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여자'는 '타자'로서 자기를 받아들이는 여자이다. 오늘날 남자의 태도에는 이중성이 있다. 그 이중성은 여자에게 실로 괴로운 모순을 안겨 준다. 남자들은 매우 폭넓게 여자를 동등자, 평등자로서 인정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자가 비본질적인 존재로서 남아있기를 계속 요구하고 있다. 여자에게 있어서 이 두 운명은 양립하지 못한다. 그 어느 쪽에도 원만히 적응하지 못하고 그 양자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여자의 불안정성은 거기에서 온다. 남자의 경우는 공적 생활과 사생활 사이에 충돌이 별로 없다. 남자는 행동과 일에 있어서 사회에 대한 세력을 확립하면 할수록 더욱더 남자답게 보인다. 그의 인간적 가치와 생명적 가치는 뒤섞여 있다. 반면에, 여자의 자주적 성공은 사람들이 '진정한 여자'에게 객체가 될 것을, '타자'가 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여자다움과는 모순된다.

이 점 때문에 남자들의 감수성과 성감까지 변해버릴 가능성이 많다. 이미 새로운 미학이 생겼다. 편평과 가슴과 가는 허리(미소년 스타일의 여자)의 유행은 일시적이었으나 그렇다고 지난 세기에 이상적이었던 풍만한 육체로는 되돌아가지 않았다. 여자의 몸이 어느 정도 풍만하길 바라지만, 소극적이다. 여자의 몸은 날씬하고 지방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근육이 발달하고 부드러우며 건강해서 초월성을 나타내야 한다. 온실의 식물처럼 창백하지 않고, 우주의 태양과 대결하며 일하는 사람의 흉상처럼 검게 타는 편이 좋다. 여자의 옷도 실용적이 되었다고 해서 성의 특징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그 반대로 짧아진 스커트는 다리와 허벅지를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게 했다. 노동을 하는 것이 여자의 성적 매력을 잃게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를 사회적 인간인 동시에 관능적인 먹이처럼 느끼는 것은 매우 자극적일 수 있다. 최근에 출간된 *158(1948년 11월 출간) 페네의 소묘 시리즈에서, 젊은 남자가 자기의 결혼식을 집행하던 아름다운 여시장에게 반해서 그 결혼을 취소하는 그림을 보았다. 여자가 '남자의 일'을 하면서도 매력적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다소 외설스러운 농담의 주제가 되어 왔다. 반감이나 아유가 차츰 둔해져서 에로티시즘의 새로운 형태가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아마 거기에서 또 새로운 신화가 생겨나리라.

확실한 것은, 오늘날 여자들은 자신의 자율적 개인조건과 여성적 숙명을 함께 떠맡아 살아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여자들로 하여금 때로는 '잃어버린 성'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어색함과 막연한 불안감의 원인도 실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자기를 해방하려는 노력보다 맹목적인 예속 생활을 얌전히 받아들이는 편이 틀림없이 한결 편할 것이다. 또한 죽은 자들이 산 자들보다 대지에는 더욱 적합하다. 아무튼 과거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가능하지도 않다. 기대하고 싶은 것은 남자들 또한 새로 나타나는 이 상황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여자는 비통한 슬픔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말로 라포르그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오 젊은 처녀들이여, 언제 그대들은 우리에게 '착취'라는 숨은 동기 없이 친한 형제가 될 것인가? 언제 우리는 서로 마음으로부터의 악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짐 지운 운명의 무게 아래 더는 신음하지 않는 멜뤼진, 해방된 멜뤼진...... 은 '자기의 인간으로서의 기초'*159(브르통, <비법 17>)를 다시 발견하리라. 그때 그녀는 완전한 인간이 되리라. '여자의 무한한 속박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의 삶을 이끌어 갈 때, 남자(이제까지 혐오스러웠던 존재)는 여자를 자유롭게 하리라.' *160(랭보, <견자의 편지>)


(335-336)




















