은 스스로를 위해 착실히 경력을 쌓아나가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 차이, 무슨 차이를 말하는지, 나는 더 이상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같은 신문을 읽고, 똑같이 회의적인 태도로 정치인들의 연설을 듣는다. 우리의 계획은 평범하다. 새 차, 새 아파트, 아니면 우리가 수리할 수 있는 오래된 집,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여행 떠나기. 심지어 다른 삶에 대한 막연한 욕망을 표현하는 것도 똑같다. 가끔씩 그는 한숨을 쉬며 결혼은 상호간의 구속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에 기꺼이 동의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견습 교사 기간이 끝난다. 습관은 계속 이어진다. 집 안에서는 원두 분쇄기와 프라이팬의 소음이 잔잔하게 이어지고, 바깥에서는 신중하고 현명한 선생님이자 까사렐이나 로디에에서 나온 옷을 입는 중역의 아내가 된다. 얼어붙은 여자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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