 프랑스어 원서읽기 모임 친구들과 읽는 제2의 성 3편 신화를 방금 전 완독. 오 즐거워 오랜만에 마주하는 보부아르 언니 읽느라 토요일을 다 보냈다. 제2편 역사_도 다 읽기는 읽었는데 정리하지 못했네. 역사 편은 재독할 때 (마침 페미니즘 함께 읽기 10월 선정 도서는 보부아르 언니) 다시 훑고 정리하기로. 신화 챕터에서 제일 강하게 인상에 남는 건 역시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뱀의 아가리. 바기나 덴타타다. 신화 편에서 대놓고 바기나 덴타타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궁을 이야기할 때 검은 동굴, 축축한 늪 운운 문학적인 표현이 나올 때 나도 모르게 바기나 덴타타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것도 일종의 신화 맥락에서 나온 건데 발기 부전을 여성에게 책임 전가하는 뉘앙스가 풍기는 건 내가 삐딱해서인가. 자궁을 떠올릴 때 축축한 물기가 있는 늪이나 동굴을 연상하는 건 그렇다 치자. 알 수 없고 볼 수 없으니. 그에 대한 강한 공포심으로 인해 발기 부전이 되는 걸 이빨 달린 질이란 괴물을 안에 숨기고 있는 여성을 괴물로 만드는 것. 감히 우뚝 설 수 있는 남성의 거대한 성기를 쫄아붙게 만들다니, 무엄하도다! 근육질의 사내들이 핏대를 세우는 소리가 저 멀리 어딘가에서 들리는듯하다.



여자를 일종의 신화적 존재로 보는 건 아주 오래 오래 전부터 이어져온 일이고 그 이야기를 아주 자세히 보부아르 언니 해주신다. 중반 좀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지루한 부분 건너뛰니 금세 몰입. 동양인 이야기 할 때는 아니 무슨 이 시대가 고려 시대도 아니건만 이렇게 편협된 시각을 지니셨다니 하고 언니에게 잠시 실망도 했지만 그래 어떻게 인간이 완벽할 수 있겠는가 싶어 무심하게 넘겼다. 스탕달을 다시 읽어야겠군 싶었고 언급된 작품들 중 읽지 못한 작품들 많아 그것도 체크해놓았다. 기회가 되면 읽겠지요. 구구절절 모두 다 옮겨 오고 싶었으나 참는다. 335쪽과 336쪽 길이길이 제 인생에 소중하게 담아놓고 펼치고 펼치고 또 펼치도록 하겠습니다. 바기나 덴타타 역시 여성을 신화의 한 맥락에서 보고 나타난 건데 이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이미지로만 아는 게 전부인지라 나중에 관련서 읽고싶다. 신화편 다 읽고 보부아르 언니 세계에서 읽고 있는 언니들 많겠지 싶어 찾아봄. 딸아이가 인스타에서 그렇게 막 퍼오는 것도 법에 어긋날걸 해서 그냥 다 지웠다. 신화편 마지막 페이지에서 랭보의 시 언급된다. 랭보 우리 오빠 불어로 읽겠노라고 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불어로 읽은 시는 딱 한 편이었던듯. 반성합니다 -_- 산으로 간 신화 편 리뷰가 되었다. 여성을 신화적 존재로 보는 것, 자기의 뮤즈나 악마의 하수인으로 보아 자기를 유혹해서 철저하게 망가뜨리거나 한없이 성스럽게 보는 이 태도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걸까. 그렇다면 나는 남성을 그렇게 본 적이 있나 하고 곰곰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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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9-27 12: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사람은 또 왜 나 안외롭고 똥줄 타게 제2의 성을 읽고 있단 말인가.. (터덜터덜...읽으러가는 중)

vita 2021-09-27 12:09   좋아요 0 | URL
알라딘 와서 댓글 다는 거 보고 다 읽은 줄 알았는데!!! 다 읽고 맥주 마시자!! 아니 오뎅탕에 소주 마시자.